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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선행을 하는 자들 중에서만 은총을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교리학습_은총] [_선행] [_공로] merits, good_works CCC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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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9 [218.55.90.*]

2013-09-08 ㅣ No.1439

+ 찬미 예수님!

아래의 한줄답변에서 언급되고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은 다음의 주소를 클릭한 후에, 제6-3항을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37.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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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순태 형제님.
작성자    번  호   192872
작성일   2012-10-09 오후 4:32:14 조회수   296 추천수   
191922 게시물에서

ㅊㅌㅇ 형제님,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선행은 전적으로 하느님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지, 자신의 "영원한 구원"을 하느님께 그 댓가/보답으로 요구/주장하기 위하여 행하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라고 의견을 주셨는데 제 미련한 머리로 이해가 어려워 제 의견을 덧붙여 다시 의견을 구하고자 합니다.

선행에 대하여 가톨릭대사전에는

 성서는 선행의 필요를 강조하며, 이를 구령상 필수적인 것으로 삼고 있으며(마태 2:34, 7:21, 16:27, 19:17, 갈라 6:9, 1디모 6:18, 아가 2:13), 하느님영광인간구원을 선행의 목표로 하고 있다(마태 5:16, 요한 15:8, 필립 1:10).

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근본적으로 피조물인 사람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위하여 과연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사람이 그 무엇을 하지않으면 하느님께서 어떤 피해를 보시고 어떤
불편을 겪으실까 생각해 봅니다만.

선행이란것이
무의식적으로 행할만큼 습관화되신분들도 있고 귀찮지만 아름다운 일이므로 하시는 분들도 있고 신앙인으로서 해야 한다기에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즉 물질적으로든 노력봉사든 말로의 위로든 그 선행이 아름다운 행위임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 입니다. 가끔은 부질없는 짓 이라는 이들은 본적이 있습니다만 그들은 논외로 하구요.

소 형제님의 의견은
1. 선행이 온전히 주님을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2. 영원한 구원을 위한 그 댓가가 될 수 없다.

입니다만 제가 그럴수도 있다 정도라도 동의를 도저히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대사전에서도
분명 선행은 구령함에 목적을 두고 있다고 되어있습니다.

