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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배성사] 야곱의 확언(창세 27,19)도 거짓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성경공부_야곱][교리용어_악의 신비][_lie][성경해석] #<홀수연중13토1독서> 782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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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7 ㅣ No.1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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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12,10-20에서 만약에 아브람이 거짓말장이라면]의 후반부입니다. 글의 크기 때문에, 부득불 두 부분들로 나누어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기 전에, 전체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를 위하여, 위의 글을 반드시 읽으셔야 할 것입니다.
(이상, 게시자 주 끝).

게시자 주: 지금까지는, 즉 위의 주소에 있는 글에서, 주로 구약 성경 본문에 의존하면서 살펴 보았기에, 유다교측의 해석과 그리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성경 본문의 해석에 있어, 지금까지 들여다 본 "자구적 의미/어의"에 근거한, 그리스도교 고유의 "영성적 해석"에 더 치중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8.
8-1. 질문 8: 창세기 25,29-34에서 에사우는 자신의 장자권, 즉, 맏아들의 권리를 야곱에게 팔아넘겼는데, 에사우"잘못"은 무엇입니까?

질문 8에 대한 답변: 우선 여기서 말하는 "잘못"이란, "하느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 잘못"이라는 의미이며, 그리고 창세기 25,29-34에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에사우의 처신을 구약 성경의 시기에 이미 유다교측에서도 "잘못"이라고 받아들였다는 생각인데, 이는, 예를 들어, 히브리서 12,15-17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답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발췌 시작)
히브리서 12,15-17: 
15 여러분은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또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하나라도 솟아나 혼란을 일으켜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16 그리고 아무도 음식 한 그릇에 맏아들의 권리를 팔아넘긴 에사우와 같이 불륜을 저지르거나17) 속된 자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17 여러분도 알다시피, 에사우는 나중에 아버지의 축복을 상속받기를 원하였지만 거절당하였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축복을 받으려고 애썼지만, 회개할 기회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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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주석 성경의 주석] 구약 성경에는 에사우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말이 없다. 후대의 유다교 전통에서는 에사우를 성적 불륜과 관련짓기도 하지만, 여기에서는 구약 성경의 표현 방식에 따라(탈출 34,15 각주 참조) 하느님께 불충을 저지른 사실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가 장자권(長子權)을 하찮게 여김으로써 함축적으로, 아브라함 이사악, 그리고 자기에게 이어져 내려오는 하느님의 계약을 업신여겼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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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음은 히브리서 12,15-17에 대한 NAB 주석 전문입니다. 또한 참고하십시오:

출처: http://old.usccb.org/nab/bible/hebrews/hebrews12.htm

(발췌 시작)
[15-17] Esau serves as an example in two ways: his profane attitude illustrates the danger of apostasy, and his inability to secure a blessing afterward illustrates the impossibility of repenting after falling away (see Hebrews 6:4-6).

[15-17] 에사우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한 개의 예(an example)로서 역할을 합니다: 그의 세속적 태도는 배교(背敎, apostasy)의 위험을 예시하며, 그리고 이후에 축복을 확보하지 못하는 그의 무능력은 너무 멀리 떨어져 나간 이후에 회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예시합니다(히브리 6,4-6을 보라).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히브리서 12,15-17과 이 본문에 대한 위의 주석들은 창세기의 해당 본문의 자구적 의미/어의(literal sense)에 충실한 설명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8-2. 질문 9: 창세기 27,19에서, 야곱나이가 많아 눈이 멀어버린 자신의 아버지 이사악에게 다음과 같이 답변하였는데, 야곱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답변을 하였던 것인지요? :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사우입니다."

질문 9에 대한 답변: 사실, 창세기 27,19 전후의 문맥 안에서 살펴보면, 야곱이 이런 "명백한" 거짓말을 자신의 아버지에게 하였던 것은 자신의 어머니인 레베카의 지시/주문 때문이었는데, 그러나 여기에 대단히 중요한 무엇인가가 하느님에 의하여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는 자신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Ia IIae, q110, a3 에서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전후의 문맥 안에서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2/3 부분에 있는 바[즉, 반대 3반대3에 대한 답변]를 필독할 것을 권고합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60.htm <--- 필독 권고

(발췌 시작)
In Holy Writ, as Augustine observes (Lib. De Mend. v), the deeds of certain persons are related as examples of perfect virtue: and we must not believe that such persons were liars. If, however, any of their statements appear to be untruthful, we must understand such statements to have been figurative and prophetic. Hence Augustine says (Lib. De Mend. v): "We must believe that whatever is related of those who, in prophetical times, are mentioned as being worthy of credit, was done and said by them prophetically." As to Abraham "when he said that Sara was his sister, he wished to hide the truth, not to tell a lie, for she is called his sister since she was the daughter of his father," Augustine says (QQ. Super. Gen. xxvi; Contra Mend. x; Contra Faust. xxii).

Wherefore Abraham himself said (Genesis 20:12): "She is truly my sister, the daughter of my father, and not the daughter of my mother," being related to him on his father's side. Jacob's assertion that he was Esau, Isaac's first-born, was spoken in a mystical sense, because, to wit, the latter's birthright was due to him by right: and he made use of this mode of speech being moved by the spirit of prophecy, in order to signify a mystery, namely, that the younger people, i.e. the Gentiles, should supplant the first-born, i.e. the Jews.

