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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전국 교구 교구장 성탄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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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2017-12-26 ㅣ No.2101

 

2017년 전국 교구 교구장 성탄 메시지

 

 서울대교구 

춘천교구

대전교구

인천교구

수원교구

원주교구

의정부교구

대구대교구

부산교구

청주교구

마산교구

안동교구

광주대교구

전주교구

제주교구

군종교구

 

 

 

[서울대교구]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로마 5,8)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어두운 세상에 구원의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맞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특별히 소외되고 가난하고 병든 이들과 북녘의 동포들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총이 충만하게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의 탄생은 우리 인간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이뤄졌습니다. 2000여 년 전 마리아와 요셉이라는 젊고 가난한 부부가 유다 지방의 작은 시골 마을 베들레헴에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가난한 아기의 어머니는 마구간에서 몸을 풀어야 했고,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구유에 뉘었습니다.(루카 2,1-7 참조)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가장 초라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앞에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누워계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예외 없이 모든 이들, 특히 연약한 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느낍니다.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인간 역사에 들어오신 그리스도를 보며 작고 약한 존재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봅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전쟁과 테러와 살생, 폭력의 위협이 줄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심화되고, 집단 이기주의와 각종 차별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불평등 구조는 가난, 실업, 착취의 악순환을 가져옵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을 수단으로 생각하고 경제적 가치가 다른 모든 가치를 우선하기 때문입니다. 인간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없는 사회는 상대적 박탈감과 불신, 분열을 초래하게 됩니다. 우리가 함께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회는 겸손한 자세로 다른 이를 먼저 배려하고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모든 살아있는 가치를 존중하는 마음을 지닐 때 가능합니다.

 

우리나라는 1960년대 이후 경제발전이란 명분하에 정부가 강력하게 주도한 산아 제한 정책과 산업화, 도시화로 인한 급격한 사회 변화 현상으로 인해 현재 세계에서 손꼽히는 저출산국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낙태죄 폐지 관련 사회적 논의도 활발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는 잉태된 생명, 즉 인간배아도 온전한 인간이며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약하고 힘없는 생명을 마음대로 없앨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인간배아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우리 주변에 존재하면서 때로는 성가시거나 귀찮게 하는 약한 존재를 받아들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하다”(「찬미받으소서」 120항)고 언급하셨습니다.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 없는 태아는 우리가 돌봐야 할 가장 약한 존재이며 또한 가장 소중한 생명입니다.

 

생명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경제력이 없고 비생산적이고 무력한 사람, 병들고 노쇠한 사람은 사회에서 제거되어도 무방하다는 주장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어 가장 약한 모습으로 오신 구세주 성탄의 신비를 묵상하며, 우리 구원에 필요한 덕인 겸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겸손한 마음은 나 아닌 다른 생명을 존중할 줄 알고, 주변의 아픔과 고통에 귀 기울이고 공감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이 겸손한 마음은 일치와 친교의 출발점입니다. 이를 위해 특별히 지도자들의 책임이 더 막중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선과 국민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정치인들은 부디 행복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근본 토대가 ‘생명 존중’임을 잊지 말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교회도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 모든 생명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길을 좀 더 확신 있게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노인들, 기댈 곳 없는 이민자들, 열악한 환경에 놓여 생명마저 위협받는 노동자들, 폭력에 내몰린 아동들과 여성들, 일자리가 없어 희망마저 잃어버린 청년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앞장서서 주변의 어렵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어야 합니다.

 

평신도 희년 중에 있는 우리 한국교회가 생명 보호와 사랑 실천을 촉구하는 데에 평신도의 적극적 역할을 기대합니다. 우리의 작은 걸음 하나하나가 주님께서 탄생의 신비로써 전하신 세상의 작고 약한 것에 대한 사랑과 존중을 실현토록 할 것입니다. 특별히 2018년도 사목교서 주제인 “사랑으로 열매 맺는 신앙”을 기억하며 우리 각자의 삶에서 좋은 사랑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성탄의 신비가 이끄는 신앙의 기쁨과 희망을 지키고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 현실의 유혹에도 굳건하게 참 생명을 수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성탄이 우리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과 함께하는 진정한 우리 모두의 성탄축제가 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다시 한 번 기뻐하며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이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충만히 내리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 민족을 축복해주시고, 남북이 진정으로 화해를 이루어 하루빨리 한반도에 평화의 날이 올 수 있도록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의 전구를 청합니다.

 

 

2017년 12월 25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춘천교구]


  

 

 

 

  

[대전교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축복이 여러분과 가족 모두에게 가득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일 년을 돌아보고 기도하며 대림 시기를 지나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믿음의 은총 안에서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나온 하느님의 말씀, 성자이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만납니다. 우리보다 더 애타게 우리를 기다리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언제나 자비로운 얼굴을 우리에게 내미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너무 아파 마주 보지 못한 상처까지 먼저 보듬고 위로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예수님을 구세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 신앙에 비추어 볼 때, 세상의 어둠이 너무나 짙습니다. 특별히 우리나라가 지나온 일 년이 그러합니다.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전쟁의 기운이 감지되는 현실입니다. 전 세계 정치외교에서도 차별과 배척의 기운이 관용과 배려의 숭고한 가치를 대체하는 모습을 봅니다. 현대 인류는 개인과 국가 이기주의, 과학기술 만능주의, 경제제일주의 등의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탐욕과 지배, 폭력과 쾌락을 부추기는 문화가 마약처럼 번져갑니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 섬김과 나눔은 그 자리를 잃어갑니다. 무차별적인 살인이 지구촌 여기저기에서 일어나는 등 예수님 탄생 이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목격됩니다. 

