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감사기도 제1양식 중의 번역 오류, 예수님의 구속/속량 위업은 오로지 죄들의 용서만을 의미하지 않고 또한 총귀/총괄복귀(recapitulatio)를 계시한다 1122_ 1242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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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9 ㅣ No.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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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면서

 

이번 항에서는, 본글을 작성하게 된 배경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20년 10월 25일]

게시자 주: 다음에 발췌된 바는, 본글을 읽고서 어떤 자매님이 주신 답글입니다.

 

(발췌 시작)

찬미예수님! 소순태님을 위해 기도 드립니다.

 

소순태님께서 올리신 글 속 내용을 읽어봤습니다. 마태오님께서는 '속량'과 '구원'을 명확하게 분리시켜 일대일 직역 번역을 해야만 한다는 지론으로서,  우리말 성경 및 교리서에서 '속량'을 '구원'이라고 번역한것은 번역오류라고 하셨지요.

 

꼭 일대일 직역번역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시면 더 많은 것을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번역해야 한다는 뜻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꼭 일대일 직역번역을 해야만 맞고 그렇지 않으면 틀렸다고 하면 억지 아니겠는지요.

 

마태오님의 주장과 정반대의 예로서,
히브리서 9,15를 찾아보시면,  속량(redemption)이라는 그리스단어 ?πολ?τρωσιν 를 우리말 성경에서는 '속량'이라고 직역 번역했으나, NAB에서는  redemption 로 번역하지 않고 deliverance 라고  번역한 것도 있습니다. 
 
어차피 인간의 언어에는 한계가 있는 법.
꼭 일대일 직역번역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시면 더 많은 것을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 발췌 끝)

 

위의 답변에 대한 필자의 답변:

 

A. [소순태님께서 올리신 글 속 내용을 읽어봤습니다. 마태오님께서는 '속량'과 '구원'을 명확하게 분리시켜 일대일 직역 번역을 해야만 한다는 지론으로서,  우리말 성경 및 교리서에서 '속량'을 '구원'이라고 번역한것은 번역오류라고 하셨지요.]

 

<----- 그렇습니다. 우리말 성경 및 교리서에서 '속량'/'구속'을 '구원'이라고 번역한 것은 중대한 번역 오류입니다. 특히, 미사 경본 중의 감사기도 제1양식에서 이렇게 번역한 분(들)은, 그 심각성 때문에, 아마도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B. [꼭 일대일 직역번역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시면 더 많은 것을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제 글을 읽고서, 오로지 본인의 느낌(feeling)만에 의존하기 때문인지, 상당히 잘못 이해하고 계시는군요.

 

아래의 본글의 본문 중 어디에서 제가 "꼭 일대일 직역번역을 해야만 한다"는 언급을 하였는지요??? 이와 같이, 자매님의 고유한 느낌/생각을 상대방의 생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왜곡의 가능성이 다분하기 때문에, 상당히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C.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번역해야 한다는 뜻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꼭 일대일 직역번역을 해야만 맞고 그렇지 않으면 틀렸다고 하면 억지 아니겠는지요.]

 

<----- 제 글을 읽고서, 오로지 본인의 느낌만에 의존하기 때문인지, 상당히 잘못 이해하고 계시는군요.

 

동일한 의미 군(group)에 속하지 않는 용어들, 즉, 논리적으로 등가가 아닌 용어들은,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대응하는 번역 용어들을 각각 다르게 선택함으로써, 애초의 번역 대본에서 구분되고 있는 유관 개념들 사이에 있는 원 의미 체계가, 우리말로 번역된 후에도, 훼손되거나, 확대되거나, 축소되거나, 혹은  파괴되지 않도록 우리말 번역 작업이 수행되어야 한는다는 이야기를 아래의 본글은 하고 있습니다.

 

D. [마태오님의 주장과 정반대의 예로서,
히브리서 9,15를 찾아보시면,  속량(redemption)이라는 그리스단어 ?πολ?τρωσιν 를 우리말 성경에서는 '속량'이라고 직역 번역했으나, NAB에서는  redemption 로 번역하지 않고 deliverance 라고  번역한 것도 있습니다.]

 

<----- NAB 히브리서 9,15에서 "redemption" 대신에 "deliverance"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한 개의 반례로서 제시하셨는데, 그러나 자매님께서 제시한 정반대의 예는 반례(a counter-example)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NAB 히브리서 9,15에서 번역 용어로서 선정된 "deliverance"라는 단어는, 제가 확인한 바에 의하면, "redemption"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따라서 동일한 의미 군(group)에 속하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제시된 바들을 정밀하게 들여다보면서, 학습하도록 하십시오:

 

(D-1) 다음의 출처 1 주소에 접속하면, 그리스어본 NAB 히브리서 9,15를 읽을 수 있는데, 해당 그리스어 단어 ?πολ?τρωσιν의 의미를 나타내는 동일한 의미 군(group)에, 영어 단어들 "redemption" 및 "deliverance" 이들 둘 다가 포함되어 있음을 출처 2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들 두 영어 단어들은 논리적으로 등가인(logically equivalent) 단어들로서 사용될 수도 있음을 확인합니다:

 

출처 1: https://biblehub.com/interlinear/hebrews/9-15.htm 

출처 2:  https://biblehub.com/greek/629.htm <----- 클릭하여 꼭 확인하십시오

 

(D-2)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가톨릭 보편 교회의 공식 언어인 라틴어본 성경인 "새 대중 라틴말 성경" 본문과의 부합/일치를 위하여 지역 언어로의 번역 시에 반드시 참조하여야 하는,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새 대중 라틴말 성경(Nova Vulgata) 중의 히브리서 9,15를 읽을 수 있는데, "redemptionem"라는 라틴어 단어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bible/nova_vulgata/documents/nova-vulgata_nt_epist-hebraeos_lt.html#9 <----- 클릭하여 꼭 확인하십시오

(발췌 시작)

15 Et ideo novi testamenti mediator est, ut, morte intercedente in redemptionem earum praevaricationum, quae erant sub priore testamento, repromissionem accipiant, qui vocati sunt aeternae hereditatis.

(이상, 발췌 끝)

 

(D-3) 따라서, NAB 히브리서 9,15에서 "redemption"이라는 단어 대신에 "deliverance"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래의 본문 중에서 필자가 지적하고 있는 바에, 정반대의 예가 아닐 수도 있음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이들 두 영어 단어들은, 한 개의 동일한 의미를 나타내는 의미 군(group)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또한 함께 고려햐여야 하는 바 전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한 개의 영어 단어가 반드시 한 개의 의미만을 나타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D-4) NAB 히브리서 9,15에서 "redemption" 대신에 "deliverance"로 번역된 것에 대하여 한 말씀을 드린다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대다수 영어본 성경들의 히브리서 9,15에서 "redemption"으로 번역되고 있는 단어를, NAB 히브리서 9,15에서 "deliverance"로 굳이 번역한 것은, 어쩌면 번역 미숙에 해당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https://biblehub.com/hebrews/9-15.htm <----- 클릭하여 꼭 확인하십시오

 

왜 이 추가 지적을 드리는가 하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영어 단어 "deliverance"가 성경 번역 용어로서 사용될 때에, 전후 문맥 안에서, 드물기는 하지만, "salvation"(구원)의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https://biblehub.com/greek/4991.htm <----- 클릭하여 또한 꼭 확인하십시오

 

따라서, 이런 문제가 있을 때에는, 위의  제(C-2)항에서 안내해 드린, 지역 언어로의 번역 시에 판단의 기준/잣대(norm, standard) 역할을 하는"새 대중 라틴말 성경", 히브리서 9,15에서 사용된 해당 라틴어 단어의 어근(root)을 유지하는 영어 단어, "redemption"를 대응하는 번역 용어로서 마땅히 선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하지만,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NAB 히브리서 9,15의 최종 영어 번역문이 마련될 때에, 번역자(들)이 이 기준/잣대를 준수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씀인고 하면, 이성의 판단에 있어 설득력이 결여된, 따라서 단순히 정반대의 예라는 형식 논리적 표현은 오로지 수사학적 강조일 뿐이며, 그리고 그러한 오로지 수사학적 강조 자체만로부터는 어떠한 진리도 창출될 수도 없고 또 발견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E. [어차피 인간의 언어에는 한계가 있는 법.
꼭 일대일 직역번역을 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시면 더 많은 것을 얻으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인간의 언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특히 지역 언어로의 성경 번역시에 더더욱 교황청 유관 부서의 번역 지침을 준수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의 본문 중에서 제가 말한 적이 없는 "꼭 일대일 직역번역을 해야만 한다"라는 왜곡의 문장을 스스로 만들어서는, 저의 생각이라고까지 주장을 하면서, 음... 권고의 형식을 사용하였는데,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아래의 본글의 작성과 관련하여, 필자 개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셔야지요... 그렇지 않는지요? 

 

세속의 댓가로서 흔히들 말하는, 돈입니까, 명예입니까, 아니면 권력입니까???

당연하게도 이런 것들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독자들로부터 제가 더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질투(envy)입니까???

 

F.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경 언어에 있어, 즉, 가톨릭 성서 신학에 있어, "salvation""deliverance"의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졸글[제목: 구원이라는 용어의 성경적 정의(definition) 외; 게시일자: 2011-08-24]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99.htm

(발췌 시작)

2-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salvation" 용어의 설명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발췌 시작) 
SALVATION

In biblical language the deliverance from straitened circumstances or oppression by some evil to a state of freedom and security. As sin is the greatest evil, salvation is mainly liberation from sin and its consequences. This can be deliverance by way of preservation, or by offering the means for being delivered, or by removing the oppressive evil or diffculty, or by rewarding the effort spent in co-operating with grace in order to be delivered. All four aspects of salvation are found in the Scriptures and are taught by the Church. (Etym. Latin salvare, to save.)
 
구원(SALVATION)
 
성경의 언어에 있어 어떤 악(some evil)에 의한 부자연스러운 여건들 혹은 억압(strained circumstances or oppression)으로부터 자유 및 안전(freedom and security)의 어떤 상태로의 구조/구출(deliverance)을 말합니다. 죄(sin)는 가장 커다란 악이기에, 구원(salvation)은 주로(mainly) 죄와 그 결과들로부터의 해방(liberation)을 말합니다. 이것은 (i) 예방(preservation)의 방식에 의한, 혹은 (ii) 구출되는 수단의 제공에 의한, 혹은 (iii) 억압하는 악(evil) 혹은 어려움의 제거에 의한, 혹은 (iv) 구출받기 위하여 은총(grace)과의 상호 협조에 소비된 노력에 대한 상을 줌(rewarding the effort)에 의한, 구조/구출(deliverance)일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이 네 가지 양상들 모두는 성경의 본문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그리고 교회에 의하여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어원: Latin salvare, to save.).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2-2: 따라서, 논리적으로 다음의 관계들이 성립함을 알 수 있습니다:


(A) 구원(salvation)은 구조/구출(deliverance) 및 해방(liberation)이나,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B) 구원(salvation)은 구조/구출(deliverance)이나,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C) 구원(salvation)은 해방(liberation)이나,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다음의 관계들이 성립함을 알 수 있습니다:

 

(C) 해방(liberation) 안에만 오로지 구원(salvation)이 있을 수 있다.

(B) 구조/구출(deliverance) 안에만 오로지 구원(salvation)이 있을 수 있다.

(A) 구조/구출(deliverance) 및 해방(liberation) 안에만 오로지 구원(salvation)이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다음의 관계들이 성립함을 알 수 있습니다:

 

(C) 해방(liberation) 된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구원(salvation)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B) 구조/구출(deliverance) 된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구원(salvation)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A) 구조/구출(deliverance) 된 자들 및 해방(liberation) 된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구원(salvation)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이상, 게시자 주 2-2 끝)

 

2-3.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용어집에 주어진 "salvation"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학습할 수 있습니다:

(발췌 시작) 
SALVATION: The forgiveness of sins and restoration of friendship with God, which can be done by God alone (169).
 
