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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9일 (금)부활 제3주간 금요일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가톨릭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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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평화방송 강의, 박기석 신부 / 제10회 마르 1,29-45

133169 이정임 [rmskfk] 스크랩 2019-10-13

박기석 신부 / 제10회 마르 1,29-45 

 

 

지난 시간에는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라는 제목으로 1장을 살펴보았는데 그 중에서도 오전에 있었던 일, 회당에서의 예수님의 첫 가르치심과 구마치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장면을 살펴보았죠. 자, 오늘은 그 일정 중에 점심 이후 저녁 전 오후의 일정을 살펴봅니다. 바로 시몬 베드로의 병든 장모의 치유와 많은 병자를 고쳐 주시는 장면을 살펴봅니다. 

 

자,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 하루 동안 카파르나움이라는 동네에서 하신 일, 그 중에 오전에 하신 일을 우리가 지난 시간에 보았지요. 이제는 점심 나절, 저녁 전 오후 시간에 하신 일을 보는 겁니다. 지난번에는 구마의 기적 치유고요, 이번에는 병자 치유입니다. 이 병자 치유 기적은 전형적으로 어떤 특별한 형식을 갖추고 있어요. 즉 상황 묘사, 기적적인 치유, 그다음 그 치유에 대한 실증 그리고 목격자들이 있어야 되겠지요. 그다음 반응이라고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오늘 살펴보겠습니다. 

 

* 치유 기적 이야기의 형식 : 상황묘사 → 기적적인 치유 → 치유의 실증 → 목격자들의 반응 

 

오늘날 고고학자들이 찾아내고 밝혀낸 바에 의하면 기원후 1세기 즈음으로 추정되는 카파르나움의 회당도 역시, 오늘날 여러분들이 성지 순례 가시면 카파르나움 가 보시면 아셔요. 거리가 카파르나움이라는 회당과 베드로의 집까지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아요. 26m 정도로 굉장히 가깝습니다. 

 

* 카파르나움 회당 유적지 → 시몬 베드로의 집 거리, 약 26m 

 

여하간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침을 주시고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다음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베드로의 집을 가셨는데, 이건 그냥 웃자고 하는 얘기인데 왜 베드로의 집을 갔을까? 가까이 있어서도 이지만 우리는 고부간의 갈등이 심하죠? 그런데 서양은 그 반대예요. 사위와 장모. 그래서 사위가 장모를 모시고 사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그러고 사위와 장모가 고양이와 개 같이 그런 관계다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웃자는 표현으로 베드로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니까 예수님께서 장모의 허락을 듣게 해야 나를 따를 것 같다. 뭐 이렇게도 얘기를 합니다. 여하간 베드로의 집으로 가는데요. 예수님과 그 일행에게 베드로의 장모가 지금 열병으로 앓아 누워 있다는 것을 알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움직이셔요. 우선 예수님이 시몬의 장모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녀가 예수님께 일어나 갈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직접 가시는 거죠. 


그다음 예수님이 취하신 행동이 그녀의 손을 잡아서 일어나도록 도와주셨다는 것.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라는 것이죠. 마르코는 여기서 '일으켜 세우다'는 동사를 쓰고 있는데, 이 일으켜 세우다라는 동사가 '부활하다', '죽음으로부터 일으켜 세우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즉, 부활하다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물론 죽음을 이겨내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사용하는 동사죠. 


* 마르코 복음 '일으켜 세우다' = 죽은 자들의 부활과 관련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장모를 측은히 여기시어 그녀를 병상에서 일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이 장면이 보다 더 큰 일으켜짐, 즉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는 부활과 바로 연관되는 것은 아닙니다. 일단 지금은 다른 목적이 있어요. 바로 다음 장면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녀의 열이 내렸다'라는 것이죠. 예수님의 권위가 아주 단순한 행동으로 드러났을 뿐입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의 가르침의 반응이 놀랍다, 새로운 가르침이다. 악령을 쫓아내니까 권위가 있다고 했어요. 사람들의 반응이 회당에서. 


