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번역오류] 2코린토 5,21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주관적 구속] 1122_ so_that_ 1689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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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30 ㅣ No.1983

게시자 주: (1) 본글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83.htm 에 접속하면, 본글 중에서 제시되고 있는 출처 문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에 접속하면, 본글의 제목이 포함된,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제공의 모든 게시글들의 제목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i) 2006년 12월 16일에 개시(開始)하여 제공 중인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날마다 영어 매일미사 중의 독서들 듣고 보기, 그리고 (ii)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라틴어/프랑스어/영어 문서들 등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  (PC용, 날마다 자동으로 듣고 봄) [주: 즐겨찾기에 추가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m (스마트폰용) [주: 네이버 혹은 구글 검색창 위에 있는 인터넷 주소창에 이 주소 입력 후 꼭 북마크 하십시오]

 

(2) 본글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졸글들에 이어지는 글이기도 합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htm <----- 필독 권고

[제목: 원죄와 구원의 신비...; 최초게시일자: 2001년 1월 31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22.htm <----- 필독 권고

[제목: 객관적 구속과 주관적 구속에 대하여; 게시일자: 2011년 10월 20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97.htm <----- 필독 권고

[제목: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라는 부분이란? - 콜로새 1,24; 게시일자: 2012년 11월 21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54.htm <----- 필독 권고

[제목: 변성(變成)함(becoming)에 있어 연(緣)의 필연성(necessity) 혹은 비필연성(非必然性)(contingency); 게시일자: 2014년 6월 16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89.htm <----- 반드시 필독 권고

[제목: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안에서만 오로지 의화가 가능하다; 게시일자: 2016년 4월 21일]

 

(3) 더 나아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i)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구원을 위하여 수행하신 바를 말하는 객관적 구속(objective redemption)(ii) 피조물인 우리들의 몫인 주관적 구속(subjective redemption)에 대한 필자의 졸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redemption_objective_vs_subjective.htm  <----- 바쁘지 않은 분들의 필독 권고

(이상, 게시자 주 끝) 

 

1. 들어가면서

 

1-1. 다음은 2코린토 5,21 전문인데,

 

출처: http://maria.catholic.or.kr/mi_pr/missa/missa.asp?menu=missa&missaid=10188&gomonth=2019-03-31 

(발췌 시작)

21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만드시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상, 발췌 끝)

 

우선적으로, 2코린토 5,21은, 가톨릭 교회 전례력에 있어, 매년 재의 수요일 제2독서(2 코린토 5,20-6,2), 다해 사순 제4주일 제2독서(2코린토 5,17-21), 그리고 홀수해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제1독서(2코린토 5,14-21) 로 발췌되어 미사 중에 봉독되는, 성경 말씀에 포함됩니다.

 

1-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2코린토 5,17-21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lent_4.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10_sat.htm 

 

1-3. 다른 한편으로, 다음은, 미사 중에 독서들이 발췌되는 것이 허락된 NAB(New American Bible) 중의 2코린토 5,21 전문인데,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ZR.HTM 

(발췌 시작)

For our sake he made him to be sin who did not know sin, so that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in him.

 

우리들을 위하여 히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셨던 분이신, 그분을 죄가 있도록 만드시어, 그리하여 그 결과 우리들이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변성(變成)/성위(成為)할 수도(might become) 있도록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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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1) 여기서 "become"으로 번역된 그리스도교 신학 용어를 "변성(變成)하다/성위(成為)하다"로 번역한 것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becoming"이라는 그리스도교 신학 용어의 정의(definition)에 따른 것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54.htm <----- 필독 권고

[제목: 변성(變成)함(becoming)에 있어 연(緣)의 필연성(necessity) 혹은 비필연성(非必然性)(contingency); 게시일자: 2014년 6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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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질문 1: 위의 제1-1항에 발췌된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 에 대응하는 문장이, (i) "하느님의 의로움이 되게 하셨습니다"의 의미가 결코 아닌, (ii) "so that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 of God in him"(그리하여 그 결과 우리들이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변성(變成)할/성위(成為)할 수도 있도록 하셨습니다)로 번역이 되었는데, 교리적으로/교의 신학적으로번역문 (I)번역문 (ii)의 차이점이 어디에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2. 질문 1에 대한 답변 시작