구원(SALVATION): 죄들의 용서(forgiveness)와 하느님과의 우의의 상태(友誼, friendship)의 회복(restoration)을 말하는데, 이것은 오로지 하느님에 의하여 행해질 수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69항).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발췌 끝)

 

각설하고, 자매님의 댓글에 대한 바로 위의 필자의 답변들이, 아래의 본글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가 도대체 무엇에 관한 것인지를 독자들[주: 여기에는 성직자들 및 수도자들이 포함됨]께서 더 쉽게 알아차리게 되는 데에, 추가적으로, 약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니까, 세속의 단어들로서기 아니고 교회의 용어들로서 사용되고 있는,

 

(i) 영어로 "redemption"(구속/속량)로 번역되는 단어로 대표되는, 특히 십자가 위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Christ)가 명백하게 기술되어야 하는(#), 한 개의 의미 군(group);

(ii) 영어로 "forgiveness of sins"(죄들의 용어)로 번역되는 단어로 대표되는 한 개의 의미 군(group); 그리고

(iii) 영어로 "salvation"(구원)로 번역되는 단어로 대표되는 한 개의 의미 군(group),

 

이들 셋를 두고서, 특히 국내의 개신교회 측에서, 16세기에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단죄된 마르틴 루터의 핵심 이단 주장에 동조하여, 특히 위에서 (#) 표시한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한 구속/속량(Redemption) 위업을 경축하는 성찬례(the Eucharist)를 인정하지 않음을 정당화 하고자,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한 개의 동일한 의미 군(group)이라고 독자들이 이해하도록, 우리말 번역을 하고 있으나, 그러니, 이들 세 개의 의미 군(groups)들이 그리스도교 전통적 교의 신학적으로 결코 한 개의 동일한 의미 군(group)일 수가 없음을, 가톨릭 보편 교회의 문헌들에 근거하여, 아래의 본글에서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하고 있습니다.

 

아래의 본글 중에서, 변별력의 유지를 위하여, "논리적으로 등가이다(logically equivalent)"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표현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상, 필자의 답변 끝]

[이상, 2020년 10월 25일자 답변 끝]

 

1-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594항에서, "새 번역 성경", 콜로새서 1,14가 발췌 인용되고 있는데,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00.htm

 

"새 번역 성경", 콜로새서 1,14에서, (i) 예수님의 핵심 위업들 중의 하나인 "속량"/"구속"(redemption)이라는 용어가 나타내는 개념과 (ii) 예수님의 바로 이 위업의 한 결과로서,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게 되는 혜택일뿐인 "죄들의 용서"라는 표현이 나타내는 개념이, 논리적으로 등가(logically equivalent)인 것으로 독자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도록, "즉"이라는 단어가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 추가되어"속량을, 죄의 용서를"이라고 우리말로 번역이 된 것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비록 필자가 많이 부족한 죄인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두 개념들이 전통적 그리스도교 교의 신학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논리적으로 등가(logically equivalent)일 수가 없음을 필자가 그동안의 학습을 통하여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 심각한 번역 오류를 바로잡는 데에 약간의 도움이 될까 하여, 본글의 작성에 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2.

1-2-1. 콜로새서 1,14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예를 들어다해 그리스도 왕 대축일(제34주일) 제2독서(콜로새 1,12-20)에 포함되는데,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학습할 수 있는, 다해 그리스도 왕 대축일(제34주일) 제2독서(콜로새 1,12-20)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에서 발췌한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 아래에 발췌된 바에서 우리말 번역은 필자가 한 것입니다:

 

츨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king.htm 

(발췌 시작)

On the meaning of "redemption" and "forgiveness of sins", see the note on
Eph 1:7-8. 

 

"구속"/"속량"(redemption) 그리고 "죄들의 용서"(forgiveness of sins)"의 의미에 대하여서는, 에페소서 1,7-8에 대한 주석을 보십시오.(*)

 

-----
(*)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나해 연중 
제15주일 제2독서(에페소 1,3-14)
에 대한 본 주석서의 해설 전문을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ot_15.htm
<----- 필독 권고
-----

(이상, 발췌 끝)

 

1-2-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당신의 자녀? 친자 혹은 양자??? -에페소 1,5 외" 제목의 졸글[게시일자: 2015-07-08]을 읽을 수 있는데,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50.htm <----- 필독 권고

 

 바로 위의 주소에 접속한 후에. 제2항부터 끝까지에서,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그리고 필자가 5년 전에 무슨 소리를 하였는지, 꼭 살펴보도록 하십시오.

 

1-2-3. 위의 제1-1항에서 이미 지적한 번역 오류의 문제의 심각성 때문에,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나해 연중 제15주일 제2독서(에페소 1,3-14)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대단히 긴 해설 전문을, 최근에 들어와, 필자가 우리말로 번역을 완료할 결심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ot_15.htm <----- 필독 권고

 

생업 속에서, 우리말로 번역을 하는 데에 투입된 시간은 약 일주일 정도였습니다.

 

1-3.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유일한 중보/중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핵심 위업들 중의 하나인, 따라서 한 개의 초자연적 개념(a supernatural concept)인, "구속"/"속량"(redemption) 위업과 관련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그동안 작성한 유관 졸글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redemption_objective_vs_subjective.htm

 

위의 주소에 접속한 후에, 특히, 제1129번 글, 제1169번 글, 제1650번 글, 제1689번 글, 제2106번 글, 그리고 제2110번 글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1-4. 이번 항에서는,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CCCC) 제101항의 우리말 번역에 대하여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1-4-1. 다음은, 한국 천주교회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101항 전문입니다. 참고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101항"가톨락 교회 교리서" 제512항-제521항, 그리고 제561항-562항의 내용을 요약하여 문답 형식으로 마련된 항입니다:

 

질문 1:  마지막 문장에서, "구원의 신비"라는 번역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 번역 표현에 대응하는 영어 표현이 무엇일 것 같은지요? the mystery of salvation일 것 같은지요???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ck/CCCC_kr.htm

(발췌 시작)

구원의_신비(번역오류)_in_가톨릭교회교리서요약편_제101항_제56쪽.jpg

(이상, 발췌 끝)

 

질문 1에 대한 답변: 다음에 발췌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의 유일한 근거 문헌인,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중의 대응하는 해당 부분인 제517항의 첫 문장을 읽어보십시오.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101항의 마지막 문장에서 "속량의 신비"로 번역되지 않고, "구원의 신비"로 번역된 것이 명백한 번역 오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ck/CCC_kr.htm

(발췌 시작)

517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속량’의 신비이다. 속량(贖良)은 무엇보다도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지만,[193] 이 신비는 그리스도의 전 생애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강생으로 스스로 가난해지시어 그 가난으로 우리를 오히려 부요하게 하신다.[194] 그분의 숨겨진 생활에서는 순종으로[195] 우리의 불순종을 보상하신다. 그분의 말씀은 듣는 사람들을 정화한다.[196] 그리고 그분은 치유와 구마(驅魔)로써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마태 8,17).[197]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심으로써 마침내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198] 

(이상, 발췌 끝)

 

그리고, 다음에 발췌된 바는, 라틴어 정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17항 전문인데, 첫 문장을 잘 읽어보십시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CCC517_lt.htm

(발췌 시작)

517 Tota Christi vita mysterium est Redemptionis. Redemptio venit ad nos imprimis per crucis sanguinem, 195 sed hoc mysterium in tota vita operatur Christi: iam in Incarnatione Eius, per quam, Se pauperem faciens, nos Sua ditat paupertate; 196 in Eius vita occulta, quae, per Eius submissionem, 197 nostram reparat insubiectionem; in Eius verbo, quod Eius auditores purificat; 198 in Eius sanationibus et exorcismis, per quae « Ipse nostras infirmitates accepit et aegrotationes portavit » (Mt 8,17); 199 in Eius Resurrectione, per quam nos iustificat. 200

(이상, 발췌 끝)

(이상, 질문 1에 대한 답변 끝)

 

질문 2: 그렇다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101항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 왜 이러한 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가 발생하였을까요?

 

질문 2에 대한 답변: 다음에 발췌된 바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101항의 이탈리아어본, 프랑스어본, 그리고 영어본인데, 이탈리아어본과 프랑스어본 둘 다에 동일한 종류의 번역 오류가 있으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101항을 우리말로 초벌 번역하는 과정에서, 아마도 이탈리아어본을 번역 대본으로 삼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며, 그러나, 이탈리아어본과 프랑스어본 둘 다보다 나중에 마련된 것이 분명한 영어본과의 정밀한 비교/검토를 통하여 혹시라도 영어본 제101항 중에 바로잡아진 문구가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았고, 그리고 더 나아가, 심지어 확실한 근거 문헌인 라틴어정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17항을 구체적으로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였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CCC =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CCCC = Compendium: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발췌 시작)

CCCC 101. In che senso tutta la vita di Cristo è Mistero?
CCC 512-521, 561-562
Tutta la vita di Cristo è evento di rivelazione. Ciò che è visibile nella vita terrena di Gesù conduce al suo Mistero invisibile, soprattutto al Mistero della sua filiazione divina: «Chi vede me, vede il Padre» (Gv 14,9). Inoltre, anche se la salvezza viene compiutamente dalla Croce e dalla Risurrezione, la vita intera di Cristo è Mistero di salvezza [주: 번역 오류], perché tutto ciò che Gesù ha fatto, detto e sofferto aveva come scopo di salvare l'uomo decaduto e di ristabilirlo nella sua vocazione di figlio di Dio.

CCCC 101. En quel sens toute la vie du Christ est-elle Mystère?
CCC 512-521,561-562
Toute la vie du Christ est un événement de révélation. Ce qui est visible dans la vie terrestre du Christ conduit à son Mystère invisible, surtout au Mystère de sa filiation divine : « Qui me voit, voit le Père » (Jn 14,9). D’autre part, bien que le salut soit pleinement accompli par la croix et la résurrection, la vie entière du Christ est Mystère de salut [주: 번역 오류], car tout ce que Jésus a fait, a dit et a souffert avait pour but de sauver l’homme déchu et de le rétablir dans sa vocation de fils de Dieu.

CCCC 101. In what sense is the life of Christ a Mystery?
CCC 512-521, 561-562
The entire life of Christ is a revelation. What was visible in the earthly life of Jesus leads us to the invisible mystery of his divine sonship: “whoever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John 14:9). Furthermore, even though salvation comes completely from the cross and the resurrection, the entire life of Christ is a mystery of redemption because everything that Jesus did, said, and suffered had for its aim the salvation of fallen human beings and the restoration of their vocation as children of God. 

(이상, 발췌 끝)

(이상, 질문 2에 대한 답변 끝)

 

1-4-2. 이상, 바로 위의 제1-4항에서 실증적으로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4)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101항의 마지막 문장 중에서, "속량의 신비" 혹은 "구속의 신비"로 직역 번역되지 않고, "구원의 신비"로 번역된 것이 번역 오류임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1-5. 이번 항에서는, 미사 경본 중의 "(Roman) Canon", 즉,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부터 "감사기도 제1양식"이라고 불리는, 그리스도교 전례에 있어 참으로 대단히 중요한, 가장 중요한, 기도문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면서, 들여다보도록 하겟습니다.

