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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20일 (토)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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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세례 (요한 3:1-21)

126767 김종업 [rlawhddjq] 2019-01-13

 

 

 

세례 (洗禮)

(요한 3:1-21)

1 바리사이파 사람들 가운데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2 어느 날 밤에 예수를 찾아 와서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3 그러자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4 니고데모는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다시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5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7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8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9 니고데모는 다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0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 11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너희는 내가 이 세상 일을 말 하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을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 간 일이 없다. 14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17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8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20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21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이요 지도자입니다. 그는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요 부자였습니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을 대표하는 제사장들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로 구성된 의회와 같은 기관에 속한 자였습니다.

지금 성경은 유대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신실한 니고데모가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자라는 것을 보여줌으로 그보다 더 형편없는 이방인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개 같다는 이방인들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지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 보시면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옵니다. 여기서 밤과 어두움이 상징하는 것은 죄 된 세상을 뜻하는 것입니다.

(요한1:4-5)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요한19:39) 39 그리고 언젠가 밤에 예수를 찾아 왔던 니고데모도 침향을 섞은 몰약을 백근쯤 가지고 왔다.

지금 예수께서 이라는 단어를 통해 독자인 성도들에게 말씀하고 싶으신 것은 유대인의 가장 뛰어난 자도 밤에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어떠한 조건이나 위치나 지식이나 소유도 하느님 나라 입성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합니다. 당신은 하느님께로서 온 분이란 것을 안다고 합니다. 일견 멋진 신앙고백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안다고 하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안다고 하는 니고데모가 얼마나 모르는 자인지를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롭게 하늘로부터 태어나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시지요  잘 생각해 보세요. 태어난다는 것은 새롭게 창조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 자신의 탄생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나요 태어나는 자는 passive thing입니다. active thing은 어머니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구원을 설명하시며  니고데모야 네가 가지고 있는 조건과 상황과 지식과 지혜가 아무리 뛰어나고 화려해도 너는 하늘로부터 나지 않으면 여전히 밤에 속한 자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네가 지금까지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그 모든 것과 네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우리가 조금 더 공부하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결심으로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거듭남을 거저 받아야만 우리는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네가 다시 창조되지 않으면 절대 넌 가망이 없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족보가 많이 나옵니다. 창세기, 역대기 상하에 많이 나오는데 신약에는 딱 두 번 예수님의 족보가 나올 뿐입니다. 마태복음 1장과 루가복음 3장에 두 번 예수님의 족보가 나오는데 마태복음1장에 예수님의 족보가 어떻게 나옵니까 아브라함에서 다윗, 다윗에서 바벨론 유배, 바벨론 유배에서 예수그리스도까지 14세대, 14세대, 14세대로 나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예수가 나오시는데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 되셨다는 것을 굳이 그 족보의 마지막에 붙여 넣었습니다. 14가 세 번이라는 것은 일곱씩 여섯 개를 말합니다. 창조의 숫자, 안식의 숫자, 완전수인 7이 여섯 번나오고 그 여섯 번째 마지막이요 일곱 번째의 시작이 성령으로 잉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눈치 빠르신 분들은 아, 하고 무릎을 치실 것입니다.

일곱 번째 세대로 마무리되는 새 창조의 완성은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제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 번째 세대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 되었다는 것을 굳이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우리의 노력이나 요구나 열심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하느님에 의해 거듭난 자만이 구원의 방주에 올라 탈 수 있다는 것을 이 족보를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요한복음의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셔도 되는데 왜 물과 성령이라고 표현 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그 표현은 유대인들이 줄줄이 꿰고 있던 구약을 배경으로 한 표현입니다. 오늘 본문에 그 증거가 나옵니다. 10절을 보세요.

(요한3:10) 10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

 

헬라어 원어를 보면 선생이라는 단어 앞에 'ho'라는 정관사가 들어있습니다. 큰 스승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지금 나는 너희들이 잘 알고 있다고 하는 구약 성경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너는 이스라엘의 큰 스승으로서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일을 모르고 있다는 말이냐하고 니고데모를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지금 니고데모에게 하시는 말씀들을 유대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을 배경으로 설명하시고 계신 것입니다예수님께서 지금 인용하시는 부분은 에제키엘서입니다. 그리로 가서 물과 성령이 뜻하는 바를 찾아보지요.