 

2-1. 바로 위의 제1-3항에 제시된 질문 1 자체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는 분들께서는, 우선적으로, 다음에 방췌된 "공동번역성서" 2코린토 5,21을, 적어도 세 번 이상, 반드시 읽도록 하십시오:

 

출처: http://maria.catholic.or.kr/bible/read/bible_read.asp?menu=bible&m=4&n=54&p=5

(발췌 시작)

우리를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죄있는 분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께로부터 무죄선언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2-1: (1) 바로 위에 발췌된 "공동번역성서" 2코린토 5,21은, 바로 아래의 게시자 주 2-2에 안내된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다수의 영문본 2코린토 5,21까지 굳이 정밀하게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이 번역 오류는 의역(free translation)의 범주에도 결코 포함될 수 없는 심각한 정도와 수준의 번역 오류이며, 다만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저의가 없다면 심지어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그리스도교 교의 신학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우리말 번역문이라 아니 지적할 수 없습니다.

 

아니, "무죄선언"이라는 표현이, 도대체 어떠한 이유로, "the righteousness of God"(하느님의 의로움)에 대응하는 논리적으로 등가인(logically equivalent) 번역 표현이 될 수가 있는지요???

 

(2) 2005년에 "새 번역 성경"이 국내의 천주교회에서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할 때까지, 거의 30여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공동번역성서", 2코린토 5,21이, 위의 제1-1항에서 구체적으로 말씀드린, 우리말로 집전되는 미사 성제 중의 말씀 전례에서 볻독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교의 신학적으로, 참으로 문제가 많았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공동번역성서", 2코린토 5,21은, 16세기 중반에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단죄된, 마르틴 루터의 주장인, 소위 말하는, "칭의"/"imputation"/"imputed justice"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우리말이라는 지역 언어로 번역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작위적으로/자의적으로/임의적으로 만들어진, 한 개의 오류의 문장이라 아니 지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우리말 번역문이 어불성설임은,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대한성서공회 홈페이지 제공의 국내의 개신교회용 다수의 우리말본 2코린토 5,21을 읽을 수 있는데, "공동번역성서""공동번역성서" 개정판제외하고는, 어느 책도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바와 같이 번역하지 않았음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https://www.bskorea.or.kr/bible/korbibParall.php?version=GAE&rdoReadType=1&book=2co&chap=5&sec=21&sec1=1 

 

왜냐하면,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하더라도, 도저히 "그렇게" 번역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감히 "그렇게" 번역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4) 이와 같이, 특정 지역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성경 본문이 전달하는 본 내용이 번역 작업자들에 의하여 의도적으로/작위적으로 훼손되는 것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5) 이어지는 제2-2항에서는 그리스어본 2코린토 5,21에, "무죄선언"으로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이 혹시라도 있는지에 대하여, 정밀하게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2-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그리스어본 2코린토 5,21을 읽을 수 있는데, 아무리 들여다보더라도, "무죄선언"으로 번역될 수 있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출처: https://biblehub.com/interlinear/2_corinthians/5-21.htm 

(발췌 시작)

(이상, 발췌 끝)

 

(이 글의 결론 1) 따라서,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공동번역성서", 2코린토 5,21은 명백한 번역 오류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게시자 주 2-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다수의 영문본 2코린토 5,21들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면서 읽을 수 있는데, 제2-1항에 발췌된 "공동번역성서", 2코린토 5,21와 논리적으로 등가인 번역문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https://biblehub.com/2_corinthians/5-21.htm  <----- 클릭하여 꼭 확인하라.

