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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전국 교구 교구장 성탄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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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goodnews] 쪽지 캡슐

2019-12-24 ㅣ No.2253

 

2019년 전국 교구 교구장 성탄 메시지

 

 서울대교구 

춘천교구

대전교구

인천교구

수원교구

원주교구

의정부교구

대구대교구

부산교구

청주교구

마산교구

안동교구 

광주대교구

전주교구

제주교구

군종교구

 

 

 

[서울대교구]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1요한 4,11)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에게 오신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하여 온 세상에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총과 평화가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천 년 전 이스라엘의 산골 마을 베들레헴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하느님의 아들이었으며 죄에 물들어 멸망하는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였습니다. 이번 성탄에 우리 가운데 오시는 그 구세주 예수님을 깊이 만기를 고대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께서는 성당에 오시면서 예쁘게 꾸며진 성탄 구유를 보셨을 것입니다. 마구간 안에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잠자고 계신 아기 예수님, 천사들과 양 떼를 지키는 순박한 목동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습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고 평화로운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더럽고 냄새나는 마구간 안에 가축이나 동물에게 먹이를 담아 주는 그릇인 구유에 아기 예수님께서 누워있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지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된 인간은 교만과 이기심으로 죄를 짓고 결국 고통과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당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구세주 예수님은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스스로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참조).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간의 지혜로는 다 이해할 수 없는 성탄의 신비입니다.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바로 인간의 더러운 죄와 악행, 교만과 이기심 그 한가운데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먹이 그릇인 구유에 아기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은 구세주께서 먹히는 존재가 되셨고, 인간과 세상을 위한 구원의 희생을 준비하고 계심을 암시합니다. 그만큼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인간 구원을 완성하시려고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고, 당신의 아드님을 주셨고, 우리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소중하고 귀한 권한을 주셨습니다(요한 1,12 참조).

올 한 해도 주님 성탄의 기쁨을 맞으며,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을 되돌아봅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으면 대화와 공존의 노력보다는 내 것만이 옳다고 주장하며 반목과 대립을 반복하는 세태는 우리 사회를 위태롭게 만듭니다. 이러한 마음은 다른 사람을 그 자체로 소중하고 가치 있게 여기지 않고, 사랑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합니다. 지난 11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일본 사목 방문 중 도쿄돔 미사 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자신에게만 유용하고 득이 되는 것만을 찾는 세속적 태도는 결국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재물의 노예로 전락시킬 뿐만 아니라 조화롭고 인도적인 사회를 만드는 데 방해가 됩니다.”
교황님께서는 원폭 피해 지역도 방문하여 피해자들을 만나 위로하셨습니다. 그리고 핵무기 폐기를 위한 국제 사회의 노력을 당부하고 모든 나라들이 핵무기 금지 조약에 참가하도록 권고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노력이 하느님과 다른 사람에 대해 사랑을 실천하는 좋은 사례가 됩니다.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하는 우리 신앙인 공동체는 솔선수범해서 나와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이들과도 사랑을 나누고 증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마태 5,44-46 참조). 주님께서 알려주신 이 사랑에 세상의 불안과 불신, 불목과 다툼을 해결할 모든 해답이 있습니다.
사회와 국민의 삶의 문제를 다루는 정치 지도자들의 책임과 역할은 막중합니다. 먼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도자들은 사회의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인내심 있고 끈기 있게 대화를 지속해주시기 바랍니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익보다 먼저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특히 가장 약하고 상처받고 힘없는 이들의 대변자가 되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구세주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다시 한번 함께 기뻐하며,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이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가득 내리시길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하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하루빨리 한반도에 평화의 은총이 가득하도록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도 전구를 청합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 평양교구장 서리
염수정 안드레아 추기경

[춘천교구]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12,36)


 

오늘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오셨고, 어둠 속에 빛이 비춰집니다. 그리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 속에 신음하던 모든 이들에게 생명과 구원의 기쁜 소식이 울려 퍼집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함께 기뻐합니다. 오늘 빛이 어둠을 이겼습니다. 구세주의 탄생은 이제 더 이상 어둠이 세상을 지배할 수 없다는 구원 약속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되어 오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진리와 사랑과 희망의 빛이신 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이제 우리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참된 구원의 빛이신 분께서 우리 곁에 항상 계시며 우리를 비추어 주시니 이제 우리는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빛의 자녀다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어쩌면 세상에 아직도 어둠이 만연해 보이는 것은 빛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참된 빛을 간직하며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 빛을 간직하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증거자’로 살아가길 요청합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을 보면 나와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쉽게 편을 가르고 서로를 적대시하는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누군가의 ‘다름’이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모습이라 생각하기보다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틀림’이라 여기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렇게 서로 적대시하고 편을 가르는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고, 서로 살리며 사랑으로 함께하는 ‘생명의 문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만이 참된 생명이요 빛임을 우리 자신부터 증거해야 합니다.


사랑 자체이신 분이 부족한 우리에게 먼저 사랑으로 다가오셨으니 우리도 그 사랑을 닮아 온 누리에 사랑의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분노보다 상대를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을, 원망보다 서로에 대한 감사함을, 미움보다 기도 안에서 용서를 선택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들과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모습 속에 우리 스스로가 먼저 자신을 어둠 속에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어둠은 어둠의 자리를 만들고, 빛은 빛의 자리를 만듭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사랑을 선택하면서 우리 삶에 빛의 모습이 더 커지도록 해야 합니다.


이번 성탄절에는 특히 우리 사회에, 그리고 우리 각자가 속한 공동체에 사랑의 빛이 머물 자리를 마련합시다. 성탄은 우리와 ‘다른’ 거룩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와 ‘같음’을 찾기 위해 몸소 자신을 낮추신 참된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우리도 사랑 안에 낮아져 ‘다른’ 이들과 ‘같음’을 찾으며 내 삶 안에도, 그리고 이 세상에도 점점 더 빛이 커져갈 수 있도록 함께 사랑의 길을 걸어갑시다.


사랑의 빛이 온 세상에 가득하길 바라며, 성탄의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 모두의 삶과 가정에 늘 함께하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2019년 주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춘천교구 교구장 김운회(루카) 주교

 

 

  

[대전교구]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거룩한 날이 우리에게 밝았습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고 선포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분, 그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말씀이신 예수님 탄생의 은총이 한분 한분에게 함께하시길 기도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하며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지만, 첫 인류는 불순종과 원죄로 말미암아 타락과 절망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후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되기를 끊임없이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려주시려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땅끝까지 모두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고 선언합니다.(이사 52,9-10 참조) 그러나 인간은 어리석게도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당신의 최고 사랑인 말씀이신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히브 1,1-2 참조)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가 직접 들으면 어떻게 될지를 알려 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산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이 처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접할 기회가 오자 모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당신이 말해 주십시오.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랬다가는 우리가 죽습니다.”(탈출 20,19)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들으면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음을 이스라엘 백성은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직접 전하고 싶어하셨습니다. 그때가 차자 우리 인간이 당신의 말씀을 듣고도 죽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친근하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오늘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요한 1,14) 아기 예수님의 탄생은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와 만나 말씀을 나누고 싶으신 간절한 사랑을 보여 주는 위대한 사건입니다.

