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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진짜 신앙인.

135341 강만연 [fisherpeter] 스크랩 2020-01-15

 

오늘 낮에 본당 교우 한 분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최근 본당에서 일어난 일을 화제로 해서 열띤 토론을 했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 형식의 토론이었습니다. 대화였지만 저는 토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토론이라기보다는 토의가 더 정확한 표현이겠습니다.

 

토론은 양 당사자가 서로 반대 주장을 가지고 자신의 견해를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려고 하는 게 토론이니 맞는 표현이겠습니다. 형제님과 저와 일치된 생각으로 서로의 의견을 나누면서 더 나은 합의점을 도출하려고 했기 때문에 토의가 맞겠습니다.

 

대화의 핵심 주제는 신앙생활하는 신자보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더 경건하게 살고 있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저도 최근에 이에 관한 의견을 표명하기도 했습니다만 오늘 이 이야기를 하면서 많은 것을 한번 되돌아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한 자연인으로서 살아가면서 또 하나의 인격체인 신앙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 신자의 모습에 대해 다양한 소재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분은 아마 지금 약 최소 30년 이상 신앙생활을 한 분입니다.

 

오늘 이분이 말씀하신 하나의 표현을 말씀드리자면 우리 신자는 니네 할 것없이 속물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라는 공동체 내에서 단지 신앙이 같다는 이유 하나로 육적으로는 전혀 남남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으로 맺어진 형제자매이지만 숱하게 전례 속에서도 하느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서로 평화의 인사를 하면서 평화를 빌어주는 그런 평화로운 분위기가 무르익지만 우리는 다시 미사 말미에 각각 평신도로서의 사명으로 힘차게 복음을 전하라는 파견인 미션을 부여받으면서 입으로 하느님, 감사합니다.” 라는 응답을 하지만 그 응답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어떨 경우는 그 응답은 어디로 날아가고 없고 성전 문을 나서면서 어떤 경우는 방금 전까지 평화를 빌어준 인사가 같은 공동체에 있는 형제자매에게 미움 가득한 감정으로 바뀌어서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명이 이상한 방향으로 뒤바뀌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걸 보고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하더군요. 성당 안에서만 형제자매라고 말입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의 생각이 오늘날 우리 신앙인의 모습 전체는 아니더라도 실제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나약한 인간이라 어쩔 수 없어서 신앙인이라는 허울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좀 더 부족하지만 경건하게 살아보려고 신앙생활을 하려고 해야 하는 게 지극히 정상인데 이런 마음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한 번의 세례성사로써 신자가 된 걸 마치 영원한 하느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는 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보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모든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성경은 말을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배우려고 오는 학교가 우리가 가서 미사를 드리는 곳인 성당입니다. 성당을 다르게 표현하면 사랑을 배우는 학교라고 말한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 같습니다.  학교에 가면 가르치는 건 늘 평생 하나만 가르쳐주시는데 그게 딱 하나로 말하자면 바로 사랑입니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잘 실천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걸 실천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입니다. 이건 누구나 할 것 없이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아마 잘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조직이나 신앙 공동체도 하나의 조직입니다.

 

둘 다 각각 한 개인, 인격체로 구성되어 있는 곳입니다. 이런 공동체를 이끌어나가는 데에는 그 조직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구심점이 있어야 그 조직이 안정적으로 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건 사회 조직이든지 교회 내부 신앙 공동체든지 다 동일할 겁니다.