 

2-3.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어본 및 영어본 2코린토 5,21이, "만약에 하느님께서 죄를 모르시는 예수님을 죄가 있는 분으로 만들지 않으셨디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이 결코 될 수 없다"는, "~q implies ~p" (즉, "not q implies not p") 구조의 문장과 논리적으로 등가(logically equivalent)임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q implies ~p" (즉, "not q implies not p")"q가 성립할 경우에만 오로지 p가 가능하다/성립할 수 있다"논리적으로 등가(logically equivalent)임에 또한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2-4. (이 글의 결론 2) 우리말본 2코린토 5,21이 의미하는 바와는 너무도 달리그리스어본 및 영어본 2코린토 5,21은, "so that ... might ..."라는 표현의 한 형식을 사용하여, 사람들이 선택하게 되는, 각자의 윤리적 행실/습성(moral beharior)에 있어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다음의 세 가지 경우들 모두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경우 1) 하느님께서 죄를 모르시는 예수님을 죄가 있는 분으로 만드셨음을 한 개의 진리로서 인정하지 않는(명제, not q) 자들은 결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변성(變成)할/성위(成為)할(become) 수가 없다 (명제, not p).

 

(경우 2) 설사 하느님께서 죄를 모르시는 예수님을 죄가 있는 분으로 만드셨음(명제, q)을 한 개의 진리로서 인정하는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예를 들어, 이방인들의 사도인 성 바오로(St. Paul)필리피서 3,9에서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당시의 여건/상황 안에서 바리사이들이 그러하였던] "나의 의로움"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의지/뜻(one's own will/rational appetite)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바로 이 자신의 의지/뜻을 여전히 스스로 선택하여 심장 안에서 혹은 심장 바깥을 향하여 실천하고자 함을 그 주된 내용으로 가지는, 자신의 고유한 자유 의지(one's own free will)를 행사하는 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따라서 초자연적인 그 무엇(something supernatural), 즉, 은총(graces)들을 여전히 거부하는(refuse) 자들이기 때문에, 결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변성(變成)할/성위(成為)할(become) 수가 없다 (명제, not p).

 

(경우 3) 하느님께서 죄를 모르시는 예수님을 죄가 있는 분으로 만드셨음(명제, q)을 한 개의 진리로서 인정하는 자들 중에서, 예를 들어,  이방인들의 사도인 성 바오로(St. Paul)가 그러하였듯이, (i) "나의 의로움"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의지/뜻(one's own will/rational appetite)을 기꺼이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대신에, (ii)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 올바르게 되도록 변성(變成)하기/성위(成為)하기 위하여(to become made right with God)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수용하여/받아들여 지니어(필리피 3,9) 실천하고자 하는 자신의 자유 의지(one's free will)를 행사하는 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변성(變成)할/성위(成為)할(become) 수 있다 (명제,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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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자유 의지(free will)"를 언급하고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졸글을[제목: 원죄와 구원의 신비 ...; 최초 작성일: 2001-01-31 오전 6:09:28)]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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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이 글의 결론 3) 바로 위의 제2-4항에서 말씀드린 바를 조금 더 상세하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말본 2코린토 5,21이 의미하는 바와는 너무도 달리그리스어본 및 영어본 2코린토 5,21은, "so that ... might ..."라는 표현의 한 형식을 사용하여, 사람들이 선택하게 되는, 각자의 윤리적 행실/습성(moral behavior)에 있어 논리적으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다음의 세 가지 경우들 모두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경우 1) 하느님께서 죄를 모르시는 예수님을 죄가 있는 분으로 만드셨음을 한 개의 진리로서 인정하지 않는(명제, not q) 자들은 결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변성(變成)할/성위(成為)할(become) 수가 없다, 즉,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 올바르게 되도록 변성(變成)하기/성위(成為)하기 위하여(to become made right with God)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성화 은총(sanctifying grace)/의화 은총(the grace of justification), 성령칠은, 향주삼덕 등의 은총(graces)들]"을 수용하여/받아들여 지닐 수(필리피 3,9) 없어 이를 실천하는 자가 될 수 없다 (명제, not p).