소 형제님의 의견을 다시 청하여 듣고싶습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09) : + 찬미 예수님! 가톨릭 대사전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선행의 목표로 하고 있다] 의 성경의 근거 구절들 [마태 5:16, 요한 15:8, 필립 1:10] 은 다음과 같습니다. 형제님 말씀대로 "선행은 구령함에 목적을 두고 있다"의 근거 구절들인지 살펴 보십시오:
소순태 (sunsoh) (2012/10/09) : 마태오 5,16: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소순태 (sunsoh) (2012/10/09) : 요한 15,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
소순태 (sunsoh) (2012/10/09) : 필리피 1,10-11: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순수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날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의로움의 열매를 가득히 맺어, 하느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09) : 이 구절들 모두는 "인간의 구원을 선행의 목표로 하고 있다" 혹은 "선행은 구령함에 목적을 두고 있다" 는 문장과는 무관하고, 그 목적/목표가 하느님을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ㅎㅅㄱ (2012/10/09) : [교리서1821]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하늘의 영광을 희망할 수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각자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있기를 바라야 하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자신이 행한 선행에 대해 하느님께서 영원한 상급으로 주시는 하늘의 기쁨을 얻게 되리라고 희망해야 한다.>> 교회는 희망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1티모 2,4) 기도한다. 교회는 천상 영광 속에서 자신의 정배이신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를 갈망한다.
 ㅎㅅㄱ (2012/10/09) : [로마서 2,6-7]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09) : 그리고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중에도 "인간의 구원을 선행의 목표로 하고 있다" 혹은 "선행은 구령함에 목적을 두고 있다" 는 언급은 없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09) : 만약에 "상선벌악"에 대한 가르침을 두고서, "인간의 구원을 선행의 목표로 하고 있다" 혹은 "선행은 구령함에 목적을 두고 있다" 라고 표현하였다면, 이들 문장에서 "목적" "목표" 단어들을 사용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09) : 제가 들여다 본 바에 의하면, 선행의 필요성은, 죄를 지어 하느님의 의로움을 침범한 것을 죄를 지은 당사가자 마땅히 바로 잡아 드려야 하는 필수적 행위, 그리하여 하느님의 영광이 온전하게 드러나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필요한 행위로 알고 있습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09) : 실제 우리의 구원이 가능하게 된 것은, 각자의 선행과는 무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 때문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음의 글을 참고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와의 통공(하나 됨, 친교, communion)의 상태에 있어야,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길인,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의 혜택을 입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29.htm  
소순태 (sunsoh) (2012/10/09) : 그리고 "상선벌악"과 관련하여서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을 읽어 보십시오. 그리고 이글의 제일 마지막에 있는 파란색 글자도 클릭하여 읽어 보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11.htm  
 ㄱㅅㅅ (2012/10/09) : 각자의 선행과는 무관하게 예수그리스도의 수난공로 덕분에 구원이 가능하다는 말씀에 크게 공감합니다.그런데 어제 신학원에서 비신앙인이라도 양심에 따라 선행을 하며 올바른 자들에게도 즉 교회 밖에서도 구원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으며, <<주님 외에는>>그들이 구원 받았는지에 관해 판단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걸로 기억합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09) :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은총을 받으면 선행을 한다"는 것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이며, "참"인 명제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은총을 더 많이 받을 수록, 선행을 더 많이 한다" 입니다. 그리고, "은총 중에서 가장 커다란 은총이 영원한 구원의 은총"입니다. 여기 어디에도, "구원을 선행의 목표/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내용은 없다는 생각입니다.
 ㅊㅌㅇ (2012/10/09) : 제 가 인용한것은 가톨릭사전입니다. 가톨릭 대 사전에서 교회의 가르침을 설명하면서 교리와 다른 주장을 하지않을거라 생각합니다. 분명 구령의 필수적인것, 하느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이 선행하는 목표라 정의하고 있습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09) : 지금 김신실 자매님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가능성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다시 한 번 더 천명한, 제가 바로 위에서 말씀드린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이 "참"임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09) : ㅊㅌㅇ 형제님, 교회의 여러 문헌들이 동일한 권위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의 설명들 중에는, 가톨릭 보편 교회의 핵심 문헌들 중의 하나인,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가르침과 충돌하는 언급들이, 아주 가끔, 있습니다. 아주 간단하게,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가톨릭 대사전은 참고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교과서.
