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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그 사랑 앞에서 (로마8:35~39)|

123324 김종업 [rlawhddjq] 스크랩 2018-09-10

그 사랑 앞에서

(로마8:35~39)

36 우리의 처지는, '우리는 종일토록 당신을 위하여 죽어 갑니다. 도살당할 양처럼 천대받습니다.'라는 성서의 말씀대로입니다. 37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여러 이름으로 부릅니다. 선악과, 율법, 계명, 언약, 모세와 예언자, , 성경, 등 여러 가지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이름들은 전부 하느님이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모든 성경이 당신 자신을 기록한 것이라 말씀을 하십니다.

(루가24:44~45) 44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한 말씀은 반드시 다 이루어져야 한다' 하시고 45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며

 

44절을 직역하면 나의 시편, 예언자의 글, 모세의 율법, 그 모든 것은 반드시 완성 되어야 한다.’입니다. 모세 오경이나 예언서나 시가서 중에 예수에 관해 기록되어 있는 어떤 부분 정도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이 전부 예수의 책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것을 45절에서 성경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곧 성경인 것이고 그 성경은 곧 예수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모든것이 말씀을 가리키는것... 그런데 요한이 그 말씀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한1:1) 1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하느님과 똑같은 분이셨다.

여기에서 한 처음, 태초에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이라는 전치사와 아르케라는 명사입니다. 그 단어를 히브리어로 바꾸면 성경의 맨 처음 단어인 베레시트입니다. 그렇다면 태초의 말씀은 창세기의 그 일곱 약속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이 일곱으로 시작해서 일곱으로 끝나는 것이고 예수의 공생애도 일곱으로 시작해서 일곱의 말(가상칠언)로 끝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주님이 빛으로 오신 날을 첫 번째 날로 표기를 하고 계속해서 그 이튿날이라는 말로 다음 에피소드들이 이어지다가 삼일후 사흘째 되던 날, 즉 일곱 번째 날에 가나의 혼인잔치가 벌어집니다. 빛에서 시작하여 안식의 혼인잔치로 완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곱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일곱의 말로 그분의 공생애를 끝냅니다. 그 일곱이 전부 하느님을 계시하는 언약의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 말씀을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 하느님을 ,진리의 말씀으로 담고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분 안에 담겨 있는 진리를 생명으로 취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있어서의 예수는 그냥 율법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는 율법이요, 성경이요, 말씀이니까요.

일곱(싸바)이라는 단어는 언약하다, 맹세하다. 실컷 먹이다. 일곱 번 말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 했습니다. 그런데 무엇으로 그 언약을 주어 실컷 먹이는 줄 아세요 싸바라는 단어를 파자해 보면 눈에 보이는 아래의 것으로 성전을 분석하여 가르치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하늘 아래의 것들에 생명의 말씀인 진리를 담아 우리에게 언약으로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게 율법이요, 성전이요, 성경이요, 예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그 예수를 말씀이라고 칭한 후에 그 속에 생명이 담겨 있다고 진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1:2~5) 2 말씀은 한 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고 이 말씀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생겨난 모든 것이 4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 본 적이 없다.

 

말씀은 태초에(베레시트)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그 말씀이신 예수가 베레시트에 언약된 일곱을 담고 오신 분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리고 만물은 바로 그 말씀을 담은 모형들로 창조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게 3절입니다. 만물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로(말씀으로) 창조가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신 예수와 그 말씀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 만물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당연하지요. 그 말씀(만물, 예수, 성경)은 전부 하느님이신 진리를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창세기에 보면 그 하늘 아래의 모형들을 어두움(호쉐크)이라고 하지요 그리고 그 어두움 속에서 그 어두움이 가리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 나타난 것을 (오르)’이라 부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곱 언약 을 설명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문자로 주신 것이 계명입니다. 그리고 그 계명을 모형으로 만들어서 가장 보기 좋은 동산 중앙(그 산)에 두셨습니다. 그게 뭐였습니까 성전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은 바로 예수 자신인 것이고요. 당연하지요. 그 성전이 말씀을 모형 한 것이고 그 말씀이 예수셨으니까 당연히 예수님은 당신을 성전이라고 하실 수밖에요.