전쟁의 위기, 사회적 혼란, 경제적 어려움을 들며, 민주화 노력의 결실까지 폄하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짙은 어둠 속에서, 구원과 희망을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오늘 우리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성자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실로 대단한 도전이며 위험한 축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던지는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희망의 불빛으로 밝히고 피와 땀이 새겨진 우리 역사의 의미를 조롱하며 묻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왜 축복이며 구원인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직면한 어둠은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격동의 역사를 버티어내는 과정에서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뿌리가 이제 드러나고, 그 힘이 더 크게 느껴지는 현실입니다. 이 지점에 설 때, 오늘 우리가 직면한 혼란과 난관이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여정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진리와 진실을 가리는 장벽이 무너지고 악을 직면하며, 진정한 평화와 정의를 향한 연대가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인간존엄성을 지켜내려는 힘들고 긴 노력이 인류의 공존을 향해 도약하는 시간입니다. 민주주의 정신을 실현하려는 불빛이 인류의 공동선과 공동번영을 위한 세계 시민의 연대로 변화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희망의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하느님의 손길을 보는 구원의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일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닙니다. 이는 은총의 초대입니다. 이 초대는 내 삶의 전체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는 곧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라는 인격과의 만남입니다. 우리는 이 만남 안에서, 당신 말씀을 선사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는 하느님의 신비 앞에 섭니다. 이 만남이 모든 판단의 기준에 하느님의 눈과 마음을 새겨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이신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기초임을 알아보도록 이끕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계획안에 있는 존재임을 보게 해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자신의 몸이 지닌 가치, 이성, 자유 그리고 양심이라는 선물의 가치를 일깨워줍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사랑이 다른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과 정의를 실현하려는 열정을 심어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매일 하느님께 희망을 두며, 온갖 두려움에 휘둘리지 않고 세상과의 화해와 하느님과의 일치에 집중하도록 우리를 지켜줍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인격과 만남이 주는 기쁨을 전할 의무와 선물을 부여받았습니다. 가장 큰 과제는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당신의 사랑을 나누어주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세례만 주는 의미로 한정될 수 없습니다. 선교를 통한 복음화는 그리스도께서 전하신 말씀이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이는 인간의 판단 기준, 가치관, 관심의 초점, 사상의 동향, 사상의 원천, 생활양식 등을 복음의 힘으로 바로잡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 결과 오늘 교회가 머무는 이곳,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느낄 수 있는 곳이 될 때 진정한 복음화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소외받고 고통에 지친 이들이 교회를 통해,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다문화 가족, 이주 노동자, 새터민 등이 교회의 손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를 충분히 받고 형제애를 느낄 수 있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우리 대전교구는 교구 설립 70주년을 준비하며 역사적인 시노드 본회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노드가 어두운 한국 교회와 사회의 현실에서 희망을 발견하며, 희망을 심는 작업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시노드를 통해 우리 교회가 어두운 시대의 빛이 되고, 갈라진 땅에 화해와 일치를 심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순교자의 후예로서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위협하는 모든 세력에 맞서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를 옭아매는 모든 거짓과 악으로부터 인간의 이성과 진실 그리고 양심을 해방시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평신도 희년’을 살아가는 기간 동안 한국 사회 곳곳이 복음화로 물들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사회에 번져 갑질이 없고 부정청탁과 부정한 특혜가 없는 사회, 땀 흘린 노동의 가치가 정당하게 인정받으며, 일하는 권리를 위협받지 않는 사회가 다가오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파멸 직전의 인간이 허리를 동여매고 돌아서서 인간 사이의 화해, 자연과의 화해, 하느님과의 화해의 길을 모색할 때입니다. 핵무기를 확산하며 인류를 공동파멸로 내모는 거짓 평화의 본질이 밝혀질 때, 정의로 다져지는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습니다. 자국 이기주의에서 벗어나려는 인류가 미래세대를 품으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꿈꿀 때 진정한 번영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 곳 한반도에서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일이 일어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마침내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며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는 현실이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한반도의 위기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시대로 다가서는 전환점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으로 오시는 아기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소서. 

2017년 성탄절에
천주교 대전교구장 주교
유흥식 라자로

  

  

[인천교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 하느님 안에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아기 예수님 탄생의 기쁨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또한 그 기쁨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오늘 맞이한 예수님의 탄생은 인류의 가장 큰 기다림이었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구세주 오심을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말한 대로 구세주의 오심을 통해 하느님 안에 새롭게 완성될 세상을 기다려왔습니다. 우리도 지난 대림시기 동안 구약의 백성들과 같은 마음으로 이 세상에 구세주의 탄생을 정성껏 준비해 왔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요한 1,14 참조) 하느님이 인간이 되셨음을 가장 간략히 표현한 이 말씀은 참으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가운데에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셨으니, 그것은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도록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458항)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잘 표현한 모습이 바로 강생의 사건, 성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7 참조) 라며 사랑의 정수(精髓)가 자기헌신임을 드러냅니다. 인간을 위한 사랑, 인간을 향한 그 사랑을 알려주시고자 하느님은 모든 것을 버리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이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입니다.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인간이 죄의 굴레인 어둠을 벗어나 생명의 빛 안에 머물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기 때문입니다(요한 1,4 참조).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우리가 들은 것, 우리가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1요한 1,1-2)라고 말합니다. 구세주의 탄생은 우리를 새로운 생명으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구세주의 탄생은 어둠 속을 헤매는 백성이 아닌 빛의 삶으로 나아가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생명의 빛으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회개와 보속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죽음의 문화가 만연된 세상의 어두움이 우리를 슬프게 만듭니다. 아담의 죄 이후 들려온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창세 4,10)는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죽음의 문화는 이전에 감히 언급조차 하지 못했던 ‘생명의 대한 자기 결정권’을 내세우며, ‘낙태죄 폐지’의 정당성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화는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 추구권을 보호한다는 미명하에, 수정된 그 순간부터 우리와 동일한 인격체(생명의 복음 60항)인 배아와 태아의 소중한 생명을 박탈할 권리가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은 ‘생명’ 곧 우리의 ‘존재함’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최고의 선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든 특수한 목적에 따라 수단으로 전락(轉落)될 수 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성인은 낙태가 분명한 살인이자 흉악한 죄악임을 강조하셨습니다(사목헌장 51항). 매스컴을 통해 보도되는 잔혹한 범죄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우리가 만일 “약하며, 방어 능력이 없고, 심지어 신생아의 울음과 눈물이 지닌 가슴을 에는 힘을 가진 최소 형태의 방어 수단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한 초기 단계의 인간 (생명의 복음 58항)”을 죽이는 것에 정당성을 찾게 된다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민의 마음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의 본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생명을 존중해온 본성을 부정하게 된다면, 이 세상의 윤리적 무질서는 거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자들의 입장에서 때로 이런 교회 가르침이 피상적으로 들릴 수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사회적 논리가 더욱 타당하게 들리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은 논리를 넘어섭니다. 인간의 논리와 생각은 시대에 따라 변화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 5,29)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세상에 생명을 주시러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날입니다. 오늘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세상에 생명의 문화가 확산되기를 기도합니다. 인간을 사랑하시어 사람이 되신 그 사랑을 우리가 삶 안에 살아가면서, 모든 이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나누어 주었으면 합니다. 또한 빛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해 모든 이들이 생명의 빛에로 초대되기를 기도합니다.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기도 안에 일치를 이루며,
천주교 인천교구장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수원교구]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 소통과 참여로 쇄신하는 수원교구
   신앙의 기쁨!  젊은이와 함께!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생명의 빛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1.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오시어 세상의 온갖 시련으로 아파하는 우리를 위로하며 안아 주십니다. 캄캄한 어둠의 터널 속에서 절망하고 있는 우리를 한줄기 빛으로 인도하시며 한 걸음 더 나아가자고 토닥여 주십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습니다”(요한 1,4). 우리는 그 빛을 보았습니다. 생명이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았습니다.

2.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며 그분의 눈길을 마주합니다. 이미 나를 알고 계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비로운 눈길로 위로하시며 안아주십니다. 잠시 시름을 내려놓고 주님 품에 기대어 평화를 느껴봅니다. 그리 대단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삶이지만 충분히 힘들고 수고했기에 ‘애써줘서 고맙다’는 한마디 위로가 사무치게 그리웠습니다. 비록 앞으로 더 잘 살아낼 자신도 용기도 없지만, 그래도 잠시 머무는 주님 안의 평화가 위안이 되고 힘이 되어 미소 짓게 합니다.