자, 지금 예수님의 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유해 주신 것도 부활과 연관된다기 보다는 "아, 예수님이 병까지도 다스리는 분, 권위있는 분이구나." 그분의 권위, 존재 자체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힘, 이것을 보여주셨구나 하는.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거예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겁니다. 단 지난 번에 더러운 영을 쫓아낼 때는 "조용히 하고 나가라!" 아주 과격한 표현을 쓰셨는데 지금은 그런 과격한 표현은 없고 아주 단순합니다. 세 번의 움직임 뿐이죠. 다가가셨고, 손을 잡아주셨고, 일으켜 세우셨다. 


* 세 번의 움직임 : '다가가심' , '손을 잡으심' , '일으켜 세우심'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병에 대해서 지니셨던 권위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죠. 율법 학자들과 달랐던 권위 또 더러운 영을 내쫓던 그 새로운 권위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알게 되죠. 예수님의 병에 대한 치유와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권위, 그 큰 능력의 실현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하느님의 나라의 이루어짐의 첫 열매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리고 나서 치유 상황은 아주 친절하게 보통의 집에서 벌어지는 일상의 삶처럼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사랑과 정성 많으신 어머니 모습 그대로 집안 사람들을 위해서 시중을 드는 거예요. 열병이 나은, 예수님이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우신 그 장모가 '곧바로' 일어나서 예수님과 그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희랍어로 시중들다. 지난 시간에 '버리다', '뒤따르다'라는 의미가 마르코 복음에서 '제자가 되다'라는 의미였죠. 시중을 들다라는 표현도 '누구누구를 섬기다'라고 하는 표현이 됩니다. 


* 시중을 들다 = 섬기다 


그러기에 마르코 복음에서 이 점은 굉장히 강조되고 있죠. 특히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예루살렘 상경기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교육하실 때 제자 됨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그 제자 됨의 어떤 가르치심 내용 안에 '시중들다', '섬기다'라는 내용이 있어요.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많은 이들을 섬기러 왔다고 하시죠. 그리고 또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 그러니까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를 버려야 되고, 다른 이를 섬겨야 된다라는 거예요. 시몬 베드로의 장모가 그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 준 시중 드는 일, 봉사자의 모습, 제자 됨의 첫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다라는 거죠. 

 

* 시몬의 장모 : '예수님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른 첫 번째 사람' 

 

그녀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시중 드는 일에 온전히 자신을 두었다는 사실, 그것은 그녀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밝혀주고 있는 겁니다. 단순히 집안 일을 했다는 게 아니예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일을 했다는 거예요. 교회를 위해서 일을 했다라는 것입니다. 이제 마르코는 예수님의 치유 기적 이야기를 보도한 다음에 카파르나움에서의 그분의 치유 기적 행위를 요약해서 다시 한 번 간략하게 말해 줍니다. 그것이 바로 마르코 복음 1,32-34절이예요. 자, 여기에는 세 가지 의도가 담겨 있는데요. 환자들이 모이는 것, 사람들이 몰려 든 것, 환자들의 운집과 예수님의 기적과 악마에게 조용히 하라고 한 함구령, 메시아 비밀 사상입니다. 

 

* 예수님의 치유 기적 세 가지 의도 : "환자들의 운집' , '예수님의 기적' , '예수님의 함구령' 

 

자, 이것이 다시 한 번 여기서 1,32-34절에서 요약 돼서 나오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내쫓으신 구마 기적과 시몬 베드로의 장모의 병을 고치신 치유 기적을 전해 줬던 마르코는 이 요약물을 통해서 예수님의 기적이 갖는 성격을 규정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질병들과 마귀들에 대한 완전한 권위를 가지셨던 거죠. 이 권한을 사용하시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이 있어야 할 자리, 본연의 자리에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 오게끔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다'(마르 1,32-34) 

⇒ 여러 질병과 마귀들에 대한 완전한 권위를 가지심. 건강한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되찾음 

 

그런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이 당신의 정체성을, 그 더러운 존재들이 분명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떠벌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어요. 바로 함구령이었죠. 마귀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또 그분이 무엇을 하러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마르코 복음서의 신학적 주제예요.

 

* 메시아 함구령 : 마르코 복음서의 의도 '예수님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 

 

그래서 1,1절에 복음이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 즉, 예수가 누구냐를 아는 것이 마르코 복음서의 의도이거든요. 그런데 그 의도를 마지막에 가서야 밝혀 준다는 거예요. 즉 십자가를 비추어서, 십자가를 통해서만 예수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겁니다. 그러기에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이야기하여 그릇된 예수님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으려는 더러운 영들, 마귀들의 의도를 미리 철저하게 봉쇄하시는 겁니다.

