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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ㅣ체험
다윗 시리즈 3편( 자신에게 주신 달란트가 무엇일까?)

135197 강만연 [fisherpeter] 스크랩 2020-01-09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접 국가입니다. 블레셋은 골리앗 장수를 등에 입고 이스라엘을 침공하려고 기회만을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습니다. 기세등등한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조롱하는데 이에 어린 다윗의 가슴에는 울분이 가득 찼습니다. 이건 왜 그럴까요

 

단순히 이스라엘만을 모욕한 게 아니라 하느님까지 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다윗에게는 이건 참을 수 없는 하나의 분노였습니다. 바로 욥의 친구들이 욥을 향해서 던지는 조롱 같은 거나 진배없었습니다. “너희가 믿는 신은 어디 있느냐 하느님이 계신다면 너희를 이렇게 내벼려두시겠느냐이런 방법으로 하느님을 모욕했던 것입니다.

 

어린 다윗은 이걸 참을 수 없어 사울왕에게 자신이 골리앗과 일대일로 맞서겠다고 스스로 자원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땅에 떨어진 하느님의 명예를 다시 올려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런 다윗의 모습에 감동이 되어 특별한 장비를 하사했습니다. 왕이 하사한 전투장비는 대단한 것이었지만 다윗에게는 맞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는 목동일을 하면서 맹수들과의 위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물맷돌 이런 게 자기에게는 더 맞은 것일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하느님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하더라도 이런 분노만으로는 거대한 장수 골리앗과 맞서 싸울 수 없습니다.

 

용기는 가상하지만 말입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상대방을 무너뜨릴 만한 실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처한 현실을 바로 내다볼 수 있는 안목도 있어야 합니다. 만용만 가지고 있다고 해결될 게 아닙니다.

 

지금의 시대도 다윗과 골리앗의 시대와 같은 면이 있습니다. 골리앗이 자기의 세력으로 하느님을 무시했듯이 지금 이 세상은 점점 어둠의 세력으로 인해 하느님의 세력이 점차 위축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유럽등 많은 곳곳에서는 성당이나 교회가 술집으로 변해가는 그런 현실로 추락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 개신교 천주교 할 것 없이 갈수록 신자수가 점차 이탈되어 가는 현실입니다. 절친인 친구가 있습니다. 지금 목사를 하고 있습니다. 초 중등 동창입니다. 개신교 신자였고 지금은 목사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김여진이라는 탈렌트 친구랑 같은 초등학교 때 친구였습니다.

 

친구의 말을 빌리자면 가시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갈수록 신자들의 영성은 세속에 물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이런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세상이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니고 세상에 있는 유혹거리가 너무나도 도처에 많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 좋은 사람도 순간 방심을 하다가는 그런 유혹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물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 목사의 말에 따르면 신앙도 양다리 걸치기식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주는 즐거움도 누리고 싶고 또 다음 천국에도 자신이 가고 싶고 이런 거라는 것입니다.

 

저는 친구의 말을 듣고 나름 생각한 게 있습니다. 절대 두 개는 동시에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건 역사를 보더라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비근한 예로 간단히 우리나라에서 최근에 일어난 6.25 전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한 전선을 두고 낮과 밤에 따라 적의 땅이 되느냐 아군의 땅이 되느냐로 나누어지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이때 자신의 신분이 확실한 노선을 견지해야 합니다. 이쪽 저쪽 양다리 걸치면 오히려 이쪽 저쪽 양쪽에서 다 보호를 받을 수 없고 사실 적군인지 아군인지 모르는 상황으로 몰리기 때문에 생존을 할 확률이 더 적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도 자기의 노선을 확실히 해야 할 겁니다. 다윗의 어린 혈기는 바로 하느님을 향한 충정 같은 그런 마음입니다. 이런 충정도 자신이 실력이 있을 때만이 그게 빛을 발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실력은 하느님께서 주신 달란트일 것입니다. 바로 자신에게만 주어진 고유의 특유한 달란트일 것입니다. 바로 은사입니다.

 

베드로 전서 410절에서 전합니다. “저마다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하십시오저는 잘 모릅니다만 여기서 사용하는 은사라는 게 헬라어로는 카리스마라고 한다고 합니다.

 

영어로는 카리스마가 이런 뜻을 내포합니다. 인간적인 매력으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카리스마의 뜻과는 조금은 차이가 납니다. 인간적인 매력을 다른 뜻으로 보면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끄는 매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마다 고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원래 영어에서도 매력이라는 건 끌림이라는 의미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이 세상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이 세상에 자기만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은사를 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런 은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그런 은사인 달란트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달란트를 부러워할 게 아니라 자기가 가진 달란트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노력이 중요할 거라고 봅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만 부여하신 달란트를 모르기 때문에 남이 가진 달란트에 영적인 질투를 할 수도 있는 것일 겁니다. 베드로 전서에 나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더 상기해보겠습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느님의 다양한 은총의 훌륭한 관리자로서 서로를 위하여 봉사를 하라고 하십니다. 바로 은사는 즉 달란트라는 건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라는 뜻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게 아닙니다.

 

바로 그 은사는 남을 위해 사용할 때만이 그 은사가 빛을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아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어떤 달란트가 있다면 그 달란트는 하느님께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부여한 선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세상에 유익을 가져다주도록 하느님께서 부여한 일을 두고 시기, 질투를 하는 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또한 자신에게 남다른 달란트를 가진 사람도 조심해야 할 게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런 달란트를 주신 것은 자신도 자신이지만 남을 위해 선용을 하라고 하신 말씀을 잘 새겨야 할 것입니다. 나중에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맡겨둔 달란트를 남을 위해 잘 선용을 했는지는 반드시 셈을 하시게 될 겁니다.

 

바로 달란트 비유에서 나오는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더 되새겨보며 지금이라도 남은 생을 살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한번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지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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