 

이렇게 한처음에 하느님 곁에 있으셨던 말씀 자체, 하느님이신 아드님께서 우리의 시간과 역사 안에 들어오셨습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갓난아기로 우리 가운데에 오신 예수님의 성탄은 구세사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탄의 신비를 미리 내다본 이사야 예언자는 감탄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 구세주의 탄생으로 세상 끝까지 하느님의 구원이 선포되고, 모든 민족이 하느님을 찬양하는 은총의 시대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존경하는 자매형제님들,

예수님께서는 죄악의 어둠을 비추고 넘치는 생명의 은총을 주십니다. 빛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허물을 말끔히 없애 주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 마음에 사랑의 불을 환하게 밝히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고, 우리의 심장 안에서 숨쉬고 계십니다. 가령, 우리 몸이 살아 있으려면 36도의 체온을 유지해야 하며, 그 아래로 차가워지면 생명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면에서 ‘생명’은 곧 ‘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묘사하는 성령의 다양한 모습 중 하나가 불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은 반드시 빛과 함께하기에, ‘생명’과 ‘불’과 ‘빛’은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완전한 빛입니다. 부분적인 빛을 가진 인간이 죄로 어둠 속에 살고 있었기에 완전한 빛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4-5)

 

우리가 사는 세상을 바라봅니다. 아직도 생명보다는 반(反)생명에, 빛보다는 어둠의 문화에 이끌리는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생명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것은 알지만, 우리 생명이 최고의 가치로 존중받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우리 사회에 인격무시, 낙태와 자살, 안락사, 환경파괴 등 반생명적인 행태가 만연해 많은 이들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 원인이 다양한 만큼 예방이 쉽지 않겠지만, 어려움에 빠진 이웃이 고립과 단절에서 벗어나 공동체적 삶을 회복하도록 돕는 게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누구보다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건강한 역할이 세상에서 요청되는 성탄 시기입니다.

또한, 미워하고 다투고 경쟁하며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고, 이웃의 행복을 빼앗으면서까지 내가 필요한 것을 얻으려 하는 극단적 욕망과 갈등이 우리 사회에서 분출되고 있습니다. 성공과 소유를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것, 그것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우리가 어둠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는 증거가 아닐까 합니다. 진보와 보수 간의 이념 갈등,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갈등, 경영자와 노동자 간의 갈등,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간의 갈등, 주택 소유자와 비소유자 간의 갈등, 개발론자와 환경보호론자 간의 갈등, 고령자와 젊은이 간의 세대갈등, 남북과 주변국 간의 갈등 등 일상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갈등이 우리 안에서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물론 갈등은 어느 사회나 존재하는 것으로 건전한 발전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갈등은 구성원 모두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빛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이윤이나 이익만 좇는 세속적인 태도와 개인의 행복만 고집하는 이기주의는, 사실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고 노예로 전락시킬 뿐 아니라, 참으로 조화롭고 인간적인 사회의 발전을 저해합니다”라는 최근(도쿄돔 장엄미사 강론)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을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님들,

이러한 현실을 성찰하며 우리 교구는 지난 4년간 시노드의 여정을 함께 걸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시노드를 통해 마음속에 담긴 상처와 부끄러운 교회의 모습을 말하고 들으며 보듬는 귀한 시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과 성령의 인도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서로 존중하고 경청하면서 복음 선포를 위해 나아갑시다. 하느님을 향한 신앙 여정에 ‘경청을 통한 대화’와 ‘공동 식별과 공동 합의성’이라는 시노드 정신이 구현되도록 실천해 갑시다. 반생명과 극한 갈등의 세상에서 서로 공감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자세는 ‘나와 우리’에서부터 진지하게 생활화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시노드 정신을 되새기며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 구성원의 조화와 협력이 이뤄지는 교회,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교회, 세상의 편견과 그릇된 가치관이 넘어오지 못할 만큼 높지만 ‘가난한 이웃이 쉽게 넘어올 수 있는 낮은 교회’, 섬김과 나눔을 증거하는 교회로 성장해 가는 성탄 시기를 보내도록 합시다. 다시 한번 우리 안에 찾아오신 아기 예수님 탄생의 기쁨이 우리 모두와 함께하길 빌며,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2019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천주교 대전교구장 주교
유흥식 라자로

  

  

[인천교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아기 예수님 탄생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구세주 탄생의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고을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그것도 화려한 집이 아닌 초라한 외양간 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탄생을 예언한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작은 고을에서 펴져 나가는 빛은 장차 인류를 구원할 빛임을 알려줍니다. 주님이 오셨습니다. 구세주가 탄생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알아주지도 않고, 들어주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이 힘차게 구세주 탄생을 외칩니다. 천사들의 외침을 들은 이는 깨어있는 목자들이었습니다.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0)


천사들의 외침에 목자들은 서둘러 예수님을 만나러 갑니다. 목자들은 구유에 누운 예수님을 만나 뵙고 기쁨에 넘칩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외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라는 말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체험합니다. 인간을 사랑하시어 인간에게 구세주를 보내주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그리고 구세주를 맞이한 인류가 평화를 가지고 오신 분을 이제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기에 그 기쁨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 들은 모든 것에 대해 하느님을 찬양하며 기쁨에 넘칩니다.

 

하지만 천사들의 외침에도 모두가 주님을 알아 뵌 것은 아닙니다. 깨어있는 목자들만이 그리고 구세주를 깊이 기다려왔던 이들만이 구세주의 탄생을 알게 되고 경배하게 됩니다(마태 2,1-12 참조). 목자들은 천사들의 말에 서둘러 주님께 갔다고 합니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보자.”(루카 2,15)며 설레는 마음으로 구세주를 찾아 나선 목자들의 그 발걸음을 묵상해 봅니다.


목자들의 발걸음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싶습니다. ‘우리도 깨어 구세주를 만나러 가고 있습니까?’ ‘우리도 목자들처럼 서둘러 주님을 경배하러 가고 있습니까?’ 목자들이 주님께 힘차게 나아갔듯이, 우리도 주님께 힘차게 나아갑시다. 주님의 탄생을 맞이하는 오늘, 아기 예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교회는 여러분들과 함께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오늘 여러분들을 초대하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나아가기 위해 목자들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들은 깨어있었다고 합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늘 말했습니다. ‘깨어 준비하여라.’  이 말은 늘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 말씀의 실현을 위해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깨어있는 목자들의 모습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하며,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준비를 의미합니다. 목자들이 깨어있었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주님이 오실 그날과 그 시간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천사의 말에 모든 것을 순명하고, 아기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모습과 반대의 인물인 헤로데를 생각해 봅시다. 헤로데 역시 주님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먼 곳에서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들에게 거짓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동방박사가 다른 길로 돌아갔다고 하자, 그는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 아기들을 모두 죽여 버립니다(마태 2.16-18). 그는 자신의 생각과 권위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없애버립니다. 이렇듯 인간의 오만과 욕심으로 가득한 곳에 주님께서 머무실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도 우리 안에 가득 찬 내 주관적 생각들, 선입견들, 교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실 자리를 없애버립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보낸 지난 1년의 시간을 돌이켜 봅시다. 서로가 생각이 다르다고, 뜻이 통하지 않는다고, 자신들의 의견을 듣지 않는다고, 서로에게 벽을 세웠습니다. 서로에게 벽을 세우는 것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습니까? 정의에 대한 부르짖음이 분열을 일으킨다면, 정의에 앞서 일치를 위한 포용이 더욱 선행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세주 탄생의 기쁜 소식은 모든 이들에게 퍼졌습니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생각의 벽, 선입견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 탄생이 주시는 은총이자, 평화의 선물입니다. 서둘러 주님을 보러 갔던 목자들처럼 우리 자신을 얽매고 있는 것들을 버리고 탄생하신 주님을 보러 갑시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게 너그러움과 관용의 모습으로 다가섭시다. 바로 그 마음으로 구세주이신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갑시다.


구세주 탄생을 다시금 축하드리며, 여러분 모두에게 아기 예수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2019년 주님 탄생 대축일에
 천주교 인천교구장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
   

 

  

[수원교구]

 

“이들은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요한 1,13) 

 


 † 소통과 참여로 쇄신하는 수원교구

  신앙의 기쁨! 젊은이와 함께!