 ㅊㅌㅇ (2012/10/09) : 명백히 선행의 정의에 대해 교회에서 대 사전을 통해 밝힌것과 소 형제님의 의견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은총의 결과가 선행이다 라는 교리를 받아들입니다. 은총의 결과이기에 선행을 한 이를 보고 그가 믿는 하느님을 떠올려 다른이가 주님을 찬양하게 되니까요. 대부분은 소 형제님의 발췌한 자료나 주장에 공감합니다. 단 하나 선행의 목적 부분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르게 정의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09) : [가톨릭 대 사전에서 교회의 가르침을 설명하면서 교리와 다른 주장을 하지않을거라 생각합니다.] <----- 형제님의 귀납적 추론(inductive reasoning)인데, 연역적 추론(deductive reasoning)과 비교하였을 때에, 일반적으로, 귀납적 추론의 결과가 "참"이 아닌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위에서 보시다시피, 목적/목표라는 단어를 사용한, 그러한 표현 혹은 비슷한 표현도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 중에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ㅊㅌㅇ (2012/10/09) : 외람되게도 소형제님께 교리서에 명시된 선행부분을 청해도 괜찮을 런지요.
소순태 (sunsoh) (2012/10/09) : [단 하나 선행의 목적 부분이 교회의 가르침과 다르게 정의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 아닙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본문의 가르침과 충돌하고 있는 표현을 형제님께서 위의 본글에서 발췌 인용한, 굿뉴스 서버 제공의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의 본문 중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본문과 무관한 주장을 하고 있다고 저 위의 한줄답변들에서 또한 지적하였습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09) : [외람되게도 소형제님께 교리서에 명시된 선행부분을 청해도 괜찮을 런지요.] <----- 다음의 주소에 접속한 후에, 왼편 상단에 있는 "Search" 기능을 활용하여, "선행", "목적", 혹은 "목표" 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각항들을 찾아서 읽어 보십시오: http://www.albummania.co.kr/gallery/view.asp?seq=157803&path=110610121307&page=1023  
ㅊㅌㅇ (2012/10/09) : 그러니까 가톨릭대사전의 오류라고 보면 되는지요? 어렵군요..
소순태 (sunsoh) (2012/10/09) : 한 가지 말씀드리면, 위의 본문에서 발췌 인용하고 있는 그 표현들에 대한 성경 근거 구절들에서, "필리피서"에 대한 약자를 "필립"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위의 본문 중에서 발췌 인용한 부분은, 상당히 오래 전에, 즉,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아직은 주변에 없었던 시기에, 집필된 것 같습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09) : [그러니까 가톨릭대사전의 오류라고 보면 되는지요? 어렵군요..] <----- 예. 적절한 어휘 선택에 관련된, 오류/표현미숙 이라는 생각입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09) : [은총의 결과가 선행이다 라는 교리를 받아들입니다.] <----- 형제님께서는 이미 커다란 은총을 받으셨다는 생각입니다.
 ㅎㅅㄱ (2012/10/09) : [마태 16,27]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주석) 마태오는 개인적 응보 사상을 표현하고자 시편 28,4 또는 62,13을 인용한다. 구약성경에 깊이 뿌리를 내린 이 사상은 마태오 복음서에서 새롭게 두 가지 특징을 부여받는다. 첫째, 마지막 날에 각 사람을 심판하실 분은 사람의 아들 곧 예수님이시다. 둘째, 마태오는 장차 '갚아 주실 분'만 생각하며 실천하는 선행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ㅊㅌㅇ (2012/10/09) : 소 형제님의 차분한 답변에 많은 가르침을 받습니다. 고맙습니다. 소 형제님의 답변이 대사전과 달라 혼란이 있었습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09) : 각자의 마지막 날에 각자가 받게 되는 "개별 심판"에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 여부"를 주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한 역시 주관하시는, 바로 "상선벌악", 즉 "상급"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즉, 천상 교회에서의 각 영혼들의 지위가 바로 이 상급에 따라 정해진다고 가르칩니다. 즉, 천상 교회가 평등한 것이 아닙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09) : [소 형제님의 차분한 답변에 많은 가르침을 받습니다.] <----- 지나친 칭찬이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비록 많이 부족한 죄인이지만, 최선을 다하여, 가톨릭 보편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전달/안내해 드리려고 노력할뿐입니다.
 ㅂㅈㅅ (2012/10/10) : ㅊㅌㅇ님 본 글의 소순태님 의견이라 적어주신 1, 2번 중 1번은 조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최종적인 목적은 주님을 위한 것일 수 있겠습니다만, 교리서에 이런 부분도 있더군요. "2016 어머니이신 거룩한 교회의 자녀들은 당연히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은총을 바라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예수님과 일치하는 가운데 실천한 선행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보상을 바란다."
 ㅂㅈㅅ (2012/10/10) : 선행이란 것이 "전적으로", "온전히" 주님만을 위한 것은 아닐 것 같습니다. 내가 선행을 할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심에 감사하고, 그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것도 맞지만, 주님"만"을 위한 것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제 자신을 위한 일도 되겠지요. 위에 ㅎㅅㄱ님이 주신 교리서 1821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ㅂㅈㅅ (2012/10/10) : 또한, ㅊㅌㅇ님의 원 글에서 "구령상 필수"와 "구령상 목적"이란 말이 섞여 있는데, 이 둘은 조금 다른 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부분도 조금 생각해 봤으면 하고요.
 ㅂㅈㅅ (2012/10/10) : 그리고, 가톨릭 대사전에서 말한 "인간의 구원"이 저는 "나의 구원"이 아닌 "다른 이들의 구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나의 선행으로 다른 이들이 주님을 알고 찬양하게 하여 다른 이들이 구원의 길에 이르게하는 그런 것 말이죠. 마태오 5:16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드네요.