성경 본문에 있어, 아우구스티노(Augustine, 354-430년)가 목격하듯이(observes) [거짓말하는 것에 대하여(Lib. De Mend.) v(<----- 혹시 관심이 더 있으면, 클릭하여 읽도록 하십시오)], 특정한 인격들의 행위(deeds)들이 완미한 덕(perfect virtue)의 예(examples)들로서 이야기되고 있으며, 그래서(and) 우리는 그러한 인격들이 거짓말장이였다고 생각하지(believe)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들의 진술(statements)들 중의 어느 것이 정직하지 않다면(untruthful), 우리는 그러한 진술들이 표상적이었을(figurative) 것이고 그리고 예언적이었을(prophetic) 것이라고 이해하여야만 합니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노(Augustine)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거짓말하는 것에 대하여(Lib. De Mend.) v(<----- 혹시 관심이 더 있으면, 클릭하여 읽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예언의 시기(prophetical times) 있어, 인정(credit)을 마땅히 받을 만한 자들로서 언급되고 있는 자들에 대하여 관련되어 있는 것 무엇이든지 그들에 의하여 예언적으로 행하여졌고 그리고 말해졌음을 믿어야만 한다." 아브라함(Abraham)의 경우에 있어 "사라(Sara)가 자신의 누이였다고 그가 말하였을 때에, 그는 진실을 감추는 것(to hide the truth)을 바랐던 것이지(wished), 어떤 거짓말을 하는 것(to tell a lie)을 바랐던 것이 아니었는데, 이는 그녀가 그의 아버지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의 누이라고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QQ. Super. Gen. xxvi; Contra Mend. x; Contra Faust. xxii). 그런 이유로 아브라함 스스로 다음과 같이 (창세기 20,12) 말하였으며: "더구나 그 여자는 정말 나의 누이입니다. 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달라서 내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사라는] 자신의 아버지측으로 그에게 친척 관계였습니다, 자신이, 이사악(Isaac)의 첫 번째 아들인, 에사우(Esau)라는 야곱(Jocob)의 확언(assertion)은 어떤 신비적 어의/의미(a mystical sense)(*) 안에서 말해졌는데, 왜냐하면, 즉(to wit), 에사우의 장자 상속권이 정당하게(by right) 자신에게 돌려져야 하였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한 개의 신비를, 다시 말해서, 더 어린 백성, 즉 이방인들이, 맏배, 즉 유다인들을 대체하여야만(should supplant) 한다 한 개의 신비(a mystery)를, 예시(豫示)하기(signify) 위하여, 예언의 영(the spirit of prophecy)에 의하여 움직여지는 말하기(speech)의 바로 그러한 양식(mode)을 그가 사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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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여기서 "a mystical sense""어떤 신비적 어의/의미"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1992년에 초판 발행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에서 또한 가르치고 있는, 가톨릭 교회의 대단히 오래된 네 가지 방식의 성경 해석법들 중의 한 가지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글의 제2항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77.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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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따라서, 창세기 27,19에서 자신의 아버지 이사악에게 하였던 야곱의 답변은, 비록 인간의 관점에서만, 즉, 오로지 자구적 의미/어의로, 고찰할 때에는 "명백한" 거짓말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하느님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속임/기만도 아니므로, 따라서 전혀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이유로 제시되고 있는 이어지는 설명은, 유다교측에서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해당 성경 본문에 대한 그리스도교 고유의 해석으로서, 자구적 의미에 근거한, 소위 말하는, 영성적 어의/의미이라는 생각입니다. 특히 "신비적/종말론적 의미/어의"라는 생각입니다.

8-3. 질문 10: 창세기 27,19장에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자구적 의미/어의로 야곱의 바로 이 "명백한" 거짓말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의 해석은 어떠한지요?

질문 10에 대한 답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가 자신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서 이미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의 해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음을 위에서 살펴보았습니다만, 다음은, 이 질문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창세기 27,19에 대한 Haydock's Catholic Bible Commentary 1859의 주석의 전문입니다:

출처: http://haydock1859.tripod.com/id354.html

(발췌 시작) 
Ver. 19. I am Esau, thy first-born. St. Augustine, (L. Contra Mendacium, c. x.) treating at large upon this place, excuseth Jacob from a lie, because this whole passage was mysterious, as relating to the preference which was afterwards to be given to the Gentiles before the carnal Jews, which Jacob by prophetic light might understand. So far is certain, that the first birth-right, both by divine election, and by Esau's free cession, belonged to Jacob: so that if there were any lie in the case, it could be no more than an officious and venial one. (Challoner) --- Ignorance might also excuse them from any sin; as many good and learned men have thought an officious lie to be lawful. (St. Chrysostom, hom. 52; Origen; Bonfrere.) And even if we allow that they did wrong; the Scripture relates, but does not sanction what they did, Let him that thinks himself to stand, take heed, lest he fall, 1 Corinthians x. 12. (Calmet) --- As our Saviour says of St. John the Baptist, He is Elias, Matthew xi, so, Jacob says, I am Esau, not in person , but in right of the first-born. (Worthington)

