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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의 고리에서 해방된 작은 여인의 영웅적인 삶을 보라!!(마르 12,41-44)

125042 김은실 [dd2560] 스크랩 2018-11-11

 

복음 묵상

재물의 고리에서 해방된 작은 여인의 영웅적인 삶을 보라!!

 

예수님께서 헌금함 맞은쪽에 앉으시어, 사람들이 헌금함에 돈을 넣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많은 부자들이 큰 돈을 넣었다. 그런데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와서 렙톤 두 닢을 넣었다. 그것은 콰드란스 한 닢인 셈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다 넣었기 때문이다.” 

(마르 12,41-44)

 

성전에서 사람들이 헌금함에 헌금(봉헌금)을 넣고 있습니다. 마침 그곳에는 예수님도 계시면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계십니다. 이 현장에는 많은 돈을 넣는 부자들의 모습들이, 극히 작은 돈을 넣는 가난한 과부의 모습이 그리고 제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사람들 중에 특별히 가난한 과부에게 당신의 눈길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길이 모아지는 정도가 아니라 당신의 온몸이 그녀한테 사로잡혔다고 보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행위 하나하나에 관심을 집중하며 자세히 살피십니다. 그래서 과부가 단 몇 푼의 돈을 헌금하고 있는지도 놓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헌금함에 넣은 액수, 단 돈 렙톤 두 닢에 당신의 눈길을 떼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한없는 깊은 눈길은 렙톤 두 닢의 액수를 초월할 뿐 아니라 엄청난 의미가 동시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험한 삶을 살고 있는 극히 하찮은 과부에 대한 연민, 헌금을 대하는 태도, 재물의 고리에서 해방된 여인의 영웅적인 삶, 과부의 자세가 제자의 삶이기를 바라시는 마음 ... 등등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 여자의 인격적인 예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의 소유물로 취급했다고 보면 무방합니다. 여자는 남자가 있어서 그나마 삶이 지켜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혼 전에는 아버지 손에 의해, 결혼 후에는 남편에 의해서 삶이 지켜졌습니다. 그런대 이렇게 기댈 남자가 없는 경우는 비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오늘 과부가 곧 이 처지에 놓인 것입니다. 여기에다 당시는 오늘날과 달리 완전한 가부장권 사회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 비참함은 몇 배로 폭등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은 더욱 발 디딜 곳이 없으므로 삶을 유지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부하면 가난 그 자체를 떠올려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대표적인 빈자를 뽑으라면 고아, 과부, 이민자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보호벽이 없다는 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이런 약자는 뭇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는 무시의 대상, 학대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약자 보호법이 발전된 계약법전에서는 이들에 대한 보호를 강력하게 말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너희는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다. 너희는 어떤 과부나 고아도 억눌러서는 안 된다. 너희가 그들을 억눌러 그들이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그 부르짖음을 들어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분노를 터뜨려 칼로 너희를 죽이겠다. 그러면 너희 아내들은 과부가 되고, 너희 아들들은 고아가 될 것이다”(탈출 22,20-23).

 

이런 사회에서 더 더욱 과부는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습니다. 아니 사람들은 이런 자를 보지 않으려하고 이들의 소리에 귀를 막습니다. 무시의 대상인 이들을 학대나 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선 힘 있고 화려한 사람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말하지 않아도 이들 곁에는 뭇 사람들이 줄을 서며 모여듭니다.

 

이런 세태 속에서 예수님의 행위는 너무 놀랍습니다. 큰돈을 넣는 부자와 비교할 수조차 없는 허름하고 힘없는 이 과부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며 눈길을 떼지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이 과부는 예수님의 연민에 찬 눈길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자기의 작은 돈이 부끄러워 남의 눈에 띠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무척이나 위축된 상태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초라함 속에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는 데에 온 정신이 쏠려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은 이 약자의 안타까운 마음을 이미 짚고 계시며 풍성하게 읽어주고 계십니다. 이는 당신이 이러한 약자, 가난한 자의 위치에 놓여 있기에 더욱 피부에 와 닿는 이해일 것입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마르 12,43).

 