그런데 그 계명, 그 성전을 표피적인 것으로만 받아 버리면 그게 곧 뭐였습니까 죄요, 어두움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계명과 성전을 진리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계명과 성전은 무엇입니까 빛입니다. 그렇다고 이 역사 속에서 그 빛이 다른 것으로 제시 될 수 있나요 역시 계명과 성전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어요. 성도는 그 어두움 속에서 그 어두움을 빛으로 볼 뿐입니다. 어두움이었던 성전이 빛이 되었다고 해서 이 역사 속에서 그 성전이 다른 모양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역사 속에서는 빛도 어두움도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이의 마음이 바뀌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사람에게 있어서 어두움과 빛이라는 개념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것을 바달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바달이 되어 으로 보여 지는 그것을 하느님이 선(토브)이라 부르십니다.(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러니까 어떤 이에게 있어서 그 일곱이라는 말씀은 멸망의 도구가 되는 것이고 어떤 이에게 있어서 그 일곱은 구원의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인데 어떤 이에게는 어두움이요 어떤 이에게는 빛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사8:14~15) 14 그는 이스라엘의 두 집안에게 성소가 되시지만 걸리는 돌과 부딪치는 바위도 되시고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덫과 올가미도 되신다. 15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져 터지고 올가미에 걸려 잡히리라.

 

그렇지요 그래서 약속의 땅이라는 가나안에 이방의 일곱(가나안 일곱 족속)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약속의 땅이라는 곳에 엉뚱한 일곱으로 완성이 된 자들이 존재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언약, 일곱은 열(십계명)이라는 내용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레위기의 그 수많은 율법은 전부 열을 설명하는 것이며 그 열은 곧 일곱을 가르치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열은 다섯으로 나누어서 주어진다고 했지요 그렇게 함으로 해서 인간들이 도저히 도달하지 못할 어떤 영역을 제시하고 그들의 한계를 명확하게 구분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하느님 사랑에 관한 부분이 하달이 되고, 신약에서는 이웃 사랑에 관한 부분이 말씀으로 떨어집니다.

 

구약에서 하느님 사랑의 다섯만이 주어지는 이유는 인간 측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임을 잘 깨달아 알라고, 한 마디로 실패하라고 주신 것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율법을 잘 지켜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나서는 모든 시도는 시날에서의 바벨탑 쌓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게 선악과 아닙니까 인본주의가 생각하는 하느님 사랑, 내가 열심히 노력하여 하느님처럼 되어서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하느님 사랑이라는 기특한 생각. 그건 절대 성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신 주님께서 직접 오셔서 다시 동산 중앙에 서 있는 선악과, 즉 이스라엘의 성전에 말씀으로 서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인간들 측에서의 하느님 사랑의 시도를 일축해 버리시고 아래의 다섯(이웃 사랑, 내리사랑)을 넷으로 주십니다. 다섯을 굳이 넷으로 주시는 이유는 창세기의 네 번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의 그 넷을 염두에 두시고, 무엇이 진정한 안식인가를 설명해 주시기 위함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주님은 십계명()의 아래 다섯을 살인과 간음의 이야기로 축약을 시켜 버리십니다. 그 살인은 희생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고 간음은 말씀을 율법으로 갖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희생제사와 율법지킴을 하나님 섬김의 모든 것으로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의 열심과 노력이 전부 부정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명이 말하려 했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상하죠

