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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미사 (백) 2024년 4월 16일 (화)부활 제3주간 화요일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시다.

가톨릭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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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130451 장병찬 [jesus_maria] 스크랩 2019-06-18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주 우리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지극히 거룩하시고 만군의 왕이시며 살아 계신 자비의 하느님, 오늘도 저에게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며 주님의 구속사업의 도구가 되게하시고 평온한 죽음을 맞게하소서.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여!

*~*~*~*~*~*~*~*~*~*~*~*~*~*~*~*~*~*~*~*~*~*

[ 온 세상과 모든 가정에 주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기도드립니다 ] 

[ 긴 고해를 하시는 분들은 명동성당의 상설고해소를 방문하세요 ]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의 글 중에서)

딸아이가 잠들기 전에 가족을 대표해서 기도하겠다고 합니다. 그래.. 어떻게 기도하는지 궁금하기도하고..  32개월 된 딸아이가 어디에서 주기도문을 배웠는지 주기도문을 외우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또박또박 외워가는 것이 참 대견하였다. 약간의 스릴 느껴지기도 하면서... 
그런데 조마조마하던 것이 결국!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문구가 비슷해서 그랬는지 녀석이 계속 이 문구를 반복하고 넘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악에서라고 넘어가더니 어렵게 주기도문을 마쳤습니다.

아이의 기도문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는데 반복하고 반복할 때 마다 저 마음에 심각한 찔림이 있었습니다.  잘못한 이를 용서해 준 것처럼 저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과연 나는 그렇게 기도할 자격이 있는 자인가! 정말 나는 용서 받는 자로서 그 은혜에 감격하여 용서하며 살아가는 사람인가! 너무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왜 그들은 나를 알지도 못하는데 난 그들을 향해 분노를 가지고 있는지!

아니 가까이에 있는 나의 가족 친구 사람들에게...   늘 암송하며 기도하는 문구이지만 오늘 그 문구가 내 가슴을 흔들며 찾아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당신의 이름이 이 불의하고 더러운 저의 인생을 통하여도 거룩히 빛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당신의 나라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랍니다. 
저의 뜻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저가 살아가는 삶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오늘 저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것으로 감사하게 하소서. 하루 먹을 것 그 이상이 아니라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케 하옵소서. 도리어 그 이상의 것은 나눌 수 있는 마음을 주소서.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핍박과 조롱과 공격을 한다하여도 주님이 저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듯이 사랑할 힘을 주십시오. 용서하며 사랑하며 섬기며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과 떨어져서 살아 갈 수 없사오니 거룩함에 대한 열정을 주시고 당신과 늘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죄에서 참 자유를 허락해 주십시오.
악을 즐기거나 취하며 살지 않고 오직 의와 진리를 위해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옵소서.
당신의 나라를 위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하시고 모든 영광을 아버지께 돌려 드리며 살게 하소서....

날마다 새롭게, 주님이 기도하라고 하신 데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선택받은 영혼들의 모반

('성심의 메시지' 중에서, 가톨릭출판사)



사랑하는 영혼들아!
나는 너희에게 영혼들이 어떤 와중에 나를 모욕하고, 나에게 등을 돌리게 되는지를 말해 주겠다. 영혼들이 내 뜻을 거역하고, 나에게 들이대는 무기는 다름아닌 바로 죄악이다. 큰 죄에 국한해서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두어라.

나로부터 선택받은 영혼들이 흔히 저지르는 사소한 많은 잘못, 고치지 않고 있는 버릇, 남에게 혐오감을 주면서도 자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괴퍅한 성벽(性癖), 애덕의 결핍 등도 내 앞에 들이대는 무기와 같은 것이며, 결국에 가서는 이런 것들이 도화선이 되어 나를 팔아 넘기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일반 보통 영혼들이 나를 모독하고 배은 망덕할 때에도 나의 마음이 이처럼 고통을 느끼는데, 하물며 내가 그토록 사랑하여 특별히 선택한 영혼들이 나에게 몹쓸 짓을 할 때, 내 심정이 어떠했겠느냐? 그러나 자신의 잘못 뿐만 아니라 다른 영혼들의 잘못을 대신 보속하며, 나를 위로해 주는 기특한 영혼도 있어 다행스럽구나.