 

1-5-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개정되어 1970년에 공포된 미사 경본(Roman Missal) 의 영어본 본분에서, 개정된 부분들에 대하여, 라틴어 정본과의 정밀한 비교/검토 결과표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Eucharistic_Prayer_I_Translations.htm

 

특히, 다음은 바로 위의 출처로부터, 라틴어 정본 감사기도 제1양식, 즉, Roman Canon(典文), 중의 유관 부분을 발췌한 것인데, 영어로 "redemption"으로 번역되는 라틴어 단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췌 시작)

Memento, Domine,
famulorum famularumque tuarum N. et N.
et omnium circumstantium,
quorum tibi fides cognita est
et nota devotio,
pro quibus tibi offerimus:
vel
qui tibi offerunt
hoc sacrificium laudis,
pro se suisque omnibus:
pro redemptione animarum suarum,
pro spe salutis et incolumitatis suae:
tibique reddunt vota sua
aeterno Deo, vivo et vero.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1-5-1: (1)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알기에, (i)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감사기도 제2양식, 제3양식, 그리고 제4양식이 성찬 젼례에 처음으로/최초로 추가가 되었다고 알고 있으며, 따라서 (ii) 트리엔트 미사 경본 본문 중의 성찬 전례에는, "Roman Canon"(典文), 즉, 요즈음 우리말 말하는 감사기도 제1양식으로 불리는, 기도문만이 있다고 알고 있으며, 특히, (iii) 바로 이 감사기도 제1양식은, 가톨릭 교회의 초기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의 성찬 전례 중의 감시기도 양식에 가장 가까운 감사기도 양식이기 때문에, 이 기도문이 지역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 조금이라도 잘못 번역되어서는 아니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2) 그리고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알기에, 그리스도교 전례에 있어, 미사 중 말씀 전례에서 봉독되는 신약 성경 본문들 보다도, 그 역사가 오래되었고 따라서 더 중요한 기도문이 바로 성찬 전례 중에 바치게 되는, 바로 요즈음 우리가 말하는, 감사기도 제1양식, 즉, "Roman Canon"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 및 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 및 인성과 결합되는 유일한 순간이 바로 바로 감사기도 제1양식을 바치는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속량(Redemption) 위업의 결과로서, 현실태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3) 그리고 이어지는 제1-5-2항에, 트리엔트 미사 경본 중의, 요즈음 우리가 말하는 감사기도 제1양식을 발췌하였는데, 그러나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교의 신학적으로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 아래의 제1-5-3항에 발췌된, 현재 우리나라 천주교회에서 사용 중인 감사기도 제1양식 기도문 중에, 영어로 redemption으로 번역되는 라틴어 용어가, "구속"(redemption)이라는 용어가 나타내는 개념과 결코 논리적으로 등가인(logically equivalent) 개념을 나타내는 용어일 수가 없는"구원"(salvaion)이라는 용어로,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교체된 데에 있습니다.

(이사, 게시자 주 1-5-1 끝)

 

1-5-2. 다음은 필자의 부친께서 사용하셨던, 그래서 필자가 소장 중인, 1951년 12월 1일대구가톨릭합창단에 의하여 초판 발행되었고 1954년 11월 22일에 재판 인쇄되어 재판 발행된, 1954년판 "가톨릭성가집", 미사지도서, 典文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발췌 시작)

1954년판_우리말본_미사경본(평신도용)_전문_제10쪽.jpg

 

1954년판_우리말본_미사경본(평신도용)_전문_제11쪽.jpg

 

게시자 주 1-5-2: (1)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산이를 위하여 드리는 경"(Commemoratio pro vivis, Commemoration of the Living)의 오른쪽에서부터 일곱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유관 부분 발췌 시작)

이는 자기 영혼들을 위하야 네 구속지은(救贖之恩)을 얻고저 하오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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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1) 괄호 및 괄호 안에 있는 "救贖之恩"이라는 한문 표현은 필자가 추가한 것이다.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우리말본 "산이를 위하여 드리는 경"에 대응하는, 1967년판 라틴어 정본 미사 경문 중의 해당 기도문(A) 및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개정되어 1970년에 공포된 미사 경본의 영어본 중의 해당 기도문(C)과 정밀하게 비교/검토할 수 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tridental_missal/redemption_in_secret_in_08-2_2020_성신강림후제9주일_1967Rubrics과_새미사경본_비교.htm

(발췌 시작)

(A)

Commemoratio pro vivis
Meménto, Dómine, famulórum famularúmque tuarum N. et N. Jungit manus, orat aliquantulum pro quibus orare intendit: deinde manibus extensis prosequitur: et ómnium circumstántium, quorum tibi fides cógnita est et nota devótio, pro quibus tibi offérimus: vel qui tibi ófferunt hoc sacrifícium laudis, pro se suísque ómnibus: pro redemptióne animárum suárum, pro spe salútis et incolumitátis suæ: tibíque reddunt vota sua ætérno Deo, vivo et vero. 

 

(C)

Commemoration of the Living.
Remember, Lord, your servants N. and N. The Priest joins his hands and prays briefly for those for whom he intends to pray. Then, with hands extended, he continues: and all gathered here, whose faith and devotion are known to you. For them and all who are dear to them we offer you this sacrifice of praise or they offer it for themselves and all who are dear to them, for the redemption of their souls, in hope of health and well-being, and fulfilling their vows to you, the eternal God, living and true.

(이상, 발췌 끝)

 

(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우리말본 "산이를 위하여 드리는 경"에 대응하는, 1967년판 라틴어 정본 미사 경문 중의 해당 기도문(A) 및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개정되어 개정되어 1970년에 공포된 라틴어 정본 미사 경본 중의 해당 기도문(B)과 정밀하게 비교/검토할 수 있다. 정확하게 동일함에 반드시 주목하라: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tridental_missal/redemption_in_secret_in_08-2_2020_성신강림후제9주일_1967Rubrics과_새미사경본_lt_비교.htm

(발췌 시작)

(A)

Commemoratio pro vivis
Meménto, Dómine, famulórum famularúmque tuarum N. et N. Jungit manus, orat aliquantulum pro quibus orare intendit: deinde manibus extensis prosequitur: et ómnium circumstántium, quorum tibi fides cógnita est et nota devótio, pro quibus tibi offérimus: vel qui tibi ófferunt hoc sacrifícium laudis, pro se suísque ómnibus: pro redemptióne animárum suárum, pro spe salútis et incolumitátis suæ: tibíque reddunt vota sua ætérno Deo, vivo et vero. 

 

(B) Commemoratio pro vivis.
Meménto, Dómine, famulórum famularúmque tuárum N. et N. Iungit manus et orat aliquantulum pro quibus orare intendit. Deinde, manibus extensis, prosequitur: et ómnium circumstántium, quorum tibi fides cógnita est et nota devótio, pro quibus tibi offérimus: vel qui tibi ófferunt hoc sacrifícium laudis, pro se suísque ómnibus: pro redemptióne animárum suárum, pro spe salútis et incolumitátis suae: tibíque reddunt vota sua aetérno Deo, vivo et vero.

 

(3)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救贖之恩"(구속지은)이라는 한문 표현이 1635년에 이르면, 줄리오 알레니 신부님의, 신약 4복음서들을 하나로 묶은 한 종류의 화합복음서/조화복음서인, "천주강생언행기략"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따라서 개신교회 측의 용어가 아님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07.htm 

(발췌 시작)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82-1649_쥬리오_아레니/1635_천주강생언행기략.htm  

(발췌 시작)

천주강생언행기략, 권4_18_자증진주_86-87 (<---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요한 복음서 8,12-30(매년 사순 제5주간 월요일 복음 말씀; 매년 사순 제5주간 화요일 복음 말씀)] [(2016년 7월 5일) 주: 각주에서 "은총"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가, 이 저서의 본문 중에서, 처음 사용되고 있음. (2016년 7월 16일) 주: 그러나 알퐁소 바뇨니 신부님(1566-1640년)에 의하여 1631년에 초간된 "성모행실", 권지2, 성모시태, 제8쪽에서 "은총"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 다음에 있는 내용 참조 요: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01.htm ] [(2016년 12월 13일) 주: 각주에서 "강생구속"이라는 번역 용어가 사용되고 있음.]

 

강생구속_in_16365_천주강생언행기략_권4_18_자증진주_제16b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열(column)을 보라. "구속지은"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상 발췌 끝)

(이상, 게시자 주 (1), (2), 그리고 (3) 끝)

-----

(이상, 게시자 주 1-5-2 끝)

 

1-5-3. 다음에 발췌된 바는, 현재 사용 중인 우리말본 미사 경본, 감사기도 제1양식에서, 위의 제1-5-2항에 발췌된 "산이를 위하여 드리는 경"(Commemoratio pro vivis, Commemoration of the Living)에 대응하는 기도문입니다:

 

출처: https://maria.catholic.or.kr/mi_pr/missa/ordinary.asp#missa_05 

(발췌 시작)

85. 산 이를 기억한다.

╋ 주님, 주님의 종 (     )와 (     )를 생각하소서.

     사제는 손을 모으고 지향에 따라 잠깐 속으로 기도한다.
     그 다음에 팔을 벌리고 계속한다.
아울러, 주님께서 여기 모인 모든 이의 믿음과 정성을 아시오니
이들도 굽어보소서.
저희는 이들을 위하여 찬미의 제사를 바치나이다.
이들도 자신과 일가 친척과 친지들이
안전하게 구원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성을 모아
영원하시며 살아 계신 참하느님께
이 찬미의 제사를 바치나이다.

(이상, 발췌 끝)

 

(이 글의 결론 5) 현재 사용 중인 우리말본 "미사 경본", 감사기도 제1양식 중의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구속"(救贖, redemption)으로 직역 번역이 되지 않고, "구원"(salvation)으로 잘못 번역된 번역 오류가 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게시자 주 1-5-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에 많이 개정되어 처음으로 도입된, 지금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라틴어 정본의 미사 경본이 우리말로 번역이 될 때에, 번역 작업에 참여한 분들이 다들 익숙하게 잘 알고 있었을, 위의 제1-5-2항에 발췌된 트리엔트 미사경본 중의 전문(Canon) 중의 구속(redemption, 救贖)구원(salvation)로 번역하였거나, 혹은 그 이후의 어느 시점 이와 같이 교체된 것에 대하여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교황정 신앙교리성 문헌에서 지시하는 바에 따르면, 이 심각한 번역 오류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한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07.htm 

[제목: 가톨릭 보편 교회 문헌들의 우리말 번역 작업 자체가 해석/주해 작업이어서는 아니 됩니다; 게시일자: 2015-02-17]

(출처 1로부터 발췌 시작)

3-5-1.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i) 위의 제3-2항에 발췌된,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린 "마음" 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나타내는 불가산 명사(uncountable noun)인 순수한 우리말 단어의 의미가 지금까지처럼 그리고 앞으로도, 전와(轉訛)됨 없이, 계속 잘 보존된다면,

(iI) 그리고 위의 제3-1항에 발췌된, 신앙의 유산(the deposit of faith)에 근거한 성경(Sacred Scriptures)과 성전(Sacred Tradition)에 대한 가톨릭 보편 교회의 살아 있는 교도권(의 가르침)이 이 땅에까지 앞으로도 온전하게 계속 잘 전달된다면,

(iii) 십자가 위에서 거룩한 속량의 피를 흘리셨던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예수 성심)으로부터 당신의 성혈이 이 땅 위에도 더 이상의 저지됨 없이 흘러내리게 되어,

 

그리하여, 예를 들어, 영어본 및 프랑스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599항, 제2603항, 그리고 제2765항 등에서 his human heart(son cœur d’homme)로 번역되는 표현이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해당 항들에서, 당신의 인간의 심장으로 올바르게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이 되는 대신에, 지금까지처럼, 당신께서 지니신 인간의 심성, 그분께서 인간으로서 지니신 ... 마음으로, 혹은 인간의 마음 등으로 계속하여 잘못 의역 번역(free translation)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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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음은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전례문, 성경 등의 가톨릭 보편 교회의 문헌들의 지역 언어로의 번역 지침서인, 2001년 5월 7일자 교황청 경신성사성 문헌[제목: Liturgiam authenticam] 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cdds/documents/
rc_con_ccdds_doc_20010507_liturgiam-authenticam_en.html

Fifth Instruction “For the Right Implementation of the Constitution on the Sacred Liturgy of the Second Vatican Council”, Liturgiam authenticam On the Use of Vernacular Languages in the Publication of the Books of the Roman Liturgy.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7월 17일]

특정 용어들의 지역 언어로의 직역 번역(lietral translation)과 관련하여, 교리 교육의 필요성 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바로 위의 문헌의 항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29항, 제30항, 제40항, 제43항, 제74항, 제133항.

 

특히 기존의 지역 언어본 번역물의 개정에 대한 언급은 제133항에 주어져 있습니다.

[이상, 2015년 7월 17일자 내용 추가 끝]

 

(1) 이 문헌의 제57항 b)는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va2001trans_guide.htm

(발췌 시작)
57. b) In the translation of terms contained in the original text, the same person, number, and gender is to be maintained insofar as possible.