3. 낯선 땅 베들레헴에서 머물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마리아와 요셉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마구간 구석 한자리를 얻어 어렵사리 해산하는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어서 서둘러 떠나라는 주님의 말씀에 혹여 들키지나 않을까 황망히 떠날 채비를 하는 마리아와 요셉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우리도 한 번 쯤은 겪었을 외롭고 서러운 처지에 마리아와 요셉이 있었음을 공감하며 우리와 같은 처지로 세상에 오신 주님을 연민과 사랑의 마음으로 경배합니다.

4. 하지만 세상의 왕은 구세주의 탄생을 반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불안하게 만드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그것이 어린 생명이라 할지라도 장차 내게 위협이 될 수 있다면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많은 무죄한 어린 생명이 예수님을 대신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세상의 왕은 지금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장차 불행해질 것이라는 이유로 힘없고 나약한 어린 생명을 무참히 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합법적으로 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하기까지 합니다. 그 대가로 얻게 되는 여분의 삶이 얼마나 초라한 것이 될지는 생각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5. 구유에 누워계신 예수님과 그 곁에 다소곳이 앉아 계신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몇 마리의 양들과 목동들이 전부인 성탄의 밤은 세상이 추구하는 행복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성탄의 밤은 누추하고 외롭고 서러운 밤입니다. 앞으로 헤쳐가야 할 역경들이 얼마나 많을지를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치게 두려운 밤입니다. 누군들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꿈꾸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눈앞에 놓인 현실은 너무나 가혹하기만 합니다. 이 밤이 새기 전에 서둘러 떠나야 합니다. 아기 예수님도 그 마음을 아시는지 고요히 숨죽여 잠들어 계십니다.

6. 성탄의 이 밤, 외롭고 두려운 상황과 마주하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를 바라보며 이 시대의 젊은이들을 생각합니다. 희망보다는 절망의 어두움이 더 짙게 드리워진 저 밖의 세상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에 잠겨있을까 생각해봅니다.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에 끝도 없는 어둠의 저편을 응시한 채 그래도 용기를 내보자고 서로를 격려하지 않았을까요? 세상이 아무리 힘들게 해도 요셉은 마리아에게 마리아는 요셉에게 서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 주었을 것입니다. 나 혼자 덩그마니 남아있는 세상은 너무나 외롭고 힘이 듭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야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끝없이 경쟁을 부추기는 세상에 맞서 용기를 내어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주는 수많은 젊은이에게 한없는 사랑과 격려의 인사를 보내야 합니다.

7. 누추한 마구간으로 동방의 현자들이 찾아온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마리아와 요셉은 영문도 모른 채 동방의 세 현자를 맞이하고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하심 속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보다 앞서 세상을 살면서 모진 풍파를 겪어낸 모든 노인은 지혜로 가득한 현자들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 안에 주님의 섭리가 담겨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인들의 지혜를 경청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들은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먼저 주님을 알아 뵙고 찾아와 경배한 이들입니다.

8. 온갖 유혹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유혹을 떨쳐내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온갖 희생을 감수하는 교우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신앙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자부심은 전 세계 모든 교회의 귀감이며 모범입니다. 그리고 그 소중한 영적 자산과 실천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한국천주교회는 ‘평신도 희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모든 교우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신도 신앙인으로서 성탄의 신비가 전하는 소중한 가치들– 생명, 사랑, 존중, 배려, 나눔, 희생 –을 세상에 선포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어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17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수원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원주교구]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 찬미예수님, 
사랑하는 원주 교구 교우 여러분들, 그리고 수도자, 사제 여러분!
또 다시 맞이하는 주님의 성탄축일을 맞이하여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빕니다. 주님이 태어나신지 2000여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겐 빛이 필요하고, 평화가 절실합니다.

2000년이란 세월이 우리에겐 긴 시간이지만, 인류가 이 지상에 출현하고, 지구가 생성되고, 우주가 형성된 시간에 비교하면 아주 짧은 시간이기도 합니다. 인류 역사는 어둠에서부터 아주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다가왔습니다. 허다한 날을 굶주리며 수렵과 채취로 연명하다가 오늘날 지구의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그 분배는 잘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하루 종일 노동의 노예로서의 삶에서부터 자유로운 시간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일요일만이 아니라 토요일도 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할 곳이 많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사람의 생사를 좌우하던 폭군들의 치하에서 민주주의 정치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국민을 위한 정치인들이 아쉬운 현실입니다. 남성과 동등한 대접을 받을 수 없었던 여성들의 권리도 크게 신장되었습니다. 요즈음은 오히려 남성들이 불쌍하다는 이야기가 들릴 정도로 역전의 세태가 되었습니다. 여전히 남녀평등에 많은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빛이 필요합니다. 죽음의 문화가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이 경시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북한의 핵무기 실험으로 비롯해서 끊임없이 세계 곳곳에 전쟁의 위협과 테러와 폭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좁은 한반도 이남 안에서도 동서가 분열되고, 좌우로 갈라져서 서로 자신만이 옳다고, 상대편을 서로 적폐라고 우기며 힘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 수준의 자살율과 낙태시술 국가라는 통계적 수치가 우리나라의 생명 의식 수준과 문화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생명공학은 동물복제를 넘어 인간복제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경제적 가치로 환산되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하여 인간 생명이 희생되거나 실험도구로 이용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최근 낙태죄에 관한 법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낙태는 분명 죄입니다. 인간은 임신 그 순간부터 한 인격으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머니 태중에 있었을 때 그냥 살덩어리나 세포덩어리가 아니라 엄연한 생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 사회는 나눔이 부족합니다. 곳곳에 굶주리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또 교회의 사명으로 주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천국에서 완성되겠지만,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늘에서는 천사들과 성인들에 의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겠지만, 이 땅에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악의 세력인 사탄의 나라와 적대적입니다. 사탄의 나라가 물러가는 만큼 하느님 나라는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의 세력을 쫓아내야 합니다. 악의 세력은 바로 인간을 괴롭히는 것들입니다. 질병, 소외, 배고픔, 폭력 등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질병이 치유되고, 소외된 자가 친교를 맺고, 배고픈 사람이 배를 채우고, 불의와 불평등과 폭력이 사라지는 곳에 도래합니다. 

성탄은 하느님께서 사람으로 오신 사건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느님처럼,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땅이 하늘에 오를 수 없기 때문에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주님이 어둠에 갇힌 백성에게 동방박사들을 인도하신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 빛이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용기를 줍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의 표징입니다. 희망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기쁜 날일 수 있습니다. 가난하게 태어난 예수 때문에 이제 인간의 가난은 빈손이 아닙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간의 슬픔은 눈물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억울한 희생자의 죽음은 더 이상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불의가 결코 희생된 억울한 죽음을 짓밟고 그 위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이신 그분이 그 희생된 죽음 한 복판에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은 가난한 자, 억울한 자, 희생된 모든 이에게 기쁨을 선포합니다. 세상의 진보를 믿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들, 어둠 속에서도 빛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희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선포합니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의 탄생과 평화의 왕국을 예언하였습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 11, 6-8). 시편 작가는 노래하였습니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께서는 그 길 위에 걸음을 내디디시리라.”(시편 85, 11-14)

기뻐합시다. 희망합시다. 성탄은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2017년 성탄절에
천주교 원주교구 교구장 조규만 주교

 

   

[의정부교구]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루가 1.78-79)

 

 

 

어두움과 불안 속에서 빛을 비추시고 참 평화를 주실 분을 간절히 기다리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빛과 평화가 되어 탄생하셨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가 2,14)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빛과 평화의 왕으로 탄생하신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며 베들레헴 하늘에서 평화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밤을 지새우며 양을 돌보는 가난한 변방의 목자들에게 위로와 함께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가 2,10-11)

한반도를 둘러싸고 핵의 위협과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습니다. 새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시작부터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정부의 구애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또한 새로 출범한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거칠고 과격한 발언으로 북한을 위협하였고, 북한의 김정은도 이에 못지않게 응수하였습니다. 특히 화성 15형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 이후 더욱 악화된 상황에서는 그동안 수차례 언급한 트럼프 대통령의 선제공격이 자칫하면 우발적으로라도 일어날지 모르겠다는 불안감마저 찾아들었습니다.