하느님의 율법은 희생제사와 율법지킴을 마치 의무처럼 주는 것 아니었던가요 그런데 주님은 율법의 진의는 그런 거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라고 뒤집어엎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율법과 희생제사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면 율법과 희생 제사를 행하고 행하지 않고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율법과 희생제사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모르고 열심히 율법만 지키고 희생제사만 드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만 하지 말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거짓 증거를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내용으로 보지 못하고 그 진리를 담은 그릇을 그대로 전해 버리면 그게 바로 거짓이잖아요

 

그러니까 거짓 예언자는 자기가 메시아라는 둥, 몇 년 몇 월 몇 시에 지구의 종말이 올 거라는 둥, 이런 미친 소리를 하는 자들이 아니라 성경을 법으로만 설명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전자의 사람들은 그냥 미친 사람들인 것이고요. 그런데 아무도 그 참말인 진리를 알아듣지 못했고 그 빛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성전이 서 있던 동산 중앙의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골고다입니다. 골고다는 성전이 서 있던 시온산에 있는 언덕입니다. 주님은 그 동산 중앙에 십자가를 지고 서십니다. 동산 중앙에 선악과나무가 다시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선악과나무가 스스로 죽습니다. 그 언약의 기둥 위에서 인간의 육이 전부 부정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의 육신 안에서. 그리고 그 생명의 진리는 인간 측에서의 무력함이라는 전제를 타고 온전한 은혜로만 택한 백성들의 마음으로 뚫고 들어갑니다.

 

그 사람은 이제 거짓 증거를 할 수 없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거짓 증거를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이웃에게 하느님은 이런 분입니다. 진리는 이런 것입니다.’하고 제대로 전해주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러한 자들에게 네가 나를 사랑한다.’라고 칭찬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측에서의 하나님 사랑, 치사랑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구약을 통해 입증이 되었잖아요 그들의 하느님 사랑에 대한 열심이 십자가에서 하느님을 죽여 버렸단 말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한단 말입니다. 신명기 6장의 그 유명한 쉐마의 처음이 뭡니까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라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냔 말입니다. 이런 딜레마가 어디 있어요 그래서 주님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시는 겁니다. 네가 희생제사와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즉 성경과 예수와 성전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그것의 진의를 이웃에게 잘 흘려주면 그것이 바로 십계명의 위의 다섯, 즉 하느님 사랑을 완성하는 자가 되는 거야.’

 

사랑이라는 단어를 히브리어에서 찾으면 아하브입니다. 그 단어는 성전을 말씀하시는 하느님’, 혹은 성전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참 성전을 진리로 잘 전해주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사도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고 분명하게 기록을 해 놓은 것입니다. 하느님을 우리 인간 이성의 수준에 맞게 말씀해 주신 것이 진리잖아요 그 진리를 올바로 전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올바로 전한다는 말이겠지요 그것이 그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 것이고, 그 분을 다른 신으로 섬기지 않는 것이며, 그 분을 우상으로 섬기지 않는 거 아닙니까

 

그리고 그 분을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부모로 공경하는 것이고요. 그게 바로 안식이잖아요 그렇게 십계명의 하느님 사랑의 부분은 창세기에서의 그 안식으로 이해가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안식의 개념이 처음 등장하니까요. 그런데 그 창세기의 안식은 넷의 마지막 완성으로 주어졌단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신약의 그 산에서 다시 넷으로 그 안식을, 그 완성을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게 바로 온전이라고 확인 도장을 찍어 버리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말씀은 사랑으로 완성이 되는데 그 사랑은 하느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여 이웃에게 흘려주는 사랑인 것입니다.

(로마13:10) 10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인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 우리는 하느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 알 수도 없는 존재를 목숨 걸어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건 추측이요, 상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하느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수준으로 계시해 주신 그 만큼의 하느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역사와 인생과 육신 속에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은 하느님께서 계시해 주신 그 만큼의 분량을 다른 이들에게 소개해 주는 일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축약이 된 율법이 나중에는 이웃 사랑이라는 것 하나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역사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거든요. 그리고 그것이 되면 그게 바로 하느님 사랑의 윗 계명의 성취니까요.