 

어떤 조직을 이끌어나가는 데에는 리더가 필요합니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떤 조직의 리더의 역량이 어떻느냐에 따라 그 조직의 운명이 좌우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비근한 예로 스포츠를 보더라도 그렇지 않습니까

 

축구를 한번 살펴보자면 축구팀의 감독의 리더쉽이 어떤지에 따라서 그 팀의 능력 차이가 월등히 차이 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한번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2002년 월드컵이 증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당시에 우리나라가 개최국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드밴티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실제 우리가 4강까지 가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결과는 어땠습니까 한 명의 훌륭한 명장이 있어서 대표팀의 문제점을 잘 파악해서 그 문제점을 보완하면서 5대영 감독이라는 불명예를 안으면서도 자기가 가진 축구에 대한 소신과 철학을 끝까지 고수하면서 4강을 이루어낸 히딩크 감독의 사례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말하였습니다. 이 예를 보더라도 한 조직의 리더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리더가 훌륭하다고만 해서 이런 성과를 모든 리더가 낼 수가 있는 건 또 아닙니다.

 

훌륭한 리더가 이끄는 대로 그 조직 구성원이 잘 따라줬을 때 그 조직이 훌륭해질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말을 할 수가 없지만 최근에 히딩크 감독이 중국 축구를 맡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아 경질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말해주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조직의 리더도 좋지만 리더만으로 모든 게 잘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 다 서로의 조건이 잘 충족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가장 환상적인 조합은 훌륭한 리더와 그 리더를 잘 따르는 조직 구성원이 찰떡 궁합이 될 때입니다. 우리 성당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본당이라는 성당은 예수님을 필두로 해서 본당을 맡고 사목하시는 신부님 이하 각 사목위원을 비롯하여 본당 회장님이 주축이 되어 하나의 본당이라는 조직이 서로서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이 돌아갑니다. 일단 우리의 조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고 저는 봅니다.

 

바로 리더와 구성원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리더는 예수님과 본당을 맡아 사목하시는 신부님이 될 겁니다.

 

구성원은 바로 본당 회장을 위시해서 본당을 대표하는 각 사목위원의 구성원들일 겁니다. 원론적인 측면에서 이야기를 한다면 일단 리더는 상당히 훌륭합니다. 그렇다면 이 공동체가 잘 되기 위해서는 그 구성원들이 훌륭한 리더가 이끄시는 대로 잘 따라줘야만이 환상적인 조직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각 구성원들은 본당에 소속된 각각의 개인 신자입니다.

 

사랑이라는 학교 공동체에서의 가르침대로 한다면 문제될 게 없습니다. 바로 사랑 그 자체가 리더로서의 가장 큰 덕목일 겁니다. 우리는 리더를 하나의 대표자로만 상징할 수도 있지만 신앙 내에서는 꼭 그렇게만 해석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대의명분적인 측면에서는 하나의 신앙 단체를 상징하는 상징성은 있어야 되겠지만 좀 더 광의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우리 신자는 공동리더가 되어야 됩니다. 성경에서도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히브리서에 나옵니다. 공동상속자로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유업을 물려받는 공동상속자입니다. 제가 잘은 모르지만 제 상식선에서 판단을 해 보면 왜 어떤 한 대표에게만 물려주는 게 아니고 이렇게 하시는가에 대해 말입니다. 바로 이건 아마 누구나가 각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이 주체가 되어 그 자리에 있어야 된다는 것을 알려줌과 동시에 같이 공동의 선을 위해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는 자신이 단순히 교회 조직 내에 아무런 위치를 설령 가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 각자는 모두가 다 대표자인 리더로서의 사명 의식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미 우리는 교리에서도 그런 걸 표명합니다. 평신도도 왕직, 예언직, 사제직을 수행한다고 예비신자 때 배웁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하나의 본당이 잘 되기 위해서는 정말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이 교회가 자기의 신체 일부처럼 생각해야 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가지 원칙만 잘 준수된다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될 겁니다. 바로 단 하나의 절대적인 법, 사랑입니다.

 

사랑 참 쉬운 말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게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은 구체성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또 다른 하편으로는 추상적인 면도 있습니다. 누구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지만 정말 단순히 어떻게 실천하는 게 사랑의 실천인지 잘 모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간단한 듯하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은 면도 있습니다. 저는 가장 쉽게 누군가가 사랑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사랑은 품어주는 것입니다. 이때 품어주는 것은 사랑하고 싶은 사람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품어주는 건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사랑입니다.