제19절.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사우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는 바로 이 장소에 대하여 상세히 다루면서 [L. Contra Mendacium, c. x. 제24항(<----- 혹시 관심이 더 있으면, 클릭하여 읽도록 하십시오)야곱을 한 개의 거짓말(a lie)로부터 면제하는데(excuseth), 왜냐하면 바로 이 전체 구절(passage)이, 야곱예언적 빛(prophetic light)에 의하여 이해하였을 수도 있는 현세적인 유다인들 앞에서 이방인들에게 이후에 주어지기로 되어 있었던 선호(preference)에 관련된 것으로서, 신비하기(mysterious) 때문이었습니다. 장자권이, 하느님의 선택 그리고 에사우(Esau)의 자유로운 양도 이들 둘 다에 의하여 야곱(Jacob)에 속하였던 것이 그 점까지는 분명하며, 그리하여 그 결과 만약에 이 경우에 있어 어떤 거짓말이 있기라도 하였더라면, 그것은 어떤 호의적인 그리고 경미한 거짓말보다 결코 더 할 수 없습니다. (Challoner) --- 수많은 선한 그리고 박식한 사람들이 어떤 호의적인 거짓말은 적법하다고 생각해 왔듯이, 무지(ignorance)가 또한 모든 죄로부터 그들을 면제할 수도 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St. Chrysostom), hom. 52; 오리게네스(Origen); Bonfrere]. 그리고 심지어 만약에 우리가 그들이 잘못이었음을 인정한다면(allows), 성경 본문은, 그들이 하였던 바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1코린토 10,12). (Calmet) --- 우리의 주님께서 세례자 성 요한에 대하여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마태오 11,14) 라고 말씀하시듯이, 마찬가지로 야곱은,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장자의 권한으로, "저는 에사우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Worthington).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8-4. 질문 11: 그런데 위의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의 해석들은 그리스도교의 또다른 어떤 문헌적 근거에 의하여 정당화되는지요?

질문 11에 대한 답변: 예를 들어, "새 번역 성경"에서 "하느님의 이스라엘의 선택"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유다교측에서 전혀 인정하지 않는 신약 성경에 있어, 바로 로마서 9,6-18입니다. 좀 더 손쉬운 이해를 위하여 이 본문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들을 또한 발췌하여 제시하였습니다:

(발췌 시작)
6 그렇다고 하느님의 말씀이 허사로 돌아갔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닙니다.9) 

7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다 그의 자녀가 아닙니다. “이사악을 통하여 후손들이 너의 이름을 물려받을 것이다.”라고10) 하였습니다. 

8 이는 육의 자녀가 곧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약속의 자녀라야 그분의11) 후손으로 여겨진다는 뜻입니다. 

9 약속이라는 것은, “이맘때에 내가 다시 올 터인데 그때에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12) 하신 말씀입니다. 

10 그뿐만 아니라, 레베카가 한 남자 곧 우리 조상 이사악에게서 잉태하였을 때에도13) 마찬가지입니다. 

11 두 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들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택의 뜻을 지속시키시려고, 

12 또 그것이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부르시는 당신께 달려 있음을 드러내시려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14) 하고 레베카에게 말씀하셨습니다. 

13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사우를 미워하였다.”15) 

14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하느님 쪽이 불의하시다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5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자비를 베풀려는 이에게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풀려는 이에게 동정을 베푼다.”16) 

16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에 달려 있습니다.17) 

17 사실 성경도 파라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이렇게 하려고 내가 너를 일으켜 세웠다. 곧 너에게서 내 힘을 보이고, 온 세상에 내 이름을 떨치게 하려는 것이다.”18) 

18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시고,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 만드십니다. 19)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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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전자의 "이스라엘"은 야곱을 가리킨다(4절 각주; 창세 32,29 참조). "이스라엘 백성"의 직역은 "이스라엘"로서, 하느님의 약속을 받은 그본의 참백성,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 (갈라 6,16), 그리고 육에 따른 이스라엘과 반대로(1코린토 10,18) 성령에 따른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10) 창세 21,12를 인용한 것이다. 직역: "이사악을 통하여 (또는, '이사악 안에서') 후손이 너를 위하여 불릴 것이다." 바오로가 "후손"이라는 낱말을 사용할 때에는(예컨데, 4,13.16.18; 9,8.29; 11,1), 아브라함의 자손들 가운데에서, 이 선조의 모범을 따라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그분의 약속을 이어받는 백성, 그본의 자녀가 된(8절) 사람들인 그의 참 "후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려고 한다.

11) "그분의"는 내용상 덧붙인 말이다.

12) 창세 18,10.14를 자유롭게 인용한 것이다.

13) 에사우와 야곱이 태어날 때를 가리킨다. 이 쌍둥이의 경우가, 하느님께서는 절대적인으로 자유로 사람을 선택하신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준다. 이사악의 자식이므로, 둘 다 똑같이 7절과 8절의 의미의 아브라함의 자녀, "약속의 자녀"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이 쌍둥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벌써 야곱의 자손들만 약속의 자녀가 되리라고 결정하신다. 형이 아니라 동생이 선택을 받음으로써, 하느님의 결정은 더욱 예기치 않은 것으로 다가온다(12절).