 

* 메시아 함구령 : '그릇된 예수님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으려는 더러운 영들, 마귀들의 의도를 미리 철저하게 봉쇄' 

 

예수님의 주변의 사람들, 일단 이 장면 안에서 보면 시몬의 집 내부에서 공간적으로 집 외부를, 비록 문 앞이지만 더 많은 이들이 몰려들고 있어요. 이렇게 모인 이들이 점진적으로 단순히 반응하면서 "와! 신기하다"라고에 머물면 안 돼요. "저 분이 누구시지?" 즉, 예수님에 대한 인식이 점진적으로 확장해 나가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시선은 지금 병자를 고쳐주고, 마귀들린 현장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라는 것. 그래서 골고타, 십자가 아래까지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에게 어떤 일시적인 도움만을 받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에이, 예수님에게서  떠나야지!" 성당 안 다니고, 냉담하고 그런 철새 신앙인이 되고 마는 거죠. 끝까지 우리 신앙은 이렇게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십자가를 통해서 알 때까지, 그 길까지 예수님과 함께 가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즉,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진정으로 알기 위해서는 나의 온 존재를 걸고 그분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 또 그분처럼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죠. 지금 열병의 치유를 받고 곧바로 시중을 든 베드로의 장모처럼 말입니다. 

 

그래요, 예수님의 지상 사명이요 또 공적 직무이신 복음 전도 여행에 있어서 그분의 일상과 또 짧은 일화가 짧게 언급되고 있는 것이 이어지는 1,35-39절의 내용입니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해가 지고 나서, 이스라엘은 하루의 기준이 오후 4시예요. 4시에 해가 지고, 해가 뜨고 하는 것을 오후 4시로 합니다. 하루의 바뀜의 시간이. 그래서 4시가 지나면 새로운 날이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안식일이 끝나자마자 예수님께 병든이들과 마귀들린 이들을 모두 데려왔고 이들 대부분이 치유를 받습니다. 

 

아마도 생각컨대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치유는 밤늦도록 계속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안식일에는 어떤 일도 하면 안 되기 때문에 4시가 지나자마자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환자를 데려왔다는 거죠. 하지만 해뜨기 전 아직 이른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집 문 앞에서 그 문 앞을 떠나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기도하십니다. 

 

* 기도 : 예수님께서는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신 다음 취하는 숙면보다 더 중요한 것 

 

자, 우리는 여기서 기도의 중요성을 알 수 있어요. 기도는 예수님께서 하루 종일 바쁘게 일하신 다음, 그럼 쉬고 싶잖아요. 숙면을 취하는 것보다도 더 우선시 하셨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을. 그렇게 기도하시기 위해서 외딴 곳으로 가셨다. 그런데 우리 지난 시간에도 예수님이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무엇을 가르치셨다라는 데 가르치심의 내용은 마르코가 불친절하게도 안 전해 줬다고 그랬어요. 

 

우린 다만 1,13-15절의 말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말씀을 통해서 추측만 할 수 있다고 그랬죠. 마르코가 예수님이 어떤 기도를 했는지 기도의 내용을 또 여기서 안 알려 줘요. 이것도 우리가 추측을 해야 돼요. 마태오나 루카에서는 우리가 일상 늘 바치는 주님의 기도가 소개 되죠. 주님의 기도는 마태오 하고 루카 복음에만 나옵니다. 마르코는 소개해 주지 않아요. 그렇다고 우리가 전에 예수님이 어떤 기도를 했는지 모른다? 그러면 우리가 이 시간 여러분이 저와 함께 할 이유가 없는 거죠. 

 