 

(경우 2) 설사 하느님께서 죄를 모르시는 예수님을 죄가 있는 분으로 만드셨음(명제, q)을 한 개의 진리로서 인정하는 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예를 들어, 이방인들의 사도인 성 바오로(St. Paul)필리피서 3,9에서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당시의 여건/상황 안에서 바리사이들이 그러하였던] "나의 의로움"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의지/뜻(one's own will/rational appetite)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바로 이 자신의 의지/뜻을 여전히 스스로 선택하여 심장 안에서 혹은 심장 바깥을 향하여 실천하고자 함을 그 주된 내용으로 가지는, 자신의 고유한 자유 의지(one's own free will)를 행사하는 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따라서 초자연적인 그 무엇(something supernatural), 즉, 은총(graces)들을 받아들이 것을 그러한 자들의 고유한 자유 의지(free will)가 여전히 거부하는(refuse) 자들이기 때문에, 결코,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변성(變成)할/성위(成為)할(become) 수가 없다, 즉,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 올바르게 되도록 변성(變成)하기/성위(成為)하기 위하여(to become made right with God)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성화 은총(sanctifying grace)/의화 은총(the grace of justification), 성령칠은, 향주삼덕 등의 은총(graces)들]"을 수용하여/받아들여 지닐 수(필리피 3,9) 없어 이를 실천하는 자가 될 수 없다 (명제, not p).

 

(경우 3) 하느님께서 죄를 모르시는 예수님을 죄가 있는 분으로 만드셨음(명제, q)을 한 개의 진리로서 인정하는 자들 중에서, 예를 들어,  이방인들의 사도인 성 바오로(St. Paul)가 그러하였듯이, (i) "나의 의로움"이라는 자신의 고유한 의지/뜻(one's own will/rational appetite)을 기꺼이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대신에, (ii)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 올바르게 되도록 변성(變成)하기/성위(成為)하기 위하여(to become made right with God)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즉, "[판단 및 절차에 있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즉, "영원한 법에 순응/부합하는, 마지막 끝 쪽으로 최적의 방향성 및 기울어짐과 함께 움직이도록 (어떤 방식, 시간, 혹은 정도에 있어) 합당하게 명령을 받고 있음의 수용(受容)이라는 올바름" 제공하는 성화 은총(sanctifying grace)/의화 은총(the grace of justification),(#) 성령칠은, 향주삼덕 등의 은총(graces)들]"을 수용하여/받아들여 지니어(필리피 3,9) 실천하고자 하는 자신의 자유 의지(one's free will)를 행사하는 자들은, 그러한 자들의 고유한 자유 의지(free will)가, 자신들의 믿음(faith)에 따른 지성의 궁극적 실천 판단(practical judgment of intellect)에 따라, 이들 은총들을 받아들이는 것에 기꺼이 동의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변성(變成)할/성위(成為)할(become) 수 있다 (명제,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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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졸글에 제시되어 있으니 반드시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89.htm <----- 반드시 필독 권고

[제목: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안에서만 오로지 의화가 가능하다; 게시일자: 2016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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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2-5: (1) 한편으로, 즉, 우리들 쪽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측에서, 하느님께서 죄를 모르시는 예수님을 죄가 있는 분으로 만드시어 모든 이(all)를 위하여 돌아가게 하심으로써(로마 8,32; 2코린토 5,14) 하느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즉, 소위 말하는 "객관적 구속(objective redemption)"을 위하여, 하실 수 있는 모든 일(all)들을 다 하신 까닭이, 하느님께서 모든 이(all)들의 구원을 바라시기 때문임은 만고불변의 주지의 진실, 즉, 진리인 사실입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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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게시자 주: 얀센주의자(Jansenists)들이 바로 이 교의(dogma)를 거부하다가, 1647년 1월 24일자로, 가톨릭 교회의 교황 교도권에 의하여 이단이다(heretical)라고 단죄되었음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DS 제2005항(덴징거 제2005항)에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다: 