14) 창세 25,23을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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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성 바오로는, 창세기 25,23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바에 전적으로 동의하여, 다른 어떤 자(예를 들어, 여기에는 악마 혹은 사탄도 포함됨) 아니라, 분명히 하느님께서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라는 말씀을 레베카에게 하셨다고 확실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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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말라 1,2-3을 인용한 것으로, 에사우보다 야곱을 더 선호하였다는 히브리 말식 표현이다(창세 29,31; 루카 14,26과 마태 10,37 참조). 여기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이사악의 이 두 아들에 대한 가치 판단이 아니라, 이 두 사람의 자손들이 구원의 역사에서 각각 차지하게 되는 위치와 그들이 수행하게 되는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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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셈족의 언어에 있어, "미워하다"는 말은 "적게 사랑한다"는 의미이지, "증오하다(hate)"의 의미가 아님을 기억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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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탈출 33,19를 인용한 것이다. 14절에서 제기된 이의에 대한 본격적인 대답은 20절에 가서야 나온다. 여기에서는 하느님께서 지고한 자유를 가지고 행동하시는 또 다른 예를 들기만 한다. 그리고 이 9장에서 이러한 하느님의 자유를 중심으로 우선 관건이 되는 것은, 개개인의 영원한 구원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하여, 그리고 이 민족을 통해서 인류 전체에 대하여 하느님께서 미리 세우시고 실행해 나아가시는 계획 안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위치이다.

17) 여기에서도 18절에서처럼 관건이 되는 것은 최종적 성화(聖化)나 구원이 아니라 선택이다. 이로써 바오로는, 인간의 노력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된 뒤에도 노력과 투쟁을 계속하여야 하는 일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6,13-19; 12,11; 1코린 9,24-27; 필리 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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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부활 제2주일은, 대희년이었던 2000년 4월 30일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의 시성식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의하여 "하느님 자비 주일"로 경축되도록 선포되었는데, 성녀 파우스티나에 의하여 드러내어진 "하느님의 자비"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 [제목: 부활 제2주일(하느님 자비 주일) 파 다데오 신부님 강론말씀 외]을 필독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671.htm <----- 필독 권고

사실, 바오로가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듯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은, "나의 의로움"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니고,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에 의한 것임을 항상 유념하고 또 숙지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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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탈출 9,16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이다. 이 말씀의 내용이 탈출 7-15장까지 펼쳐진다고 말할 수 있다.

19) 바오로는 여기에서도 파라오 개인의 잘못이라든가 그의 영원한 징벌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이 박해자의 자세가 하느님의 뛰어난 계획의 일부를 이룬다는 사실만 지적한다. 파라오는 고집을 부림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데에 일조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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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이글에서 다루는 주제와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으나, 탈출기 7-15에 서술되어 있는 "파라오의 완고함"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77.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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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성 바오로는 로마서 9,6-18에서,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창세기 해당 본문에 대하여, 자구적 의미/어의에 근거한 그리스도교 고유의 영성적 의미/어의를 서술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신비적/종말론적 의미/어의"를 서술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 의미/어의에 대한 더 깊이있는 해석은 이어지는 제9항에 있습니다.

9.
다음의 주소에 있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홀수해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제1독서(창세 27,1-5.15-29)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우리말 번역문 포함)을 읽도록 하십시오.

게시자 주: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창세기 해당 본문에 대한 자구적 의미/어의에 근거한 그리스도교 고유의 영성적 의미/어의를 대단히 잘 서술하고 있는 좋은 내용이므로, 다음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아래에 발췌한 부분의 전후 문장들을 또한 함께 꼭 필독 하실 것을 권고 드립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13_sat.htm <--- 필독 권고

특히 다음은. 이 해설에서 발췌하여 인용하고 있는, 창세기 27,26-29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의 저술인 "하느님의 도성/신국론(the city of God)"에 주어진 해석입니다: 

(발췌 시작)
And so St Augustine interprets that "what the blessing of Jacob typifies is, then, the preaching of Christ to all nations. [...] Isaac is the law and prophecy by which Christ is blessed by means of the mouth of the Jews. But, since law and prophecy was not understood, it was as though it came from one who spoke in ignorance. It is with the aroma of Christ's name that the world, like a field, is filled. His is the blessing of the dew from heaven (meaning the shower of His divine words) and of the fruitfulness of the earth (in the sense of the gathering in of the peoples of the earth). His is the harvest of grain and of wine (interpreted as the multitude of those who gather the grain and wine in the sacrament of his Body and Blood). [...] His Father's sons, in the sense of the sons of Abraham according to faith, adore Him who is, in turn, a son of Abraham according to the flesh. Anyone who curses Him is cursed, and anyone who blesses Him is blessed. What I mean is that it is our Christ who is blessed (in the sense of being truly announced) even by the Jews themselves, who, for all their errors of hoping for some other Messiah and of thinking that it is he who is being blessed, still sing in their synagogues the Laws and the Prophets" ("De Civitate Dei", 16, 37).