57. b) 원문에 포함된 용어들의 번역에 있어, 가능한 한 같은 사람, 같은 숫자, 같은 성(性, gender)이 유지가 되어야만 한다.

(이상, 발췌 끝)

 

(2) 그리고 이 동일한 문헌의 제43항의 두 번째부터 마지막까지 문장들은 같습니다:

 

(발췌 시작)

43. [...] Thus it is best that such terms not be explained or interpreted by more abstract or general vernacular expressions. As regards certain terms, such as those translated in the Nova Vulgata as anima and spiritus, the principles mentioned in above nn. 40-41 should be observed.  Therefore, one should avoid replacing these terms by a personal pronoun or a more abstract term, except when this is strictly necessary in a given case. It should be borne in mind that a literal translation of terms which may initially sound odd in a vernacular language may for this very reason provoke inquisitiveness in the hearer and provide an occasion for catechesis.

 

43. [...] 따라서 그러한 용어들은 더 추상적이거나 혹은 더 일반적인(more abstract or general) 세속의 표현들에 의하여 설명되거나(explained) 혹은 해석되지(interpreted) 않는 것이 최선이다.(#1) 새 대중 라틴말 성경에서 anima(영혼)spiritus(영) 로 번역되고 있는 바로 그러한 용어들처럼, 특정한 용어들에 관하여, 위의 제40항-제41헝들애 언급되어 있는 원리/원칙(principles)들은 마땅히 준수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러한 용어들을 어떤 인칭 대명사(a personal pronoun) 혹은 어떤 더 추상적인 용어(a more abstract term)교체하는 행위(replacing), 어떤 주어진 경우에 있어 이것이 엄밀하게 필요한 때를 제외하고는, 마땅히 회피하여야 한다.(#1) 어떤 세속 언어에 있어 초기에(initially) 어색하게 들릴 수도 있는, 용어들의 어떤 자구적 번역(a literal translation)은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청중들에게 알고 싶어함(inquisitiveness)을 불러일으켜 그리하여 교리 교육의 한 기회(an occasion for catechesis)를 제공할 수도(may) 있음이 마땅히 마음에 새겨져야 할 것이다.(#0)

 

-----
(#1) 번역자 주: 달리 말하여, 지역 언어로의 번역 과정에서 번역자의 자의적/임의적 해석/주해가 번역된 본문 중에, 마치 직역 번역된 본문의 일부인양, 추가되는 것을 금한다는 표현이다. 이 지침은 또한, 만약에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 궁극적 책임이, 해당 문헌의 해당 지역 언어본으로 출판을 허락한 지역 교회의 교도권자에게 있다기보다는, 번역자 당사자에게 있음을 또한 밝히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추후에라도 그러한 오류가 지역 언어로의 번역본에서 발견이 되면, 이 지침에서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바로잡아져야 함을 또한 이 지침은 밝히고 있다는 생각이다.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6월 15일]

(#0) 번역자 주: 최근에 들어와, (i)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교황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매 주간 수요일에 있는 교리 교육용 일반 알현 강론 말씀들과 (ii) 다양한 기회들에 주어지는 교황님들의 강론 말씀들은, 이러한 용도의 교리 교육의 역할을 또한 해 왔다는 것이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이다. 예를 들어, 다음의 글에 안내되어 있는 히브리어 구약 성경 용어인 "heart(심장)"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에 대한 교황님들의 가르침들을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01_heart_Popes.htm <----- 필독 권고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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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 그리고 이 동일한 문헌의 제40항 전문 및 제41항의 전반부 및 마지막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발췌 시작)

40. With due regard for the requirements of sound exegesis, all care is to be taken to ensure that the words of the biblical passages commonly used in catechesis and in popular devotional prayers be maintained. On the other hand, great caution is to be taken to avoid a wording or style that the Catholic faithful would confuse with the manner of speech of non-Catholic ecclesial communities or of other religions, so that such a factor will not cause them confusion or discomfort.

 

40. 건전한 성서 주해에 있어서의 요구 사항들에 대한 정당한 고려와 함께, 교리 교육에서 그리고 민간의 경례(敬禮)/공경 기도(popular devotional prayers)들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성경 구절들에 있어서의 표현들이 유지가 됨을 확실히 하기 위한 모든 주의가 기울여져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가톨릭 열심신자들이 비 가톨릭 교회적 공동체(non-Catholic ecclesial communities)[주: 여기에는 개신교 교파들이 포함됨]의 화법의 방식과 혼동할 수 있는, 그리하여 그 결과 그러한 어떤 요소가 그들에게 혼동(confusion) 혹은 불안(discomfort)을 장차 야기하지 않도록, 어떤 말씨(wording) 혹은 양식을 회피하기 위한 커다란 경계(caution)가 기울여져야 한다.


41. The effort should be made to ensure that the translations be conformed to that understanding of biblical passages which has been handed down by liturgical use and by the tradition of the Fathers of the Church, especially as regards very important texts such as the Psalms and the readings used for the principal celebrations of the liturgical year; in these cases the greatest care is to be taken so that the translation express the traditional Christological, typological and spiritual sense, and manifest the unity and the inter-relatedness of the two Testaments.[34]

 

41. 번역문들이, 전례에서의 사용에 의하여 그리고 교부들의 전승(tradition)에 의하여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성경 구절들에 대한 바로 그 이해에 합치됨(be conformed to)을, 특히 전례 주년(전례력)의 주된 경축들을 위하여 사용되는 시편들과 독서들 등과 같은 대단히 중요한 본문들에 관련하여, 확실하게 하기 위한 노력이 마땅히 기울여져야 하며,(#2) 그리고 바로 이러한 경우들에 있어, 번역문이 전통적인 그리스도론적(Christological), 예표론적(typological) 그리고 영성적(spiritual) 어의(語義)/의미(sense)를 표현하기 위하여, 그리하여 두 개의 계약[즉,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들의 단일성 및 상호-관련되어 있음(inter-relatedness)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34](#3) 최대한의 주의가 기울여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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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번역자 주: 이들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제공하는 다음의 자료들을 활용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85.htm [성 토마스 아퀴나스 용어집]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교회의 용어들의 정의(definitions)들을 전달하는 게시판]

 

(#3) 번역자 주:

(1) 다음의 주소에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80항 전문과 이어지는 글을 반드시 여러번 차분히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601_heart_CCC580.htm <----- 필독 권고 

 

(2) 한 처음에 사람이 창조될 때에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의 영혼(soul)지성[intellect, 마음(mentus)]자유 의지(free will), 그리고 자연법(the natural law)을 주셨고,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원죄 때문에 타락하게 된 인류의 윤리성(morality)의 회복을 위한 그 첫 단계로서, 모세를 통하여 당신에 의하여 선택된 백성인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당신의 신법(divine law)/계시법(revealed law)도 또한 알려 주셨으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백성의 윤리성의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인데, 이를 지켜보시던 성부 하느님께서는, 드디어, 오로지 인류에 대한 당신의 사랑(love) 때문에, 이스라엘의 자손들뿐만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윤리성의 회복을 위한 한 개의 결정적이고 또한 충분한 길인 은총의 법/사랑의 법/새 법(the New Law)을 새로 마련해 주시고자, 당신의 명에 따라 사람이 되신, 당신의 외아드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몸(body)을, 그리하여, 특히, 하느님의 심장(God's heart)인 바로 이분의, 살(flesh)과 피(blood)로 이루어진, 인간의 심장(his human heart)을, 인류의 속량(Redemption)을 위한 희생 제물로 바치게 하셨던 것이다(바로 위의 주소에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580항을 꼭 읽도록 하라)

 

(3) 바로 위의 제(2)항에 간략하게 말씀드린 이러한 성부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의 관점을 지속적으로 유념하면서, "그리스도의 인간의 심장(the human heart of Christ)"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 다음의, 우리말본이 아닌, 라틴어 정본, 영어본, 그리고 프랑스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항들은의 번호들인데, 우리말본이 아닌 이 항들을 아래에 나열된 순서대로 읽도록 하라:

 

CCC 580 [바로 위의 주소] <----- 필독 권고

CCC 609 <----- 필독 권고

CCC 478 <----- 필독 권고 

CCC 2599 [아래에 있는, 이 글의 제3-5-2-1항] <----- 필독 권고

CCC 2765 [아래에 있는, 이 글의 제3-5-2-3항] <----- 필독 권고

CCC 2603 [아래에 있는, 이 글의 제3-5-2-2항] <----- 필독 권고

CCC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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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nally, translators are strongly encouraged to pay close attention to the history of interpretation that may be drawn from citations of biblical texts in the writings of the Fathers of the Church, and also from those biblical images more frequently found in Christian art and hymnody.

 

끝으로, 번역자들이 교부들의 저술들에 있는 성경 본문들의 인용들로부터,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교 예술과 찬미가(hymnody)에서 더 자주 발견되는 바로 그 성경 묘사(biblical images)들로부터, 도출될 수도 있는, [성경 본문에 대한] 해석의 역사(the history of interpretation)(#4)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 강력하게 독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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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번역자 주: 이들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예를 들어,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2006년 12월부터 제공해온 다음의 홈페이지에 있는 가톨릭 보편 교회의 문헌들을 최대한 활용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 [PC 용; 호환용 보기 설정 선택이 필요함]

http://ch.catholic.or.kr/pundang/4/m [스마트 폰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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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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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1로부터 발췌 끝)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va2001trans_guide.htm 

 

출처 3: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cdds/documents/rc_con_ccdds_doc_20010507_liturgiam-authenticam_en.html 

(출처 3으로부터 발췌 시작)

A. The Eucharistic Prayers

 

A. 감사기도들 

 

63. The high point of all liturgical action is the celebration of the Mass, in which the Eucharistic Prayer or Anaphora in turn occupies a pre-eminent place.[41] For this reason, the approved translations of the approved Eucharistic Prayers require the utmost care, especially as regards the sacramental formulae, for which a particular procedure is prescribed below, in nn. 85-86.  

 

63. 모든 전례 행동의 고점(high point)은 미사 경축이며, 그 안에서 감사기도(the Eucharistic Prayer) 혹은 아나포라(Anaphora)는 이 번에는(in turn) 하나의 출중한(pre-eminent) 자리를 차지합니다.[41]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교황 교도권에 의하여] 기 승인된 [라틴어 정본] 감사기도들의 승인된 [지역 언어들로의] 번역문들은, 특히 성사 정식(sacramental formulae)들에 관하여, 극도의 조심을 요구하며, 이 조심을 위하여 한 개의 특별한 절차가 아래에, 제85항-제86항들에, 기술되어 있습니다.

 

64. Without real necessity, successive revisions of translations should not notably change the previously approved vernacular texts of the Eucharistic Prayers(*) which the faithful will have committed gradually to memory. Whenever a completely new translation is necessary, the principles given below, in n. 74, are to be observed.

 

64. 실제적 필요성 없이, 번역문들의 연속적인 개정들은, 열심 신자들이 점차적으로 기억하기 위하여 장차 전념할 감사기도들의 이전에 승인된 지역 언어 본문들을 마땅히 눈에 띄게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완전하게 새 번역문이 필요할 때마다, 아래에, 제74항에, 제시된 원리(printiples)들은 준수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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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에 많이 개정되어 처음으로 도입된, 지금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는, 라틴어 정본의 미사 경본이 우리말로 번역이 될 때에, 번역 작업에 참여한 분들이 다들 익숙하게 잘 알고 있었을, 위의 제1-5-2항에 발췌된 트리엔트 미사경본 중의 전문(Canon) 중의 구속(redemption, 救贖)구원(salvation)로 번역하였거나, 혹은 그 이후의 어느 시점 이와 같이 교체한 행위는, 위의 게시자 주 1-5-2 중의 게시자 주 (2)에 발췌된 바에 의하여, 바로 이 지침에 정면으로 위배됨에 반드시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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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 ON THE PREPARATION OF TRANSLATIONS AND THE ESTABLISHMENT OF COMMISSIONS 

 

1.  The manner of preparing a translation

 

[...]