선택받은 영혼들아!
너희들이 바로 나의 안식처이다. 내 즐거움의 화원이다. 나는 다른 영혼들 보다 너희들에게서 더 따뜻한 사랑과 애정을 받고 싶다. 너희는 나의 아픈 상처에 도포(塗布)될 연고(軟膏)가 되어야 하며,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더러워진 나의 얼굴을 깨끗이 씻어주는 일도 너희가 해야 한다
.

무지몽매하여 나를 폭행하고 오랏줄로 묶는 영혼들에게 광명을 주고 싶어하는 나를 도와주는 것이 너희들이 할 일이다. 너희는 절대로 나를 혼자 외롭게 두지 말아라. 어서 깊은 잠에서 깨어나 나에게로 달려오너라. 나를 잡아 혹독히 고문한 후, 십자가에 매달려고 하는 자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병사들이 나를 체포하러 왔을 때, 나는 그들에게 "나다. 내가 여기 있다."라고 말해 주었다.  너희 영혼들이 유혹에 빠져 나를 멀리하려 할 때도 나는 이와 똑같은 말을 한다.

"내가 여기 있다. 어딜 가려 하느냐?"

아직 시간적 여유는 있다. 너희들만 원한다면 나는 모두다 용서하겠다. 너희는 너희 죄악으로 나를 동여맬 수 없다. 도리어 내가 너희를 나의 사랑으로 꽁꽁 묶어 놓겠다.

어서 나에게로 오너라. 나는 여전히 너희를 사랑하고 있다. 나약한 너희를 동정하고 너희를 내 품에 감싸 안아주고 싶다. 아!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도 불구하고, 너희는 나를 결박하여 끌고가 죽이려는 자들에게 나를 팔아 넘기려 하느냐?

내 자신을 제물로 바치려는 제사시간이 임박하고 있었다. 나는 병사들이 나를 잡아끌고 갈 때, 순한 양처럼 그들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가야파의 집으로 호송되어, 거기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욕과 조롱을 당했으며, 심지어는 그 집 하인한테 난생 처음 뺨을 맞았다!

사랑하는 영혼들아! 
잘 알아두어라. 처음으로 뺨을 맞을 때, 나는 하느님께서 내리신 은총을 받고 살아온 많은 영혼들의 첫 번째 죄악을 보았다.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한번 죄의 길에 발을 잘못 디딘 후, 헤어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재앙으로 떨어지고 말았는가! 죄 중에 죽었을 때에, 그들에게 내려질 영원한 죽음과 형벌....  참으로 안타깝고 답답하구나.

내일 계속하겠다.
나를 기다리는 동안, 온 종일 기도하며 보내어라. 많은 영혼들이 올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혹은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해달라고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드려라.


('성심의 메시지' 중에서, 가톨릭출판사)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예수님, 나는 당신을 흠숭(欽崇)하나이다!



"나는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마태오 28,20)

진정으로 사랑하고 만유 위에 사랑하는 것은 흠숭의 시작이 된다. 지고의 사랑과 흠숭은 별개의 것이지만, 두 가지가 함께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  그래서 흠숭하는 사랑이 되며 사랑하는 흠숭이 된다. 감실 안의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에 의해서만 흠숭되시며, 그분을 흠숭하는 이들에 의해서 깊이 사랑되신다.

사랑의 예술가들이었으며 전문가들이었던 성인들은 성체 성사에 계신 예수님을 충실하고도 열절히 흠숭하였다.  성체께 대한 흠숭이야말로 우리가 천국에서 그분께 영원히 드릴 흠숭과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항상 간주되어 왔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현실에 대한 직관(直觀)이 아직은 베일에 가려져 있으나, 신앙을 통하여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성체 성사의 흠숭에 대하여 성인들은 크나큰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흠숭은 자주 수 시간씩 계속되었으며, 어떤 때에는 하루 종일,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루카 10,39) 그분과 사랑으로 일치되어 그분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던 베타니아의 마리아처럼, 그들은 순결하고도 감미로운 흠숭의 사랑에 자기들의 마음을 쏟았다.