그 때문에(and so)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는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야곱의 축복(the blessing of Jacob)이 예표하는(typifies) 바는, 그래서(then), 모든 민족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 이사악(Isaac)은, 그것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 유다인들의 입에 의하여 축복을 받게되는, 율법과 예언(the law and prophecy)이다. 그러나 이 율법과 예언이 이해되지 못하였기에, 이 율법과 예언은 마치 그것이 무지의 상태에서 말하였던 자로부터 왔던 것처럼 이었다. 이 세상이, 한 개의 들판처럼(like a field), 채워지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이라는 향기(aroma)로써 이다. (당신의 거룩한 말씀들로 이루어진 소나기를 의미하는) 하늘(heaven)로부터 오는 이슬(dew)로 이루어진 축복과 (이 땅의 백성들의 거두어들임의 의미로) 땅의 비옥함(fruitfulness)으로 이루어진 축복은 당신의 것이다. [당신의 성체(Body)와 성혈(Blood)로 이루어진 성사(sacrament)에서 알곡식(grain)과 포도(wine)를 거두어 들이는 자들의 무리로서 해석되는] 알곡식으로 이루어진 그리고 포도로 이루어진 수확은 당신의 것이다. [...] 믿음에 따른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의미로, 당신의 성부의 아들(His Father's  sons)들은 당신을 흠숭하는데(adore), 당신께서는, 교환으로(in return), 육(flesh)에 따라 아브라함의 한 분의 자손이시다. 당신을 저주하는 자 누구든지 저주를 받으며, 그리고 당신을 축복하는 자 누구든지 축복을 받는다. 내가 의미하는 바는 심지어, 어떤 다른 메시아를 간절히 바람이라는 모든, 그들의, 오류(errors)들 때문에, 자신들의 회당(synagogues)들에서 율법들과 예언서들(the Laws and the Prophets)(*) 여전히 노래하는 자들인, 유다인들 스스로에 의하여, (참되게 선포됨이라는 의미로) 축복을 받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도성/신국론(De Civitate Dei)", 16, 37].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위의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의 해석 또한 유다교측에서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해당 성경 본문에 대한 그리스도교 고유의 해석으로서, 자구적 의미에 근거한, 소위 말하는, 영성적 어의/의미이라는 생각입니다. 특히 "신비적/종말론적 의미/어의"라는 생각입니다.

10.
마지막으로,

질문 12: 이사악레베카의 가정에서 왜 이러한 일이 발생하였는지요?

질문 12에 대한 답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10-1.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original sin)의 결과로서, 지금까지도 각 가정에서는,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 특히 부부 사이에, 이 글의 전반부에서, 즉,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글에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358.htm <----- 필독 권고


자세하게 고찰하였던 바와 동일한 혹은 유사한 종류의 갈등, 불화, 분열 등의 근본적 문제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근본적 문제들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CCCC) 및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필자가 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INDEX.HTM
(빌췌 시작)
 

400 The harmony in which they had found themselves, thanks to original justice, is now destroyed: the control of the soul's spiritual faculties over the body is shattered; the union of man and woman becomes subject to tensions, their relations henceforth marked by lust and domination.282 Harmony with creation is broken: visible creation has become alien and hostile to man.283 Because of man, creation is now subject "to its bondage to decay".284 Finally, the consequence explicitly foretold for this disobedience will come true: man will "return to the ground",285 for out of it he was taken. Death makes its entrance into human history.286


400 그 안에서, 원 의로움 덕택으로, 그들이 스스로 이미 발견하였던 조화(harmony)는 [원죄의 결과로서] 다음과 같이 이제 파괴되며: 몸에 대한 영혼의 영적 능력들의 통제가 산산히 부수어지며; 그리하여 사람과 여자의 결합(union)이 긴장(tensions)들의 지배를 받으며, 그들의 관계들은 차후로 음욕(淫慾, lust)우위/상위를 차지하기(지배, domination)에 의하여 특징지어집니다. 피조물의 조화는 다음과 같이 깨뜨려집니다: 가시적 피조물은 이질적이 이미 되었으며 그리하여 사람에게 적대적이 이미 되었습니다. 사람 때문에, 피조물은 이제 "부패에 대한 자신의 노예의 상태"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끝으로, 바로 이러한 불순종(disobedience)에 대하여 명백하게 예견되었던 결과는 다음과 같이 사실로 될 것입니다: 사람은 "흙으로 돌아갈 것인데", 이는 흙에서 그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죽음이 인간의 역사에 들어가는 데 성공합니다. 