 

  사랑하는 수원교구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가운데 평화로 오신 주님의 은총과 영광이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1.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 평화는 은총의 빛으로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믿는 이들은 그분을 알아보고 경배하며 평화를 누립니다. 하늘의 영광이 땅에서도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구원의 성사가 성탄의 신비 안에서 태동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누시는 평화의 인사가 구유 안에 잠든 아기의 미소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장차 당신을 믿는 이들을 통해 선포될 지상의 평화가 베들레헴 마구간 안에서 온화한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평화가 세상의 어두운 밤을 고요히 감싸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 온 하느님의 평화는 장차 구원의 등불이 되어 세상을 밝히 비추는 빛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2. 세상은 여전히 갈등과 분열 속에 평화를 갈망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추구하는 평화는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와는 다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평화는 빠르게 확산하는 개인화의 물결 속에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목적을 충족하려는 것일 뿐, 더불어 나누고 내어주며 누리게 되는 하느님의 평화와는 너무나도 다릅니다. 게다가 분단의 현실 앞에서 아직도 불안한 평화를 누리고 있는 우리나라는 내년이면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이합니다. 70년 세월 동안 우리는 이 땅의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습니다. 하지만 주변 강대국들과의 이해관계 속에 얽혀있는 분단의 현실은 여전히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는 힘겨루기로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래도 이 땅의 평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는 지난 10월 추계 정기총회의 결정을 통해서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인 2020년을 맞이하여, 2019년 12월 1일 대림 시기부터 2020년 11월 28일까지 ‘한반도 평화를 위한 밤 9시 주모경 바치기’ 운동을 합니다. 저는 우리 교구민 모두가 한마음으로 이 땅의 평화를 염원하며 매일 밤 9시에 ‘주모경’을 바침으로써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모든 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실어주시기 바랍니다.


3. 성탄의 신비는 또한 우리를 성가정의 사랑 안으로 초대합니다. 예수님, 성모님, 요셉 성인이 이루는 성가정은 모든 가정의 원형이고 모범입니다. 그 안에서 충만한 사랑과 희생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정을 통해 당신의 구원사업을 이루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가정에 당신의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희망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를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가 필요한 곳에 언제나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특히 사회경제적 이유로 결핍을 겪고 있는 소외계층의 가정에 실질적이고 조건없는 나눔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조금만 눈을 들어 주변을 살핀다면 어렵지 않게 도움이 필요한 가정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탄 시기에 하느님의 평화를 전하는 사도로서 도움이 절실한 가정에 베푸는 나눔의 실천은 그 어떤 구유 경배보다 더 값진 경배이며 예물이 될 것입니다.


4. 지금 우리 수원교구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기계화, 도시화, 개인화, 고령화,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넘길 수 없는 난제들이 동시에 밀려들고 있습니다. 이 난제들은 비단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가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구는 이러한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하여 지난 2018년에 기존의 제도를 과감하게 개선한 새로운 대리구제도를 출범하였습니다. 그 목적은 ‘통합 사목’과 ‘지구 중심 사목’을 통해 사목의 소통 구조를 단순화하고 목자들이 신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지역 본당 공동체들이 활기 넘치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또한, 세대와 계층이 소통하고 화합하는 유기적 협력관계를 구축함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 년 반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좀 더 힘을 내서 앞으로 나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인답게 도도하게 밀려드는 세상의 거센 유혹과 난관에 맞서서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평화를 전하는데 힘차게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5. 교회의 어머니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성탄의 신비 한가운데에서 우리를 위해 전구하십니다. 이미 2000년 전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한없는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기도하셨듯이, 지금도 새롭게 태어나는 모든 어린 생명과 그 가정을 품에 안고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믿는 이들에게 인간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모든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며 함께 기도하자고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아니면 누가 성모님께 힘이 되어 드릴 수 있겠습니까? 생명을 경시하고 분열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평화를 노래하고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 이들이야말로 진정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입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2019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수원교구장 교구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

 

   

[원주교구]

성탄메시지 

 

♱ 찬미예수님, 

 

주님의 성탄입니다.

날마다 수많은 아기들이 탄생합니다.

그 많은 아기들의 탄생 가운데 주님의 탄생은 특별합니다.

한 아기의 출생이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주님의 탄생이 주는 기쁨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오를 수 없습니다.

새들도 하늘을 날고, 우주선도 다른 별들이 있는 창공을 오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계신 하늘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 하늘에 오를 수 있기 위해서. 신학자들은 이를 ‘강생’(降生)이라 말합니다.

 

우리 인간은 태초부터, 어려서부터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살기를 꿈꾸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처럼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처럼 영원히 살 수 있기 위해서. 신학자들은 이를 ‘육화’(肉化)라 말합니다.


주님의 탄생은 바로 강생, 육화의 시작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성탄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삶을 다할 때까지 그 선물의 의미를 다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뇌물은 근심 걱정을 안겨주지만, 선물은 기쁨을 줍니다.

주님의 성탄은 그 자체로 크리스마스 선물입니다.


선물은 받는 사람에게는 선물이지만,

거절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선물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 원주교구 교우 여러분 모두가

하느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가장 큰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2019년 12월 기쁨의 성탄절에
 천주교 원주교구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


    

[의정부교구]

 

2019년 성탄절 메시지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

 

  어둠이 깔려있는 세상에 빛을 비추시고 전쟁의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참 평화를 주실 분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빛과 평화가 되어 오셨습니다.  빛과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베들레헴 하늘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 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라고 천사들이 외쳤습니다.  우리도 이 세상의 어두움과 두려움을 없애 달라 외치며 아기 예수님께 달려갑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나약하고 천진한 아기 모습으로 태어나게 하신 성탄의 신비는 두고두고 생각하게 해 주는 인생의 숙제가 담겨있습니다.  첫째,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육화(肉化)의 신비는 우리 인간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가를 말해줍니다.  창조 때부터 당신을 닮게 만드셨고, 구세주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셨다는 사실은 인간품위의 고귀함을 말해주며 동시에 인간의 평등함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둘째, 아기 예수님의 탄생 그 자리에는 가난함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태어나실 자리로 택하신 곳이 가난한 곳이었으며, 탄생의 자리에 함께 있어 친구가 되었던 사람들도 가난한 목자였습니다.  셋째, 구세주의 탄생을 알렸던 베들레헴 하늘의 천사들이 외쳤던 것은 평화라는 선물이었으며, 이 평화는 마음 착한 이들에게 전해진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이처럼 성탄에 담겨있는 메시지이자 선물은 인간의 고귀함과 가난 그리고 평화입니다.

  성탄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보내면서 이 세계와 우리 사회를 위한 기도와 묵상 중에 가장 마음 아팠던 것은 인간의 고귀함이 손상되어 가고 있는 현실을 목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이나 TV에서는 끔찍한 살인사건이나 폭력사건이 보도되고 있으며, 부모들을 대신하여 사랑으로 돌보아 달라고 맡긴 아이들과 외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는 어르신들이 시설에서 함부로 다루어지고 있다 합니다.  또한 직장이나 사회 곳곳에서는 지위와 권력이 높다고 낮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무시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은 코리안 드림을 안고 찾아온 외국인 근로자들이 노동착취와 인권 유린에 시달리는 일들이었습니다.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어 나갑시다.


  인간의 품위와 존엄성이 무시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 신자들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모든 사람들이 존엄하고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작은 역할이라도 하는 것입니다.

  기쁨과 평화가 흐르는 예수님 탄생의 현장인 구유에 초대되었던 사람들은 가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예수님 부모들에게 환대를 받았듯이, 우리도 우리 삶의 현장인 교회와 직장 그리고 사회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따뜻하게 반기고 환대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높지 않고 평범한 사람, 오히려 낮은 사람들을 환대하고 축복해 주는 세상이 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보다 인간다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축복하다’는 단어는 라틴어로 ‘Benedicere’이며, 이는 ‘좋다(bene)’와 ‘말하다(dicere)’에서 유래한 것이라 합니다.  축복을 보낸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군가에게 좋은 말을 하는 일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떠합니까,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친절한 말로 사람들을 대하기보다는 더 강하고 아픈 말로 다른 사람을 제압하고, 사실이 아닌 말로 경쟁자를 힘들게 하는 사회로 변해가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특히 정치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프기 그지없습니다.  공동선을 위해서라면 경쟁 상대에게라도 양보하고 함께 해 나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교황권고인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에서는 성덕이 “일상생활에서의 작은 몸짓들로 자라난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16)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작은 몸짓’이란 예를 들어, 이웃들과의 일상생활에서 뒷담화를 하지 않고, 피곤하고 힘들어도 이야기를 걸어오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일이며, 길거리에서 만난 불쌍한 사람을 위해 묵주기도라도 짧게 드려주는 일을 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성탄의 선물인 평화


  평화는 성탄의 선물이지만, 사람들의 착한 마음과 기도로 연대할 때 이루어집니다.