http://www.clerus.org/bibliaclerusonline/en/dxe.htm#ce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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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즉, 우리들 쪽으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접촉(contact)의 대상인 각 인격(each person)에게 자유 의지(free will)를 주시어(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54-155항), 각 인격이 바로 이 자신의 고유한 자유 의지의 행사를 통하여,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느님과 바로 이 하느님에 기인하는 초자연적인 그 무엇(something supernatural)들을, (i) 영접하거나/받아들이거나(accept), 혹은 (ii) 거부할(refuse) 수 있는(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97항, 제415항), 자유/자유로움(freedom)을 [그리하여 그 결과, 각자의 윤리적 행실/습성(moral behavior)에 있어, 소위 말하는 "주관적 구속(subjective redemption)"을] 또한 하느님께서 허락하셨고 또 존중하심(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11항)은 만고불변의 주지의 진실, 즉, 진리인 사실입니다.

 

(3) 그리고 바로 위의 제(1)항제(2)항에저 말씀드린 바는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이 가르쳐 온 전통적 진리들로서, 특히 특정 지역 언어으로의 번역 과정에 그 내용이 달라질 수 없는, 교의(dogmas)들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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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게시자 주:  "객관적 구속(objective redemption)"과 "주관적 구속(subjective redemption)"에 대한 안내의 글들인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졸글들의 일부는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22.htm <----- 필독 권고

[제목: 객관적 구속과 주관적 구속에 대하여; 게시일자: 2011년 10월 20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97.htm <----- 필독 권고

[제목: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라는 부분이란? - 콜로새 1,24, 게시일자: 2012년 11월 21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54.htm <----- 필독 권고

[제목: 변성(變成)함(becoming)에 있어 연(緣)의 필연성(necessity) 혹은 비필연성(非必然性)(contingency); 게시일자: 2014년 6월 16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89.htm <----- 반드시 필독 권고

[제목: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안에서만 오로지 의화가 가능하다; 게시일자: 2016년 4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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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그러나, 각자의 윤리적 행실/습성(moral behavior)에 있어, 사람의 자유/자유로움(man's freedom)이 아담(Adam)과 하와(Eve)가 범한 원죄(original sin)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되었다(radically distroyed)고 16세기에 들어와 처음으로/최초로 주장하기 시작한 마르틴 루터(1483-1546년)(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406항 참조)와 그러한 주장의 맹목적 추종자들인 국내의 개신 교회 측의 일부 분파들은, 바로 위의 제(2)항에서 간략하게 말씀드린 각 인간의 자유 의지의 역할/기능에 대한 교의 신학 가르침을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것을 여전히 거부하며, 대신에, 이러한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 그리스어본 및 영어본 2코린토 5,21; 2코린토 8,9 등에서 "so that ... might ..." 라는 표현으로 서술된 문장에서,(*3) 2코린토 5,21의 우리말 번역과 관련하여 위의 제2-4항 제2-5항(경우 2)(경우 3)에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미력한 필력으로나마 구체적으로 지적한 바와 같이"might"가 의미하는 바를 의도적으로/고의적으로/작위적으로 감추는/누락시키는 번역 오류를 자행하였다는 지적을 아니 드릴  수 없습니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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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이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https://biblehub.com/interlinear/2_corinthians/5-21.htm 

https://biblehub.com/2_corinthians/5-21.htm 

 

https://biblehub.com/interlinear/2_corinthians/8-9.htm 

https://biblehub.com/2_corinthians/8-9.htm 

 

(*4)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이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https://www.bskorea.or.kr/bible/korbibParall.php?version=GAE&rdoReadType=1&book=2co&chap=5&sec=21&sec1=1 

https://www.bskorea.or.kr/bible/korbibParall.php?version=GAE&rdoReadType=1&book=2co&chap=8&sec=9&sec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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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회의 역사 안에서 거의 450여년 전에 발생한 사정이 바로 위의 제(5)항에 지적한 바와 같음을 몰랐기 때문이겠지만, 2005년에 초판 발행된 "새 번역 성경", 2코린토 5,21의 우리말 번역문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국내의 개신 교회 측의 우리말 번역문들과 대동소이함은, 참으로 실망스러운 일이라 아니 지적할 수 없습니다:

https://www.bskorea.or.kr/bible/korbibParall.php?version=GAE&rdoReadType=1&book=2co&chap=5&sec=21&sec1=1 