 

(갈라5:13~14) 13 형제 여러분, 하느님께서는 자유를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여러분의 욕정을 만족시키는 기회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사랑으로 서로 종이 되십시오. 14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 마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이렇게 온 율법은 이웃 사랑 하나로 축약이 됩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진리의 사람들에게 당부의 말을 첨언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으면 자유가 뭔지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로 방종의 기회를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이웃에게 흘려주기 위해서는 자유를 방종의 기회로 삼으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사도들이 그들의 서신 서에서 제발 성도답게 좀 살자는 식의 권고를 많이 했던 것입니다. 그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진리를 깨달은 성도는 그렇게 사는 것이 즐겁고 기쁘기 때문에 성경이 그렇게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헌신이나, 거룩한 삶의 추구 등이 구원의 과정이나 전제나 수단이 될 때는 그러한 것이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나 종교행위들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들에게서 나올 때에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행복의 재료들이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선행이나 착한 삶 등을 허락하신 것은 우리에게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한 번 해 보세요. 불쌍한 이들을 돕는다거나 힘에 부치는 구제와 선행을 할 때에 그냥 힘들기만 한가요 아닙니다. 인간은 그러한 행위들을 통하여 위로와 기쁨과 힘을 얻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느님은 그러한 것들을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너무 힘들지 말라고, 너무 외롭지 말라고, 너무 심심해하지 말라고요.

 

어떤 사람들은 진리가 주는 자유를 자신이 중독되어 있는 것을 합리화 시키는 데에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게 정말 사랑을 전하는 자의 올바른 태도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여 그 사랑을 전하는 자의 삶의 자세가 어찌 그렇게 가벼울 수가 있어요 끊으려 노력하세요. 중독이 주는 쾌락은 잠시지만 그것이 주는 절망과 상심은 훨씬 무서운 것임을 본인들도 알잖아요 끊고서 자기의 의지를 자랑하라는 게 아닙니다. 그게 선물이라니까요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물며 어떻게 그러한 선물을 자기의 공로로 싸들고 하느님 앞에 가서 저 이 정도로 열심히 했습니다.’하고 상급의 근거로 제시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그 모든 것들이 진리의 말씀으로 주어진 사랑에 근거한 것이라면 다 괜찮습니다. 그땐 성전 안에 들어가서 희생 제사를 드려도 괜찮고 밥 먹을 때마다 정결 예식 행해도 괜찮아요 그는 그러한 율법적 행위 속에서 진리를 읽어 낼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바오로도 율법이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있는 자처럼 율법이 없는 자들에게는 율법이 없는 자처럼 행동해 주며 진리를 전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 모든 것들은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진짜 사랑으로 수렴이 되는 것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에 근거한 구제와 헌신과 헌금과 봉사와 선교, 열심히들 하십시오. 최선을 다해서 하세요. 그러면 온 율법이 그 안에서 다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사람을 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말씀으로 오신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이러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언약을 주십니다. ‘나는 반드시 너희들을 내 백성으로 완성하겠다.’는 언약입니다. 그 언약이라는 단어가 일곱이라는 말이라 했지요 그래서 그 언약이 일곱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기 쉽게 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 열은 다시 위의 다섯과 아래의 다섯으로 주어집니다.

 