 

74. A certain stability ought to be maintained whenever possible in successive editions prepared in modern languages. The parts that are to be committed to memory by the people, especially if they are sung, are to be changed only for a just and considerable reason. Nevertheless, if more significant changes are necessary for the purpose of bringing the text into conformity with the norms contained in this Instruction, it will be preferable to make such changes at one time, rather than prolonging them over the course of several editions. In such case, a suitable period of catechesis should accompany the publication of the new text.

 

[...]

 

3. On the translation and approbation of sacramental formulae  

 

85. As regards the translation of the sacramental formulae, which the Congregation for Divine Worship must submit to the judgment of the Supreme Pontiff, the following principles are to be observed besides those required for the translation of other liturgical texts:[64]

 

a) In the case of the English, French, German, Italian, Portuguese and Spanish languages, all of the acts are to be presented in that language; 

 

b) If the translation differs from a vernacular text already prepared and approved in the same language, it is necessary to explain the reason for the introduction of the change;

 

c) The President and Secretary of the Conference of Bishops should testify that the translation has been approved by the Conference of Bishops. 

 

86. In the case of the less widely diffused languages, everything shall be prepared as set forth above. The acts, however, are to be prepared with great care in one of the languages mentioned above as more widely known, rendering the meaning of each individual word of the vernacular language. The President and Secretary of the Conference of Bishops, after any necessary consultation with trustworthy experts, are to testify to the authenticity of the translation.[65]

(이상, 출처 3으로부터 발췌 끝)

(이상, 게시자 주 1-5-3 끝)

 

 

2. 유관 근거 문헌들의 제시

 

연대순에 있어 아래로 내려가면서, 근거 문헌들을 제시하도록 하겠습니다.

 

2-1.

2-1-1.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대전", IIIa, q49, a1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출처: https://www.newadvent.org/summa/4049.htm#article1  

(발췌 시작)

Question 49. The effects of Christ's Passion

 

Article 1. Whether we were delivered from sin through Christ's Passion?

 

[...]

 

On the contrary, It is written (Apocalypse 1:5): "He loved us, and washed us from our sins in His own blood."

 

I answer that, Christ's Passion is the proper cause of the forgiveness of sins in three ways. First of all, by way of exciting our charity, because, as the Apostle says (Romans 5:8): "God commendeth His charity towards us: because when as yet we were sinners, according to the time, Christ died for us." But it is by charity that we procure pardon of our sins, according to Luke 7:47: "Many sins are forgiven her because she hath loved much." Secondly, Christ's Passion causes forgiveness of sins by way of redemption.[졸번역: 그리스도의 수난은 구속/속량(redemption)을 경유하여(by way of) 죄들의 용서를 야기합니다](*)  For since He is our head, then, by the Passion which He endured from love and obedience, He delivered us as His members from our sins, as by the price of His Passion: in the same way as if a man by the good industry of his hands were to redeem himself from a sin committed with his feet. For, just as the natural body is one though made up of diverse members, so the whole Church, Christ's mystic body, is reckoned as one person with its head, which is Christ. Thirdly, by way of efficiency, inasmuch as Christ's flesh, wherein He endured the Passion, is the instrument of the Godhead, so that His sufferings and actions operate with Divine power for expelling s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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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만약에 구속(redemption)죄들의 용서(remission of sins, 즉, forgiveness of sins)논리적으로 등가(logically equivalent)이라면, 신학 대전 본문 중에 위와 같은 문구가 결코 명기될 수 없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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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일부 문장의 우리말 번역 끝)

 

2-1-2. 다음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 대전", IIIa, q83, a1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출처: https://www.newadvent.org/summa/4083.htm#article1 

(발췌 시작)

Question 83. The rite of this sacrament [성체 성사[지적] 의식]

 

Article 1. Whether Christ is sacrificed in this sacrament?

 

[...]

 

On the contrary, Augustine says in the Liber Sentent. Prosp. (cf. Ep. xcviii): "Christ was sacrificed once in Himself, and yet He is sacrificed daily in the Sacrament."

 

I answer that, The celebration of this sacrament is called a sacrifice for two reasons. First, because, as Augustine says (Ad Simplician. ii), "the images of things are called by the names of the things whereof they are the images; as when we look upon a picture or a fresco, we say, 'This is Cicero and that is Sallust.'" But, as was said above (III:79:1), the celebration of this sacrament is an image representing Christ's Passion, which is His true sacrifice. Accordingly the celebration of this sacrament is called Christ's sacrifice. Hence it is that Ambrose, in commenting on Hebrews 10:1, says: "In Christ was offered up a sacrifice capable of giving eternal salvation; what then do we do? Do we not offer it up every day in memory of His death?" Secondly it is called a sacrifice, in respect of the effect of His Passion: because, to wit, by this sacrament, we are made partakers of the fruit of our Lord's Passion. Hence in one of the Sunday Secrets (Ninth Sunday after Pentecost) we say[졸번역: 따라서 주일 묵축문(黙祝文)들 중의 하나(성신강림 후 제9주일)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Whenever the commemoration of this sacrifice is celebrated, the work of our redemption is enacted[졸번역: 바로 이 희생이 경축될 때마다, 우리들의 구속/속량(redemption)의 일이 실행되게 하소서)]."(*) Consequently, according to the first reason, it is true to say that Christ was sacrificed, even in the figures of the Old Testament: hence it is stated in the Apocalypse (13:8): "Whose names are not written in the Book of Life of the Lamb, which was slain from the beginning of the world." But according to the second reason, it is proper to this sacrament for Christ to be sacrificed in its celeb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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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1) 다음은,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부글리오 신부님 등에 의하여 마련되어 1670년에 출판된 "미살경전", 성신강림제9주일, 묵축문(黙祝文, Secreta)입인데, 영어로 "redemption"으로 번역되는 라틴어 단어가 "구속"으로 번역되었음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다:

 

출처: 미살경전 

(발췌 시작)

구속_in_1670_미살경전_성신강림후제9주일_묵축문_제156b쪽.jpg

 

게시자 주: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 열(column)부터 읽도록 하라.

(이상, 발췌 끝)

 

(2)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라틴어 정본, 1670년 성신강림대축일 후 제9주일, 트리엔트 미사 경문 전문을 읽을 수 있다:

 

츨차: http://ch.catholic.or.kr/pundang/4/tridental_missal/redemption_in_secret_in_07-27-1670_성신강림후제9주일.htm  

(빌췌 시작)

Secreta
Concéde nobis, quǽsumus, Dómine, hæc digne frequentáre mystéria: quia, quóties hujus hóstiæ commemorátio celebrátur, opus nostræ redemptiónis exercétur.
Per Dóminum nostrum Jesum Christum, Fílium tuum: qui tecum vivit et regnat in unitáte Spíritus Sancti Deus, per ómnia sǽcula sæculórum.
R. Amen.

 

Secret
Grant us, we beseech You, O Lord, to take part worthily and frequently in this sacramental action: for as often as this sacrifice of commemoration is offered, the work of our redemption is performed.
Through Jesus Christ, thy Son our Lord, Who liveth and reigneth with thee, in the unity of the Holy Ghost, ever one God, world without end.
R. Amen.

(이상, 발췌 시작)

 

(3) 그리고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성신강림후 제9주일 영성체전 묵축문(黙祝文, Secreta)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후에 도입된 새 미사 경본에서 삭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tridental_missal/redemption_in_secret_in_08-2_2020_성신강림후제9주일_1967Rubrics과_새미사경본_비교.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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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다음은, 트리엔트 공의회 문헌(1547년)(영어본): Decree of Justification(의화 교령), Chapter III로부터 발췌한 바입니다:

 

출처: http://www.intratext.com/IXT/ENG0432/__PJ.HTM 

(발췌 시작)

But, though He died for all, yet do not all receive the benefit of His death, but those only unto whom the merit of His passion is communicated. For as in truth men, if they were not born propagated of the seed of Adam, would not be born unjust,-seeing that, by that propagation, they contract through him, when they are conceived, injustice as their own,-so, if they were not born again in Christ, they never would be justified; seeing that, in that new birth, there is bestowed upon them, through the merit of His passion, the grace whereby they are made just. For this benefit the apostle exhorts us, evermore to give thanks to the Father, who hath made us worthy to be partakers of the lot of the saints in light, and hath delivered us from the power of darkness, and hath translated us into the Kingdom of the Son of his love, in whom we have redemption, and remission of sins.[졸번역: 그분 안에서 우리는 구속/속량(redemption)과 죄들의 용서(remission of sins)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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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만약에 구속(redemption)죄들의 용서(remission of sins, 즉, forgiveness of sins)논리적으로 등가(logically equivalent)이라면, 트리엔트 공의회 문헌 중에 위와 같은 문구가 결코 명기될 수 없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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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2-3. 다음은, 가톨릭 보편 교회 핵심 문헌들의 근거 자료로서 교황 교도권에 의하여 이미 수용된, 덴징거(Dezinge, DS), 제1523항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56.htm  

 

라틴어본 출처: http://catho.org/9.php?d=bx2#b5t 

(발췌 시작)

1523 795 Cap.3. "Qui per Christum justificantur" - Verum etsi ille "pro omnibus mortuus est" (Cor2 5.15), non omnes tamen mortis ejus beneficium recipiunt, sed ii dumtaxat, quibus meritum passionis ejus communicatur. Nam sicut revera homines, nisi ex semine Adae propagati nascerentur, non nascerentur injusti, cum ea propagatione per ipsum, dum concipiuntur, propriam injustitiam contrahant: ita nisi in Christo renascerentur, numquam justificarentur (can. 2 et 10), cum ea renascentia per meritum passionis ejus gratia, qua justi fiunt, illis tribuatur. Pro hoc beneficio Apostolus gratias nos semper agere hortatur Patri, "qui dignos nos fecit in partem sortis sanctorum in lumine" (Col 1.12), et eripuit de potestate tenebrarum, transtulitque in regnum Filii dilectionis suae, in quo habemus redemptionem et remissionem peccatorum (Col 1.13s).

(이상, 발췌 끝)

 

프랑스어본 출처: http://catho.org/9.php?d=bwq#dnb 

(발췌 시작)

1523  Mais, bien que lui soit " mort pour tous " 2Co 5,15, tous cependant ne reçoivent pas le bienfait de sa mort. mais ceux-là seulement auxquels le mérite de sa Passion est communiqué. En effet, de même qu'en toute vérité les hommes ne naîtraient pas injustes s'ils ne naissaient de la descendance issue corporellement d'Adam, puisque, quand ils sont conçus, ils contractent une injustice personnelle par le fait qu'ils descendent corporellement de lui, de même ils ne seraient jamais justifiés s'ils ne renaissaient pas dans le Christ , puisque, grâce à cette renaissance, leur est accordé par le mérite de sa Passion la grâce par laquelle ils deviennent justes. Pour ce bienfait l'Apôtre nous exhorte à toujours "rendre grâce au Père qui nous a rendus dignes d'avoir part à l'héritage des saints dans la lumière et nous a arrachés à la puissance des ténèbres et transférés dans le Royaume de son Fils bien-aimé, en qui nous avons la Rédemption et la rémission des péchés" Col 1,12-14

(이상, 발췌 끝)

 

영어본 출처: http://www.clerus.org/bibliaclerusonline/en/dw5.htm#b0d 

(발췌 시작)

1523 Dz 795 But although Christ died for all (2Co 5,15), yet not all receive the benefit of His death, but those only to whom the merit of His passion is communicated. For, as indeed men would not be born unjust, if they were not born through propagation of the seed of Adam, since by that propagation they contract through him, in conception, injustice as their own, so unless they were born again in Christ, they never would be justified [can. 2 and 10], since in that new birth through the merit of His passion, the grace, whereby they are made just, is bestowed upon them. For this benefit the Apostle exhorts us always to "give thanks to the Father who has made us worthy to be partakers of the lot of the saints in light" (Col 1,12), "and has delivered us from the power of darkness, and has translated us into the kingdom of the Son of his love, in whom we have redemption and remission of sins (Col 1,13 ff.).[졸번역: 그분 안에서 우리는 구속/속량(redemption)과 죄들의 용서(remission of sins)를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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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만약에 구속(redemption)죄들의 용서(remission of sins, 즉, forgiveness of sins)논리적으로 등가(logically equivalent)이라면, 덴칭거에 발췌된 트리엔트 공의회 문헌 중에 위와 같은 문구가 결코 명기될 수 없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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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일부 문장의 우리말 번역 끝)

 

2-4. 다음은,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제공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용어집"에서 발췌한 바입니다:

 

2-4-1.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cc_glossary.htm#r 

(발췌 시작)

REMISSION OF SINS


죄들의 사면

 

The forgiveness of sins, which is accomplished in us through faith and Baptism, as the fruit of the redemptive sacrifice of Christ on the cross (977, 1263). Christ gave the power to remit sins to his Apostles, and through them to the ministers of the Church (981). The remission of sins committed after Baptism is effected sacramentally through the Sacrament of Penance and Reconciliation (1446).