자,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예수님께서 게쎄마니에서 기도하시죠. 잡히시기 전 번민하시잖아요. 그때 어떻게 기도하십니까?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마르 14,36) 이 말씀을 통해서 비록 마르코 복음서에 주님의 기도가 없지만 우리는 주님이 어떻게 기도하셨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겁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게쎄마니에서도 '제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주님의 기도와 같은 내용이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주로 기도 하셨던 내용은 당신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접고 아버지의 일을 하시려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려고 기도하셨다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께는 이렇게 당신만의 시간, 홀로 아버지 하느님과 대화를 갖고 싶은 그런 사적인 시간도 그리 오래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았어요.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기도하시려는, 아버지와 대화를 원하시는 그런 시간을 마련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그 바램, 뜻을 베드로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베드로는 지금 어부로서 살다가 사람 낚는 어부로, 제자로 불림을 받았는데 그러면서 회당에서 예수님이 어떤 가르침을 했는지 들었고, 악마를 쫓아내는 것도 보았어요. 심지어는 자기 장모를 고쳐주시는 것도 봤잖아요. 그럼 예수님이 누구라는 거를 베드로만큼은 알아야 돼요. 보통 분이 아니구나. 그런데 지금 베드로가 아직도 예수님을 정확히 모른다는 거죠. "스승님, 사람들이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예수님의 기도를 방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순간적인 현장에서 인간의 일, 인간적인 명성이 드높아지고 그래서 예수님께 사람들이 몰리는 인기 때문에 "야, 뭔가 하면 되겠는데, 예수님을 따르면 이다음에 한자리할 수 있겠는데!"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께 "손님 왔어요!"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 거죠. 

 

자, 이런 모습은 구체적으로 마르코 복음서 안에서 뒤에서 확장이 됩니다. 언제 확장이 되죠? 마르코 복음서 8장에 "사람들이 날 누구라고 하더냐?" 물었을 때 여러 가지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장면에서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베드로에게 물었을 때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하고 신앙 고백을 하죠. 어느 정도 알아 들은 것 같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처음 예고하시니까 베드로가 어떻게 합니까?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예수님이 어떻게 야단치시나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마르 8,33) 지금의 모습과 같습니다. 베드로가 지금도 기적을 보았고, 악마를 쫓아내고 병자를 치유하고, 율법 학자들이 놀라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에 대한 기대감을 가졌는데, 그래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을 예수님께 알리는 거예요. 더 큰 일을 하시라고, 자기의 일을 예수님께 권하는 거죠. 

 

단 8장과 지금의 차이는 예수님이 지금은 야단을 안 치신다는 거예요. 8장에 가서는 야단을 치시죠. 하느님의 일은 생각 안 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그러나 지금은 야단을 안 치십니다. 그 이유는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거예요. 예수님이 아직은 기회를 더 주고 싶은 거예요. 제자들에게, 베드로에게 더 많은 당신의 모습, 당신의 가르치심을 베드로에게 주어야겠다고 생각을 하시는 겁니다. 아직은 예수님께서 여기에서는 야단을 치지 않으세요.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교육의 혜택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들 마르코 복음서 보실 거예요. 제자들은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지? 4장에 가서 바람과 호수를 가라 앉히시는 기적에서도 그것을 보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아야 되는데 "도대체 이분은 누구시지?" 하고 헤메고 있어요. 빵을 많게 하신 기적, 물 위를 걷는 기적 때도 마음이 완고해졌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이 체포되시니까 어떻게 돼요?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떠납니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이신가?(마르 4,41), 마음이 완고해져(마르 6,52), 결정적인 순간에 주님을 버리고 도망치지 않았습니까?(마르 14,50) 제자들의 몰이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예수님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해서 전에 그물을 버렸듯이, 아버지를 버렸듯이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버렸다는 거죠. 여하간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하느님의 일을 이루고자 하느님과 대화를 원하시는 예수님께 사람의 일을 권하고 있는 그런 베드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아직은 야단을 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정확하게 짚어 주십니다. 카파르나움에서의 첫 가르침, 첫 구마 행의, 첫 병자 치유 그리고 그 결과로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 대단한 성공에 연연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이 하셔야 했던 일이 뭐지요?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그에 따른 회개와 복음을 믿는 것이었죠. 그것을 예수님이 강조하세요.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마르 1,38) 

 

* 카파르나움의 첫 가르침, 첫 구마 행위, 첫 병자 치유 ;

  "당신에게 주어진 지상 사명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일깨워 줌" 

 

예수님은 당신의 이 지상 사명에 제자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이렇게 밝혀 주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즉, "함께 가자." 이렇게 제자들을 초대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39) 이렇게 예수님의 활동을 마르코는 복음 선포와 구마 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앞서 마르코가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에서 펼치셨던 첫 공적 직무 활동을 갈릴래아의 다른 고을에서도 똑같이 하셨음을 마르코 특유의 어떤 빠르게 이야기하는 전개 방법으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죠. 이처럼 마르코는 예수님의 활동이 무엇인지  또 이것이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있음을 이렇게 간단하게 요약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마르코 복음의 특유의 방법들 곧바로, 즉시, 빠른 이야기 전개와 간결한, 때로는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것, 여기서  또 볼 수 있겠죠.  