  지난해 평창올림픽을 시작으로 불어왔던 한반도 평화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일찌기 예언자 이사야는 평화로운 동물의 세계를 묘사하며 민족들간의 평화를 노래하였습니다.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 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이사 11,6)  이런 평화로운 세계가 언제 올 수 있을까요….

  최근 들어 세계 정세는 더욱 험악해져만 갑니다.  자국 우선주의와 경제적인 이익을 따지며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힘들게 하는 비정한 지구공동체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평화는 성탄의 선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선물을 마음 착한 이들과 한결같은 심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베푸신다(이사 26,3) 하였습니다.  착한 마음과 평화를 위한 한결같은 심성은 누구보다 정치지도자들에게 필요합니다.  자국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착한 마음과 평화를 함께 누리는 심성을 갖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 뿐이십니다.

  한반도 평화와 관련된 정치지도자들을 위한 기도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온 교회가 밤 9시에 한반도 평화를 위해 주모경을 바치기로 한 결심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하며 평화의 주님께 한반도의 평화를 맡겨 드리도록 합시다.


2019년 성탄절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

 

 

 

  

[대구대교구]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습니다.”(요한 1,9)

 

 아기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가 여러분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추운 겨울 밤, 어둠으로 가득한 세상에 아기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교회는 이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해마다 성탄절을 지내며 구세주의 오심을 기념하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일 년 가운데 밤이 가장 긴 동지(冬至) 가까이에 성탄을 지내는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하겠습니다. 어둠이 가장 깊을 때 빛은 더 밝게 빛나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기쁨은 교회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우리 신앙의 보화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은 놀라운 구원 신비의 시작입니다. 구세주께서 위대한 왕이나 권력자의 모습이 아니라, 시골의 가난한 가정에서 나약한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대개 세상 사람들은 권력으로 남들을 억누르며 더 높아지려고 하고, 자신들의 이익만 챙겨 더 부유해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구세주께서는 더 낮은 모습으로, 더 나약한 모습으로 오셔서 사랑을 가르치십니다.

 

오늘날 지구촌에는 춥고 어두운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테러와 범죄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죽음의 위험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 가는 어린 아이들도 아직 많습니다. 이런 위험을 피해 자유세계를 찾아오는 난민은 넘쳐 나고 있지만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강대국들은 난민의 어려움을 외면합니다. 우리나라도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습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갈등이 심해지고, 서로 간의 혐오와 증오의 골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정치 상황은 불안하고, 경제 현실은 어렵기만 합니다. 청년들은 취업난에 허덕이며, 고령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많은 노인들이 가난과 외로움에 처해 있습니다. 서민들의 겨울나기는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정치적 혼란과 경기 침체는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를 무겁게 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어둡게 합니다. 이러한 시기에 맞는 성탄절의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하겠습니다.

 

빛이 어두운 세상을 밝고 따스하게 해 주는 것처럼, 예수님의 성탄이 이 사회를,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을 더욱 밝고 따스하게 해 주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 기쁜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 마음 안에 빛을 밝힙시다. 그 빛으로 세상을 더욱 밝고 따스하게 밝혀 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구는 2018년 성모당 봉헌 100주년을 맞아, 초대 교구장이셨던 안세화 드망즈 주교님께서 우리 교구를 ‘루르드의 원죄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께 봉헌했던 그 정신으로, 그리고 루르드의 성모님께서 주셨던 메시지대로 삼 년을 살고자 하였습니다. 첫해를 ‘회개의 해’로 시작했고, 지난해에는 ‘용서와 화해의 해’를 살았으며, 2020년 새해에는 ‘치유의 해’를 살고자 합니다. 올해는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특별 전교의 달’ 선포가 있었고, 우리 교구는 ‘냉담교우 회두와 선교’에 힘을 쏟았습니다. 이를 위해 많은 교우들이 노력하고 활동해 주셨습니다. 다시 한 번 교우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새해에도 계속 이러한 활동을 펼쳐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우리 교구는 2020년 새해를 ‘치유의 해’로 살고자 합니다. 우선 우리 교구민들이 대내외적으로 입은 상처에 대해 성모님께서 치유의 은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가톨릭 신자로서의 자긍심을 회복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치유가 되고 선물이 되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상처 난 현실을 치유하는 데 있어서 우리 교우들이 먼저 노력하고 모범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끊임없이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실천하려는 노력들을 좀 더 기울였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새해에는 우리가 특별히 성체를 공경할 뿐만 아니라 성체를 자주 영하고 성령의 은혜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 힘으로 먼저 나 자신이 치유되고, 치유 받은 내가 나아가 다른 상처 입은 이웃들을 치유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치유를 위해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성탄을 기뻐하며 축하를 나누고 있습니다.


아울러 2020년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인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남북한이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청산하고 같은 민족으로서 서로 이해하고 도와 한반도에 평화가 깃들기를 바라며 열심히 기도합시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2019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타대오) 대주교


  

  

[부산교구]

낮은 곳에 임하시는 사랑과 평화의 주님 

 

 

 

2019년 성탄절을 맞아 아기 예수님께서 내리시는 은총과 평화가 모든 분들에게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여러 이유로 이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시는 분들에게 그분의 따뜻한 손길이 머물기를 바랍니다.

  매년 12월 25일이면 우리는 ‘성탄절’을 경축하며 즐겁게 지냅니다. 본래 ‘성탄절’은 종교적 축제로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이 축제가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그리스도 신자 뿐 아니라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같이 기뻐하며 축하하는 모든 사람들의 축제가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분의 탄생을 축하하고 기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축제에만 집중하다 보니 성탄절의 본래 의미는 퇴색되고, 이 축제가 상업화되는 면도 없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탄절’의 근본 의미와 정신은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하시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고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와 똑같은 조건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아드님의 ‘강생의 신비’입니다.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는 모든 신적 특권을 버리시고 비천한 인간의 땅으로 오셨습니다. 이를 두고 리옹의 주교 성 이레네오(+200년)는 “신이 인간의 되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이 되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은 인간을 위하여 스스로 낮아지셨는데, 오히려 인간은 스스로 더 높아지려고만 하는데 모순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인간의 욕심과 오만 때문에 저질러진 많은 어려움이 산재해있습니다. 우선 지구 환경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산업화, 과학화라는 미명 아래 지구의 온난화 더불어 인간의 기본권마저 위협받고 있습니다. 국가 이기주의의 극에 달하여 이웃 나라의 어려움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자국의 이익만 바라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현실만 보아도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남북의 갈등에 이어서 이제는 한일 갈등과 무역보복, 지소미아 철회라는 강수까지 등장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더불어 국내 경제 불황과 정치상황, 종교인구의 감소와 종교의 침체, 불신의 만연, 높은 자살률 등 모든 면이 다 어둡고 밝은 데가 없어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은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 생각하는 국가와 개인의 이기주의에서 옵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시고 인간에게 생명과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고, 우리가 그분의 탄생을 기뻐하고 경축하는 것은 그분이 행하시고 사신 모든 것을 우리의 것으로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 자신들만 쳐다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보다 먼저 이웃에게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불우한 사람에게는 도움과 사랑의 손길을 뻗고, 힘들어하고 심지어 삶을 포기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위로를 전해야 합니다. “그래, 내가 네 곁에 있다. 너는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존재다. 우리 더불어 살아가자. 힘이 되어 줄께!”라고 용기를 주고 격려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성탄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고, 그분의 성탄절을 축제로 지내는 사람들의 자세와 태도 역시 이러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과 자세를 가진 사람만이 예수님의 성탄을 축제로 지낼 자격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분의 ‘강생’을 우리 것으로 하고, 그분의 ‘강생’을 우리가 삶으로써 이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고 밝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성탄 대축제를 지내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 자신과 삶을 되돌아보고 더 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이 세상에는 희망이 넘치고, 보다 밝은 세상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이기심에서 벗어나 서로를 위하는 세상을 만들어봅시다. 이 세상과 우리나라에 힘찬 ‘희망가’가 울려 퍼지는 날을 기다려 봅니다.