성탄 밤 베들레헴 천사들의 평화의 선포가 이 땅에서 실현될 날이 오기를 희망해봅니다. 그런데 그 선포 내용을 들여다보면, 평화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주어 진다고 합니다. 이 표현이 가슴에 와 닿아 깊은 성찰을 하게 됩니다. 과연 우리들은, 우리 교회는 평화를 얻기에 합당한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았는가 반성을 해보아야 합니다. 형제끼리의 처참한 전쟁을 체험하고 분단의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과연 우리는 평화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였으며, 평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평화의 사도로 불리움 받은 사람들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할 때 비로소 하느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마태 5,9 참조) 

평화의 길을 걸어가려는 사람들은 일상의 생활에서부터 용서와 화해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3년 전 방한 시 있었던 공직자들과의 만남에서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화해와 연대의 문화를 증진시켜 불신과 증오의 장벽을 허물어 가는 끝없는 도전입니다. … 평화란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대화를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존중하고 인내하고 대화하는 것이야말로 개인뿐 아니라 국가 간의 분쟁을 극복하며 평화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되는 또 다른 방법을 우리는 바로 성탄 밤 베들레헴을 둘러싼 정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탄의 소식이 처음 전해진 가난한 목자들, 초라한 마구간에 마련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의 자리, 함께한 동물들 등은 구유의 영성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가난한 모습이 되어, 가난한 이들을 먼저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그들과 함께하라고 초대하십니다. 성탄이 아름다운 것은 이 때문입니다.

지난해 바티칸 광장에 마련된 구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구유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고 구유 바로 곁에는 소수의 인원이 탄 작은 배가 있었습니다. 전쟁과 분쟁을 피해 목숨을 걸고 고향을 떠나온 난민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구유 언저리에는 수단을 입은 사제가 있었습니다. 교회가 그들을 맞아들이라는, 가난한 모습으로 강생하신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구유와 난민,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주제입니다. 또 우리나라의 상황이라면 또 다른 의미의 난민인 새터민과 이주근로자들도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이제 일주일 후면 맞게 되는 1월 1일 세계 평화의 날을 앞두고 교황님은 ‘이민과 난민: 평화를 찾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담화문을 주셨습니다. 여기서 교황님은 전쟁과 기아를 피하여, 또는 차별과 박해와 빈곤으로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자비심으로 끌어안으라고 촉구하고 계십니다. 대한민국은 난민들을 받아들이는데 인색한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난민 지위를 인정 받기가 하늘에 별 따기만큼이나 어렵다고 합니다. 난민 지위를 희망하는 이들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사람이 우리 교구 지역에 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뜻에 따라 한 본당이 한 난민 가정을 돌보아 주었던 유럽 교회처럼 우리도 그렇게 한다면 너무나 따뜻하고 아름다운 일일 것입니다.


2017년 성탄절 이 기 헌 ( 베드로 ) 주교

 

   

[대구대교구]

 

“온 세상에 큰 기쁨이 될 소식”(루카 2,10)


 

“하느님께 영광, 사람들에게 평화!”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여러분의 가정에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가득하길 기도드립니다. 추운 겨울, 양떼를 지키던 가난한 목동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전해 준 기쁜 소식을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11절)
이 기쁨은 교회를 통해 이천 년을 넘게 전해진 신앙의 보화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셨으며,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구원 신비의 시작입니다. 구세주께서 위대한 왕이나 권력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난한 시골 가정에서 나약한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12절) 구세주 예수님을 알아보는 표징이 포대기에 쌓여 마구간의 구유에 누워 있는 보잘것없는 아기의 모습이라는 천사의 말입니다.

교구의 모든 사제들에게 성탄의 기쁨을 전합니다.
사제는 말과 행동, 그리고 자신의 온 존재로 예수님을 전해야 하는 사명을 안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제들의 삶이 먼저 기쁨에 차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제는 매일 미사를 통해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교우들의 마음 밭에 뿌리고 가꿀 뿐만 아니라 성체성사를 통해서 교우들이 주님과 하나 되도록 돕습니다. 그러기에 사제의 삶은 주 예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매일의 복음 말씀을 마음에 새겨 자신이 먼저 싹을 틔워야 할 것이며, 성찬례를 통해 자신이 먼저 주님과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제들은 가장 나약한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구세주를 본받아, 자신을 내세우기보다 하느님께 의지하는 겸손한 어린 아이 같아야 합니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본받아 청빈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 삶이 가난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가난한 이들에게 가난한 모습으로 오신 주님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내 삶이 겸손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가장 낮은 모습을 취하신 구세주를 본받으라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내 삶이 기쁨으로 충만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의 성탄을 맞아 신부님들 한 분 한 분이 천사의 인도로 성탄을 목격한 목동들처럼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교구의 모든 수도자들에게 성탄의 기쁨을 전합니다.
수도자들은 지상에서 하늘나라의 신비를 미리 보여 주는 존재입니다. 수도생활은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삶을 통해 주님을 향한 완덕에로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고귀한 삶입니다. 하지만 수도자들의 첫째가는 덕목은 기쁨일 것입니다. 수도생활은 고행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기쁜 여정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아기 예수님의 성탄은 수도자들에게 먼저 기쁜 소식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기뻐하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여러분의 기쁜 삶을 보고 하늘나라의 기쁨을 미리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수도자들의 삶은 지상에서 하늘나라의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갈수록 물질만능주의에 빠지고 신앙을 멀리 하더라도, 성소자가 줄어들고 수도생활에 걸림돌이 많더라도 여러분의 삶은 흔들리지 않고 기쁘게 주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구세주의 성탄을 여러분과 함께 기뻐하며 기도드립니다.

교구의 모든 평신도들에게 성탄의 기쁨을 전합니다.
주님 성탄을 맞아 평신도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한국 교회는 평신도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며, 세상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직접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선교의 최전선인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먼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들으며, 하느님의 가르침을 기쁨 가운데에서 실천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요한 13, 3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기쁨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평신도사도직단체협의회 50주년을 기념하여 내년 평신도주일까지 “평신도 희년”을 선포하고 전대사를 수여합니다. “희년(禧年)”은 복된 해, 기쁨의 해, 거룩한 해입니다. 삶에서 기쁨이 우러나는 한 해가 되어야겠습니다. 세상살이는 고단하고 세상 안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평신도 여러분의 삶은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습니다. 춥고 어두운 겨울밤에 아기 예수님께서 따스하고 밝은 빛으로 오신 것처럼, 여러분 마음 안에 주님께서 빛으로 오시어 앞길을 환하게 비춰 주실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2017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 환 길(타대오) 대주교

 

 

  

[부산교구]

017년에 맞는 우리 주님 성탄 대축일은?