1607 According to faith the disorder we notice so painfully does not stem from the nature of man and woman, nor from the nature of their relations, but from sin. As a break with God, the first sin had for its first consequence the rupture of the original communion between man and woman. Their relations were distorted by mutual recriminations;96 their mutual attraction, the Creator's own gift, changed into a relationship of domination and lust;97 and the beautiful vocation of man and woman to be fruitful, multiply, and subdue the earth was burdened by the pain of childbirth and the toil of work.98


1607 믿음(faith)에 따르면 우리가 너무도 고통스럽게 주목하는 혼란 상태(the disorder)는 사람과 여자의 본성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들의 관계들의 본성으로부터 유래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죄로부터 유래합니다. 하느님과의 어떤 단절(a break)로서, 첫 번째 죄[즉, 원죄]그 첫 번째 결과로서 사람과 여자 사이의 원 하나 됨(친교, 통공, original communion)의 파열(rupture)을 가졌습니다. 그들의 관계들은 상호 되받아 비난함(mutual recriminations, 상호 보복적인 비난)들에 의하여 왜곡되었고(were distorted), 그리하여 창조주의 고유의 선물인 그들의 상호 끌어당김(mutual attraction)은 우위/상위를 차지하기(지배, domination)음욕(淫慾, lust)의 어떤 관계로 변하였으며, 그리고 열매를 많이 맺고, 증식하여, 그리하여 이 땅을 개간하고자(subdue) 하는 사람과 여자의 아름다운 소명(vocation)은 출산의 고통(pain)과 일의 노역(toil)에 의하여 부담지게 되었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내용 추가 일자: 2013년 4월 13일]

위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제400항 제1607항 설명은, 부부간의 긴장/갈등/불화의 원인(cause) 아담과 하와의 원죄(original sin) 때문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다음은, 2004년 5월 31일자, 교황청 신앙 교리성 문헌 [제목: LETTER TO THE BISHOPS OF THE CATHOLIC CHURCH ON THE COLLABORATION OF MEN AND WOMEN IN THE CHURCH AND IN THE WORLD (교회 안에서 그리고 세상 안에서 사람들과 여자들의 협력에 대하여 가톨릭 교횡의 주교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아래의 발췌문에서, 독자들을 위하여, 일부 글자들을 굵게하고 또 색칠을 입힌 것은 발췌자가 한 것입니다: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발췌 시작)
7. Original sin changes the way in which the man and the woman receive and live the Word of God as well as their relationship with the Creator. Immediately after having given them the gift of the garden, God gives them a positive command (cf. Gn 2:16), followed by a negative one (cf. Gn 2:17), in which the essential difference between God and humanity is implicitly expressed. Following enticement by the serpent, the man and the woman deny this difference. As a consequence, the way in which they live their sexual difference is also upset. In this way, the Genesis account establishes a relationship of cause and effect between the two differences: when humanity considers God its enemy, the relationship between man and woman becomes distorted. When this relationship is damaged, their access to the face of God risks being compromised in turn.


7. 원죄(original sin)는, 창조주와 그들(즉, 사람과 여자)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사람과 여자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고 그리고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방식을 변화시킵니다. [에덴] 동산이라는 선물을 그들에게 이미 제공하신 직후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한 개의 허락하는 명령(a positive command)을 주시고 (창세 2,16 참조), 이 명령은 한 개의 금지하는 명령(a negative command)에 의하여 뒤따르게 되는데 (창세 2,17), 이 금지하는 명령 안에서 하느님과 인류 사이에 있는 본질적 차이점이 함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뱀에 의한 유혹을 뒤쫓아, 사람과 여자는 바로 이 차이점을 부정합니다. 그 결과, 그 안에서 그들이 자신들의 성에 있어서의 차이점(sexual difference)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live) 방식이 또한 뒤엎어집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창세기 이야기는 이 두 개의 차이점들 사이에 원인과 결과라는 한 개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제정합니다: 인류가 하느님을 자신의 원수로 간주할 때에, 사람과 여자 사이의 관계는 왜곡됩니다. 바로 이 관계가 훼손될 때에, 하느님의 얼굴을 향하는 그들의 접근은 그 댓가로(in return) 손상되는 위험을 감수합니다.

God's decisive words to the woman after the first sin express the kind of relationship which has now been introduced between man and woman: “your desire shall be for your husband, and he shall rule over you” (Gn 3:16). It will be a relationship in which love will frequently be debased into pure self-seeking, in a relationship which ignores and kills love and replaces it with the yoke of domination of one sex over the other. Indeed the story of humanity is continuously marked by this situation, which recalls the three-fold concupiscence mentioned by Saint John: the concupiscence of the flesh, the concupiscence of the eyes and the pride of life (cf. 1 Jn 2:16). In this tragic situation, the equality, respect and love that are required in the relationship of man and woman according to God's original plan, are lost.

첫 번째 죄 [즉, 원죄] 이후 여자에게 하신 하느님의 결정적인 말씀들은 지금 사람과 여자 사이에 이미 도입되어져 있는, 다음과 같은, 바로 그러한 관계를 표현합니다: "그대의 욕망은 그대의 남편을 위한 것이 되리라, 그리고 그는 그대를 지배하리라(your desire shall be for your husband, and he shall rule over you)" (창세 3,16). 이 관계는, 사랑(love)을 무시하고 죽이며 그리고 사랑을 한 성(one sex)의 다른 이(the other) 위에서의 지배(domination)라는 멍에로 대체하는 어떤 관계 안에서, 그 안에서 사랑(love)이 순전한 자기 추구(self-seeking)로 자주 저하되게 될, 한 개의 관계일 것입니다.