 

천주교 부산교구장 손삼석 요셉 주교 


  

[청주교구]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이사 9,6).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1. 오늘은 예수 성탄 대축일입니다. 구세주 예수님께서 오늘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경축하며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신자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우리를 위하여 한 아기가 태어나셨습니다(이사 9,5 참조). 성탄 날에 거행하는 세 번의 미사는 한결같이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들려줍니다. 이사야는 우리를 위한 한 아기가 태어나고,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일 것이며 그의 이름은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임금이라 불릴 것이라고 선포합니다(이사 9,5-6 참조). 그 아기는 사람들이 짊어진 무거운 멍에를 없애고 불의의 세상 한 가운데에서 평화를 이룩할 것이니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라고 선언합니다(이사 9,3-4.6. 참조). 장차 태어날 한 아기가 권능의 하느님이시고 영원한 아버지이시며 평화의 임금이시라는 이 예언은 구약 성경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때가 차서 이사야가 예언한 한 아기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베들레헴 작은 고을 초라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이 바로 권능의 하느님이시고 영원한 아버지이시며 평화의 임금님이십니다.

3.  예수님은 평화의 임금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평화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평화의 길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환대하시고 용서하는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지치지 않고 선포하시며 원수를 사랑하라고(마태 5,44 참조) 가르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폭력과 불의에 더 큰 사랑과 더 큰 선으로 자신을 내어주시어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제50차 세계평화의 날 담화문, 3항 참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곧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비폭력의 길을 가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평화를 이룩하시고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16 참조).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몸소 우리의 평화가 되셨습니다. 그 평화는 삶과 죽음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가이없는 사랑으로 다 내어주시고 얻으신 열매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시어 목숨을 내어주신 더 없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4. 평화는 우리 모두의 갈망입니다. 우리 모두는 마음의 평화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가정의 평화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나라의 평화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는 한반도의 평화 나아가 세계의 평화를 원합니다. 평화의 강력한 무기는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라(요한 15,12 참조), 원수를 사랑하라(마태 5,44 참조)는 복음의 명령은 평화의 대헌장입니다. 평화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는 유난히 국론이 분열되고 사회계층간 갈등이 첨예해지고 있습니다. 거짓이 난무하고 불의와 불공정이 만연하며 서로간의 무관심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반목과 증오, 원한과 적개심을 내려놓고 사랑과 진실이 가득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또한 무관심의 높은 장벽을 허물고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사랑을 끊임없이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특히 소외된 노인과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관심과 보살핌으로써 희망의 등불을 밝혀주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평화의 강력한 무기는 기도입니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이하여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매일 밤 9시에 함께 바치는 우리의 기도는 평화를 주러 오신 아기 예수님의 성탄에 더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십니다(루카 1,79 참조). 평화의 임금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세상의 악을 이기시고 승리하셨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우리 자신을 형제들에게 내어주는 행동하는 사랑을 통하여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5. 사랑은 평화의 바탕이자 원동력입니다. 사랑은 평화로 가는 길이며, 평화는 사랑의 결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삶과 죽음을 통하여 당신자신을 가이없이 내어주는 사랑으로 우리의 평화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 5,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평화의 임금이신 예수님의 성탄을 기뻐하는 오늘,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는 사랑의 등불을 밝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리며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신자여러분의 가정과 이 땅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2019년 12월 25일
예수 성탄 대축일에
청주교구장 장 봉 훈 가브리엘 주교

   

[마산교구]

2019년 성탄 담화문

 

 

 아기 예수님, 진정한 평화를 주시는 분

 

사랑하는 우리 교구 모든 분들이 주님 성탄의 은혜로 평화와 기쁨을 가득히 누리시길 빕니다.

 

성탄 대축일 밤 미사에서 우리는 루카 복음서를 듣게 됩니다. 북부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의 한 어린 처녀가, 로마 황제의 호구조사령에 따라 호적 등록을 하기 위해서, 만삭의 몸으로 지아비의 본적지인 남쪽 유다지방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해산날을 맞게 되었는데 몸을 풀고 아기 누일 방 하나 구하지 못해 결국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짐승의 먹이통에 뉘었습니다. 이 가련한 이야기가 우리가 ‘주님’(퀴리오스 Κύριος)이라 부르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탄생 모습이고 아울러 이 죄 많은 세상에 ‘기쁜 소식’(복음: 에우앙겔리온 ευαγγὲλιον)이 시작되는 첫 장면입니다.

 

루카 복음의 이 대목을 조금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이야기 안에는 묘하게 숨겨진 커다란 대비(對比 contrast)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아우구스투스라는 황제를 언급하며 시작합니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루카 2,1)

  고대 중국 역사에서 진나라가 다른 나라들을 쳐 이기고 패권을 잡은 후 왕이 자신을 처음으로 황제로 부르기 시작하였다고 하여 진시황제라 했듯이, 서양 지중해 패권왕국 로마 역시 죽이고 죽이는 권력다툼 끝에 최후의 승자가 스스로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 지존 至尊)라 부르며 시황제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는 죽이고 죽이는 권력다툼 끝에 쟁취한 최고(最高)의 자리에 앉은 절대자를 뜻합니다. 실제로 황제를 따르는 무리들은 그를 ‘주님’(Κύριος)이라 부르며 거의 신으로 떠받들었습니다. 또한 황제의 이름으로 임명된 사령관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 소식을 황제의 이름으로 알렸는데 그것을 ‘복음’(에우앙겔리온 ευαγγὲλιον)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몇 개의 용어를 통해 최고 권력자인 로마 황제와 포대기에 싸여 짐승의 먹이통에 뉘어있는 예수 아기를 날카롭게 대립시킵니다. 최고의 자리에 앉은 황제는 무력으로 그 자리를 ‘쟁취’했지만 가장 낮은 자리에 누운 갓난아기는 하느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황제는 ‘무력(武力)’을 사용하지만 갓난아기는 ‘무력(無力)’합니다. 황제는 무력(武力)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만 갓난아기는 무력(無力)을 통해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옛말에 ‘왕은 하늘이 내려준다’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진정한 왕입니까? 힘으로 자리를 쟁취한 자입니까, 하늘이 내려준 분입니까? 자신을 드러내고 높이는 자입니까, 하느님을 드러내고 높이는 분입니까?

 

  이 대비를 통해서 복음사가는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분은 저 황제가 아니라 이 아기라고,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이라 부를 수 있는 자는 황제가 아니라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라고 힘차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복음 또한 힘으로 상대를 누르고 이겼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기운을 받아 상대를 사랑하고 용서함으로써 죄와 악에 대해 승리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승리를 선포하는 것이 참된 기쁜 소식, 곧 복음인 것입니다.

 

  세상은 스스로를 높여 자기를 드러내는 길을 구하지만 우리 주님은 스스로를 낮추어 아버지 하느님을 드러내는 길을 여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하나의 표징입니다. 이 표징을 통해서 우리는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는 작년과 올해 사목교서를 통해 진정한 평화와 참된 자유의 원천은 하느님의 사랑이며 그것을 이루는 길은 용서의 실천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특별히 지금은 우리나라가 매우 위중한 처지에 있습니다. 이 나라 백성으로서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진정한 평화와 참된 자유를 주시라고 아기 예수님께 간절히 간절히 기도드립시다. 아멘.