소순태 (sunsoh) (2012/10/10) : [선행이란 것이 "전적으로", "온전히" 주님만을 위한 것이다.] <----- 이 문장에서 "만" 이라는 표현은 저와는 무관한, 즉 제가 하지 않았던, 표현입니다. 혹시 오해하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0) : ["2016 어머니이신 거룩한 교회의 자녀들은 당연히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은총을 바라며, 하느님의 은총으로 예수님과 일치하는 가운데 실천한 선행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의 보상을 바란다."] <----- "상선벌악"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0) : 2016항에서 말하는 보상으로서, 다음의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010항의 세 번째 문장에서 "은총"을 준다고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즉 "은총의 지위에서 행한 선행에 대한 보상"은 "은총"입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0) : 2010 은총의 영역에서는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행사하신다. 그러므로 회개와 용서와 의화의 기원이 되는 최초의 은총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최초의 은총을 받은 뒤 우리는 성령과 사랑의 인도를 받아,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우리의 성화를 위해, 은총과 사랑의 성장을 위해,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필요한 은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공로를 세울 수 있다. 지혜로우신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면, 우리는 건강이나 우정과 같은 현세적 선익까지도 받게 하는 공로가 되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이 모든 은총과 선익은 그리스도인이 기도로써 청하는 것들이다.
소순태 (sunsoh) (2012/10/10) : (계속) 기도는 공로가 되는 행실에 필요한 은총을 얻게 해준다. (이상, 발췌 끝).
 ㅂㅈㅅ (2012/10/10) : "전적으로"와 "온전히"에 "만"이라는 의미가 들어갔다 봤습니다. 강조의 차이일 뿐이지요. 어찌되었건, 저는 선행이 "주님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 점은 소순태님도 동의하시는 것으로 알면 되는지요?
 ㅂㅈㅅ (2012/10/10) : 또, 보상에는 "은총"도 있고, "선익"도 있으며, "하늘나라의 상급"도 있겠지요. 물론, "은총만"이라고 하셨다는 이야기는 아니라, 그런 오해가 있을까봐 제가 보충을 한 것입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0) : [저는 선행이 "주님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 당연합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0) : ["은총만"이라고 하셨다] <----- 여기서도 "만" 이라는 표현은 저와는 무관한, 즉 제가 하지 않았던, 표현입니다. 혹시 오해하는 분들이 계실 것 같아 말씀드립니다.
 ㅇㅂㅅ (2012/10/10) : 선행을 실천하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것이되니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행위이고 또한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도 도움이 되는 공로를 쌓게되는 것이지요. 당연히?
소순태 (sunsoh) (2012/10/10) : [가톨릭 교회 교리서 2010 ... 최초의 은총을 받은 뒤 우리는 성령과 사랑의 인도를 받아,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우리의 성화를 위해, 은총과 사랑의 성장을 위해,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필요한 은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공로를 세울 수 있다. ... ] <----- 여기서 말하는 "공로"를, 전통적으로 "적정공로"라고 불러 왔습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0) : [선행을 실천하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것이다.] <----- 그런데 "자신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선행"을 실천하는 자들도 더러 있기 때문에, 전후의 문맥 안에서 "자신을 위하고자 하는 생각/의향/뜻"의 배제 여부가 불분명한 이 문장은, 항상 "참"인 명제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신에,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선행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0) : [또한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도 도움이 되는 공로를 쌓게되는 것이지요.당연히?] <----- "당연히"라는 말씀까지 하셨는데, "당연히"가 아닐 수 있습니다. "적정공로" 여부에 대한 판단을 오로지 하느님만이 하시기에, 이러한 표현은 회피하고 또 삼가야 할 것입니다. 대신에, [또한 자신의 성화(sanctification)에 도움이 되는 공로로 인정받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가, "하느님 고유의 주관과 판단 영역"을 침해하지 않는 표현일 것입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0) : [가톨릭 교회 교리서 2010 ... 최초의 은총을 받은 뒤 우리는 성령과 사랑의 인도를 받아,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우리의 성화를 위해, 은총과 사랑의 성장을 위해,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필요한 은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공로를 세울 수 있다. ... ] <----- "공로"를 "영원한 구원"에 대한 판단과 결코 직접적으로 관련지우지 않는 바로 이 가르침의 범주 이내에서 "공로"에 대하여 생각해 주십시오.