(에제36:22-26) 22 그러니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일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가는 곳곳에서 뭇 민족에게 멸시를 받게 한 거룩한 내 이름 때문에 행동할 것이다. 23 너희는 내 이름을 뭇 민족에게 멸시받게 했지만 나는 야훼다. 내 이름이 다시는 멸시를 받지 않고 오히려 들날리게 하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너희에게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면, 뭇 민족은 이를 보고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24 내가 너희를 뭇 민족 가운데서 데려 내 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다가 25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 주고 26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범죄 하여 소망이 없는 자들이 되어 하느님께서 가나안에서 쫓아내시고 흩어버리십니다. 그들이 얼마나 소망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토록 소망이 없는 자들이기에  하느님께서 직접 물로 씻어서 그들의 더러움을 씻어주시고 하느님의 영을 그들의 마음에 새겨서 다시 창조하시지 않으면 절대 소망이 없음을 에제키엘을 통해 계시하신 이 부분을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상기시키시며 다시 설명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물은 깨끗하게 하며 정결함을 주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이 있으세요 먼저 성령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르와흐바람, , 호흡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럼 생각해 보세요. ‘바람이 밤새 불어 이 갈라진 장면이 있었지요 바로 홍해가 갈라진 사건입니다. 거기서 모든 죄인들을 상징하는 애굽 군대가 모조리 빠져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쪽에서 보니 애굽에서 탈출한 새로운 자들이 물을 마른 땅처럼 걸어서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게 홍해 사건이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홍해 사건은 죄인들이 죽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어 올라오는 것입니다.

또 물과 성령하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지요 노아의 홍수 사건입니다.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시는 것처럼 노아의 홍수사건도 기식(寄食)하는 죄인들이 모두 빠져 죽고 하느님의 택한 자들만 방주에 담겨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정결하게 한다는 것의 진의입니다. 정결하게 한다는 것은 단순히 더러워진 것을 씻거나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죄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죄에 대해 죽고 성령에 의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학에서는 그것을 재창조 혹은 새 창조라 부릅니다.

 

태초에 천지가 창조될 때에 수면()위에 하느님의 영(성령)이 운행하셨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옛 창조가 그렇게 물과 성령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성경이 명확히 기록하는 것은 하느님의 궁극적인 목적인 재창조가 그렇게 이루어질 것임을 미리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재창조, 구원은 하느님의 주권과 섭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의 노력과 애씀이 낳는 열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예수님은 계속해서 에제키엘 37장으로 니고데모에게 말씀을 이어가십니다.

에제키엘37장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마른 뼈에 생기를 불어넣으니 뼈들이 살이 붙고 힘줄이 붙어 군대가 되는 것을 그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에제키엘에게 열방으로 흩어진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이런 말라빠진 뼈들이라는 것을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죽은 지 너무 오래되어서 먼지가 풀풀 나는 그런 마른 뼈들, 그런 마른 뼈들에 생기가 불어서(‘생기는 히브리말 르와흐로 바람, 성령이라는 말과 함께 쓰인다고 했지요) 말라빠진 뼈들이 가득 찬 골짜기에 성령의 바람이 부니 그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군대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모습이 어떤 자들인지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른 뼈와 같았던 우리들을 야훼의 군대인 하느님의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성자 하느님께서 직접 십자가에 달리셔서 저주와 심판의 뱀이 되심으로 우리를 멸망에서 구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의 혼돈과 공허가 질서와 충만으로 창조가 되어지는 것과 동일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군대가 탄생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른 뼈와 같은 이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위해 무슨 노력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보탤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14절부터16절까지를 잘 보세요. 두 문장이 댓 구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3:14-16) 14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구원이라는 것은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저주의 뱀이 되셔서 장대에 달리시고 그 것이 바로 죄인인 자기 자신을 위한 하느님의 은혜의 십자가라는 것을 믿는 사람만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에제키엘서에서 확인을 했듯이 구원을 얻어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자들은 이미 죽어서 마른 뼈처럼 먼지가 풀풀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누가 그 저주의 십자가를 구원의 십자가로 믿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어떤 자들이 과연 그 예수를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 마른 뼈들이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율법과 제사제도와 그 많은 언약을 주셨음에도 계속해서 타락하고 실패하여 결국에는 그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버리는 그 죄인들이 정말 독생자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성령으로 그 눈을 뜨게 해 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우리는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믿습니까 성령께서 임의로 그 분의 주권으로 우리를 향해 불어오시지 않으면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자들보다 무엇이 너 나아서 우리를 택하셨나요 찬송가 가사처럼 난 알 수 없도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말씀에서 거듭난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으로 보면 위로부터 난다는 말입니다. 위로부터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이 세상에 위로부터 오신 분은 예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셔서 저주와 심판의 물에 의해 죽으시고 성령에 의해 다시 사신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 13절도 명확하게 그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3:13) 13 하늘에서 내려 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 간 일이 없다.