  


2019년 성탄절에
 교구장 배기현 콘스탄틴 주교

 

 

   

[안동교구]

육화(肉化)의 신비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 14)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라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바로 하느님이셨기 때문입니다(요한 1, 1). 이렇게 하느님께서 사람과 함께 하시고 싶어서 하느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을 우리는 ‘육화(肉化)의 신비’라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토록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신 이유를 사랑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참으로 놀랍고 오묘합니다. 그러면서도 지극히 겸손하고 단순합니다. 오로지 상대방의 처지에서 상대방과 함께하기 위해, 내려갈 때까지 내려가는 지극히 겸손한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이기에 겸손하다고 말할 수 있고, 그 낮은 자리에서 상대방을 위해 내놓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내놓는 지극히 단순한 사랑이 하느님의 사랑이기에 단순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십니다. 당신 자신을 한없이 낮추십니다.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지칠 줄 모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이 바로 이러한 사랑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아기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한없이 위대하고 강하신 분이 힘없고 약한 어린 아기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한없이 부유하신 분이 가난하게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세상의 창조주 하느님이 한낱 피조물이 되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하느님이 이렇게 우리를 향해 오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더 가까이 계시기 위해 우리 곁으로 오십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모든 순간을 더욱 함께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 걸으려 오십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 한가운데로 들어오십니다. 우리에게 오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시어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위대하고 강하고 전능하신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작아지시고 약해지시고 모든 것을 내어주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당신 자신을 낮출 수 있는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시고, 당신 자신을 끝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가장 가난한 사람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 사랑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당신 사랑 때문에 이루신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었으며 하느님께서 친히 택하신 사건이며 하느님께서 친히 이루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서 탄생하신 그 아기 안에서 하느님을 봅니다. 하느님은 저 멀리 하늘 위에 계시지 않고 우리 가까이 우리 땅 위에서 우리와 더불어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하느님은 주님의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한 모습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오십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 12)


“하느님께서는 힘에서 무력에로, 강함에서 약함에로, 창조주에서 피조물에로, 위대함으로부터 작음에로, 독립에서 의존에로 그렇게 자신을 옮기고 싶어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육화의 신비입니다.”(헨리 나웬)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강생의 신비를 육화의 신비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목자들에게 알린 그러한 모습으로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오시고 그러한 모습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 12)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분께 경배하기 위해서 ‘한 갓난아이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함께 찾아봅시다. 한 갓난아이처럼 무력하기 짝이 없어서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이 자신의 비참한 조건을 감수해야 하는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의 모습이 그러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형제 안에서 주님께서 친히 태어나시고 주님께서 친히 함께 계신다고 하셨으니 우리가 주님을 섬기듯이 이 형제를 받아들이고 섬기며 사랑할 때 우리가 거기서 주님을 만나 뵙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이웃에서, 마을에서, 공동체 모임에서, 구역/반 모임에서, 공소에서, 본당에서 그러한 형제를 찾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 양들을 지키면서 주님을 밤새워 깨어 기다리던 목자들처럼, 우리도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천사가 우리에게 주님께서 계신 곳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게 인도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가난한 형제들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태어나시는 자리가 되는 가난한 형제들을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멀리 계시지 않고 가까이 계신다는 사실도 잊지 맙시다.


2019년 12월 25일

안동교구장 권 혁 주 주교

 

 

  

[광주대교구]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이사 52,7) 

 


아기 예수님의 성탄은 평화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평화의 길이 되고, 구원을 갈망하는 인류에게는 참 빛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심으로,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참사람이 되는 길이 비로소 열렸으며, 세상의 어둠과 암흑을 깨고 모든 것을 새롭게 변모시키는 희망의 새벽이 마침내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사셨다(요한 1,14 참조)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가장 안타까운 일은 우리 모두가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이미 태어날 때부터 서로 건너갈 수 없는 부와 가난 사이의 큰 구렁에 직면해야 하고, 끝없는 경쟁을 시작해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좁고 높은 취업의 문 앞에 서서 인간적인 자존감을 버겁게 지켜가야 할 처지입니다. 많은 어르신들은 빈곤과 병고에 시달리며 쓸쓸한 노년의 삶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 노동은 냉혹한 자본의 힘에 밀려나 그 가치와 그 참뜻을 실현시키는 것이 매우 어렵게 되었습니다. 낯선 외국인들, 이주민들,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배제의 문화는 보다 다양하고 적극적인 환대의 문화로 변모되어야 합니다. 자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이른바 ‘나 홀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확대되었고,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려는 ‘주체적인 삶’은 어려워졌으며, 또한 ‘더불어 사는 공동체성 회복의 삶’을 이루는 것도 더더욱 힘들어졌습니다.

나아가, 이른바 갑질문화, 배척의 이데올로기 그리고 인종적, 종교적, 언어적, 문화적, 정치적 다름을 존중하지 못하는 배타적 문화는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훼손합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다양성 속의 일치를 이룰 수 없고, 적대와 대결의 문화가 지배하며, 또한 평화와 화해, 용서가 싹트기 어렵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다양한 문화의 교류가 서로의 문화를 성장시킬 수 있는 힘이므로 이주민들과 난민들의 고유한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길은 곧 참사람이 되는 길이며, 하느님의 가르침만을 유일한 길로 선택하는 주체적이고 더불어 사는 삶의 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무식하지만 순박한 목동들(루카 2,8-20 참조)과 박식하지만 겸손한 동방의 현자들(마태 2,1-12 참조)만이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죽했으면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요한 1,10)고 했겠습니까. 하느님께서는 심지어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7-8)

하느님은 인간이 되심으로써 인간의 존엄성과 품위를 높여주셨습니다. 곧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눈먼 이들에게 빛을, 잡혀가고 억압받는 이들에게 해방을,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는”(루카 4,18-19 참조) 삶의 길을 통하여 인간의 길을 완성하셨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하느님의 길을 현대 사회에 비추어 새롭게 해석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과 행동으로 가난한 이들을 위로하고, 현대 사회의 새로운 노예살이에 얽매인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자신 안에 갇혀 제대로 보지 못하는 이들이 다시 볼 수 있도록 하고, 존엄성을 빼앗긴 모든 이가 다시 그 존엄을 찾도록 하는 것입니다.”(『자비의 얼굴』, 16항)

 

얼마나 아름다운가, 평화와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이!

인간의 존엄과 품위는 세상의 평화 없이 이룩할 수 없습니다. 또한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로마 8,22) 있는 지구를 살리는 일에 적극 나서지 않으면 인간의 존엄과 품위 또한 온전히 지켜낼 수 없습니다. 평화는 인간의 존엄과 품위, 어머니인 지구를 지킬 수 있는 바탕입니다. 그리고 평화는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과 폭력을 극복할 수 있는 뿌리이며, 정치적, 군사적 갈등과 대결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특별히 남북 간의 평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중단될 수 없습니다. 한반도에서는 “어떤 전쟁도 정당하지 않습니다. 정당한 것은 오직 하나, 평화뿐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자국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국제적 이해관계 속에 한반도의 평화를 내맡겨 둘 수는 없습니다. 남북 간의 대화를 가로막고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그 어떤 정치적, 군사적 시도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남북 간의 형제애를 증진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를 자주적으로 이룩하기 위한 지름길이며, 세계 평화를 위한 버팀돌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평화와 구원의 기쁜 소식은 자연의 어머니인 우리 지구를 살리는 일을 통해서도 실현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지구는 함부로 훼손당하면서도 말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뿐인 지구를 지키기 위해서는 생태 환경을 파괴하는 이기적 탐욕에 대한 회개가 절실히 요청됩니다.

 

“저희 삶을 치유해주시어 저희가 이 세상을 훼손하지 않고 보호하게 하시며 오염과 파괴가 아닌 아름다움의 씨앗을 뿌리게 하소서.”(『찬미받으소서』, 우리의 지구를 위한 기도)


우리는 더 나은 세상, 아름다운 지구를 가꾸는 선교사!

우리 그리스도인은 더 나은 세상, 아름다운 지구를 지키기 위한 그리스도의 제자요 선교사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세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복음이 되었듯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 자체도 더 나은 세상과 아름다운 지구를 지키기 위한 복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서, 우리가 사람들을 만나는 곳에서, 우리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평화가 흘러넘치도록 마음을 다합시다. 우리들의 일상 안에서 더욱 확산되는 평화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자양분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를 아름답게 보존하기 위한 생태 환경에 대한 회개는 우리 삶의 태도를 새롭게 하고 평화로운 삶을 위한 뿌리가 될 것입니다.