소순태 (sunsoh) (2012/10/10) : 은총의 지위에 있으면서 은총에 화답하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함으로써 "적정공로"를 (더 많이) 세우면 하느님께서는, 영원한 생명, 즉 영원한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은총"을 (더 많이)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0) : "선행", "은총", 그리고 "영원한 구원"이라는 개념들 사이의 논리적 포함관계를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은 자들 중에서, "선행을 하는 자들 중에서만 은총을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으며, 그리고 은총을 받는 자들 중에서만 영원한 구원을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있을 수 있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시고 그리고 가부를 결정하시는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ㅂㅈㅅ (2012/10/10) : 소순태님, 마지막 댓글 부분은 이전에도 이야기 되다 말았던 것 같은데, 교리서의 가르침과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ㅂㅈㅅ (2012/10/10) : 교리서를 보면, "2010. 은총의 영역에서는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행사하신다. 그러므로 회개와 용서와 의화의 기원이 되는 최초의 은총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략)"라고 나옵니다. 때문에 소순태님이 말씀하신 "선행을 하는 자들 중에서만 은총을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으며"라는 부분은 교리서의 2010항과 상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0) : [회개와 용서와 의화의 기원이 되는 최초의 은총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그리스도교 세례 시에 해당합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0) : [교리서를 보면, "2010. 은총의 영역에서는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행사하신다. 그러므로 회개와 용서와 의화의 기원이 되는 최초의 은총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략)"라고 나옵니다. 때문에 소순태님이 말씀하신 "선행을 하는 자들 중에서만 은총을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으며"라는 부분은 교리서의 2010항과 상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 아닌데요... 제 한줄답변의 앞에 다음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은 자들 중에서"
소순태 (sunsoh) (2012/10/10) : 두 번씩이나 그렇게 하셨는데, 괜히 제가 하지 않은 "만"을 저의 한줄답변에 임의적/자의적으로 추가하여, 형제님께서 저의 한줄답변들에 대한 왜곡을 시도한다고 다른 분들로부터 오해를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또 지금처럼, 저의 한줄답변의 앞 부분에 있는 분명한 표현을 임의적/자의적으로 제거하면서 발췌 인용하면서 마치 제가 "그렇게" 말한듯이 하는 것도, 형제님께서 다른 분들로부터 동일한 오해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0) : 그리고, 제가 드린 한주답변들은, 애초에 형제님의 본글 혹은 한줄답변들에 드린 한줄답변들이 아니므로, 빠지십시오. 그리고 저에게 말을 걸기 위하여 저의 한줄답변에 "만" 을 추가하는 등의 행위도 이제 그만 두십시오.
 ㅂㅈㅅ (2012/10/10) : 아, "세례 받은 자들 중에"라는 부분을 제가 놓쳤군요. 그 부분은 이해했습니다.
 ㅂㅈㅅ (2012/10/10) : 2번의 "만"의 삽입은 나름 이유가 있는데요. 첫번째는 일부러 "전적으로"와 "온전히"만 따옴표를 달았지요. 그 때의 만은 단순히 보조적인 의미입니다만, '만'이 있고 없고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전적으로"와 "온전히"에 이미 어느 정도 '만'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어찌 되었건 왜곡의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말씀 드린대로 보조의 의미였고요.
 ㅂㅈㅅ (2012/10/10) : 그리고, 두번째에는 제가 분명히 "은총만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소순태님의 글을 왜곡하려는 의도가 아님은 그 문장으로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제가 알고 싶었던 것은 그겁니다. 예외가 있느냐 없느냐... 그리고 그에 대해 답변을 주셨고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ㅂㅈㅅ (2012/10/10) : 그리고, 빠지라는 이야기는 왜 하시는 지 잘 모르겠군요. 가톨릭 서울대교구 사이트의 자유게시판에서 서로 교리에 대해 아는 것을 나누고 모르는 것을 묻고 하는 것에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ㅎㅅㄱ (2012/10/10) : 감히 토를 다는 게...
소순태 (sunsoh) (2012/10/10) : 말꼬리 잡고 시비 거는 방식이 모르는 것 묻는 한 방식은 아니지요.
소순태 (sunsoh) (2012/10/10) : 하여튼,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010항의 세 번째 문장은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적용되고 있는 논리는, 사실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다음과 같은 논리와 동일함에 주목하십시오: (1) 은총을 받는 자는 선행을 한다 (즉, 은총을 받는 자들은 선행을 하는 자들 중에 포함된다). (2)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들은 은총을 받는 자들 중에 포함된다.
소순태 (sunsoh) (2012/10/10) : 그리고 이 (1) 과 (2) 를 논리적 등가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선행을 하는 자들 중에서 은총을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2) 은총을 받는 자들 중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등가의 표현들에서는 논리적으로 반드시 유의하여야 하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바로 이 등가의 표현들에서 "있을 수 있다"를 심사하여 결정하는 분이, 사람이 아닌, 오직 하느님뿐이시라는 점입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0) :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일부 개신교측에서 크게 반발하는데, 제가 처음 말씀드린 (1), (2) 와 두 번째 말씀드린 (1), (2) 가 각각 논리적으로 등가임을 간과(看過)한 결과로 보입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0) : 이렇게 동일한 보편적인 논리가 적용되고 있으나,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은 자들 경우에는, 교회에 "신앙의 유산"으로 남겨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에 기인하는, 네 복음서들에도 기록되어 있고 또 성전으로 살아서 전해오고 있는 여러 가르침들과, 일곱 성사등을 포함하는, 우리들의 성화를 도와주는 다양한 구체적인 조치들 그리고 특히 "통공 교의" 덕택으로, 바로 이 "새로운 길"을 받아들이고 또 실천하면, "익명의 그리스도인" 보다 훨씬 쉽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지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ㅂㅈㅅ (2012/10/10) : 소순태님이 잘못 생각하시고 계십니다. 제 첫 댓글 4개를 보면 저는 분명히 ㅊㅌㅇ님에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소순태님의 이름이 들어간다고 모두 소순태님께 하는 말은 아닙니다. 왜 저에게 빠지라, 말꼬리잡고 시비를 건다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저는 분명히 보충하는 것이고 묻는다 말씀드렸는데, 오해는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억지로라도 빠져야 한다면 제가 ㅊㅌㅇ님께 대화를 건 것에 대해 소순태님이 빠지시는게 맞지요.