 

(6)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각자의 윤리적 행실/습성(moral behavior)에 있어, 사람의 자유/자유로움(man' freedom)에 대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1730-1748항들의 가르침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3s1c1a3.htm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110610121307&page=657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이상, 게시자 주 2-4 끝)

 

2-6. 다음의 파란 색칠을 한 글자들을 클릭하면,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NAB (New American Bible), 코린토 2서에서 "so that ... might" 가 사용된 절들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특히 2코린토 5,15; 2코린토 5,21; 그리고 2코린토 8,9예수님의 경험으로 구성된 변증법/형이상학적 모순들과 그들의 해답들 쪽으로 탐구(dialectic)라는 동일한 방식으로 서술되고 있음에 주목합니다:

 

"so that" "might" "2 Corinthians" site:vatican.va/archive/ENG0839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2코린토 1,15; 

2코린토  2,10-11;

 

2코린토 5,15:

He indeed died for all, so that those who live might no longer live for themselves but for him who for their sake died and was raised.

 

그분께서는 정말로 모든 이들을 위하여 죽으셨으며, 그리하여 그 결과(so that) 살아있는 자들이 더 이상 자신들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그리고 일어나게 되셨던 분을 위하여 살 수도 있도록(might live) 하셨습니다.

(이상, 졸번역 끝)

 

2코린토 8,9:

For you know the gracious act of our Lord Jesus Christ, that for your sake he became poor although he was rich, so that by his poverty you might become rich.

 

이는 여러분들이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의 행위(the gracious act)를, 즉(that), 여러분들을 위하여 비록 그분께서는 부유하셨으나 그분께서 가난한 상태로 변성(變成)하시어/성위(成為)하시어(become), 그리하여 그 결과(so that) 그분의 빈곤에 의하여 여러분들이 부유하게 될 수도 있도록(might rich) 하시고자 하셨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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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The dialectic of Jesus' experience, expressed earlier in terms of life and death (⇒ 2 Cor 5:15), sin and righteousness (⇒ 2 Cor 5:21), is now rephrased in terms of poverty and wealth. Many scholars think this is a reference to Jesus' preexistence with God (his "wealth") and to his incarnation and death (his "poverty"), and they point to the similarity between this verse and ⇒ Philippians 2:6-8. Others interpret the wealth and poverty as succeeding phases of Jesus' earthly existence, e.g., his sense of intimacy with God and then the desolation and the feeling of abandonment by God in his death (cf ⇒ Mark 15:34).

 

[9] 삶(life)과 죽음(death)(2코린토 5,15), 죄(sin)와 의로움/올바름(righteousness)(2코린토 5,21) 이라는 용어들로 더 일찍 표현되었던, 예수님의 경험(Jesus' experience)으로 구성된 변증법/형이상학적 모순들과 그들의 해답들 쪽으로 탐구(dialectic)(#)가 이제 빈곤(poverty)과 부(wealth)라는 용어들로 다시 말해지고 있다. [이하, 우리말 번역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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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dialectic""형이상학적 모순들과 그들의 해답들 쪽으로 탐구"로 번역한 것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Oxford Dictionary"에 주어진 바를 따른 것이다:

https://en.oxforddictionaries.com/definition/dialec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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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유관 부분의 졸번역 끝)

 

2코린토 9,3; 9,5;

 

게시자 주 2-6: (1) 따라서, "새 번역 성경"2코린토 5,15; 2코린토 8,9 우리말 번역문들에도, 또한, 본 글에서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2,코린토 5,21의 우리말 번역문의 번역 오류와 동일한 종류의 번역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2) 특히, "공동번역성서""새 번역 성경"2코린토 8,9의 우리말 번역문들도 또한,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그리스어본 및 영어본 2코린토 8-11의 문맥 안에서 고찰할 때에, 명백한 번역 오류들입니다:

https://biblehub.com/interlinear/2_corinthians/8-9.htm

https://biblehub.com/2_corinthians/8-9.htm

https://biblehub.com/interlinear/2_corinthians/8-10.htm

https://biblehub.com/2_corinthians/8-10.htm 

https://biblehub.com/interlinear/2_corinthians/8-11.htm 

https://biblehub.com/2_corinthians/8-11.htm 

 