위의 다섯은 하느님 사랑이라는 하나의 계명으로 축약이 되고, 아래의 다섯은 이웃 사랑이라는 또 하나의 계명으로 축약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열을 둘로 제시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래의 다섯은 다시 넷으로 주어지지요 그리고 그 넷은 다시 하나로 수렴이 됩니다. 하나가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치사랑이 아니라 내리 사랑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말씀으로 먹이고 섬기고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온전한 말씀으로 이웃에게 흘러갈 때 그 이웃이 생명의 생수로 살아납니다. 사랑입니다. 그때에 하느님은 네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구나하고 위의 다섯 계명을 성취한 자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를 가진 자가 되면 그 사람을 아들(모노게네스)’이라고 부르고 그 아들을 여덟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일곱을 완성하고 거기에서 나온 자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여덟의 날에 부활하신 것이 그러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홍수 사건 이후에 남은 자의 모형으로 방주에서 나온 자들이 여덟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제물을 바치는 자가 아니라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화목제잖아요 하느님과 화목 된 이들의 만찬. 그래서 노아의 홍수 이후에 여덟의 사람들이 고기(베헤마)를 나누어 먹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때부터 육식이 시작되었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예수가 방주가 되어 하느님의 택한 백성들을 품고 저주의 비에 맞아 심판의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입니다. 십자가입니다. 그것으로 하나님과 하느님의 백성이 화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기를 먹는 것입니다.

 

그런데 채소와 함께 짐승이 식량으로 주어지지요 그리고 고기를 피와 함께 먹지 말라고 합니다. 그건 제가 이번 주 수요 예배 산상수훈 강해 때에 금식의 이야기에서 자세하게 설명해 드릴 것입니다. 이렇게 일곱이라는 언약의 말씀이 열이라는 율법으로 주어지고 그 열이 아래의 다섯을 통하여 위의 다섯을 성취하는 방법으로 설명이 되며 그 아래의 다섯은 넷으로 주어져 그 넷이 사랑이라는 하나로 완성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일곱 말 중 다섯 번째 말 속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창세1:20~23) 20 하느님께서 '바다에는 고기가 생겨 우글거리고 땅 위 하늘 창공아래에는 새들이 생겨 날아 다녀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21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큰 물고기와 물속에서 우글거리는 온갖 고기와 날아다니는 온갖 새들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22 하느님께서 이것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새끼를 많이 낳아 바닷물 속에 가득히 번성하여라. 새도 땅 위에 번성하여라!' 23 이렇게 닷샛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창세기의 다섯 번째 날은 두 번째 날과 짝입니다. 두 번째 날에는 궁창과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나누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궁창 아래의 물을 모아서 바다()’라고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바다라는 말의 의미가 진리를 주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아래의 물, 즉 바다는 진리를 주기 위한 모형들임이 분명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궁창(라키아)은 아래의 물로 위의 물을 알게 하기 위해 타베크에 만들어진 성전을 가리킵니다. 그 단어 자체가 두드려서 펴다, 덮다라는 뜻이니까요. 물론 그 성전 안에는 진리를 품고 있는 율법이나, 성경이나, 세상이나, 예수까지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섯 번째 날에서는 아래의 물, 즉 아래의 다섯 속의 그 모형들이 들어가 있어야 하겠지요 그게 뭐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큰 물고기,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 날개 있는 새가 등장합니다. 그 큰 물고기 타닌은 요한묵시록에서 으로 설명이 되는 그것이라 했지요 그 용은 짐승으로, 공중의 새로, 적그리스도로, 거짓 선지자로도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게 뭐였습니까

 

하느님의 말씀이 진리로 해석되지 않고 표피적으로 주어지게 되면 그게 바로 가짜 하나님, , 짐승, 가짜 성전, 유사 그리스도, 거짓말이 되는 거라 했지요 하나님이 아래의 물에 그것을 만들어 담아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움직이는 생물은 라마르 아쉐르 솨라쯔’, 즉 우글거리며 기는 네페쉬 하이라는 뜻입니다. ‘네페쉬 하이는 하느님께서 진리로 만들기 위하여, 혹은 멸망시키시기 위하여 육신의 숨을 주어 살려두신 존재들을 말합니다.