 

정말로 인간성(humanity)에 대한 이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형세(situation)에 의하여 계속적으로 특징지어지는데(is marked), 이 이야기는 성 요한(St. John)에 의하여 언급된, 다음과 같은, 삼중의 사욕편정(慾偏情, concupiscence)을 상기시킵니다: 육에 기인하는 사욕편정, 눈들에 기인하는 사욕편정 그리고 삶에 있어서의 교만(pride) (1요한 2,16 참조). 바로 이러한 비극적 사태 안에서, 하느님의 원 계획에 따라 사람과 여자의 관계에 있어 요구되는 동등(equality), 존중(respect) 그리고 사랑(love)들은 상실됩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내용 추가 끝].

게시자 주: 창세기 25,28창세기 27,5, 그리고 창세기 27,41-28,1에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가족들 사이에 있어서의 레베카의 처신들에 대한 이야기는, 부부인 이사악 레베카 사이에, 위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400항과 제1607항에서 명백하게 지적하고 있는, 우위/상위를 차지하기(지배, domination)로 표현되는 긴장/갈등/불화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대단히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의 가정에서 부부 사이에 이런 종류의 긴장/갈등/불화는 없는지요?

10-2. 다른 한편으로,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범하기 이전의, 원 은총(original grace)의 상태, 원 의로움(original justice)의 상태로 회복시키고자 진실로 의도하시는데(will), 최종적으로 성자 하느님의 강생과 공생활, 그리고 이어지는 십자가 수난과 성자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하여 당신의 바로 이러한 의지를 구현하시고자 함에 있어, 예표들 혹은 예시들로서, 구약 성경의 시대부터 다양한 죄인들에게 다가 오셨으며, 그리고 이들 죄인들의 행위들 안에서, 그러나 이들 죄인들이 결코 알아차리지 못하는 "신비한 방식"으로, 당신의 의지(will)를 점진적으로 드러내 오셨다는 생각입니다. 

     바로 이 신비에 대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CCCC) 및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에서 가르치고 있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필자가 한 것입니다.

게시자 주: 우선적으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CCCC)에 주어진 가르침을 여러 번 읽은 후에, 아래에 인터넷 주소가 제시되어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중의 해당 문항들을 또한 여러 번 읽도록 하십시오:

출처: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가해-I, 나해-I, 부활성야 3분 복음/교리 묵상.

(발췌 시작)
CCCC 57. 하느님께서 전능하시고(omnipotent) 그리고 미래를 마련하신다면(provident), 왜 악이 존재합니까?

CCC 309-310, 324, 400 <-----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중의 해당 항들

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정말로 고통스럽고 또 신비한 만큼, 오로지 그리스도교 신앙(Christian faith) 전체만이 한 개의 답변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 직접적이든 혹은 간접적이든 간에 - 악의 원인(the cause of evil)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다른 악들의 뿌리(root)에 자리 잡고 있는 바로 그 커다란  윤리적 악(moral evil)인 인간의 죄(human sin)를 정복하기(vanquish)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셨던, 당신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악의 신비(the mystery of evil)에 빛을 비추십니다(illuminates)(엮은이 번역).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b_estrv_c309.htm


CCCC 58. 하느님께서는 왜 악을 허락하시는지요?

CCC 311-314, 324 <-----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중의 해당 항들

신앙(faith)은 하느님께서, 바로 그 악(evil)으로부터 선(good)이 나오는 것을 당신께서 야기하지 않으신다면, 결코 악을 허락하지(permit) 않으실 것이라는 확신(certainty)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 확신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하느님에 의하여 매우 경이로운 방식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사실, 모든 윤리적 악(moral evils)들 중에서 가장 큰 악(당신 아들의 살해)으로부터 하느님께서는 모든 선들 중에서 가장 큰 선(즉,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게 되심(glorification)우리의 구속(救贖)/속량(redemption)을 이미 도출하셨습니다(엮은이 번역).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b_estrv_c311.htm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따라서 하느님께서 악으로부터 선이 나오는 것을 야기하시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창세기 끝부분에 기록되어 있는 "요셉"의 경우일 것입니다. 다음은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312항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19.HTM (교황청 홈페이지)

(발췌 시작)
312 In time we can discover that God in his almighty providence can bring a good from the consequences of an evil, even a moral evil, caused by his creatures: "It was not you", said Joseph to his brothers, "who sent me here, but God. . . You meant evil against me; but God meant it for good, to bring it about that many people should be kept alive."178 From the greatest moral evil ever committed - the rejection and murder of God's only Son, caused by the sins of all men - God, by his grace that "abounded all the more",179 brought the greatest of goods: the glorification of Christ and our redemption. But for all that, evil never becomes a good.