성 베드루 쥴리안 에이마르의 열정에 찬 절규를 들어보자.  
"오 주님, 저로 하여금 당신 성체의 옥좌 밑에 놓을 발판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챨즈 드 푸꼬 수사가 감실 앞에서 쓴 글을 읽어보자.  
"오 하느님 이 얼마나 엄청난 기쁨입니까!  열 다섯 시간 이상 다른 아무 것에 대해서도 신경쓰지 않고 오직 당신만을 바라보며 당신께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얼마나 감미로운 기쁨입니까........!"

모든 성인들은 성체께 대한 흠숭으로 불타는 이들이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성 보나벤뚜라와 같은 위대한 교회 박사들로부터, 성 비오 5세와 성 비오 10세와 같은 교황들, 아르스의 거룩한 신부와 성 베드루 쥴리안 에이마르와 같은 신부들, 성녀 리타, 성 파스칼 바일론, 성녀 벨라데따 수비루, 성 제랄도, 성 도미니끄 사비오, 성녀 젬마 갈가니... 와 같은 겸허한 영혼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인들은 성체께 대한 열절한 흠숭가들이었다.  이 간택된 영혼들의 사랑은 진정했으며, 그들은 감실 안의 예수님 앞에서 보내는 밤과 낮의 시간들을 헤아리지 않았다.

성 프란치스꼬 아씨시는 제대 앞에서, 때로는 밤을 새우면서, 그 태도가 얼마나 신심깊고 겸손한지 그를 보는 이들이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40시간 신심의 걸인"이라고 불리웠던 성 분도 라브르는 성체가 엄숙하게 현시되어 있는 성당들 안에서 여러 날을 보내었다.  이 성인이 로마에서 40시간의 신심을 하고 있는 성당들을 찾아다니며 예수님 앞에서 늘 무릎을 꿇고 흠숭의 기도에 몰두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8시간 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으며, 곤충들이 기어올라와 온 몸을 물어대어도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한 번은 성 알로이시오 공사가의 사후에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어떤 자세로 그릴 것인가에 대하여 의논들을 하였다.  결국은 성인이 제대 앞에서 흠숭하고 있는 자세로 그리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성체께 대한 흠숭이 이 성인의 성성을 가장 뚜렷이 나타내는 특징이기 때문이었다.

예수 성심께 특별히 가까웠던 성녀 마가렡 마리아 알라콕은 어느 성 목요일에 1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엎드려 흠숭하였다. 성녀 프란체스 사비에르 카브리니는 예수 성심 축일에 12시간 동안 계속해서 성체께의 흠숭에 몰두했는데, 성녀가 어찌나 성체의 주님께 매혹되어 있었던지, 한 수녀가 성녀에게 제대 주위의 꽃들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었을 때, "저는 꽃들을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저는 단 하나의 꽃, 예수님만을 보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성 프란시스 드 살레즈가 밀라노의 대성당을 방문한 후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 "주교님, 많은 대리석 조각물들을 보셨지요?  매우 훌륭하지 않았습니까?"  거룩한 주교께서 대답하였다. "무슨 말을 듣고 싶으신 겁니까?  저는 감실 안에 계신 예수님께 정신이 팔려서 그 모든 예술적인 미를 감상하지 못하였습니다."  유명한 성당들을 마치 박물관인 것처럼 생각없이 방문하는 우리들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