 

 

    올해도 어김없이 주님 성탄 대축일이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은 부산교구민들께 임마누엘 주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매년 이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자신을 살펴보며‘과연 오시는 주님을 맞을 준비를 잘 했는가?’하고 스스로 묻게 됩니다. 해마다 돌아오는 대축일이기에 습관적으로 그 대축일을 맞이할 수 있어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 생기 없는 축제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우리나라의 것은 아니지만 다음과 같은 외국의 두 사례를 소개합니다.

사례 1 : 성탄이 다가오면 미국의 백화점이나 쇼핑센터에‘Merry Christmas’(즐거운 성탄)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을 길게 늘어뜨려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성탄절에 주고받을 선물을 준비하는 고객들을 향한 홍보용인 것입니다. 성탄 카드에도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현수막이나 성탄 카드에‘Merry Christmas’대신‘Happy holiday’(즐겁고 행복한 축제)라고 바뀐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성탄 축제에서 종교적인 흔적을 지우고 단지 세속적인 것만 강조하려고 애쓰는 듯합니다.‘그리스도’없는‘크리스마스’만을 즐기려는 것 같아 서운하고 씁쓸합니다. 
사례 2 : 몇 년 전 프랑스 르망 교구장 주교님이 우리나라를 방문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 주교님은 강의 서두에‘이제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나 사회가 아닙니다.’라고 운을 뗐습니다. 한 때는‘유럽 교회의 장녀’라고 불리던 프랑스가 그렇게 변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 주교님은“파리 시내 길에서 장사를 하는 어떤 여인에게‘크리스마스를 아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 여인은‘그게 무엇이죠? 아이들을 위한 축제인가요?’라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성탄은 그 여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 밖인 것 같습니다.

  이런 사례들을 접하면서‘우리는 그 정도는 아니다’고 생각하면서도‘우리의 부족은 무엇일까?’생각하게 됩니다. 올해도 예년처럼 다가온 주님 성탄을 맞아‘아, 벌써, 주님 성탄 대축일이고 또 한 해가 가는구나.’하고 무감동한 표정을 지을지 모르겠습니다. 늘 반복되는 축제이니 감동이 덜 할 수도 있겠지만,‘주님 성탄’은 단지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중심이고 본질이어야 합니다. 이천년 전 하느님의 아드님이 우리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사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무한히 자신을 낮추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신 후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지금도 오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체험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주님 성탄은 이전에 오셨고 지금도 오시는 분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날이기도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그분을 맞아들이는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지나간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주님 성탄 대축일을 맞은 오늘은 그분이 우리의 삶의 주인이자 주인공이심을 되새기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힘과 용기를 얻어 우리의 일상을 주님 성탄 축제로 삼아 신명나는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2017년에 맞는 우리의 주님 성탄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운데 모시고 그분께 더 집중하고 그분을 더 닮도록 노력하며 다짐하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아멘. 

총대리 손삼석 요셉 주교

 


  

[청주교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오늘 구세주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 가운데로 오신 예수님 탄생의 기쁨과 평화가 신자 여러분의 가정, 그리고 온 세상에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2. 요한 복음서는 1장1절부터 18절의 장엄한 찬미가를 통해 예수님께서 누구이시며, 예수님 탄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주고 있습니다. 초기 교회 공동체에서 고백되었던 이 찬미가의 핵심은 바로 1장 14절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고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고백입니다. 또 하나는 “그분께서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고백입니다. 
먼저,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고백은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뜻합니다. 모든 이의 구원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계획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사람이 되셔서 이 땅으로 내려오심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명백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고백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택하신 이스라엘 백성과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신 후, 이집트에서 노예살이에 힘겨워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 시키실 때에도, 약속의 땅인 가나안 복지를 향해 40년간 광야의 험한 길을 걸어갈 때에도, 한결같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살아가기 위해 이민족과의 전쟁을 할 때에도, 심지어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땅에서 유배 생활을 할 때에도, 하느님께서는 한결같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고(히브 1,1 참조), 당신 백성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3. 말씀이시며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탄생하시어 우리 가운데에 계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환호합니다.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 52,9-10).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며 구원의 길로 이끄십니다. 또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어, 세상에서 죄악의 세력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는 그것을 이겨낼 힘과 용기를 주시며, 힘들고 아프고 상처받은 이들에게는 따스한 격려를 통한 희망을 주십니다. 

4. 한 해를 되돌아보며 힘들고 고통 받은 많은 이들을 떠올려 봅니다. 3년 동안이나 바다 속에 잠겨 있던 세월호가 인양되었지만 미수습자 5명은 끝내 찾지 못하고 가족과 지인들의 큰 슬픔 속에 마지막 영결식을 치룰 수밖에 없었습니다. 7월에는 우리 지역에 쏟아진 기록적인 폭우로 농경지와 도로, 그리고 주택 등이 침수 피해를 입었고, 많은 수재민들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11월에는 경북 포항지역 지진 및 여진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삶의 보금자리를 잃고 지금도 여전히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북한은 연이은 미사일 발사를 통해 한반도의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으며, 주변국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강경대응을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에 따라 우리 국민들은 언제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함으로 두려움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여 적폐청산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도 불평등, 불공정, 불의가 만연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비록 우리가 이러한 암울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결코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저 멀리서가 아니라, 세상 안에서 우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겪으시며, 고통 받는 이들을 어루만지시고, 그들의 상처를 보듬어 안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유가족 곁에서, 자연재해로 인해 피해를 입은 이들의 곁에서, 전쟁 위험에 떨고 있는 이들 곁에서, 불평등과 불의에 맞서 노력하는 이들 곁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두를 위로하시며, 힘을 북돋워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현실이 암울하고 어둡게 느껴질지라도 예수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의 탄생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기쁜 소식은 우리의 기쁨과 희망, 사랑의 삶을 통해 이 세상에 더욱 널리 드러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5. 교회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로 오신 예수님께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를 청하며, 신자 여러분의 가정과 교구 공동체, 그리고 지역사회에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가득히 내리기를 기원합니다. 

2017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청주교구장 장 봉 훈 가브리엘 주교

   

[마산교구]

2017년 성탄 담화문  

 

 

여기 성탄 구유에 한 아기가 누워있습니다. 잠시만 돌보지 않아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갓난아기가 이 추운 겨울 우리 겨레의 역사 속에 들어와 쌔근쌔근 숨 쉬고 있습니다. 올겨울엔 어쩐지 못 오실 것 같았는데, 이렇게 어김없이 오셔서 구유에 누워계시니 기쁨 이런 듯 오히려 감사의 눈물이 앞섭니다.