 

죄들의 용서(the forgiveness of sins)를 말하는데, 이용서는 우리들 안에서 신앙(faith)과 세례(Baptism)을 통하여,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구속하는/속량하는 희생(the redemptive sacrifice)의 열매(fruit)로서, 성취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977항, 제1263항).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사도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통하여 교회의 사역자(ministers)들에게, 죄들을 사면하는 힘을 주셨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981항). 세례 후에 범해진 죄들의 사면은 참회와 화해의 성사의 적을 통하여 성사적으로 성취됩니다(is effected)(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46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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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만약에 구속(redemption)죄들의 용서(remission of sins, 즉, forgiveness of sins)논리적으로 등가(logically equivalent)이라면, 이 용어집에서 "죄들의 용서"를 기술하면서 위와 같은 문구가 결코 명기될 수 없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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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2-4-2.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ccc_glossary.htm#s

(발췌 시작)

SALVATION


구원

 

The forgiveness of sins and restoration of friendship with God, which can be done by God alone (169).

 

죄들의 용서하느님과의 우의의 상태의 회복을 말하는데, 이들 둘 다는 하느님 홀로에 의하여서만 행해질 수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69항; 또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85항; 제200항; 제296항; 제297항; 제310항 등을 참조하라).

(이상, 발췌 끝)

 

2-5. 바로 위의 제2-4항에서 함께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의 결론 1) (i)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유일한 중보(中保)/중개자(Mediator)(*)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햔 역할들 중의 하나인 구속/속량(Redemption) 신비의 혜택을 입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이 신비의 열매(fruit)인 죄들의 용서(forgiveness of sins)를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고, 그리고 (ii) 죄들의 용서를 받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구원(salvation)을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음을, 이 글의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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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영어로 "Mediator"로 번역되는 라틴어 용어 "Mediator"의 번역 용어인 "중보"(中保)라는 용어가 한문 문화권 천주교회의 고유한 번역 용어임을 실증적으로(positively) 확인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875.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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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의 (이 글의 결론1)논리적으로 등가인(logically equivalent) 따름 정리(corollaries)로서,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합니다:

 

(이 글의 결론 2) (가)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유일한 중보(中保)/중개자(Mediator)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햔 역할들 중의 하나인 구속/속량(Redemption) 신비를  한 개의 계시 진리(a revealed truth)인 한 개의 교의(a dogma, 즉, 믿어야 하는 교리)로서 인정하지 않는 자들 중에서는 이 신비의 열매인 죄들의 용서(forgiveness of sins)를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나) 죄들의 용서를 받지 않는 자들들 중에서는 구원(salvation)을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없다.

(이상, 이 글의 결론 2 끝)

 

(이 글의 결론 3) (a) 구원(salvation)을 받음죄들의 용서(forgiveness of sins)를 받음를 의미하나 그러나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b) 죄들의 용서를 받음구속/속량(Redemption) 혜택을 입음을 의미하나 그러나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디

(이상, 이 글의 결론 3 끝)

 

2-6.  바로 위의 제(1)항에서 전달해드린 바를 더 자세하게 나열하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i) 하느님과 인류 사이의 유일한 중보(中保)/중개자(Mediator)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유햔 역할들 중의 하나인 구속/속량(Redemption) 신비의 혜택을 입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이 신비의 열매(fruit)인 죄들의 용서(forgiveness of sins)를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고, 그리고

 

(ii) 죄들의 용서를 받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으며, 그리고

 

(iii)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는 자들 중에서만 오로지 구원(salvation)을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게시자 주 2-6: (1) 바로 위의 제(i)항의 역(converse)이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음은, 즉, 예수님의 구속/속량 위업이 죄들의 용서와 결코 논리적으로 등가(logically equivalent)일 수가 없는 이유는, 이 글의 제목에서 지적한 바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이어지는 제3항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2)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구속/속량 위업이 구원과 결코 논리적으로 등가(logically equivalent)가 없는는 이유는, 이 글의 제목에서 지적한 바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는, 이어지는 제3항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3) 그리고 바로 위의 제(ii)항제(iii)항 각각의 역(converse)이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는 이유는, 예를 들어, 우선적으로, 심장 안으로 혹은 심장 바깥으로 표출되는 말, 생각, 행동 등을 스스로 결정할 때에 개입하게 되는 각자의 판단에 있어, 각 인격(person)에게 허락된 자신의 고유한 자유 의지(free will)의 행사권 때문임을, 반드시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즉, 매사에 있어 각자가 행하게 되는 판단의 시점에, 하느님의 뜻/의지(will, rational appetite)에 부합하지 않게, 무지하기 때문에 혹은 감정 등등의 나열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극히 주관적이고 또 심지어 극단적으로 이기적일 수도 있는, 당사자의 고유한 이런 저런 이유(들) 때문에 자신의 고유한 희망(hope), 욕망(desire) 혹은 욕구(appetite) 등을 판단의 기준/잣대로 사용하는 등, 아무런 속박이나 제약 전혀 없이, 자유롭게(freely) 자신의 의지(will)를 행사할 수도 있는 권한이 각 인격에게 이미 허락되어 있기 때문임음을 항상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4) 바로 위의 제(3)항에서 지적한 바에 대하여서는,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있는, 소위 말하는,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가 나열한 여섯 종류의 성령을 거스르는 죄들에 대한 졸글들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blasphemy2Holy_Spirit.htm <--- 필독 권고

(이상, 게시자 주 2-6 끝)

 

작성 중입니다.

 

3.

3-1-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콜로새서 1,14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king.htm 

(발췌 시작)

On the meaning of "redemption" and "forgiveness of sins", see the note on
Eph 1:7-8.

 

"구속/속량"(redemption) 그리고 "죄들의 용서"(forgiveness of sins)의 의미에 대하여서는, 에페소서 1,7-8에 대한 주석을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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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나해 연중
제15주일 제2독서(에페소 1,3-14)
에 대한 본 주석서의 해설 전문을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ot_15.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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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1-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나해 연중 제15주일 제2독서로 미사 중에 봉독되는, 에페소서 1,3-14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 전문을 읽을 수 있는데, 특히, 어떠한 경우에도, 예수님의 위업들인 "구속/속량"(Redemption)"죄들의 용어"(the forgiveness of sins)를 논리적으로 등가인 개념(logically equivalent concepts)들로 결코 이해할 수 없도록 기술하고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ot_15.htm <----- 제2독서 해설 전문을 필독 하라 

 

(에페소서 1,7-10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 발췌 시작)

7-8. St Paul now centers his attention on the redemptive work of Christ -- the third blessing -- which has implemented the eternal divine plan described in the preceding verses. 

 

7-8. 성 바오로는 이제 자신의 주의를 , 세 번째 축복인,그리스도의 구속하는/속량하는 위업(the redemptive work of Christ)에 집중시키는데(centers), 이 위업은 앞서는 절들에서 묘사된 영원한 신성적 계획을 이미 이행한 것입니다. 

Redemption means "setting free". God's redemptive action began in the Old Testament, when he set the people of Israel free from their enslavement in Egypt (cf. Ex 11:7ff): by smearing the lintels of their doors with the blood of the lamb, their first-born were protected from death. In memory of this salvation God ordained the celebration of the rite of the passover lamb (cf. Ex 12:47). However, this redemption from Egyptian slavery was but a prefigurement of the Redemption Christ would bring about. "Christ our Lord achieved this task [of redeeming mankind and giving perfect glory to God] principally by the paschal mystery of his blessed passion, resurrection from the dead, and glorious ascension" (Vatican II, "Sacrosanctum Concilium", 5). By shedding his blood on the Cross, Christ has redeemed us from the slavery of sin, from the power of the devil, and from death (cf. note on Rom 3:24-25). He is the true passover Lamb (cf. Jn 1:29). "When we reflect that we have been ransomed 'not with perishable things such as silver or gold but with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like that of a lamb without blemish or spot' (1 Pet 1:18f), we are naturally led to conclude that we could have received no gift more salutary than this power [given to the Church] of forgiving sins, which proclaims the ineffable providence of God and the excess of his love towards us" ("St Pius V Catechism", I, 11, 10).

 

구속/속량(Redemption)은 "해방함/석방함"(setting free)를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구속하는/속량하시는 행동은, 다음과 같이,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그들의 노예 상태(enslavement)로부터 해방하실 때인, 구약 성경에서 시작하였습니다 (탈출 11,7 및 이어지는 몇 개의 절들을 참조하라):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의 문들의 상인방(lintels)들을 바름으로써, 그들의 맏이가 죽음(death)으로부터 보호되었다. 바로 이 구원에 대한 기억으로 하느님께서 과월절 어린양의 의식(rite)이라는 경축을 명하셨습니다 (탈출 12,47 참조). 그러나, 이집트에서의 노예 상태(slavery)로부터 구속/속량(redemption)은 다만(but) 그리스도께서 초래하실 유일한 구속/속량(the Redemption)의 한 개의 예형(prefiturement)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께서는, 당신의 복받으신 수난(blessed passion), 죽은 이들로부터 부활(resurrection from the dead), 그리고 영광을 발하는 승천(glorious ascension)으로 구성된 파스카 신비(the paschal mystery)에 의하여 주되게(principally) [인류의 구속/속량(redemption) 그리고 하느님께 완미한 영광(perfect glory)을 바침이라는 바로 이 과업(task)을 성취하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I, 1962-1965년),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um Concilium), 제5항]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피를 흘림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죄의 노예 상태(the slavery of sin)로부터, 악마의 힘(the power of the devil)으로부터, 그리고 죽음(death)으로부터 이미 구속하셨습니다/속량하셨습니다(has redeemed) (로마 3,24-25에 대한 주석 참조). 그분은 유일한 참된 과월절 어린양(passover Lamb)입니다 (요한 복음서 1,29 참조).

 

"우리가 '은 혹은 금과 같은 썩기 쉬운(perishable) 사물들로써가 아니라 다만, 아무런 흠(blemish) 혹은 결점(spot) 없는 한 마리의 어린양의 바로 그것처럼, 그리스도의 가치있는(precious) 피로써, 속죄를 받았음(have been ransomed)' (1베드로 1,18 및 이어지는 절)을 우리가 성찰할(reflect) 때, 우리는, 하느님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섭리(providence) 및 우리들 쪽으로 향하는 당신 사랑의 과잉(excess)을 선포하는, 죄들을 용서하는 [이 유일한 교회에 주어진] 바로 이 힘보다 더 유익한(salutary) 어떠한 선물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쪽으로 우리가 자연스럽게 인도된다" ["성 비오 5세 교리서"(St Pius V(1504-1572년) Catechism), I, 11, 10].

The Redemption wrought by Christ frees us from the worst of all slaveries--that of sin. As the Second Vatican Council puts it, "Man finds that he is unable of himself to overcome the assaults of evil successfully, so that everyone feels as though bound by chains. But the Lord himself came to free and strengthen man, renewing him inwardly and casting out the 'ruler of this world' (Jn 12:31), who held him in the bondage of sin. For sin brought man to a lower state, forcing him away from the completeness(*15) that is his to attain" ("Gaudium Et Spes", 13). 