정신의 집중

성체를 흠숭할 때 정신을 집중해야 함에 대한 좋은 예가 있다.  
모데나 대학교의 교수였던 복자 콘타르도 페리니가 하루는 주님을 방문하기 위하여 성당에 들어갔다.  그리고 흠숭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의 두 눈이 감실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누가 와서 그의 망토를 벗겨갔는데도 이를 알지 못하였다.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뽀스텔은 성체 조배 때 어찌나 경건하고 정신이 집중되어 있었던지 벼락이 떨어져도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들 말하였다.  
그런데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가 한 번은 성체 조배 중에 옆에 지나가는 사람을 무심코 쳐다보았다.  이 순간적인 분심에 대하여 성녀가 얼마나 가슴아프게 생각했던지 성녀는 오랫 동안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외치면서 울었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성당 안에서의 우리의 태도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 주님께서 엄숙하게 현시되어 있을 때에도 우리는 쉽사리 좌우로 돌아보며 아주 작은 것들에 의해서도 주의가 흐트러진다.  더 나쁜 것은 그렇게 하고도 슬프게 생각하거나 뉘우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 성인들은 얼마나 섬세한 사랑을 가졌던가!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성체 성사의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본질을 대하고 있는 천국의 복된 이들처럼 해야 합니다."  성인들은 성당 안에서 바로 그렇게 했다.  아르스의 거룩한 신부는 성체 성사 안의 예수님을 어찌나 열절하고 집중하여 흠숭했던지 사람들은 그가 예수님을 두 눈으로 직접 뵙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사람들은 성 원선시오 드 폴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감실 안의 예수님을 보고 계십니다."  
또 성체 흠숭의 출중한 사도였던 성 베드루 쥴리안 에이마르에 대해서도 같은 말들을 했다.  삐에트렐치나의 비오 신부는 성 에이마르 신부를 본받으려고 했다.  비오 신부는 40년 동안 성 에이마르 신부의 작은 상본을 그의 책상 위에 모셔놓고 있었다.


죽은 후에까지도

주님께서는 어떤 성인들에게 죽은 후에도 성체 성사를 흠숭하는 행위를 할 수 있게 해주셨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볼로냐의 성녀 카타리나가 임종한 후 며칠 동안 그의 몸이 제대 앞에 놓여져 있었다.  그런데 성녀의 시신이 일어나 흠숭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취하였다.  성 파스칼 바일론의 장례 미사 때 성체 거양 및 성혈 거양때 성체 성사께 대한 흠숭을 표시하기 위하여 그의 눈이 두 번 떠졌다.  복자 마테오 기르겐티의 장례 미사 때 그의 두 손이 성체 성사를 향하여 합장되었다.  라벨로에서는 복자 보나벤뚜라 데 포뗀자의 시신이 제대 옆을 지나갈 때 감실의 예수님을 향하여 경건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아가 8,6), 그리고 "이 빵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요한 6,59)라는 말씀들은 참으로 진실이다.  성체는 우리의 사랑이신 예수님이시다.  성체는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님이시다.  
성체를 흠숭하는 것은 우리에게 생명력을 주며 우리가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님과 일치되도록 해주는 천상적인 사랑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위하여 항상 살아계신 분이시다" (히브리 7,25).

우리가 성체께 흠숭드릴 때에는 형제들의 구원을 위하여 성부께 간구하시는, 면병 형상 안의 예수님과 일치됨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가장 고귀한 애덕의 행위가 된다.  즉 그들이 천국을 얻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야먄 비로소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성체께 대한 흠숭으로 인하여 지옥을 면하고 구원되었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파티마의 세 목동들에게 나타난 천사가 아이들에게 보속을 위한 아름다움 성체 기도를 직접 가르쳐주었다. 우리도 이 기도를 배우자.

오 지극히 거룩하신 성삼위, 성부, 성자, 성령이여, 당신을 깊이 흠숭하나이다.  그리고 당신께 이 세상의 모든 감실들 안에 계시는, 모욕당하시고, 독성당하시고, 무시당하시는, 가장 고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와 영혼과 신성을 바쳐드리나이다.  그리고 예수 성심과 티없으신 마리아 성심의 무한한 공로를 통하여 불쌍한 죄인들의 회개를 간구하나이다.

성체께 대한 흠숭은 사랑의 극치이며 영혼들을 구하기 위한 사도직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효과를 지닌 신심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마리아의 위대한 사도였던 성 막시밀리언 마리아 콜베 신부는 그의 수도원들을 건설할 때 수사들의 숙소를 짓기 전에 성당을 먼저 지었다. 그리하여 항구적인 성체 현시와 흠숭을 즉시 시작하였다.  
한 번은 폴랜드에 있는 그의 "티없으신 이의 도시"를 찾아온 방문객을 안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성체 조배 성당"에 들어갔다.  신부는 손님에게 성체 성사를 가리키면서 "우리의 모든 삶이 여기에 의존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더 좋은 몫"