그들이 라마르 아쉐르 솨라쯔(우글거리며 기는)’로 수식이 되고 있지요 성경에서 우글거리고 기는 존재는 전부 부정한 존재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위로 똑바로 세우면(, 이스테미), 그게 바로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네페쉬 하이 라마르 아쉐르 솨라쯔는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한 죄인인 상태의 인간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날개 있는 새는 당연히 날개 부조를 한 옛 성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왜 만드셨다고 하지요 개정성경에는 종류대로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그 레 민이라는 단어는 분배를 위해, 분류를 위해라고 번역을 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그러한 아래의 것들은 죄를 제시하여 양과 염소로 분류해 내기 위한 장치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22절이 바라크()’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복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면(파라 라바 마레) 그게 복이라는 것입니다. 생육이라고 번역이 된 파라라는 단어는 열매를 맺다라는 뜻입니다. 어떤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지요

(루가6:43~45) 43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44 어떤 나무든지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 도 딸 수 없다. 45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 놓고 악한 사람은 그 악한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 놓는다.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성도가 맺어야 하는 열매가 뭡니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섯째 날에 하느님께서 생육하라(열매를 맺으라)’고 하신 것은 무슨 말입니까 우글우글 기는 네페쉬 하이들아 바다의 큰 물고기(타닌)와 날개 있는 새로 진리를 깨달아 진리를 말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번성이라고 번역이 된 라바라는 단어는 풍성하다, 성숙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인데 그 단어를 헬라어로 바꾸면 페릿소스가 됩니다. 그 단어가 쓰인 곳을 한 번 보세요.

(요한10:10) 10 도둑은 다만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합니다. 여기에서 풍성히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페릿소스입니다. 그 단어는 풍성하다라는 뜻으로 쓰이기보다는 차원이 다른이라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는 단어인 것입니다. ‘너희들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어절에서 낫다라고 번역이 된 그 단어가 페릿슈오입니다. 차원이 다른 의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번성하라는 말씀은 큰 물고기와 날개 있는 새를 차원이 다른 그것으로 깨달아 풍성하고 성숙한 존재가 되라는 그런 의미가 숨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새 언약을 주시면서 그들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하시지요

(에제36:11) 11 사람과 짐승이 새끼를 많이 낳아 너희 위에 사람과 짐승이 우글거리게 하리라. 너희는 전처럼 사람이 불어, 예전보다 더 살기 좋은 고장이 되리라. 그제야 너희는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사람과 짐승이 아담베헤마입니다. 베헤마라는 단어는 자바라는 단어와 함께 성전에서 드려지는 희생제사의 제물을 가리키는 그런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베헤마는 율법의 제물을 가리킬 때에는 한 번도 쓰인 적이 없고 하느님이 준비하시는 진짜 제물을 상징적으로 가리킬 때에만 쓰인 아주 중요한 단어입니다. 그 단어의 의미가 성전을 진리로 말한다.입니다.

아무튼 이 말씀은 제물과 아담을 생육시키고 번성시켜서 제물은 진리, 아담은 하 아담으로 만드시겠다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말씀을 하실 때 그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하시면서 그 제물을 베헤마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창세7:1~3) 1 야훼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식구들을 다 데리고 배에 들어 가거라. 내가 보기에 지금 이 세상에서 올바른 사람은 너 밖에 없다. 2 깨끗한 짐승은 종류를 따라 암컷과 수컷으로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암컷과 수컷으로 두 쌍씩, 3 공중의 새도 암컷과 수컷으로 일곱 쌍씩 배에 데리고 들어 가 온 땅 위에서 각종 동물의 씨가 마르지 않도록 하여라  

2절의 정결한 짐승이 베헤마입니다. 정결한 것은 일곱으로 취하라고 하지요 부정한 것은요 둘씩 취하랍니다. 그 단어가 쉐나임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둘째 날에서 배운 한 쌍,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는 열둘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부정한 것은 아래와 위, 좌와 우를 한 쌍, 한 짝으로 만들어 취해야 한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칼네케바라는 한 사람,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중의 새(오프 솨마임)도 당연히 일곱으로 취해야지요.