더 나은 세상, 아름다운 지구를 지키는 일은 우리 교회가 완수하려는 복음 선교의 목표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교구 사목평의회가 제안하고 교구장인 제가 승인한 2020년부터 2022년까지 3년 동안 지속되는 ‘3개년 특별 전교의 해’를 알차게 지내기 위한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언급하신 “선교란 단순히 신자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신자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열심히 살도록 독려하는 것”임을 기억하면서, 3개년 특별 전교의 해가 지향하는 실천사항들을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선교 열정을 새롭게 하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디딤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019년 11월 20일부터 23일까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태국 사목방문 주제 말씀은 “우리 모두 사랑과 평화의 다리를 놓읍시다.”였습니다. 끼리끼리만 어울리는 집단이기주의와 배제의 문화가 퍼져가는 우리 사회에 자신을 희생하면서 이웃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사랑과 평화의 다리를 놓는 선교사가 되기를 권고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있는 곳에서 실천하도록 노력합시다. 이러한 우리의 삶이야말로 바로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성탄의 참뜻을 실천하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덧붙여 2020년, 우리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이합니다. ‘민주, 인권, 평화, 통일’을 바탕으로 대동사회를 지향했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정신이 모든 국민과 세계인들이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민주사회 정신으로 확산되기를 희망합니다.

 

인류의 희망은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고 가난한 사람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탄생의 순간부터 마지막 삶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비우시고 낮추심으로써 온 세상에 참 평화를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거룩한 탄생이 세상 모든 이의 희망이 되고 기쁜 소식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019년 12월 25일
천주교 광주대교구 
김  희  중  히지노 대주교

  

   

[전주교구]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요한 1,9)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늘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의 사랑과 축복이 교우 여러분과 온 누리에 가득 내리기를 빕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을 ‘큰 빛’으로 소개합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이사 9,1)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주님께서 어두운 이 세상에 탄생하시어 당신 백성에게 밝은 빛을 비추신다는 것입니다. 탄생하신 주님께서 당신 백성 한가운데 계심으로써 백성의 근심과 슬픔을 덜어주시고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그 시초부터 어둠을 가까이 하였습니다. 우리의 첫 조상은 하느님을 배반하였고, 이어서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는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 이후로 이 세상에는 죄로 인한 타락이 전반적으로 이어졌습니다. 과연 인류의 역사는 억압과 증오, 폭력과 전쟁 등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어둠의 질곡에서도 하느님께서는 기다리셨습니다. 인간이 당신께 돌아설 것을 기다리셨던 것입니다. 거듭된 인간의 거부 때문에 그만 포기하실 이유가 충분했지만 그분은 결코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기다리시고 또 기다리셨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성실하신 “당신 자신을 부정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2티모 2,13)


따라서 어두운 이 세상을 비추는 성탄은 하느님께서 정말 우리 아버지이시며 우리 인간에 대한 기대를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어두운 죄악이라도 그분의 사랑을 꺾지 못합니다. 아니 하느님의 사랑을 소진시킬 수 있는 죄악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엄밀한 메시지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부패와 죄악보다 더 강하십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당신 자녀인 우리에 대한 기대를 조금도 접지 않으십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처럼, 그분은 역사의 문지방에서 멀리 내다보시며 당신 자녀의 귀환을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이런 기다림 가운데 하느님께서 마침내 당신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천사는 탄생하신 주님에 대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2) 표징치고는 정말 보잘것없습니다. 약속된 구세주가 화려하고 위엄한 모습으로 오실 줄 알았는데, 소리 없이 오시고 초라한 곳에 누워계시다니요?! 전쟁과 폭력 등 어둠의 세력을 조금도 맞설 수 없는 무기력한 모습입니다. 오히려 외부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연약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행동방식입니다. 그분은 항상 겸손하게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행동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무능하거나 어리석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1코린 1,24)입니다. 사람의 어떤 힘보다 더 강하고, 사람의 어떤 지혜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기대와 생각과는 다르게 행동하십니다.

 

사실 주님께서 연약한 갓난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이유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나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모두가 당신께 다가설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작게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너무나 작은 아이가 되셨기 때문에, 이제 그분께 다가서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교우 여러분, 저는 이 성탄절에 천사가 목자들에게 전했던 것처럼 “두려워하지 마라.”(루카 2,10)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는 북미회담 결렬과 그 이후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 권력자들의 기득권 집착으로 인한 국론분열, 계층 간 갈등, 각종 사회적 혼란 등 짙은 어둠이 드리워져있지만 우리 곁에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어두운 상황을 익히 알고 계시고 또한 이에 좌절하지 않으십니다. 계속 우리의 돌아섬을 기다리십니다. 마침내 구세주께서 우리에게 탄생하시어, 우리와 함께 걷고 우리의 발걸음을 비춰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무엇에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울러 저는 큰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님에게서 우리의 어둠을 밝히는 해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세주는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해, 특히 힘없는 자를 우선적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낮추어 연약한 아기가 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주님의 모범에 따라 무엇보다도 먼저 가난한 사람을 배려해야 합니다. 강대국은 약소국을, 권력자는 비천한 자를 먼저 생각해야 하고, 공동체는 가장 어려운 사람을 먼저 배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낮추는 하느님의 겸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작은이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작은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작은이로 오신 그리스도의 빛이 온 누리를 비추도록 우리가 먼저 겸손의 길에 들어섭시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굳은 확신으로 모든 두려움을 물리칩시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낮추어 작은이에게 먼저 다가갑시다. 그리하여 성탄의 신비가 온 누리에 가득하게 합시다.

천주교 전주교구장 주교 김선태(사도요한)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늘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의 사랑과 축복이 교우 여러분과 온 누리에 가득 내리기를 빕니다.


천주교 전주교구장 주교 김선태(사도요한)


  

  

[제주교구]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구세주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실 무렵,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제국 영토내 모든 주민들에게 호적등록을 명하였습니다. 제왕들이 호구조사를 하는 목적은 더 많은 세금을 걷고, 군 병력을 충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산골 마을 노동자 요셉과 출산이 임박한 마리아까지 베들레헴으로 긴 여행길에 나서야 했던 것은 황제의 권세와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제왕과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명령에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는 힘없는 백성들의 순종과 희생 위에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이 시대에도 국가지도자들은 경제성장과 정치업적을 자랑하지만, 밑바닥 인생들은 그 밑에서 고달프고 배고픈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습니다.