 

우리는 바로 그 예수와 함께 죽고 성령에 의해 새롭게 탄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오직 그 은혜로만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예수의 품에 안겨 죽어야 합니다. 복된 니고데모는 결국 그 의미를 알았습니다.

(요한19:38-40) 38 그 뒤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도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게 하여 달라고 청하였다. 그도 예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요셉은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렸다. 39 그리고 언젠가 밤에 예수를 찾아 왔던 니고데모도 침향을 섞은 몰약을 백근쯤 가지고 왔다. 40 이 두 사람은 예수의 시체를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풍속대로향료를 바르고 고운 베로 감았다.

 

몰약은 사람이 죽으면 시체의 악취를 없애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 박사들이 몰 예수께서 탄생하셨을 때 바로 그 몰약을 예물로 가져 왔습니다. 그것은 예수는 죽기 위해 왔다는 것을 미리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몰약은 아주 비싼 물건이어서 일반인들은 잘 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몰약을 백근을 가져 왔습니다. 몰 약 백근을 장례에 쓸 수 있었던 사람은 그 나라의 왕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 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물과 성령으로 나야한다는 사실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죄에 대해 죽고 성령에 의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그가 안 것입니다. 유대인의 장례법 중 몰약과 침향을 시체와 함께 세마포로 싼다는 것은 죽은 그가 너무 소중해서 그와 함께 내가 죽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그 하느님이신 예수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그게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우리가 참 부러워하는 예수님 곁에서 죽었던 그 강도가 뭐 한 일이 있습니까 그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와 함께 죽은 것밖에 없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은혜로 그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낙원에 이르는 것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게 구원의 길입니다. 너무 심플하지요

예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은혜를 허락하시기 위해 진노의 놋 뱀이 되신 것입니다. 그 진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입니까 오죽하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하느님께 탄원을 했겠습니까 하느님의 사랑을 독차지하시던 그 하느님의 독생자가 십자가에서 당해야 할 하느님의 저주와 심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아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진노를 예수께 퍼부으셨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구약의 하느님을 진노의 하느님이고 신약의 하느님이 사랑의 하느님이라 말합니다.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구약의 하느님은 인내의 하느님이시고 신약의 하느님이야말로 진노의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단지 그 진노를 그 아들이신 예수께 다 퍼부으신 것이고 그 모든 저주를 예수께서 다 받아 죽으신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그 십자가에서의 진노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를 예수께서 지옥에 내려갔다 오셨다고 말을 할 정도입니다. 'He descend into Hell' 한국어 번역판에서만 지워졌는데 그 말은 예수님께서 진짜로 지옥에 내려가셨었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불타야할 지옥처럼 처참하고 고통스러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지옥을 경험하셨다는 말이지요.

 