제물도 성전도 전부 일곱이라는 진리의 언약으로 취해야 의인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들이 씨(제라, 진리)를 온 지면(, 세상, 성전)에 흘릴 수 있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라바(번성)’인 것입니다. 땅의 모형들을 다른 차원의 것으로 받아 그것으로 풍성하게 흘려주는 것, 그것이 바로 라바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마레(완성하다, 온전한 것으로 가지다)’라고 합니다. 그것을 개정 성경이 충만이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창세기 122절이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로 끝이 나지요 그 땅 안에서 (오프, 성전)는 다른 차원으로(라바) 존재하는 것이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다섯(하미쉬)은 하느님께서 아래의 물속으로 던져주신 그 모형들을 가지고 차원이 다른 하늘의 것으로 가지라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미쉬라는 단어를 파자하면 진리를 죄로 주어 분석한 것으로 주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다섯입니다. 그렇게 아래의 물속의 것들로 밤과 낮을 바달하여 밤과 낮의 구분을 없애버리는 그런 존재들을 (코카브)’라 한다고 했지요 코카브가 어디에 등장합니까의 날에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다섯은 반드시 으로 이웃에게 전해져야 하겠지요 그들이 바로 진짜 아브라함의 후손들인 하늘의 별들(코카브)이니까요. 그러나 그들이 넷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아래의 다섯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성경에 죄를 갚을 때 다섯으로 갚으라는 말이 그렇게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래의 다섯을 세상(호코스모스)’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예수께서 그 말씀, 그 세상으로 이 땅에 오셨잖아요 그렇다면 이제 요한복음 316절이 제대로 이해가 되어져야 하겠지요

 

(요한3:14~21) 14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16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17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8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20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21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주님이 이 세상에 뱀으로 오셨다는 것이지요 (나하쉬, 말이 없음)은 하느님의 말씀이 율법으로 전해졌을 때 왜곡되는 하느님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이 땅에 세상 죄를 짊어지러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세상 죄를 짊어지기 위해 세상으로 와야 하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그리고는 그 놋 뱀, 즉 세상으로서의 그 분을 언약(십자가, 스타우로스)으로 이해를 하는 자(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16절의 세상은 누구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이셔야 해요. 그래서 그 구절을 원문에 맞게 다시 해석을 하면 이처럼(14, 15절의 내용처럼) 하느님이 세상으로 사랑하시기 위해 하나만 가진 아들을 우리에게 넘겨주셨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세상으로 오신 주님을 통해 진리를 가지면 영생을 가진 것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17절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하느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으로 보내신 것은 그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세상을 진리로 밝히 보여주고 그 세상을 세상으로 보낸 아들처럼 구원해 내기 위함이다.’

그런데 세상은 어때요 세상으로 오신 주님을 진리의 빛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세상은 빛(진리)을 사랑할 힘이 없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들은 어두움(나타난 형상)만을 사랑해요. 그래서 아래 세상의 것들을 진리로 둔갑시켜 그대로 행해버리면서 인간들의 보편적 자존심만을 챙겨 가집니다.

 

그런데 20절에 아담들이 빛으로 나오지 않는 이유를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랍니다. 인간들의 율법적 행위는 아담들의 세상 속에서는 훌륭하고 멋진 것일지 모르지만 진리의 시각으로 보면 그 실체가 너무 추악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율법의 세상에서 진리의 세계로 넘어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악한 행위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나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나온다고 하지요 그들이 빛으로 나오면 어떤 일이 성취됩니까 그들의 모든 행위가 하느님 안에서 행한 것임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들에게 있어서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등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성경에 동원하신 것들이잖아요 진리를 알게 된 이들에게 있어서 그러한 모든 것들은 그냥 합력되어 선이 된 재료들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한 이들이 무슨 천사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사망이나 생명 같은 것이 의미가 있는 말이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러한 개념들에 묶여서 오히려 그것들을 추구하느라 진짜 진리를 놓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궁금하시죠  다음에 계속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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