가르가노의 오상 받은 수사, 삐에트렐치나의 비오 신부는 사방에서 몰려오는 신자들에게 오랜 시간 동안 고해를 준 후에 남은 시간은 밤이든 낮이든 거의 전부 감실 앞에서 성모님과 함께 수백 단의 묵주를 드리며 성체를 흠숭하는 데에 보냈다.
한 번은 만프레도니아의 주교였던 체사라노 몬씨뇰이 비오 신부의 수도원에 와서 8일 간의 피정을 하였다.  매일 밤 주교는 다른 시간에 일어나서 성당으로 갔는데, 그 때마다 비오 신부가 성체 조배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가르가노의 이 위대한 사도는 전 세계에 걸쳐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동시에 한 곳 이상의 곳에 있을 때도 있었다.  그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있었으며 그의 손에는 늘 묵주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영적 제자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하였다.  "나를 찾으려면 감실 가까이 와서 보라."

우리 시대의 또 한 분의 위대한 사도인 제임스 알베리오네 신부는 그의 출판물을 통한 사도직 전체를 성체께 대한 흠숭의 토대 위에 세웠다. 그리하여 그의 회에 속한 이들에게는 밤낮 돌아가며 엄숙하게 현시된 우리 주님을 흠숭하는 성소(聖召)가 주어졌다.

성체께 대한 흠숭은 참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더 좋은 몫"(루카 10,42)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선택했던 "단 한 가지 필요한 것"(루까 10,42), 즉 겸손하고 사랑에 찬 흠숭을 간과하고 "많은 일로 걱정하며 부산을 떠는"(루카 10,41) 마르따를 책하셨다.

그러면 성체를 흠숭함에 있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사랑와 열심은 어떤 것일까?  예수님께 의해서 "모든 것이 존속(存續)"(콜로새 1,17)되고 있다면, 그분께 가서 그분과 함께 있고 그분과 일치하는 것은 우리와 온 우주를 지탱하고 계시는 그분을 발견하고 얻고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만이 모든 것이시다.  다른 모든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리지외의 성녀 테레사는 말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신 분을 얻기 위하여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을 버리며,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을 추구하기보다 모든 것인 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전부를 써버리는 것이 우리에게 참다운 부유를 주며 가장 높은 지혜를 주는 것이 아닐까?
바로 이것이 성 베드루 쥴리언 에이마르가 강조했던 점이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 성사 앞에서 흠숭하며 보낸 한 시간이 많은 성당들을 참배하며 많은 성인들의 무덤을 찾아 공경하는 것보다 더 많은 유익을 가져댜 줄 것이다."  
이것이 또한 삐에트렐치나의 비오 신부가 생각했던 바이다. 
"천년 동안 인간적인 영광을 누리는 것은 성체 성사의 예수님과 감미롭게 대화하며 보낸 한 시간보다 가치없는 것이다."

성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감실을 항상 호위하며 주님께 흠숭드리는 천사들을 부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성체 성사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






하느님이 쓰신 인물의 공통점



1. 자기 존재의 전부를 하느님께 바친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스러기 마음을 가진 부스러기 인생의 모습으로 하느님께 쓰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2. 상대적 가치보다 절대적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절대신앙, 절대사랑, 절대헌신 이하의 것도 좋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3. 겸손한 마음과 겸손한 신앙고백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우리는 항상 "부족합니다!"를 날마다 고백하며 살아야 합니다.

4. 하느님을 의뢰하는 신앙의 배수진을 친 사람들이었습니다.
즉 "나는 하느님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다"는 일념으로 사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5. 잘못했을 때에는 진지한 참회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잘못했을 때 참회하는 자세는 일상생활에서의 성실한 자세와 책임적 자세를 반증합니다.