 

그리스도에 의하여 초래된(wrought) 구속/속량(Redemption)은 우리들을, 죄의 노예 상태인,  모든 노예 상태들의 최악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frees).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것을 진술하듯이, 

 

"사람은 자신이 악의 맹렬한 공격을 자기 스스로 성공적으로 극복할 수 없음을 발견하며 그리하여 그 결과 각자는 마치 쇠사슬들로 묶여있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주님 당신 자신께서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굳세게 하기 위하여 오셔서, 그를 내부에서(inwardly) 새롭게 하시고 그리고, 그를 죄의 속박 상태(bondage of sin)에 붙잡고 있는, '이 세상의 지배자'를  쫓아내셨습니다 (요한 12,31). 왜냐하면 죄가 사람을 어떤 더 낮은 지위로 데려갔으며, 그로 하여금 획득하여야 하는 자신의 충만함(fullness)(*15)으로부터 멀어지도록 강제하였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I, 1962-1965년)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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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번역자 주: (1) (번역 오류) 여기서 "completeness"로 번역된 단어는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발생한, 번역 오류임이 분명하여,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 필자가 바로잡았다.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라틴어 정본 및 프랑스어본, 영어본, 그리고 스페인어본의 해당 문장과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va1965gs_lt.htm
[주: 라틴어 정본]
http://ch.catholic.or.kr/pundang/4/va1965gs_fr.htm
[주: 프랑스어본]
http://ch.catholic.or.kr/pundang/4/va1965gs_en.htm
[주: 영어본]
http://ch.catholic.or.kr/pundang/4/va1965gs_sp.htm
[주: 스페인어본] 

 

(2)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획득하여야 하는 자신의 충만함(fullness)'이란 곧 '완미'[perfection, 즉, 완전하고(complete) 그리고 마땅히 갖추고 있어야 하는 선(good)에 있어 어떠한 결함/부족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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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carrying out this Redemption, our Lord was motivated by his infinite love for man. This love, which far exceeds anything man could hope for, or could merit, is to be seen above all in the universal generosity of God's forgiveness, for though "sin increased, grace abounded all the more" (Rom 5:20); this forgiveness, achieved by Christ's death on the cross, is the supreme sign of God's love for us, for "greater love has no man than this, that a man lay down his life for his friends" (Jn 15:13). If God the Father gave up his Son to death for the remission of men's sins, "it was to reveal the love that is always greater than the whole of creation, the love that is he himself, since 'God is love' (1 Jn 4:8, 16)", John Paul II reminds us. "Above all, love is greater than sin, than weakness, than 'the futility of creation' (cf. Rom 8:20); it is stronger than death" (Redemptor Hominis", 9). 

 

바로 이 구속/속량(Redemption)을 성취함(carrying out)에 있어, 우리들의 주님께서는 사람(man)에 대한 당신의 무한한 사랑(infinite love)에 의하여 움직여지셨습니다(is motivated). 사람(man)이 희망할 수 있거나, 혹은 공로로서 획득할 수 있는(merit) 어떤 것도 훨씬 능가하는, 바로 이 사랑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용서(God's forgiveness)의 보편적 관대(universal generosity) 안에서 볼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though) "죄(sin)가 증가하게 되면, 은총(grace)이 훨씬 더 풍부해지기" (로마 5,2) 때문이며,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하여 성취된 바로 이 용서는 우리들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최고의 표시(supreme sign)인데, 왜냐하면 "어떠한 사람도 한 사람(a man)이 자신의 벗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려 놓는(lay down) 것보다 더 커다란 사랑을 가질 수 없기" (요한 15,13) 때문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예수님의 구속/속량(Redemption) 위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우리들을 상기시킵니다: 성부 하느님께서 사람들의 죄들의 사면(remission)을 위하여 당신의 성자(Son)를 내주셨다면(gave up), 

 

"그것은 피조물(creation) 전체보다 항상 더 커다란 사랑을,당신 자신인 사랑을, 드러내고자 하셨던 것인데,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기' (1요한 4,8)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은 죄(sin)보다 더 크고, 나약함(weakness)보다 더 크며, '피조물의 허무함(futility of creation)'보다 더 크기 때문이며 (로마 8,20 참조), 그리고 죽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St. John Paul II, 1920-2005년), "인간의 구속자/속량자"(Redemptor Hominis), 제9항](*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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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번역자 주: (1) (번역 오류)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중앙협의회 번역의 이 회칙의 제목에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라틴어 "Redemptor"/영어 "Redeemer"가, 구속자/속량자 대신에, "구원자"(savior)로 번역된 것은 명백한 번역 오류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bck/hf_jp-ii_enc_04031979_rh_kr.htm
 <----- 필독 권고

 

(2) 왜냐하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인 라틴어 "salvator""savior"(구원자)로 번역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cc_glossary.htm#s
  

 

(3) 그리고 또한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라틴어 "Redemptor"/영어 "Redeemer"(구속자/속량자)와 라틴어 "salvator"/영어 "Savior"(구원자)는, 예를 들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항에서부터 확실하게 구분되고 있다: 
http://ccc.scborromeo.org.master.com/texis/master/search/?sufs=0&q=%22savior%22+%22redeemer%22&xsubmit=Search&s=SS
  

 

"redeemer and savior" "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site:vatican.va 

 

(4) 왜 이러한 지적을 드리는가 하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천주교 용어집"에 제시된 언제 "구원자"와 "구속자"를 구분할 필요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행위는, 우리말로의 번역 과정에서 판단자가 누구이냐에 따라, 자의적/작위적인 의역 번역free translation)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https://cbck.or.kr/Glossary/Search?htype=1&page=14
 

 

예를 들어, 이러한 종류의 번역 오류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는, 우리말로 번역이 된 교회의 핵심 문헌들을 자신의 신학적 사고의 기본 지식들로서 열심히 습득한 후에, 로마 혹은 프랑스로 유학을 갔을 경우에, 석사, 박사 학위 과정에서, 바로 이러한 종류의 번역 오류들 때문에 어떠한 일들이 발생할 것인지에 대하여서도 또한 고려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term paper들 혹은 학위 논문을 우리말로 작성한 후에,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혹은 라틴어로 번역을 하여 제출하면, 이들 두 용어들 사이의 차이점을 모르고 있는 문제점이 확실하게 드러나, 즉시, 거부당하기 십상일 것은, 상당히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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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abling our sins to be forgiven, the Redemption brought about by Christ has restored man's dignity. "Increasingly contemplating the whole of Christ's mystery, the Church knows with all the certainty of faith that the Redemption that took place through the Cross has definitely restored his dignity to man and given back meaning to his life in the world, a meaning that was lost to a considerable extent because of sin" ("Redemptor Hominis", 10). This action on God's part reveals his wisdom and prudence. 

 

우리들의 죄들이 용서 받는 것을 가능하게 하심으로써, 예수님에 의하여 초래되었던 구속/속량(Redemption)은 사람의 품위(dignity)를 이미 회복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비(Christ's mystery)(*17)의 전체를 점점 증가하게(increasingly) 관상한 결과(contemplating), 죄 때문에 상당한 정도에 이르기까지(to a considerable extent) 잃어버렸던 한 개의 의미인, 십자가를 통하여 발생한 구속/속량(Redemption)이 사람에게 자신의 품위를 결정적으로 이미 회복시켰음을, 교회는 신앙의 확신 모두와 함께 알고 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St. John Paul II, 1920-2005년), "인간의 구속자"(Redemptor Hominis), 제10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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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그리스도의 신비"에 공통으로 포함된 세 가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제516항, 제517항, 그리고 제518항의 가르침들로 안내의 졸글/논문[제목: 성 이레네오의 recapitulation 용어의 우리말 
번역에 대하여; 게시일자: 2012-09-08]
을 읽을 수 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제8-1항을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54.htm
<----- 필독 권고

 

하느님 편에서의 바로 이러한 행동(action)은 당신의 지혜(wisdom) 및 현명(prudence)을 드러냅니다.

 

9. 예수님의 구속 행동(redemptive action)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죄를 이미 용서하셨을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분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이 모든 역사 및 모든 피조물을 포옹함(embraces)을 이미 보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내어진 바로 이 계획을, 성 바오로는 하느님의 뜻/의지의 "신비"(mystery)이고, 그리고 그것의 계시/드러내어짐(revelation)은 한 개의 그 이상의 축복(a further blessing)이라고 부릅니다. 이 전체 신비는, (i) 유일한 교회(the Church) 및 '신성적 부자(父子) 관계(divine filiation)라는 선물'의 제정(establishment) (제 4-7절들)을, (ii)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의 총귀/총괄복귀(recapitulation)(*18) (제 10절), 그리고 (iii) 이 교회의 일부를 형성하기 위한 유다인들과 이방인들의 소집(convoking)을 (제11절-제14절; 그리고 3,4-7을 참조하라), 포옹합니다. 바로 이것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드러내어졌으며, 그분 안에서, 그러므로, 하느님의 계시/드러내심(revelation)는 그 절정에 도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현존(presence) 및 스스로 분명하게 드러내심(self-manifestation)이라는 전체적 사실(by the total fact)로써 -- 말씀(words)들과 일(works)들, 표징(signs)들과 기적(miracles)들로써, 그러나 무엇보다도 당신의 죽음(death)과 죽은 이들로부터 영광을 발하는 부활(glorious resurrection)로써, 그리고 최종적으로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을 파견하심으로써, 바로 이것[즉, 총귀/총괄복귀(recapitulation)]를 행하셨습니다. 우리들을 죄와 죽음의 어두움으로부터 구하고, 그리고 영원한 생명 쪽으로 우리들을 일으켜 세우고자, 하느님께서 우리들과 함께 계심을, 그분께서 드러내셨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I, 1962-1965년),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적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제4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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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번역자 주: "새 하와"라는 동정 마리아에 대한 칭호(title)의 신학적 근거인, 2세기의 교부인 리옹의 성 이레네오(St. Irenaeus of Lyons)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해되고 서술되었던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근거인 그의 "recapitulation(총귀/총괄복귀/수렴)"이라는 한 개의 초자연적 개념(a supernatural concept)에 대한  글들은 다음의 주소들에 있으니 필독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recapitulation_of_St_Irenaeus.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new_Eve.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new_Adam.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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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ct that God reveals his plans of salvation is a further proof of his love and mercy, for it enables man to recognize God's infinite wisdom and goodness and to hear his invitation to take part in these plans. As the Second Vatican Council puts it, "It pleased God, in his goodness and wisdom, to reveal himself and to make known the mystery of his will (cf. Eph 1:9). His will was that man should have access to the Father through Christ, the Word made flesh, in the Holy Spirit, and thus become sharers in the divine nature (cf. Eph 2:18; 2 Pet 1:4). By this revelation, then, the invisible God (cf. Col 1:15; 1 Tim 1:17), from the fullness of his love, addresses men as his friends (cf. Ex 33: 11; Jn 15:14f), and moves among them (cf. Bar 3:38), in order to invite and receive them into his own company" ("Dei Verbum", 2). 

 

하느님께서 당신의 구원 계획들을 드러내심이라는 사실은 당신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한 개의 그 이상의 증명인데, 왜냐하면 이 사실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무한한 지혜와 선하심을 알아차리게 하고 그리하여 이들 계획들의 참여하라는 당신의 초대를 듣는 것을 허락하기 때문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다음과 같이] 이것을 진술하듯이,

 

"당신의 선하심과 지혜 안에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리고 당신의 뜻/의지의 신비(the mystery of his will)를 알려지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에 드시는 일이었습니다 (에페소 1,9 참조). 당신의 뜻/의지는 사람이, 성령 안에서, 육이 되신 말씀(Word)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 쪽으로 접근을 마땅히 가지고,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신성적 본성(the divine nature)을 함께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에페소 2,18; 2베드로 1,4). 그래서, 바로 이러한 계시에 의하여, 비가시적인 하느님께서(콜로새 1,15; 1티모테오 1,17), 당신 사랑의 충만함으로부터, 당신의 벗들로서 사람들에게, 그들을 당신의 고유한 동료(company) 안쪽으로 초대하고 또 받아들이기 위하여, 연설을 하시고(addresses) (탈출 33,11; 요한 복음서 15,14 및 이어지는 한 개의 절),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움직이십니다(moves) (바룩 3,38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I, 1965-1965년),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적 헌장, "하느님의 말씀" (Dei Verbum), 제2항].