 

올 한 해는 유난히도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당장 전쟁이라도 벌어질 것 같은 날들도 있었고 온갖 싸움과 갈등 속에 먹고 사는 어려움까지 겹쳐 온 국민이 힘들었습니다. 아직 절망할 단계는 아니라는 가느다란 희망으로 이 차가운 겨울의 끝자락에 숨을 고르며 감사의 기도를 올립니다.

하지만 구유에 계신 아기예수님께 눈물로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되는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들 마음의 창고 속에 켜켜이 쌓인 거짓과 위선, 미움과 분노라는 ‘핵탄두’가 조절 불가능한 모습으로 무섭게 일렁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기예수님의 성탄을 예언했던 저 구약의 시인詩人 이사야의 말씀이 2700년을 관통하며 오늘 죄스런 우리에게 희망과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땅을 흔들며 저벅거리던 군화도 피 속에 뒹군 군복도…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그의 이름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릴것입니다.”(9,1-5)

 

한주먹감도 안 되는 저 갓난쟁이가 우리에게 어찌하여 평화를 안겨줄 임금이 될 것인지… 그것은 다만 오랜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 말씀을 받아 익힌 예언자만이 가질 수 있었던 희망의 언어였으니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고통의 시인 제2이사야의 입을 통해 밝혀진 대로 이 아이가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53,4)

그가 동포들의 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기에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53,5)고.

그렇게 평화가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예수아기의 운명은 그렇게 참 얄궂습니다. 태어나실 때부터 이 세상사람 속에는 어미의 몸 풀 자리조차 없어 짐승의 먹이통이 누울 자리가 되었고, 포대기에 싸인 채 쫓기는 몸으로 시작하여 십자가에 처형되기까지 권력자들의 눈 밖에 나, 이 세상 안에서는 ‘머리 둘 곳조차 없이’(마태 8,20) 사셨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분은 오히려 이 세상에 머리 둘 곳 없는 자들 곧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 슬퍼하는 사람이 자신들의 눈길을 맡길 수 있고 찾아가 위로받을 수 있는 하느님 자비의 따뜻한 품이 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목격하고 체험한 사도들은 모두 입을 모아 예수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고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오히려 당신 것을 모두 버리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셔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구유에 계신 예수아기를 바라보며, 내 아기라면 저런 길을 걷게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모께서는 아드님 십자가 그 곁에 서 계셨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드님 십자가의 그 고통을 끝내 함께하셨습니다.

 

- 어머니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 누가 뭐라 해도 창피하지 않습니다. 

-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 사도들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 오히려 담대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 부활하신 예수의 ‘영’(Spritus 靈)이 그들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구 신부님들께서도 떳떳하고 기쁘게 살아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혹 다른 교구 신부들의 멋진 

사제관이나 용돈 사정이 결코 우리를 우울하지 않게 하기를 주교의 손금(M자 손금입니다 money 많이)을 걸고 보증하고 싶습니다.

 

수녀님들, 수사님들이 흔들림 없이 사시기를 빕니다. 주님의 영이 함께 계시니 가난해도 빵긋빵긋하소서.

 

우리 교우들께서도 기쁘게 사시기를 빕니다. 위로는 하느님께서 지켜주실 것이고 아래에는 저희들이 엎드려 있으니 힘들 때 우리들을 밟고 일어서십시오. 우리는 밟힐 때 비로소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게 되는 ‘십자가의 역설’ 속에 사는 사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2017년 성탄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교구장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

 

 

   

[안동교구]

 

 

 

 

 

  

[광주대교구]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요한 1,2 참조)
  아기 예수의 탄생은 생명의 빛이 비추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염원하는 세상 모든 사람에게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소식입니다. 이 기쁜 소식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루카 1,79)에게 기쁨과 희망의 복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생명은 선물입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 ‘사랑으로 창조된 작품’입니다(에페 2,10; <사목헌장 >19항 참조). 이는 곧 우리의 생명은 인간적 척도나 가치기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신성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고, 함부로 다루거나 조작할 수 없는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생명의 존엄성은 하느님께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거나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죽음의 문화에 저항하며, 생명의 복음, 생명의 문화를 확고하게 보존하고 지켜야 합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낙태 문제에 직면하여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생명윤리위원회가 “모든 인간생명은 수정되는 순간부터 아버지의 것도, 어머니의 것도 아닌, 새로운 한 사람의 생명으로 보호되어야 하고, 그 존엄성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확고한 믿음이며, 우리 교회의 양보할 수 없는 기본적인 가르침”이라고 표명한 입장을 재확인하고자 합니다(<낙태죄 법안 폐지 논란에 대한 한국 천주교회의 입장> 2017.11.21.). 
  더 나아가 인간의 생명은 인간 존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인간 삶의 모든 영역과 맞닿아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교회는 “고의적인 자살을 포함하여 생명 자체를 거스르는 모든 행위와 인간의 온전함에 폭력을 자행하는 모든 행위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모든 행위, 더 나아가 노동자들이 자유와 책임을 지닌 인간이 아니라 이윤추구의 단순한 도구로 취급당하는 굴욕적인 조건 등 이 모든 행위와 이 같은 다른 행위들은 참으로 치욕이며, 또한 이는 인간문명을 부패시키는 한편, 불의를 당하는 사람보다도 그러한 불의를 자행하는 자들을 더 더럽히며, 창조주의 영예를 극도로 모욕하는 것”(<사목헌장> 27항 참조)이라고 재천명합니다. 

 한반도 평화와 인간 생명 존중은 매한가지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제51차 세계평화의 날 담화(2018.1.1.)>에서 전쟁과 기아, 차별과 박해, 빈곤과 자연 훼손이 야기한 극심한 고통과 역경 속에서 평화를 찾아 나선 난민과 이주민들에 대해 각별한 관심의 시선으로 그들의 처지를 바라보며 정의와 평화를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러한 시선은 이민과 난민을 그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근심거리의 존재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대와 형제애, 평화를 증진하는 기회로 변모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각별한 관심과 애정의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들이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용기와 재능과 에너지와 열망, 그리고 고유문화라는 보화를 가지고 옵니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들이 생활했던 지역의 다양한 문화로 자신들을 받아들여준 나라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도록 기여합니다. 우리는 또한, 심지어 자원이 부족한 곳에서조차, 이민과 난민에게 마음과 문을 여는 무수한 개인, 가정, 공동체의 창의력, 끈기 그리고 희생정신을 보게 됩니다.”
  
  평화를 증진시키려는 노력이야말로 인간 생명의 가치를 보존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한일주교교류모임의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성명서(2017.11.16.)>는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현 정세에 비추어 볼 때, 시의적절한 의견표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양국민은 모두 군비 확장에 투입되는 막대한 비용이 가난한 이들의 희생과 고통을 더 심화시키고, 환경 악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이들, 특히 국가 원수와 군의 지도자들은 하느님과 전 인류 앞에서 세계평화를 위한 막중한 책임을 항상 염두에 두고 평화를 위한 대화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 우리 한일주교들은 무력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형제애를 적극적으로 실천함으로써 평화건설에 매진할 것을 다짐합니다.”
  