6. 정직하고 진실한 사랑의 참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정직하고 진실한 사랑이란 행동으로 보여주고 생활로 나타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한규님)





유다에게 팔림을 당하다

('성심의 메시지' 중에서, 가톨릭출판사)



나의 아버님께서 보내신 천사로부터 위로 받은 후,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가 앞장 서 오는 것을 보았다. 그 뒤에는 나를 잡아갈 악당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체포하려고 칼과 몽둥이를 들고 몰려왔다.
나는 일어나 그들에게로 가서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었다. 그 때 유다가 다가와 나를 껴안고 입맞추었다. "오! 유다야, 왜 이러느냐? 왜 나에게 입맞춤을 하느냐?"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영혼들에게 "왜 이러느냐?  왜 나에게 입맞춤하여 잡아 넘기느냐?" 라고 내가 하문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메어진다.

나에게 사랑받은 영혼들아!
너희들도 나를 마중 나와 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내 앞을 떠나면 악당들에게 나를 잡아 넘기는 일을 밥 먹듯이 해댈 것이다. 나를 모욕하는 언행은 내가 악당들에게 끌려갈 때, 그들이 나에게 던진 돌멩이와 같은 것이다.

아침마다 나의 성체를 먹고 돌아서면 세상과 타협하여 내 얼굴에 먹칠하는 짓을 하는 것은 유다가 한 것과 다를 바 없다. 온갖 더러운 수단을 동원하여 재물을 모으고, 자기 출세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면, 너희들의 손은 바로 나를 잡아 넘긴 유다의 손이 된다. 내가 내려주는 순결한 은총을 더럽히는 손이 되는 것이다.

유다의 악표양을 쫒아 나에게 입맞추어 나를 잡아가라고 신호를 보내는 일을 너희들도 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유다가 데리고 온 악당들과 마찬가지로 너희도 직접 나를 묶고, 매질하고 나에게 돌팔매질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짓을 하라고 시키기까지 한다. 어떻게 해서 너희가 나에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나를 열열히 사랑하고 있다고 나에게 자랑스럽게 고백하던 너희가 나를 잡아 넘기다니.... 너희가 지니고 있던 애덕과 열정이 너희들의 악행을 일시적으로 가려줄 포장지에 불과했단 말이냐?

사랑하는 영혼들아!
왜 너희들은 자신들의 영혼이 사사로운 정에 끌려가고 있는 것을 방치하고 있느냐? 나는 너희 안에 있는 사욕(邪慾)과 편향(偏向)된 정을 없앨 수도 없고, 또 그럴 의사도 없다. 내 말뜻은 싸워서 이기라는 것이다.
사욕과 편향된 인간의 정에 빠지는 것은, 유다가 나를 30 데나리온에 팔아 넘긴 것과 같다. 그 30 데나리온은 바로 자기 멸망을 자초한 사욕과 일시적 쾌락과 같은 것이다. 얼마나 수 많은 영혼들이 순간의 쾌락 때문에 싸구려로 나를 팔았으며, 앞으로도 계속 팔아 넘길 것인지.....

아! 가련한 영혼들아!
도대체 너희들은 누구를 찾고, 무엇을 추구하고 있단 말이냐? 내가 여기 있질 않느냐? 너희가 사랑한다고 나에게 영원한 다짐을 했고, 나는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고 약속했지 않느냐?

"항상 깨어 기도하여라."는 나의 말을 명심하여라. 사욕과 정에 물들기 쉬운 인간 속성 때문에, 죄악이 너희 안에서 습관화되기 십상이니, 자신을 늦추지 말고 계속 단속해야 한다.

들판의 잡초는 수시로 제거해야 한다. 밭을 갈아 비옥한 옥토로 개간하려면 잡초가 자리 잡을 수 없도록 틈나는 대로 뽑아 없애버려야 한다. 영혼의 잡초도 마찬가지이다. 사욕과 편향된 정, 올바르지 못한 습성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영혼의 끈질긴 잡초이니 과감히 제거하여라.

영혼들이 어떤 큰 죄악에 순식간에 빠졌을 때만, 나를 팔아 넘기는 짓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이 간혹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주 드문 일이다. 보통은 작은 허물에서 출발하여 점차 큰 죄에 이르게 된다. 사소한 재미, 대수롭지 않은 약점들, 전혀 개의치 않던 작은 버릇들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크게 부풀어올라, 결국에 가서는 나까지 팔아 패가망신하게 된다.