소순태 (sunsoh) (2012/10/10) : 이미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매사에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0) : [소순태님의 이름이 들어간다고 모두 소순태님께 하는 말은 아닙니다.] <----- 제 이름을 거명하면서 그리고 제 한줄답변들에 "만"을 붙이기까지 하면서, 저로 하여금 답변을 하게끔 하더니, 이제 이런 소리도 하는 겁니까? 전혀 납득할 수 없습니다.
 ㅂㅈㅅ (2012/10/10) : 은총을 받은 자는 선행을 한다? 저는 그 부분도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는데(물론 제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소순태님이 말꼬리로 생각할 것 같아 그만두겠습니다. 제 글이 아니라 ㅊㅌㅇ님의 글이라 난장판이 되는 것이 두렵군요. ㅊㅌㅇ님, 제 글이 거슬리시면 삭제하셔도 좋습니다. ^^;;;
소순태 (sunsoh) (2012/10/10) : [소순태 (sunsoh) (2012/10/09) :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은총을 받으면 선행을 한다"는 것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이며, "참"인 명제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은총을 더 많이 받을 수록, 선행을 더 많이 한다" 입니다. 그리고, "은총 중에서 가장 커다란 은총이 영원한 구원의 은총"입니다.]
 ㅂㅈㅅ (2012/10/11) : 소순태님의 해당 글도 읽었습니다만, 아우구스티노의 정확한 가르침을 제가 몰라서 그 부분은 전혀 이해가 가질 않네요. 안그래도 은총과 선행에 관련된 글을 하나 쓸 예정이었으니, 그 때 하실 말씀이 있으면 오셔서 해 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저를 차단하셨기 때문에 안 오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건 소순태님의 자유이니 그냥 말씀만 드립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1) : [아우구스티노의 정확한 가르침을 제가 몰라서 그 부분은 전혀 이해가 가질 않네요.] <----- 오래 전에 성 아우구스티노의 저술에서 그러한 내용의 언급을 하고 있는 부분을 읽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선행보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이 먼저입니다. 이것 역시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성경공부 해설서들의 본문에서 인용까지 되고 있습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1) : [그리고 이 (1) 과 (2) 를 논리적 등가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선행을 하는 자들 중에서 은총을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2) 은총을 받는 자들 중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등가의 표현들에서는 논리적으로 반드시 유의하여야 하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바로 이 등가의 표현들에서 "있을 수 있다"를 심사하여 결정하는 분이, 사람이 아닌, 오직 하느님뿐이시라는 점입니다.] <----- 위의 이 한줄답변에서, "중에서"를 "중에서"으로 수정합니다. 다시 읽어보니 "만"을 빠뜨렸습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1) : [소순태 (sunsoh) (2012/10/10) : 하여튼,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010항의 세 번째 문장은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적용되고 있는 논리는, 사실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다음과 같은 논리와 동일함에 주목하십시오: (1) 은총을 받는 자는 선행을 한다 (즉, 은총을 받는 자들은 선행을 하는 자들 중에 포함된다). (2)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들은 은총을 받는 자들 중에 포함된다.]
소순태 (sunsoh) (2012/10/11) : 그리고 이 (1) 과 (2) 를 논리적 등가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선행을 하는 자들 중에서 은총을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2) 은총을 받는 자들 중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 등가의 표현들에서는 논리적으로 반드시 유의하여야 하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바로 이 등가의 표현들에서 "있을 수 있다"를 심사하여 결정하는 분이, 사람이 아닌, 오직 하느님뿐이시라는 점입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1) : [소순태 (sunsoh) (2012/10/10) :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일부 개신교측에서 크게 반발하는데, 제가 처음 말씀드린 (1), (2) 와 두 번째 말씀드린 (1), (2) 가 각각 논리적으로 등가임을 간과(看過)한 결과로 보입니다.]
소순태 (sunsoh) (2012/10/11) : [소순태 (sunsoh) (2012/10/10) : 이렇게 동일한 보편적인 논리가 적용되고 있으나,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은 자들 경우에는, 교회에 "신앙의 유산"으로 남겨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에 기인하는, 네 복음서들에도 기록되어 있고 또 성전으로 살아서 전해오고 있는 여러 가르침들과, 일곱 성사등을 포함하는, 우리들의 성화를 도와주는 다양한 구체적인 조치들 그리고 특히 "통공 교의" 덕택으로, 바로 이 "새로운 길"을 받아들이고 또 실천하면, "익명의 그리스도인" 보다 훨씬 쉽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지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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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공로)의 주체는 내가 아닌 은총(성령)이십니다.
작성자   송두석(peterfe12)  쪽지 번  호   179096
작성일   2011-08-26 오전 1:59:31 조회수   159 추천수   
악행(죄악)을 행하는 주체는 바로 "나(자유의지)" 입니다,
그러나 선행의 주체는 바로 은총(성령)입니다.
 