  이미 우리 민족은 한국전쟁을 통해 전쟁의 참혹함과 비극을 뼈저리게 체험하였고, 평화 없이 인간 생명과 존엄성 또한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남북한의 평화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평화 증진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음을 거듭 확인합니다. 그리고 이 동북아시아의 평화는 세계평화를 위한 중요한 징검다리가 될 것입니다.

  생명과 평화 안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생명존중과 평화건설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밑바탕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광주대교구는 2018년부터 2020년까지 ‘본당의 해 (II) :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사목지표로 정하고, ‘공동체성 강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사랑’, ‘청소년 친화적인 공동체’, ‘사제단의 사목교류 강화 및 지구사목 활성화’를  사목중점사항으로 구체화하고자 합니다. 이 네 가지 사목중점사항은 우리 교구공동체가 교회 내적으로만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로 자리매김하고자 함이며, 아울러 세상 사람들에게 생명과 평화의 복음을 전함으로써, 생명의 문화를 촉진하고 평화를 증진하는 데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본당의 해 I’을 보내면서, 가정 공동체의 회복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 주신 본당 신부님과 수도자 그리고 교구민 모두에게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구체적인 우리의 생명 넘치는 삶과 평화에 대한 노력으로 생명과 평화의 주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모실 수 있는 한 해가 되길 희망합니다.
  
2017년 12월 25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김희중 히지노 대주교

 

   

[전주교구]

 

그분은 당신 자신을 작게 하셨습니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구원자가 태어나셨다.”(루카 2,11) 천사가 우리에게 전해준 놀라운 메시지입니다. 이 메시지는 시대의 장구한 흐름에도 늘 신선함을 유지하는 소식입니다. 교회에 끊임없이 큰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그 기쁨을 감출 길이 없어 환호성마저 지르게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도 모두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의 은총과 평화와 더불어 기쁨을 가득 누리시길 빕니다.

그런데 탄생하신 구세주는 비범하거나 웅장한 모습이 아닙니다. 그분은 어느 인간의 아이처럼 그저 작은 아기이십니다. 그 아기는 으리으리한 궁전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십니다. 그분은 호화로운 요람이 아니라 초라한 구유에 누워계십니다. 정말 단순하고 가난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느님께서 늘 활동하시는 방식입니다. 하느님에게는 다른 방식은 없습니다. 항상 단순하고 가난하게 활동하십니다. 왜 그렇게 늘 활동하실까요? 성탄의 신비와 관련하여 다음 세 가지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 모두가 하나도 예외 없이 당신께 다가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위대한 모습으로 권능을 떨치고 오셨다면, 우리는 두려운 나머지 그분을 멀리하거나 다가간다 해도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가 결여되어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또 만일 하느님께서 호화로운 모습으로 찬란하게 오셨다면, 우리는 그 화려함과 영화에 도취되어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분께 다가섰을 것입니다. 이것도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당신에게서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또한 허황된 욕심에서 벗어나 당신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단순하고 가난한 방법을 택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오직 우리를 위해 당신 자신을 작게 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그분은 당신 자신을 작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나 그분께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은 아기에게 두려움을 느끼거나 다가가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모든 아기에게는 무언가 새롭고 순결하며 아름다운 것, 말하자면 우리가 사랑하고 무릎 꿇어야 하는 어떤 광채 혹은 신적 현존과 같은 것이 있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듭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기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어른이나 아이,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 부유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예수님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은 당신께 다가온 사람 모두에게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이실 것입니다. 그 웃음이 바로 하느님의 평화이며 사랑입니다. 교우 여러분은 그분께 다가가 그 평화와 사랑을 가득 누리시길 바랍니다.

둘째, 당신을 진실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작게 하시어 무방비 상태인 작은 아기가 되셨습니다. 모든 아이가 어머니의 돌봄을 필요로 하듯이, 하느님도 우리의 따뜻한 사랑을 필요로 하는 아기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우리의 도움과 사랑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아기이십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느님께서 아기가 되신 이유는 우리의 사랑을 간청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사랑이 피어나 우리를 정화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당신을 가슴에 안을 수 있도록 아기가 되신 것입니다. 그분은 실제로 사랑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바라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아기처럼 무방비 상태에 있는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구걸하는 어린이, 궁핍하고 굶주린 어린이, 사랑을 겪어보지 않은 어린이에게 눈을 돌리라는 뜻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베푸는 일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아기 예수님은 사랑의 빛으로 세상을 환하게 밝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마지막 셋째 이유는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루카 2,12)의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누워 있는 상태는 바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게 멈추어 있는, 무언가를 위해 긴 시간을 마련한 상태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시간을 내십니다. 그분은 본래 시간을 초월하신 분인데 우리를 위해 시간 안에 들어오셨고, 지금은 구유에 누워 우리를 위해 시간을 내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라도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충분하신 분이십니다. 지금은 아기가 되어 구유에 누워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아기 예수님께 시간을 내면 됩니다.

교우 여러분, 구유에 누워 계신 그분께 달려갑시다. 그리고 해맑은 웃음을 지으시는 그분의 얼굴을 바라봅시다. 아울러 그분을 가슴에 꼭 껴안읍시다. 그러면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요한 1,16) 받을 것입니다.


천주교 전주교구장 주교 김선태 (사도요한)

  

  

[제주교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마리아가 만삭의 몸을 끌고 요셉과 함께 이스라엘의 북쪽 마을 나자렛을 떠나 베틀레헴까지 장거리 여행을 한 것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인구조사 칙령 때문이었습니다. 식민지 백성 요셉과 마리아는 로마 황제의 막강한 군대가 시키는 대로 본적지로 가서 신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대의 제왕들은 백성들의 호구 조사를 통해 세금 징수의 기반을 만들고 병역 의무를 부과하며 통치권을 행사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군사력으로 식민지를 장악하고 식민지 백성들에게 부과한 세금으로 그 군대를 유지하고, 전쟁을 통해 또 다른 나라를 점령하여 제국을 계속 강화하고 확장해나갔습니다. 군대와 전쟁은 제국 성장의 필수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소불위의 군대로 수많은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고 수탈과 억압의 역사를 반복하던 고대의 제국들은 모두 멸망하였습니다.

 

  제국의 메카니즘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하게 작동합니다. 20세기 들어와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세계1차 대전을 시작한 것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고, 나치의 제3제국과 일본 제국은 세계2차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제국의 권력과 부를 확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지만, 수천만의 인명을 살상하고 곳곳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와 잿더미만 남긴 채 제국은 사라져갔습니다. 이후 한동안 이어지던 동서 냉전 시대는 미국을 필적할 초강국 소연방이 해체되어 사라지니, 이제야 정말 평화의 시대가 오는구나 하며 많은 이들이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던 평화는 좀처럼 오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은 냉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군비를 계속 확장하고 여러 동맹국에 끊임없이 새로이 개발한 고가의 첨단무기 구입을 유도하고 분쟁을 부추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한반도 북쪽에서는 핵무기와 미사일 실험을 되풀이하고, 이에 맞서는 남측에서는 한국과 미국이 엄청난 화력을 총동원한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계속함으로써 금방이라도 전쟁이 터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에 다가서고 있습니다. 냉전 시대 이후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하는 미국은 천문학적인 재원을 투입하며 엄청난 무력을 동원하여 곳곳에서 여러 차례 가공할 파괴력을 과시하였지만, 베트남 전쟁, 쿠웨이트 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간 전쟁 등 어디서도 온전한 승리를 거두거나 평화를 실현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직 무고한 민간인 노약자들의 억울한 죽음과 젊은 군인들의 전사가 이어질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전쟁들은 오로지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자국의 군수산업을 성장시키는 돈벌이 수단이었고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발판이었습니다.