이 점에 유의하지 않고 있으면, 이러한 것들이 비대해짐에 따라 총명하던 영혼의 눈은 어두워지고, 내가 은총을 내려 주어도 그 은총이 발 붙일 자리조차 없게 된다. 사욕과 편향된 정이 너희 영혼을 지배하여, 악의 세력이 승리하게 된다.

아!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는 수많은 영혼들이 부지 불식간에 지옥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을 보시는 하느님의 성심(聖心), 그 분의 상심(傷心)이 어떠하실지.... 너희는 아는가? 모르는가?


('성심의 메시지' 중에서, 가톨릭출판사)






우리 문제에 깔린 하느님의 뜻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은 우리를 쓰러뜨리거나 진보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우리가 문제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에서 겪게 되는 문제들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선을 이루시는 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은 그 문제들이 가져 온 유익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조차 갖지 못하고 단지 부딪힌 문제들에 대해서 만 화를 낼뿐이다.

여기에 하느님께서 당신의 삶을 세우기 위해 문제들을 어떻게 이용하시는 지 다섯가지 대답이 있다.


1.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신다

때때로 하느님께서는 앞으로 나갈 수 있도록 불을 밝혀주신다. 문제들은 종종 우리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고, 방향 전환의 계기를 제공한다.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 당신의 주의를 끌려고 애쓰고 계실 것이다.
"깊은 상처는 악을 씻고 매질은 배 속 깊은 곳을 씻는다." (잠언 20,30)


2.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관찰하신다

사람들은 차봉지와 같다. 만약 당신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 지 알고 싶다면, 그냥 뜨거운 물에 넣어보면 된다. 하느님께서 문제를 통해 당신의 신앙을 시험하신 적이 있는가? 그때 당신은 어떤 모습을 드러내었는가?
"나의 형제 여러분, 갖가지 시련에 빠지게 되면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십시오. 여러분도 알고 있듯이, 여러분의 믿음이 시험을 받으면 인내가 생겨납니다." (야고보 1,2-3)


3.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교정하신다

어떤 교훈은 고통과 실패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어린 자녀가 뜨거운 난로는 만지면 안 된다는 부모님의 말을 듣고도 실제로 만져보고 데인 후에야 그 말의 뜻을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때로 우리는 건강, 돈, 인간관계 등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나서야 깨닫는다.
"제가 고통을 겪은 것은 좋은 일이니 당신의 법령을 배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저에게는 당신 입에서 나온 가르침이 좋습니다. 수천의 금과 은보다 좋습니다." (시편 119,71-72)


4.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보호하신다

만약 어떤 문제가 좀더 심각한 다른 문제 때문에 상처받는 것을 막아 준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이 될 수 있다. 지난 해에 한 친구는 그의 사장이 시킨 비윤리적인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 그의 실직은 분명히 하나의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일년 후에 비리를 통해 회사가 운영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에는, 그 일로 인해서 감옥에 갇히지 않을 수 있었다.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50,20)


5. 하느님께서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를 완전하게 만드신다

문제들이 올바로 대처되었을 때에는 우리의 인격과 삶을 더욱 아름답게 다듬어준다. 하느님은 당신의 안락보다는 당신의 인생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신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로마 5,3-4)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건 모르고 있건 간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에 함께 하신다는 것이며, 또 우리가 그분과 함께 모든 일을 행할 때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것이다.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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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연옥 영혼들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하느님을 반대하는 사람들과 다른 신들을 믿는 사람들과 쉬는 교우들을 위해서” 라는 지향을 미사에 참례때 혹은 기도하면서 붙이면 매우 큰 선행과 보속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인의 통공 교리를 생활화 한다면 지상에서 행할 수 있는 선행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께 찬미와 흠숭을,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성가정의 수호자이신 요셉께 사랑을!

자비의 예수님, 양점상 마리아와 장한상 요셉과 장가브리엘과 모든 거룩한 연옥영혼에게 구원의 은총 속에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교회와 교황님과 사제와 수도자와 온 세상의 모든 이들과 태아에게도 은총과 자비를 베푸소서. 온 세상과 우리 나라에도 사랑과 평화와 축복이 가득하게 이끌어주소서. 성모 마리아님과 배필이신 성 요셉과 성인의 통공 안의 모든 가족들은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이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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