오늘 말씀에서는 화폐 단위가 복잡하게 두 개나 등장합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지만 희랍 문화 속에 있기 때문에 그리스 화폐와 로마 화폐를 같이 통용했기 때문입니다. 렙톤은 그리스 최소 화폐인 동전이고 콰드란스는 로마 동전으로서 최소 화폐입니다. 복음 말씀에서처럼 로마 돈 한 콰드란스는 렙톤 두 닢의 가치를 지녔다고 합니다. 그럼 과부가 헌금한 액수 한 콰드란스의 가치를 가늠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당시 노동자가 온 종일 일하면 로마 은전으로 한 데나리온을 받습니다. 이는 한 가족이 하루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액수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데나리온은 64 콰드란스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과부의 돈이 정말 작은 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궁핍한 가난뱅이인지 상상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나마도 한 콰드란스인 이 돈이 과부가 지닌 생활비 전체에 해당한다는 것까지를 예수님은 읽어내십니다. 과부는 당장 먹거리를 해결하는 데에도 부족한 이 돈을 헌금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인의 이 작은 돈이 가장 많은 돈을 헌금한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이 가치 평가는 세간의 계산과는 도통 맞지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즉, 새로운 질서 안에서 발휘되는 액수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해도 재물에 사로잡히지 않고 하느님한테 의지함을 크게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역사적으로 친히 발설하신 말씀들을 가난한 과부가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마태 6,20).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가난한 과부의 자세는 재물에 눈이 멀어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우리 범인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입니다. 이 길은 예수님께서 재물을 대하는 과감한 처신, 용단과 같은 노선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물을 날카롭게 대하시며 평소에 제자들에게도 엄격하게 대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루카 12,18-21).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3-4).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이르셨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지 않도록 조심할 일입니다. 예를 들면, 내일 굶는 한이 있더라도 하느님께 전 재산을 믿음으로, 용감하게 바치면 더 큰 축복으로 채워준다는 식의 이해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와 전혀 맞지 않는 이해로써 금물입니다. 그리고 이는 아전인수 격으로 모든 재산을 헌납받기 위한 해석, 그 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마디로 이 복음 말씀은 교회에 헌금을 많이 내게 하는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무소유의 삶, 가난의 길을 요구했습니다. 과부는 그렇게 가난해도 재물을 넘어 하느님을 볼 수 있었던 여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귀감이 됩니다. 사실 부자청년처럼 재물이 풍부하게 있어도 재물에 대한 탐욕이 하느님을 앞지릅니다. 반대로 가진 것 없이 가난해도 재물에 대한 탐욕은 우리 인간을 사로잡아 하느님을 가리게 만듭니다. 너나없이 재물에서 자유스럽지 못함은 매양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가난한 예수님을 따른다고 해서 재물욕에서 멀어졌다고 안심할 수 없습니다. 이런 약함 속에 있는 인간들 가운데 가난한 과부는 재물 앞에서 매우 자유로운 자이며 재물을 대하는 용기 또한 놀랍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이야기는 우리 제자들에게 딱히 들어맞는 모범 사례, 예수님이 찾는 제자상입니다. 

 

일상적으로 우리들이 생각하는 헌금(=봉헌금) 이해와 예수님이 보시는 헌금과는 큰 차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난한 과부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돈의 액수 자체에 비중을 전혀 두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이 바치면 많이 주신다는 미신적인 의미는 더 더욱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희생의 가치, 유무도 강조하지 않습니다. 재물을 대하는 자세와 이를 대하는 결단에 중점을 두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부르시는 하느님, 곧 야훼 하느님은 부와 권력을 지켜주시며 위용을 드러내는 지배자의 신이 결코 아닙니다. 이와는 정 반대로 약자와 함께 계시면서 이들을 지켜주시며 돌보시는 하느님, 약자를 해방시키는 하느님으로서 계십니다. 재물과 권력과 명예는 강한 연관 속에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우리는 이 하느님을 바로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습니다. 즉, 올바른 예배생활이 가능해집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하느님 앞에 이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헌금도 역시 이 자세를 통해 하느님을 뵙고 만나는 예배 행위입니다.

 

헌금은 내가 번 재물이지만 그중 일부(전체를 대변함.)를 하느님 앞에 놓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재물을 보고 대하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예수공부 카페 메뉴에서 서공석 신부, <예수-하느님-교회, 이스라엘 신앙전승 4> 동영상 강의와 주일강론 2014.12.28. 참조.) 이는 예수님께서 과부헌금을 칭송하는 의미를 제대로 반영시킨 것이며 과녁을 맞추듯 명중시킨 설명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 가난한 과부를 보시는 당신의 이 깊은 눈길을 지니도록 저희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며 초대를 해주셨으니 감사를 드립니다. 당신의 마음,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자가 되고 싶습니다. 저희 제자들이 계속 당신의 말씀을 새기며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용기를 주소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 말씀 안에는 예수님의 신선한 가르침들이 살아 움직이며 꿈틀대고 있음을 봅니다. 이제 더욱 새롭게 보입니다.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함이, 아름다움이 이 안에서 큰 물결로 출렁이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 당신이 기쁜 소식, 복음인지를 드디어 알겠습니다. 그리고 매우 이기적이고 물신에 사로잡히며 협량인 저에게 그저 새로운 감동, 충격으로 와 닿습니다. 속화된 세상 한 복판에서 이런 하늘 길을 열어주신 예수님 그리고 그 하느님, 곧 우리의 하느님께 찬미를 드립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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