  며칠 전 인천 어느 편의점에서 한 남자와 아들이 우유와 사과 1만원어치를 훔치다가 발각되었습니다. 그는 34세의 젊은 택시 기사였으나, 당뇨와 갑상선 질환이 악화되어 일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요양기간이 여섯 달이나 지속되자 끼니를 거르는 날이 많아졌고,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아침도 점심도 못 먹고 배고파하는 아들 모습에 아버지는 자기도 모르게 눈앞의 먹거리에 손이 갔습니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편의점 주인도 고발을 취하하고, 경찰관은 자기 주머니를 털어 그 부자에게 국밥을 대접하였습니다. 가게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어떤 이웃은 식당까지 따라와서 현금 봉투를 두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습니다. 우리나라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이라고 하지만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아야 최저기초생활이 가능한 174만이나 되는 국민이 심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국회는 50조원이라는 사상 최대의 국방 예산을 통과시켰습니다. 그중 33.3%에 달하는 16조7천억 원이 무기 도입 예산입니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우리 군은 금년부터 세계 최강의 스텔스 전투기 F35기종을 미국으로부터 구매하여 배치하기 시작했습니다. 2019년부터 2021년까지 40대를 구매하는데 대당 가격이 1000억 원에 달합니다. 해마다 벌여온 한미군사연합훈련에는 800억 원에 달하는 군사비를 투입해 왔습니다. 북한은 이러한 우리 군의 군비증강을 비난하며 자신들도 핵실험을 하고 갈수록 더 가공할 탄도 미사일을 계속 시험 발사합니다. 북녘 땅에 많은 어른 아이들이 식량부족, 영양부족에 허덕이고 있는 상황에서 대당 20억 원이 넘는 미사일을 수 없이 허공으로 날려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국민들 중에는 단 돈 1만원이 없어서 진열대의 우유를 훔칠 정도로 가난에 시달리는 이들이 생겨나는데, 국민을 위해 봉사하라고 권력을 위임 받은 의원들은 세계 최고수준의 연봉 1억5천176만 원을 누리며, 생명을 죽이는 무기구입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너무도 손쉽게 통과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 모순적 현실은 인류 역사의 발전과 문명에 너무나 역행하는 반인간적, 야만적인 처신임을 정치 지도자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는 군비축소를 호소해 왔습니다. 많은 이들은 무기를 충분히 비축함으로써 적에게 전쟁을 단념하게 하고 국가 간의 평화를 보장해주는 가장 유효한 방법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군비 경쟁은 평화를 보장하지 못하며, 전쟁의 원인을 제거하기보다는 국가 간의 안전과 평화에 심각한 위협이 됨을 가르쳐 왔습니다.(간추린 사회교리 508-509항) 또한 새로운 무기를 개발하고 보유하는데 소요되는 엄청난 재원의 낭비는 가난한 이들의 구제를 막고, 민족들의 발전을 방해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315항) ‘군비 경쟁은 인류의 극심한 역병이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것입니다. 군비 경쟁이 계속된다면 언젠가는 가공할 온갖 재앙을 일으키고 말리라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여야 합니다.’(사목헌장 81항)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남기신 평화는 힘의 균형으로 만들어져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잠정적 평화가 아닙니다. 포대기에 쌓여 구유에 누운 가장 무력한 갓난아기가 보여주는 평화입니다. 아기는 누구의 것도 탐내지 않고, 빼앗지 않고, 감추지도 않으며 모든 것을 내어놓습니다. 그리하여 누구도 아기를 적으로 여기고 맞서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이 갓난아기에게 배워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아기 예수님의 평화가 가득히 내리시기를 기원합니다!

2019년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
 제주교구 감목 강우일
  

 

[군종교구]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루카 2,11) 

 

I

 

주님 안에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구민 여러분, 앞에서 인용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전하는 천사의 말은, 성탄시기만이 아니고 언제나 우리 가슴을 놀라움과 기쁨으로 가득 채워줍니다. 우리 주님의 육화, 곧 하느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그대로 취하시어 세상에 탄생하심이 주는 영적인 의미가 너무나도 커서, 우리가 주일 미사나 대축일 미사 때마다 함께 큰 소리로 바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이나 ‘사도신경’에서 밑줄이 그어진 부분을 보게 되는데 이는, 바치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깊은 절을 하도록 권고하는 부분으로써,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탄생을 고백하는 다음 문맥입니다. 저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앙고백’의 이 부분을 인용합니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이 부분의 문맥이 우리 주님의 탄생을 가장 잘 요약해주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신앙고백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동정이신 성모님의 몸을 통하여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거듭거듭 믿으면서 마음과 입으로 고백합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시고 자비 충만하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도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심은,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보이신 한없는 사랑의 표현으로써(참조: 요한 3,16), 이 사랑 때문에 당신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한없이 낮추시어 보내셨고 비참할 정도의 가난한 상태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이 ‘낮추심’, 곧 하느님의 겸손은 이 세상 그 무엇에 비유해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겸손입니다. 사람이 벌레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도 비유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하느님께서 당신을 낮추신 것입니다. 이 ‘낮추심’은 이미 탄생의 여러 장면에서 상징적으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하느님께서 당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실 때 하늘에서 천둥 번개와 번쩍이는 광채와 우렁찬 천상의 찬미가 속에 내려보내신 것이 아니라, 서민에 속한 가문의 동정 마리아를 택하시어 주님을 탄생하게 하신 사실입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을 탄생시키는 소식을 왕이나 귀족이 아닌 서민 중의 서민이며 외롭고 고달픈 삶을 살아가던 양치기 목동들에게 전하신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왕이나 귀족의 말을 듣지 이 서민층의 목동들 말을 듣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이 서민 목동들을 당신의 가장 중요한 소식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니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은 아니라도 사람들이 잠자는 보통의 방이라도 택하여 탄생시키셨을 텐데, 가축들의 집인 냄새나고 불결하고 추운 외양간에서 탄생하게 한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죄로 인해 멸망으로 향하던 나를 포함한 모든 인류를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으로 인해,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도 겸손한 모습으로, 가난한 모습으로 탄생하게 하셨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금 깨달으면서 마음속 깊이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를 바치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 감사와 찬미는 곧바로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감사에 찬 사랑의 응답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성탄절의 말구유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고 “하느님, 감사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의 기도를 바치도록 합시다. 이 사랑의 고백이 나를 형제애로 인도해주어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의 두 가지 축복을 누리게 해줍니다. 이 두 가지 축복보다 더 큰 축복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두 축복이 나를 ‘사랑의 사람’으로 변모시키고 나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II


저는 우리 주님의 육화-탄생이 보여준 하느님의 ‘사랑의 은혜’에 이어, ‘빛의 은혜’도 잠시 묵상하고 싶습니다. 은퇴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2005년 성탄절 미사 중에 하신 당신의 강론에서 주님의 육화-탄생이 가져온 또 하나의 은혜인 “빛의 은혜”를 말씀하셨습니다. 루카복음서는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2,9)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말씀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말씀을 좀 길지만 인용하고 싶습니다. “빛은 생명의 원천입니다. 그러나 빛은 특히 깨달음을 의미하고 거짓과 무지의 어둠과 대립되는 진리를 뜻합니다. 그래서 빛은 생명을 주고 길을 보여줍니다. 또한 빛은 따뜻함을 주기에 사랑을 뜻합니다. 사랑하면 세상이 밝아지고 미워하면 어두워집니다. 베들레헴 구유에 세상이 기다리던 위대한 빛이 나타났습니다.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안에서 하느님은 당신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그 영광은 우리를 사랑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당신 자신을 내어 주고 모든 위대함을 포기하는 사랑의 영광입니다. 베들레헴의 빛은 결코 꺼지지 않습니다. 그 빛은 모든 세기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그 둘레를 비추었습니다.”

 

교황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베들레헴에서 나온 빛과 사랑과 진리의 자취가 세기를 통해서 계속됩니다. 바오로에서 시작하여 아우구스티노,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도미니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아빌라의 데레사 등을 거쳐 마더 데레사에 이르기까지 성인들을 두루 살펴보면 베들레헴의 신비에서, 다시 말해 아기가 되신 하느님한테서 언제나 새롭게 불타오른 자비와 빛의 흐름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친히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하셨고, 우리에게도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보고 “세상의 빛”이라고 하실 때, 이는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빛이 아니고 주님의 빛을 충실히 받아 살아가면서 세상에 반사해주는 빛인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반사하는 빛은 바로 “착한 행실”에서 드러나게 되고 이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해 줍니다.(참조: 마태 5,16)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앞서 말씀하신 “베들레헴에서 나온 빛과 사랑과 진리의 자취”인 많은 성인들도, 결국 주님으로부터 빛을 받아 착한 행실을 살아감으로써 주님의 빛을 반사해준 이들입니다. 우리도 이 성인들처럼 주님의 빛을 충실히 받아 살아가며, 우리의 착한 행실로써 그 빛을 반사하여, 세상 모든 이가 내가 반사해주는 주님의 이 빛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시다. 주님의 빛을 누리고 그 빛을 착한 행실을 통해 세상을 비추는 축복된 삶을 추구하도록 합시다.

 

III

 

주님 안에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교구민 여러분, 우리 주님의 육화-탄생의 신비를 잠시라도 묵상하면서, 이 신비 속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하느님의 놀라우신 빛을 영신의 눈으로 바라보도록 합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이 ‘사랑의 은혜’와‘빛의 은혜’에 대해 깊이깊이 감사드리고, 우리 각자 하느님의 ‘사랑의 은혜와 빛의 은혜’를 체험하면서 이 하느님 사랑과 빛의 증거자요 전달자가 되도록 합시다. 우리 주님의 성탄 은혜 충만히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2019 성탄절을 맞으면서

천주교 군종교구장 유수일 F. 하비에르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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