믿음과 세례를 통하여 의화되면(하느님의 자녀가 되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살아계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선행(공로)를 쌓을 수 있는
은총지위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으로 선행(공로)를 쌓도록
주도(인도) 하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랑으로 선행(공로)를 쌓을 수 있는 이유는 상존은총(성령)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해,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우리를 은총지위에 머무르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으로 선행(공로)을 쌓을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다만, 믿음과 은총입니다. (저희 가톨릭 신앙을 정확히 설명해 주시는 조정제 형제님, 박여향 형제님의 최근 게시글 참조 바람,이단 관련해서는
소순태 형제님의 게시글들을 참조하시기 바람).
 
선행(공로)는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떠한 것이 참된 선행인지는
하느님 만이 온전하게 아실 뿐입니다. 우리 인간의 판단의 영역에 있지 아니 합니다.
 
어떠한 선행이 하느님(성령)에 의해 주도되었다면 그것은 은총의 결과이므로
하느님 보시기에 구원(구원의 완성)에 합당한 선행일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의 선행이 자신의 욕망(과시욕)을 충족하기 위한 전시적인
것이거나, 그릇된 내면의 동기에 의해 유발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선행은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참된 믿음(은총)을 선물로 받게 되면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선행(공로)를 쌓게 됩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사랑을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보면, 은총이 작용(선행先行)한 결과로서 善行(공로)가 後行할 뿐입니다.
 