(3) 사족일 수도 있습니다만, "새 번역 성경" 2코린토 8,10에 대한 "주석 성경"의 다음과 같은 주석이, 잘못 번역된 "새 번역 성경" 2코린토 8,9의 우리말 번역문의 문제점을 정당화 하는 데에 얼마나 도움이 될 수가 있는지 의문입니다:

 

(발췌 시작)

먼저 원하고 다음에 실천하는 것이 순서인데, 바오로는 코린토 신자들의 '원함'을 뒤에서 말하여, 그들의 자발적 원의를 강조하려고 한다.

(이상, 발췌 끝) 

(이상, 질문 1에 대한 답변 끝)

 

3.

끝으로, 이번 글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와 관련하여, 

 

3-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필자가 소장 중인, 2003년 출판 당시에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이셨던 Joseph Ratzinger 추기경님 (주: 나중에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이 됨)의 저서, 영어본 "God is Near Us", 제34-41쪽에서 발췌된 바를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ignatiusinsight.com/features2006/ratzinger_formany_nov06.asp 

http://www.ignatiusinsight.com/features2006/print2006/ratzinger_formany_nov06.html 

 

(유관 부분 발췌 시작)

At this point I should like to include a question about which some people argue in extremely heated fashion: The German translation no longer says, "for many", but "for all", and this takes into account that in the Latin Missal and in the Greek New Testament, that is to say, in the original text that is being translated, we find "for many". This disparity has given rise to some disquiet; the question is raised as to whether the text of the Bible is not being misrepresented, whether perhaps an element of untruth has been brought into the most sacred place in our worship. In this connection, I would like to make three points.

I. In the New Testament as a whole, and in the whole of the tradition of the Church, it has always been clear that God desires that everyone should be saved and that Jesus died, not just for a part of mankind, but for everyone; that God himself-as we were just saying--does not draw the line any- where. He does not make any distinction between people he dislikes, people he does not want to have saved, and others whom he prefers; he loves everyone because he has created everyone. That is why the Lord died for all. That is what we find in Saint Paul's Letter to the Romans: God "did not spare his own Son but gave him up for us all" (8:32); and in the fifth chapter of the Second Letter to the Corinthians: "One has died for all" (2 Cor 5:14). The first Letter to Timothy speaks of "Christ Jesus, who gave himself as a ransom for all" (I Tim 2:6). This sentence is particularly important in that we can see, by the context and by the way it is formulated, that a eucharistic text is being quoted here. Thus we know that at that time, in a certain part of the Church, the formula that speaks of a sacrifice "for all" was being used in the Eucharist. The insight that was thus preserved has never been lost from the tradition of the Church. On Maundy Thursday, in the old missal, the account of the Last Supper was introduced with the words: "On the evening before he died, for the salvation of all he . . ." It was on the basis of this knowledge that in the seventeenth century there was an explicit condemnation of a Jansenist proposition that asserted that Christ did not die for everyone. [8] This limitation of salvation was thus explicitly rejected as an erroneous teaching that contradicted the faith of the whole Church. The teaching of the Church says exactly the opposite: Christ died for all.

We cannot start to set limits on God's behalf, the very heart of the faith has been lost to anyone who supposes that it is only worthwhile, if it is, so to say, made worthwhile by the damnation of others. Such a way of thinking, which finds the punishment of other people necessary, springs from not having inwardly accepted the faith; from loving only oneself and not God the Creator, to whom his creatures belong. That way of thinking would be like the attitude of those people who could not bear the workers who came last being paid a denarius like the rest; like the attitude of people who feel properly rewarded only if others have received less. This would be the attitude of the son who stayed at home, who could not bear the reconciling kindness of his father. It would be a hardening of our hearts, in which it would become clear that we were only looking out for ourselves and not looking for God; in which it would be clear that we did not love our faith, but merely bore it like a burden. We must finally come to the point where we no longer believe it to be better to live without faith, standing around in the marketplace, so to speak, unemployed, along with the workers who were only taken on at the eleventh hour; we must be freed from the delusion that spiritual unemployment is better than living with the Word of God. We have to learn once more so to live our faith, so to assent to it, that we can discover in it that joy which we do not simply carry round with us because others are at a disadvantage, but with which we are filled, for which we are thankful, and which we would like to share with others. This, then, is the first point: It is a basic element of the biblical message that the Lord died for all-being jealous of salvation is not Christian. [9]