성경은 무섭게도 그 사실을 힌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에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지요목마르다라는 단어를 들으시면 생각나는 비유가 있지요 부자와 나자로의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부자가 지옥에서 아브라함에게 뭐라 합니까 내가 목이마르니 나자로의 손가락에 물을 한 방울만 찍어서 내 목을 축여 달라 부탁하지요 그게 바로 지옥의 특징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낯 열두시부터 오후 세시까지 태양이 빛을 잃고 세상이 어두워지지요 어두움, 흑암이 의미하는 바는 저주와 심판, 지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그리고 우리를 대표해서 지옥을 경험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지옥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불로 다 태워버리시고, 홍수로 사람을 다 쓸어버리시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대적들을 어린아이까지 다 죽여 버리시는 것을 보고 무시무시한 하느님이라 말을 하기도 합니다. 너무 잔인하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그것이 죄인들이 받아야 할 최종적 형벌인가요 아닙니다. 처참하게 죽은 그들은 최후의 심판 때 다시 일어나서 그것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몇 억 배의 고통 속으로 영원히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지옥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를 향한 하느님의 진노입니다. 그 하느님의 진노가 이 세상에 아주 조금 맛보기로 나타나는 것이 여러 가지 재앙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재앙들을 통해 회개하라고 요한묵시록의 일곱 나팔을 열심히 불고 계신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께서 마지막 심판으로 그 진노를 발하실 때는 우리가 그토록 애정을 쏟아 붓고 있는 이 땅을 비롯한 우주가 전부 불타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만큼 그 진노는 무시무시하고 큰 것입니다. 그 모든 진노가, 전 우주를 태워버릴 수 있는 하느님의 진노가 예수그리스도에게 단번에 쏟아진 것입니다. 그 진노를 하느님이신 예수가 받으셨기에 우리 안에 그 크신 하느님께서 들어와 계신데도 여러분과 제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서 하느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은 절대 하느님과 함께 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나이산에서도 하느님은 짐승들조차 하느님께 범접하지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안에 하느님께서 들어와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멀쩡하게 그 분과 대화를 하고(기도) 그 분을 자랑하고(찬양) 그 분을 섬깁니다.(예배) 우리가 받아야 할 그 하느님의 진노를 예수께서 받아내셔서 우리가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죄를 그토록 미워하십니다. 하느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시다고 말은 잘하면서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없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죽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는 우리는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죽으셨다면 지금도 여러분과 저는 매일매일 예수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하느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그 고마운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아무런 죄책 감 없이 습관적으로 죄를 짓는 사람들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맞습니까  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울부짖게 만든 그 죄를 나는 이토록 미워한다고 하느님은 세상에게 여전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해서 죄를 짓고 있으면 어떡합니까

어떤 분은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그토록 사랑하신다면 자신이 직접 내려와서 죽으실 것이지 아들을 내려 보내셨냐고.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여러분, 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목숨을 요구하시지 않고 이삭을 죽이라고 하셨을까요 자식을 가져 본 사람은 그 이유를 압니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부모된 자의 최고의 자기표현입니다. 그래서 자식이 좋은 대학가고 훌륭한 사람 되면 부모는 그렇게 기쁜 것입니다. 자식은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중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당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을 죽이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느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 우리를 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교 박해가 다시 시작되어 예수를 믿으면 죽인다하고 저를 고문한다고 한다면 저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신앙 때문에 저의 자식들을 바로 제 앞에서 고문하고 죽인다면 그 것은 저의 목숨을 끊어버리는 것보다 수천 배 괴로울 것입니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요. 그런데 하느님이 바로 그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토록 괴로워 하셨는지. 예수님은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아셨습니다. 그 아버지가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실 것을 생각하신 주님이 그토록 괴로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이 우리 같은 인간들을 위해 그러한 고통을 감수하셨습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어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다는 구절의 그 참 사랑을 이제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정말 이해하세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에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 이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하느님이 왜 나를 이 지경에 그냥 놔두시나하고 생각하신다면 여러분은 아직 그 아버지의 사랑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것은 그토록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너무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정 주고 살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이며, 여러분의 옛 성품이나 모난 인격을 다듬고 계신 것이며, 정금 같은 여러분의 완성을 위해 잠시 허락하는 훈련의 시간일 뿐입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애절하고 절박한 사랑인지 제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가장 좋은 땅인 고센 땅에서 잘 살고 있었을 때 그 왕조를 바꿔서 그 이스라엘을 핍박하게 만드신 이유를 아세요  이 풍요의 땅이 너희들이 거할 곳이 아니란 것을 하느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는 그 땅에 정을 두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영원한 나라를 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하늘을 소망하라고 지금 고난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하느님께서 그렇게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세요.

하느님 이것까지 가져가십니까라고 묻지 말고 내가 하느님을 알고 내가 그 천국을 알기에 이 모든 사건과 상황들이 하느님의 그 놀라운 사랑의 표현임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실력자가 되십시오. 이 세상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실망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洗禮는 이렇게 하느님의 주권과 섭리로 구원을 얻은 자들이 저는 하느님의 은혜로 이렇게 죽고 다시 살아났습니다.’라는 신앙 고백의 하나로 치러지는 聖禮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세례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각인이 되셨습니까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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