 

복음사가 마르코는 이렇게 세례받고 광야에서 유혹을 견뎌내시고 공적으로 당신을 처음 드러내셨던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를 통해 예수님의 행동의 몇몇 특징들을 우리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이 연장 선상 위에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갈릴래아 전도 여행에 대해서는 전형적인 본보기 하나를 우리에게 제공을 해요. 바로 회당에서 더러운 영에 대한 승리와 비교되는 정화, 깨끗해짐 즉, 나병 환자의 치유입니다. 

 

* '더러운 영'에 대한 승리(마르 1,23)와 정화(淨化),(나병 환자의 치유) 비교 

 

자, 이 새로운 단락의 등장 인물에는 이름이 없어요. 시몬 베드로의 장모처럼 어떤 정확한 신원을 인식할 수 있는 게 없죠. 단순히 그냥 마르코가 나병 환자라고만 언급을 합니다. 하지만 이름이, 신원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이 나병 환자의 행동이 평범하지가 않아요. 앞선 인물들하고 다릅니다. 왜냐하면 1,40절에 첫 문장의 동사에 여러분 시선을 모아 봐야 됩니다.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40)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오다, 왔다라고 하잖아요. 그리고 그가 보여 주는 세부적인 세 번의 행동은 도움을 청하고, 무릎을 꿇고, 말하며. 시몬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으로 누워서 예수님이 오히려 가셨잖아요. 측은한 마음으로. 그래서 예수님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런데 지금 나병 환자는 신원은 분명하지 않은데 행동은 예수님에게 오히려 반대로 왔고, 청하고, 무릎을 꿇고 행동이 다르다라는 겁니다. 비교가 되죠. 

 

그는 나병이라는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도움을 청해요.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신뢰하고 또 그분이 그를 도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는 행위는 뭐예요? 결국 우리가 누구 앞에 무릎을 꿇는다라는 것은 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말이거든요, 

 

자, 우리 이제까지 펼쳐진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서, 가르침에 사람들의 반응이 다 예수님의 권위에 놀랐다라는, 예수님의 권위가 드러나는 거였죠. 악마를, 더러운 영을 다스리는, 이겨내는 권위, 병을 치유하는 권위, 이제 그 권위 앞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거죠. 이러한 나병 환자의 행동은 그의 능동적이고 눈에 띄는 특성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마르코 복음 1,32절에는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었어요. 아니면 그 앞에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님이 가셨고요. 지금 나병 환자는 어때요? 예수님에 대한 명성을 들었고, 자신이 필요한 도움 때문에, 간절함 때문에 예수님 앞에 왔다라는 거예요. 이 점이 다르다라는 겁니다. 

 

그래요 당시에는 모든 병을 종교적인 차원에서 이해했습니다. 의학적으로만 질병으로 본 게 아니고요. 종교적으로는 병에 걸렸다라고 하면 죄를 지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병에 걸린 것을 죄가 있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의학적으로 질병, 그 질병이 종교적으로는 죄, 심지어 지금 이 환자가 앓고 있는 병이 뭐죠? 나병입니다. 나병은 사회로부터 격리가 되는 병이예요. 

 

* 그 당시 병의 원인은 저지른 죄에 있음

  나병은 유다 사회 안에서 관습적으로 더럽고, 불결한 것으로 여김


그래서 사회적으로도 사람을 격리시키는, 단절시키는 병입니다. 전적으로 사회적으로 사회에서 배제되었죠. 죄인으로 간주되어 그와 접촉하는 것조차도 부정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회 공동체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역에서 배제되었고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었어요. 구약의 레위기에 있는 말씀 때문에. 레위 13,45-46에 보면, 나병 환자들은 사람들과 접촉을 하면 안 됩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병자는 옷을 찢어 입고 머리를 푼다. 그리고 콧수염을 가리고 '부정한 사람이오.' ,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친다. 병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부정하다. 그는 부정한 사람이므로, 진영 밖에 자리를 잡고 혼자 살아야 한다."(레위 13,45-46) 