2. A second point to add to this is that God never, in any case, forces anyone to be saved. God accepts man's freedom. He is no magician, who will in the end wipe out everything that has happened and wheel out his happy ending. He is a true father; a creator who assents to freedom, even when it is used to reject him. That is why God's all-embracing desire to save people does not involve the actual salvation of all men. He allows us the power to refuse. God loves us; we need only to summon up the humility to allow ourselves to be loved. But we do have to ask ourselves, again and again, whether we are not possessed of the pride of wanting to do it for ourselves; whether we do not rob man, as a creature, along with the Creator-God, of all his dignity and stature by removing all element of seriousness from the life of man and degrading God to a kind of magician or grandfather, who is unmoved by anything. Even on account of the unconditional greatness of God's love-indeed, because of that very quality-the freedom to refuse, and thus the possibility of perdition, is not removed.

3. What, then, should we make of the new translation? Both formulations, "for all" and "for many", are found in Scripture and in tradition. Each expresses one aspect of the matter: on one hand, the all-embracing salvation inherent in the death of Christ, which he suffered for all men; on the other hand, the freedom to refuse, as setting a limit to salvation. Neither of the two formulae can express the whole of this; each needs correct interpretation, which sets it in the context of the Christian gospel as a whole. I leave open the question of whether it was sensible to choose the translation "for all" here and, thus, to confuse translation with interpretation, at a point at which the process of interpretation re- mains in any case indispensable. [10] There can be no question of misrepresentation here, since whichever of the formulations is allowed to stand, we must in any case listen to the whole of the gospel message: that the Lord truly loves everyone and that he died for all. And the other aspect: that he does not, by some magic trick, set aside our freedom but allows us to choose to enter into his great mercy.     

 

[..]

 

-----
[8] Denzinger-HŸnermann, no. 2005.

[9] I have fully developed this idea in my little book Vom Sinn des Christseins (Munich, 1965), pp. 39ff.

[10] The fact that in Hebrew the expression "many" would mean the same thing as "all" is not relevant to the question under consideration inasmuch as it is a question of translating, not a Hebrew text here, but a Latin text (from the Roman Liturgy), which is directly related to a Greek text (the New Testament). The institution narratives in the New Testament are by no means simply a translation (still less, a mistaken translation) of Isaiah; rather, they constitute an independent source.

-----         

(이상, 발췌 끝)

 

3-2. 그리고 바로 위의 제3-1항에서 지적되고 있는 바에 이어지는 글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마련된 옥일어본 및 영어본 미사 경문 중에서 그때까지 잘못 번역된 부분을 바로 잡는 것으로 가닥이 잡히는, 라틴어 "PRO MULTIS"의 정확한 번역 표현 "믾은 이들을 위한"에 대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2012년 4월 14일자 교서는,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42.htm <----- 또한 필독 권고

 

3-3. 혹시하여 추가로 안내해 드립니다만,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 요한 바로오 2세 교황님베네딕토 16세 교뢍님의 스승인, 국내에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한스 우르스 본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1905-1988년) 추기경님의 저서 "Theo-Drama, Theological Dramatic Theory", IV: The Action 중에서, objective redemption(객관적 구속/속량)subjective redemption(주관적 구속/속량), 그리고 2 Cotinthians 5:21이 언급되고 있는 부분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s://tcr1alpha.alexanderstreet.com/philologic/TCRT/navigate/156/4/3/6/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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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30시간 (자료 조사 및 분석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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