 

312 충분하게 초기에(in time) 우리는 하느님이 당신의 전능하신 섭리 안에서, 당신의 피조물들에 의하여 야기된 어떤 악(an evil)의 결과들로부터, 심지어 어떤 윤리적 악(a moral evil)의 결과들로부터, 어떤 선(a good)을 도출하실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요셉(Joseph)은 자신의 형제들에게,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창세 45,8; 50,20) 라고, 말하였습니다. 여태까지 범해진 가장 커다란 윤리적 악(moral evil)으로부터, 즉, 모든 사람들의 죄들에 의하여 야기된 하느님의 한 분뿐이신 아드님의 거부와 살해로부터, 하느님께서는, "훨씬 더 많은" 당신의 은총에 의하여, 선(goods)들 중에서 다음과 같은 가장 커다란 선을 도출하셨습니다: 그리스도계서 영광을 받게 되심(glorification of Christ)우리들의 구속(救贖)/속량(redemption).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evil)은 어떤 선(a good)이 결코 되지 못합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그런데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와는 전혀 무관합니다만, 위의 졸번역문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다음의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12항이 얼마나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정밀하게 비교/검토해 보도록 하십시오. 특히 밑줄 친 부분들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해 보도록 하십시오. 원 문장의 구조가 보존되도록 번역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아래의 우리말 번역은, 그 내용 전달에 있어, 상당히 문제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발췌 시작)
312 이리하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능하신 섭리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에서 야기된 악의 결과에서, 물론 윤리적 악의 결과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하였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창세 45,8; 50,20) 윤리 악은 모든 인간의 죄로 일어난 하느님 아들의 배척과 살해였다. 이 악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충만한 은총으로 그리스도의 영광과 우리의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을 끌어내셨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악이 선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윤리적 악(moral evil)"의 철학적/신학적 정의(definition)를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84.htm <----- 필독 권고

게시자 주: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이사악레베카 부부의 가족 구성원들 사이의 갈등에 대하여 다루었던 것인데, 다들 잘 아시겠지만,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요셉도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이었으므로 [주: 막내아들, 즉, 열두 번째 아들은 벤야민이다(창세기 35,16 참조)], 요셉은 결국에 이사악레베카 부부의 손자였습니다. 따라서, 요셉의 형제들뿐만이 아니라, 이 글의 전반부에서 자세하게 들여다 보았던(<----- 클릭하십시오), 바로 이 가족의 일부 구성원들이 다른 구성원들에게 범하였던 크고 작은 윤리적 악(moral evils)들의 결과들로부터,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인간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그리하여 신비로운 방식들로(in mysterious ways), 예를 들어, 야곱의 아들들이 대단히 많이 늘어나는 등의, 어떤 선(a good)을 도출하셨음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다음에, 요셉이 말하는 창세 45,8; 50,20에 기록되어 있는 또다른 어떤 선(another good)이, 즉, "큰 백성을 살리시는 선"이, 또한 하느님에 의하여 도출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위의 제10-2항에서 말씀드리고 있는 바를, 창세기 27,1-45에 대한 NAB(New American Bible) 주석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말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http://old.usccb.org/nab/bible/genesis/genesis27.htm

(발췌 시작)
[1-45] ... The story was told because it was part of the mystery of God's ways in salvation history--his use of weak, sinful men to achieve his own ultimate purpose.

[1-45] ... 이 이야기가, 하느님께서 당신 고유의 궁극적 목적을 수행하시고자 나약하고 죄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심이라는구원 역사에 있어 하느님의 방식들의 신비의 일부분이었기 때문에 이 이야기는 말해졌습니다.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창세기 12,10-20에서 아브람이 과연 파라오에게 거짓말을 하였는지, 그리고 창세기 27,19에서 야곱이 과연 자신의 아버지인 이사악에게 거짓말을 하였는지에 대하여 상당히 깊이 있게 고찰하였는데, 만약에 아브람창세기 12,10-20에서 파라오에게 거짓말을 하였다면, 야곱창세기 27,19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이사악에게 하였던 확언은 명백한 거짓말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번 글의 고찰에서, 이들 둘 다 거짓말을 하였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야곱의 경우에 대하여 고찰한 위의 제8-10항은, 국내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여기에는 개신교측 신자들도 포함)에게 여태까지, 정확한 출처들을 포함하여, 체계적으로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인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는데, 이들 항들에서 전달해드리는 내용들은 정확한 출처들을 또한 제시하고 있기에, 구약 성경의 창세기의 내용에 대한 가톨릭 그리스도교측의 전통적 해석에 대하여 올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국내의 그리스도교 신자들께 상당히 유익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이 정도로 이번의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게시자 주: 
(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이번의 글을 포함하는, "거짓말"에 대한 졸글들 모두를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lie.htm

(2) 다른 한편으로, 창세기 32,23-23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홀수해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제1독서(창세 32,23-23)이며, 이 제1독서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의 주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14_tue.htm

(3) 그리고,

여기를 클릭하면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
 
"야곱이 하느님과 씨름하다"라는 소제목을 가진, 그리고 "야곱"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게 되는, 창세기 32,23-33에 대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2011년 5월 25일자 교리 교육용 일반 알현 강론 말씀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4) 영어가 가능한 바쁘지 않은 분들께서는, 바로 위의 제(2)항제(3)항에 안내해 드린 바들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어, 둘 다에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2573항 중의 동일한 한 문장을 발췌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발전시켜 창세기 32,23-23에 대하여 해석하고 계신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우리말 번역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한 번 별도의 시간을 내어, 마련해 드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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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 20시간 (자료 조사 및 우리말 번역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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