만일 내가 스스로 선행을 항구적으로 행할 수 있다 한다면, 구원을 이루는 주체는
바로 나(자유의지)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구원을 내가 이루므로 나는 하느님께
감사할 이유도 없고 그분을 의지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구원을 내 힘으로, 내가 이루므로 나는 나를 의지해서 내가 스스로 선행(공로)를 쌓아서
구원을 이룬다는 것인데, 이러한 그릇된 주장들은 이미 가톨릭 교회에 의해
이단 판정이 내려진 것들입니다. 바로  "펠라지오"와 "세미 펠라지오"라는 이단입니다.
 
관련 교리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1963
 
 
2082
 
 
2025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쌓는 공로는 하느님께서 당신 은총의 활동에 인간을
참여시키려는 자유로운 계획에 따르는 것일 뿐이다. 공로는 우선 하느님의
은총에 속하고, 그 다음으로 인간의 협력에 속한다. 인간의 공로 역시 하느님께
속한 것이다.
 
2026
 
성령의 은총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거저 베푸시는 의로움의
결과로 참된 공로를 세울 수 있게 한다.
 
2007
 
엄밀히 말해서, 하느님 앞에서 공로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10
 
은총의 영역에서는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행사하신다.
 
 
 
 
 
 
구본중 (amor11) (2011/08/26) : 굿~
김복희 (prana) (2011/08/26) : 저도 굿~~~^^
조정제 (wild306) (2011/08/26) : 또한 구원이 우리 선행과는 무관하게 하느님의 선물 즉 은총에 따른 것이라는 것은 천주교인이라면 누구라도 비신자의 임종시(임박할 시) 그가 주님을 믿겠다고 고백한다면... 대세를 주라고 가르칩니다. 즉 그도 구원의 대열에 들게 하도록 하는 교회의 배려입니다. 유아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유아세례도....원칙은 신앙을 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는 것이지만.. 교회는 모든 아가들이 하느님의 은총에서 하나도 제외되지 않도록 세례를 주라고 가르칩니다..... 선행이 구원에 필수라면..... 대세라던지.... 유아세례라던지... 이러한 교리는 우리 교회에서 배척되었을 것입니다. 교회는 누구나 구원의 은총에서 제외되지않도록 합니다.
조정제 (wild306) (2011/08/26) : 송형제님의 간결한 설명에 아래에서 좀 더 하고 싶은 제 말씀도 함께 적어보았습니다. 송형제님께 거듭 감사드립니다.
소순태 (sunsoh) (2011/08/26) : 송 형제님께서 좋은 글을 올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소순태 (sunsoh) (2011/08/26) : [소순태 (sunsoh) (2011/08/24) : "선행"은 하느님께서 의도하시는 바를 실천하기 위하여, 즉 하느님 원하시는대로 상대방의 선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하느님과 그리고 상대방을 위하여, 실천하는 것이기에, 사실은 자신의 구원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중요한 내용을 모르고 있으니, 목회자를 잘못 만난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의 선행에 대한 가르침 자체를 크게 오해/억측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소순태 (sunsoh) (2011/08/26) : [소순태 (sunsoh) (2011/08/24) : 달리 말하여, 선행은 제대로된 신앙/믿음(fafith), 즉 애덕과 함께 하는 "살아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본인에게 주어진 은총의 결과로서, 누구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구원을 위하서가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을 위하여 그리고 상대방의 선(good)의 회복 및 증진을 위하여, 행하게 됩니다.]
소순태 (sunsoh) (2011/08/26) : 또한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010항의 세 번째 문장은, 공로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구원 그 자체가 아니라, "은총"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세례에 의하여] 최초의 은총을 받은 뒤 우리는 성령과 사랑의 인도를 받아,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우리의 성화를 위해, 은총과 사랑의 성장을 위해,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위해 필요한 은총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공로를 세울 수 있다.
소순태 (sunsoh) (2011/08/26) :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010항 두 번째 문장) Moved by the Holy Spirit and by charity, we can then merit for ourselves and for others the graces needed for our sanctification, for the increase of grace and charity, and for the attainment of eternal life.
박영진 (mryjpark) (2011/08/26) : 좋은글 감사합니다.
박영진 (mryjpark) (2011/08/26) : 예수님께서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알아들을 귀가 있는자는 알아들어라"
소순태 (sunsoh) (2011/08/26) : 위에 전달해 드린,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010항의 두 번째 문장의 분명한 가르침이, 특히 공로와 관련하여 헷갈린다는 교우님들께서 자신의 생각을 말끔히 정리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송두석 (peterfe12) (2011/08/26) : 소순태 (sunsoh) (2011/08/26) : 다음은,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공로(merit)" 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 입니다: 공로(MERIT): 당신을 사랑하고 그리고 당신의 은총에 의하여 선행들을 실행하는 자들에게 하느님께서 약속하시고 그리고 주시는 보상(reward)을 말한다. 아무도,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인, 의로움(justification) 혹은 영원한 생명을 ‘공로로 얻을(merit)’ 수 없으며,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모든 공로의 원천은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은총에 기인한다(2006).
송두석 (peterfe12) (2011/08/26) : 위에 인용된 댓글(소순태 형제님께서 번역하신 글)에 훌륭하게 정의가 되어 있군요. 소 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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