 

  최근 한반도를 중심으로 고조되는 군사적 긴장에는 무력의 대치만이 아니라 서로를 위협하는 언어의 난무로 갈수록 상황이 악화되고 있습니다. 선제공격을 불사하는 국가 지도자들의 절제 없는 표현은 실제로 전쟁 가능성을 고조시키는 위기감을 크게 조장하고 있습니다. 폭력적인 언어는 상대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고 미움과 대결을 증폭시킬 뿐입니다. 미움이 축적되고 싸우려는 의지가 굳어지면 충돌이 일어납니다. 세계의 외교정책 전문가들은 지금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한국은 한 세대 전, 또는 그 이전의 세대로 되돌아갈 것이고, 북한은 한국전쟁 중 겪었던 ‘완전한 파괴’를 또 다시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전쟁은 역사 속에서 인간이 저질러 온 최대의 죄악입니다. 전쟁은 어떤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최고의 악입니다. 국가 지도자들은 상대측을 악마로 매도하기 전에, 자신들 안의 미움과 폭력을 부채질하는 악의 군대를 먼저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어느 때보다도 하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계신 가장 작고 힘없는 갓난아기 예수를 둘러싸고 그분의 영광을 노래하던 수많은 하늘의 군대를 오늘 이 시대에도 보내주시도록 소리 높여 외쳐야 하겠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미움과 폭력을 부추기는 악의 군대를 몰아내고 참 평화를 이루는 하늘의 군대를 파견해 주시도록 우리는 오늘 한 목소리로 하느님 아버지께 부르짖어야 하겠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2017년 성탄절에

천주교 제주 교구 감목
                                                                                                                     강 우 일

 

 

 

 

  

[군종교구]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 드리고, 우리게 평화기쁨 전해주시네  

 

 

“영원한 천주성의 찬란한 광명, 빛이요 생명이신 예수오시네,
병들어 신음하는 만민 고치려, 구원의 문 되시려 찾아오시네.
천사들 합창소리 땅을 흔들고, 천상의 노랫소리 새 세상 알려,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 드리고, 우리게 평화기쁨 전해주시네.”
(성무일도서의 성탄대축일 독서기도 찬미가에서)

I

주님 안에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구민 여러분, “오늘 구세주께서 탄생하셨으니 기뻐합시다. 죽음의 공포를 소멸하시고 영원한 약속으로 인해 기쁨을 부어주시는 생명께서 탄생하신 이날 슬퍼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이 기쁨의 참여에서 아무도 제외될 수 없으며 기뻐할 이유는 모두가 다 지니고 있습니다.” 라는 성 대 레오 교황님의 강론을 인용하면서, 구세주 예수님 탄생의 기쁨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성 대 레오 교황님께서 “기뻐할 이유는 모두가 지니고 있습니다.”라고 하시는데, 이는 우리 각자가 세상에서 어떤 좋은 일 때문에 느끼는 그런 기쁨을 초월하는 우리 구세주 탄생이 가져온 우리 공통의 ‘지극히 좋은 일’ 때문입니다. 그 ‘지극히 좋은 일’은, 바로 하느님께서 죄로 인해 멸망으로 향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이 세상에 보내신 그 축복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지극히 좋은 일’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목이 두려워 밤에 당신을 찾아온 의회의원 니코데모와 대화하시는 중에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4-16)

우리 죄인들이 죄의 용서를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도록,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이 성탄의 중심이 되는 의미이며, 이 축복이 바로 우리를 기쁨으로 충만하게 해줍니다. 저는 여기서 알기 쉽게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예수님께서는 앞의 인용문처럼 “외아들을 내주시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참으로 심오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세상에 보내시다.’ 혹은 ‘태어나게 하시다.’는 뜻만이 아니고, 죄로 인해 멸망으로 향하는 우리 모두를 이 멸망의 불행에서 구출하여 영원한 생명이라는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외아들을 수난과 죽음에 처할 수도 있게 하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아들을 내주시어”라는 말씀 속에는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감동적으로 드러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II

참된 사랑은 몇 가지의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사랑은 무엇보다 사랑하는 상대방을 위해 자신의 모든 좋은 것을 내어주게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 모든 좋은 것을 내어주는 데에서 이 사랑의 좋은 모범이 드러나지요.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가 바로 사랑에서 흘러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인을 너무도 사랑 하시어 당신 외아드님까지 영원한 생명을 위한 대속물로 그리고 희생제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참된 사랑은 또한 상대편을 위해 자신을 낮추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최고의 겸손함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인을 너무도 사랑하시어, 외아들이 고통받을 수 있고 죽을 수 있는, 하나의 작은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이 되게 낮추시었고, 그래서 번쩍이는 광채와 천둥 번개 속에 내려보내시지 않고, 한 인간 여인의 몸에 잉태하게 하시어 무력한 아기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 ‘낮춤’의 정도는 이 세상의 그 어느 낮춤과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참으로 겸손하게 탄생케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탄생 소식을 세상의 왕이나 총독 같은 권력자에게 먼저 알리시지 않으시고, 외롭고 인정받지 못하고 고달프게 살아간, 한밤에 양 떼를 지키던 목동들에게 가장 먼저 전하신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또한 상대방을 풍요롭게 하고자 자신은 오히려 가난해지게 합니다. 그래서 사도 성 바오로께서는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분께서 당신 외아드님이 여관방 하나 찾지 못하고 가축이 먹고 자는 외양간의 구유 위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외아들 탄생에서 어떤 특전도 찾지 않으셨기에 이 비참한 환경에서 외아들이 탄생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미국의 유명한 설교자이셨던 풀톤 쉰 대주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태양으로 하여금 땅을 따뜻하게 해줄 수 있게 하시는 분께서, 어느 날 소와 당나귀의 입김을 필요로 하게 되실 줄을 세상의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참된 사랑은 사랑의 가장 큰 장애물인 미움을 뒤로하고 포용하고 용서하게 해줍니다. 하느님께서 외아들을 내어주심은 이 포용과 용서를 통해 우리 죄인이 새롭게 태어나 당신의 자녀가 되고 그래서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얻게 해주셨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구민 여러분, 하느님의 이 참된 사랑과 무한한 사랑이 드러난 성탄 대축일을 맞으면서 크나큰 기쁨을 누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죄스러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외아들을 극단의 겸손과 가난 속에 태어나게 하신 하느님의 이 사랑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이 사랑을 본받는 삶을 새롭게 시작하도록 합시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습니다. …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신 것입니다.”(1요한 4,9-10)라고 외치듯 말씀하시는 사도 성 요한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도록 합시다.

2017 성탄절을 맞으면서
천주교 군종교구장 유수일 F.하비에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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