 

이것도 사랑이겠지만 실제 복음에서 말하는 사랑은 이런 사랑은 말할 것도 없고 진정한 사랑은 인간적으로 사랑을 하기 힘든 그런 상황에서도 상대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자신의 넓은 가슴으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그런 사랑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사랑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주 단순한 진리를 제가 아주 길게 말을 한 듯합니다.

 

왜 제가 아주 간단한 것을 이렇게 길게 말씀을 드리는 것일까요 막연하게 사랑을 실천하자는 말의 의미를 좀 더 쉽게 단순하게 한번 생각해보자는 의도에서 좀 더 깊이 한번 생각해보자는 의도입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이 단순한 가르침을 벗어나 많은 사람들이 성당을 다닌다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이런 사랑의 꽃이 피어올라야 할 곳이 같은 형제자매라고 신앙고백을 말로만 하지 실제로는 서로 잡아먹지 못해서 마음속에는 증오와 미움의 씨앗을 품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도 교우님과 말한 가장 큰 핵심적인 주제가 바로 시기, 질투였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시기, 질투에 대해 글을 올렸습니다만 오늘날의 저희 본당만이 아니라 실제 모든 본당에서 일어나는 불협화음의 대부분의 근원적인 원인은 지금까지 제가 봤을 때 거의 모두가 바로 시기, 질투입니다.

 

시기, 질투는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했다고 없어지는 그런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정말 이건 피나는 각고의 노력을 해야 어느 정도 인간의 본성을 초월하는 그런 수준까지 가지 그러하지 않으면 어느 일정 수준에서 신앙 성숙은 이루어지지 않고 만성 정체된 상태로 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시기 질투의 근본적인 원인도 바로 사랑이 없어서입니다. 근데 문제는 서두에 말씀을 드렸다시피 오늘날 우리 신자의 모습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많이 남을 사랑하고 상대를 더 이해를 잘 하는 그런 빛의 자녀가 되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빛과 소금이 되어야 되는데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더 서로를 사랑하며 지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지금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의 모습이 하느님의 영광은 고사하고 얼굴에 먹칠을 하는 그런 모습도 보여주기도 하는 게 실제 사실입니다.

 

과연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지 하는 의구심이 가는 말을 하는 현실을 보니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정말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는지 단순한 빈말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을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건 저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느 특정한 날만 해야 될 게 아니고 매순간 해야 될 정도로 우리의 신앙의 수준이 이미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는 걸 우리는 정말 절감해야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의 자비는 지칠 줄 모르신다고는 하지만 방심을 했다가는 큰 코 다칠지도 모를 일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물러가라고 하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신자로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았다고는 하지만 나중에 하느님 앞에 가서 뚜껑을 열어보니 제대로 된 신자가 아니고 가짜 신자로 살은 것으로 평가를 받는다면 하느님께서는 자비도 자비이지만 그 자비에 상응하는 정의와 공정에 따라 판단을 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절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자칫 자비를 너무 맹신한 나머지 정말 큰 코 다칠 수가 있다는 걸 우리 모두는 알아야 될 겁니다.

 

만에 하나 혹시 모를 영적인 안전을 위해 미리 대비해서 손해날 건 없지 않겠습니까 한번 보세요. 하느님께서 무한한 자비만 베푸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하느님 앞에 가보니 자신이 생각했던 하느님의 모습과 다른 일이 일어난다면 그때 하느님께 하느님, 이거 하는님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까하고 말씀이라도 제대로 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런 상황이 되면 그땐 오금이 저릴 정도가 될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생각한 하느님 상과 완전히 다르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두려움의 존재로 생각하는 무서운 존재로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렇다고 무한한 사랑만으로 충만하신 하느님 상으로 바라봐야 될 게 아니라 경외감으로 하느님을 바라볼 때만이 그 경외감이 진정 하느님 사랑으로 되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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