그러나 지금 나병 환자는 이 율법을, 정결법을 어기고 예수님께 가고 있는 거죠. 본인이 능동적으로 법을 어기고 있는 겁니다. 나병 환자는 이미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어요. 예수님이 치유하시면 내가 낫겠다라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고, 이 질병에 대해서 예수님이 권위가 있는 분으로 생각을 했던 겁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가엾은 마음, 측은지심으로 다가가시죠. 예수님이 이렇게 자비로 반응을 하십니다.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깊은 동정, 측은함으로 움직였다는 말인데요. 말 그대로 하자면 저 밑바닥에서부터 움직여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마르 1,41) ⇒ 예수님의 자비(慈悲). 속마음 깊숙히, 불쌍한 마음이 들어 행동하셨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함께 느끼기, 함께 아파하기 정도라 하겠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감정에 대한 표현은 마르코 복음서에서 처음 나오는 거예요. 앞으로 이제 예수님의 이런 측은지심은 반복해서 나옵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시자마자 이런 깊은 애정으로, 측은한 마음으로 움직이시어 당신의 다음 행동을 취하시게 되는 것. 예수님이 손을 내미시죠. 손을 내미는 것. 아까 나병 환자와 접촉하면 안 된다라고 했어요. 나병 환자도 율법을 어기며 예수님께 왔지만 예수님도 율법을 어기면서 손을 내미시는 거죠. 


구약 성경에서 이 손을 내밀다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능력있는 행동을 드러낼 때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나는 손을 내뻗어 이집트에서 온갖 이적을 일으켜 그 나라를 치겠다." (탈출 3,20)

"당신 손을 뻗치시어 당신 오른손으로 저를 구하십니다."(시편 138,7)


그런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능력으로 나병 환자에게 손을 먼저 내미셨다라는 것. 그래서 나병 환자들은 철저하게 그 사회에서 추방되고 격리되었고 소외되었던 인물인데 예수님이 그를 만지시면서, 접촉하시면서 깨끗하게 하시고, 의학적으로 치유만이 아니라 죄도 없애시면서 당시 사회적으로 차별되었던, 사회적 어떤 가치관을 바꾸어 놓으시는 그런 모습이죠.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마르 1,42) 


그런데 예수님이 이제 마지막으로 그에게 뭐라고 하세요?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마르 1,43) 이것을 단호하게 명령하십니다. 


어쩌면 나병환자가 그동안 자신을 짓눌렀던 율법의 예수님의 이 말씀, 함구령과 함께 사제에게 보이라는 이 말씀, 함구령이 더 큰 무게감으로 주어진다라는 거예요.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이 새로운 가르침을, 명령을 주셨어요. 함구령. 이 함구령에 대한 것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 메시아 - 함구령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르 1,44) 


예수님을 올바로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십자가 아래서라는 의미로 이해하면서 함구령을 이해하게 됐죠. 그 외의 나머지는 정결법에 따라서 예수님이 사제에게 몸을 보이면서, 당시에 병이 나았다라는 것은 사제에게서 판정을 받는 것이거든요. 그 법을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나병 환자가 예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불손종한다라는 거죠. 오히려 떠나가서 이를 널리 알리는 것, 이것이 지금 45절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마르 1,45) 그래요 불순종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지만 반대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널리 알리다라는 말, 선포하다는 말. 복음을 전하다, 선포하다는 같은 동사의 표현이거든요. 

 

 

일단 함구령을 지키지는 않았지만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그 기쁜 소식의 선포라고 하는 것이 지금 1장에서 중요한 거잖아요. 그 맥락 안에서 본다면 불순종이기는 하지만 아, 결국 예수님이 하신 일, 말씀과 가르침, 기적은 알려져야만 하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코는 1장 이 부분 안에서 마지막까지 시종일관 자신이 처음 시작했던 복음의 의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알리는 것, 선포하는 것.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마르코 복음서 1장을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자, 이런 성공적인 장면들을 뒤로 하고요. 이제 다음 주부터는 2장을 보는데요. 2장은 성공가도와 함께 따라붙는 것, 남이 잘 되면 시기하죠. 논쟁들이 시작됩니다. 2장에는 연속된 논쟁, 갈등의 시작이 펼쳐지는데요. 그 장면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다음 주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http://cafe.daum.net/bible100weeks/UJbt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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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석 신부, 마르코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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