On the meaning of the word "mystery" in St Paul, see the notes on 1:26, 28; 2:9.(*19)

 

"신비"/奧跡(跡)(오적, 즉, 깊은 흔적)(mystery)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하여, 1,26.28; 2,9에 대한 주석들을 보십시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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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번역자 주: 영어로 "mystery"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단어의 우리말 번역 용어인 "신비"라는 번역 용어의 신학적 정의(definitions)들은 다음의 글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50.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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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The "mystery" revealed by God in his love takes shape in a harmonious way, in different stages or moments ("kairoi") as history progresses. The fullness of time came with the Incarnation (cf. Gal 4:4) and it will last until the End. Through the Redemption, Christ has rechannelled history towards God; he rules over all human history in a supernatural way. Not only have God's mysterious plans begun to take effect: they have been revealed to the Church, which God uses to implement these plans. "Already the final age of the world is with us (cf. 1 Cor 10:11) and the renewal of the world is irrevocably under way; it is even now anticipated in a certain real way, for the Church on earth is endowed already with a sanctity that is real though imperfect. However, until there be realized new heavens and a new earth in which justice dwells (cf. 2 Pet 3:13) the pilgrim Church, in its sacraments and institutions, which belong to this present age, carries the mark of this world which will pass, and she herself takes her place among the creatures which groan and travail yet and await the revelation of the sons of God(cf. Rom 8:19-22)" (Vatican II, "Lumen Gentium", 48). 

 

10. 하느님에 의하여 당신의 사랑 안에서 드러내어진 "신비"(mystery)는, 역사가 전진함에 따라, 서로 다른 단계들 혹은 순간들("kairoi")에서,(*20) 어떤 조화로운 방식으로 구체화합니다. 때의 충만함이 강생/육화(Incarnation)과 함께 왔으며(갈라티아 4,4 참조) 그리고 이것은 종말(the End) 때까지 장차 계속될 것입니다. 구속/속량(Redemption)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쪽을 향하여 이미 다시 경로를 여셨으며(rechannelled), 그리고  당신께서는 어떤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인간의 역사 모두를 지배하십니다(rules over). 하느님의 신비로운 계획들이 효력을 발생하기 시작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이 계획들은, 하느님께서 이들 계획들을 이행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교회에 이미 드러내어졌습니다. 

 

"벌써 이 세상의 마지막 시대는 우리들과 함께 있으며(1코린토 10,11 참조) 그리고 이 세상을 다시 새롭게 함(renewal)은 되돌릴 수 없게 진행 중이며, 그리고 이것은 심지어 지금 어떤 확실한 실제 방식으로 예상되고 있는데, 왜냐하면 지상에 있는 교회에게, 비록 완미하지 않지만(imperfect), 실재하는(real) 어떤 거룩한 의무(sanctity)가 부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정의(justice)가 거주하는 새 하늘과 하나의 새 땅(new heaven and a new earth)이 실현될 때까지 (2베드로 3,13 참조), 바로 이 현재의 시대에 속하는 순례 교회(the pilgrim Church, 즉, 지상 교회, 전투 교회)는, 그 성사[聖事, 거룩한 일, 즉, 하느님의 일(opus Dei)][의 표적(sensible signs)](sacraments, 聖事之迹)들(*21)과 제도(institutions)들 안에, 장차 지나갈 바로  이 세상의 흔적을 지니고 있으며(carries the mark of), 그리고 교회 스스로, 여전히 신음소리를 내며 진통을 겪고 있는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the sons of God)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로마 8,19-22), 피조물들 사이에 자신의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Vatican II, 1962-1965년), 교회에 관한 교의적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tium), 제48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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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번역자 주: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여기서의 전후 문맥 안에서, 하느님께서  직접 작용하시는 시점들을 말하는 "kairoi"의 단수형인 그리스어 단어 "kairos"의 의미를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tdnt/kairos.htm
 

 

(*21)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Sacramentum의 애초의 번역 용어는, 성사(聖事)가 아니고, 자구적으로 훨씬 더 정확하게, 성사(聖事)의 적(迹, sensible sign, mystery)[聖事之迹]이었다" 제목의 글을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34.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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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limax of God's pre-creation plan involves "uniting" ("recapitulating") all things in Christ:(*18) Christ is to be the cornerstone and head of all creation. This means that,  through his redemptive activity, Christ unites and leads the created world back God. Its unity had been destroyed as a result of sin, but now Christ binds it together, uniting heavenly things as well as mankind and other earthly things. St John Chrysostom teaches that "since heavenly things and earthly things were torn apart from each other, they had no head [...]. (God) made Christ according to the flesh the sole head of all things, of angels and of men; that is, he provided one single principle for angels and for men [...]; for all things will be perfectly united as they ought to be when they are gathered together under one head, linked by a bond which must come from on high" ("Hom. on Eph, ad loc."). 

 

하느님의 창조이전 계획(pre-creation plan)의 정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물들을 "결합함"(uniting) ("총귀/총괄복귀"(recapitulating))(*18)을 수반하며(involve),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모든 피조물의 초석(cornerstone) 및 머리(head)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다음을 의미합니다, 즉, 그분의 구속하는/속량하는 활동(through his redemptive activity)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이 창조된 세상을 되돌려(back) 하느님 쪽으로 결합하고 그리고 인도합니다. 이 세상의 조화/일치(unity)는 죄[즉, 아담과 하와의 원죄]의 한 결과로서 과거에 파괴되었으나,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인류 및 댜른, 땅에 있는, 사물들 뿐만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사물들을 결합함으로써,  이 세상을 함께 묶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금구(金口)(St. John Chrisostom)는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있는 사물들과 땅에 있는 사물들이 서로로부터 과거에 찢어져 분리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육에 따라 모든 사물들, 천사들 그리고 사람들의 유일한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즉, 그분께서 천사들을 위한 그리고 사람들을 위한 하나의 단일한 원리(principle)를 제공하셨는데, 이는 모든 사물들이, 그들이 하나의 머리 아래에서 함께 모아질 때에 높은 데로부터 와야 하는 어떤 끈에 의하여 그들이 당연히 연결되기로 되어 있듯이(ought), 장차 완미하게(perfectly) 결합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금구(金口)(St. John Chrisostom, 347-407년), "Hom. on Eph, ad l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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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번역자 주: "새 하와"라는 동정 마리아에 대한 칭호(title)의 신학적 근거인, 2세기의 교부인 리옹의 성 이레네오(St. Irenaeus of Lyons)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해되고 서술되었던  그리스도교 신학의 기초/근거인 그의 "recapitulation(총귀/총괄복귀/수렴)" 이라는 한 개의 초자연적 개념(a supernatural concept)에 대한  글들은 다음의 주소들에 있으니 필독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recapitulation_of_St_Irenaeus.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new_Eve.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new_Adam.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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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s being head of all things -- as will be made manifest at the end of time -- stems from the fact that he is true God and true man, the head and first-born of all creation. By rising from the dead, he has overcome the power of sin and death, and has become Lord of all creation (cf. Acts 2:36; Rom 1:4; Eph 1:19-23); all other things, visible as well as invisible, come under his sway.

 

시간의 끝에 장차 분명하게 드러내어질 것이듯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물들의 머리(head)이심은 당신께서 참 하느님이시고 참 사람, 모든 피조물의 머리이시고 맏이이심이라는 사실로부터 유래합니다(stems from). 죽은 이들로부터 일어나심으로써, 당신께서는 죄와 죽음의 힘을 이미 극복하셨고,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주님이 이미 되셨으며(사도행전 2,26; 로마 1,4; 에페소 1,19-23을 참조하라), 그리고 비가시적(invisible)뿐만이 아니라 가시적인(vsible) 다른 사물들 모두는 당신의 지배(sway)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The motto taken by Pius X when he became Pope echoes this idea of Christ's Lordship: "If someone were to ask us for a motto which conveys our purpose we would always reply, 'Reinstating all things in Christ' [...], trying to bring all men to return to divine obedience" ("E supremi apostolatus").

 

비오 10세에 의하여, 그분께서 교황이 되었을 때에, 선택된 표어(motto)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주님 되심(Lordship)이라는 바로 이 관념(idea)을 반향합니다: 

 

"어떤 이가 우리들의 목표를 시사(示唆)하는(conveys) 한 개의 표어(a motto)를 요청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항상 답변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신성적 순종(divine obedience) 쪽으로 되돌아가도록 데려오고자 노력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물들을 본래대로 회복시키고' [...]" [비오 10세(Pius X, 1835-1914년), "E supremi apostolatus"].

 

"Uniting all things in Christ": this includes putting Christ at the summit of human activities, as the founder of Opus Dei points out: "St Paul gave a motto to the
Christians at Ephesus: 'Instaurare omnia in Christo' (Eph 1:10), to fill everything with the spirit of Jesus, placing Christ at the center of everything. 'And I, when I am lifted up from the earth, will draw all things to myself' (Jn 12:32). Through his incarnation, through his work at Nazareth and his preaching and miracles in the land of Judea and Galilee, through his death on the cross, and through his resurrection, Christ is the center of the universe, the first-born and Lord of all creation.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물들을 결합시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인간 활동(human activities)들의 정상(summit)에 둠(putting)을 포함합니다(includes), 오푸스 데이(Opus Dei)의 창시자(founder)가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듯이: 

 

"성 바오로는 에페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한 개의 표어(a motto)를 제시합니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채우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모든 것의 중심(center)에 놓음으로써(placing),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들을 회복시킵니다' (Instaurare omnia in Christo) (에페소 1,10). '그리고 나는, 내가 이 땅으로부터 들어올려질 때에, 모든 사물들을 나 자신쪽으로 장차 끌어당길 것이다' (요한 12,32). 당신의 강생(incarnation)의 처음부터 끝까지(through), 나자렛(Nazareth)에서 당신의 일(work) 및 유데아(Judea)와 갈릴래아(Galilee)의 땅에서 당신의 설교(preaching)와 기적(miracles)들의 처음부터 끝까지((through),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죽음의 처음부터 끝까지(through), 그리고 당신의 부활(resurrection)의 처음부터 끝까지(through), 그리스도께서는 우주의 중심(center), 모든 피조물의 맏이 및 주님 이십니다(is)".

"Our task as Christians is to proclaim this kingship of Christ, announcing it through what we say and do. Our Lord wants men and women of his own in all walks of life. Some he calls away from society, asking them to give up involvement in the world, so that they remind the rest of us by their example that God exists. To others he entrusts the priestly ministry. But he wants the vast majority to stay right where they are, in all earthly occupations in which they work -- in the factory, the laboratory, the farm, the trades, the streets of the big cities and the trails of the mountains" ("Christ Is Passing By", 105).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들의 임무(task)는 그리스도의 바로 이 왕 되심(kingship)을, 이것을 우리가 말하고 행하는 바를 통하여 고지함으로써(announcing), 선포하는(proclaim)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삶의 모든 걸음걸이(walks)들에서 당신 소유(own)의 사람(men)들과 여자(women)들을 원하십니다. 어떤 이들을 그분께서 사회로부터 멀어지라고 부르시어, 그들에게 이 세상에 개입함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심으로써, 그리하여 그 결과 그들은 우리들 중의 나머지에게 그들의 모범(example)으로써 하느님께서 존재하심(God exists)을 상기시킵니다(remind). 다른 이들에게 그분께서 사제 직무(priestly ministry)를 맡기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거대한 다수가 그들이 있는 바로 거기에, 그 안에서 그들이 일하는 모든 세속의 직업들에 -- 공장, 실험실, 농장, 소매업들, 대도시들의 거리들 그리고 산들의 오솔길(trails)들에, 머물 것을 원하십니다" [성 호세 마리아 에스크리바(St. J. Escriva, 1902-1975년), "Christ Is Passing By", 105].

(이상, 발췌 끝)

 

3-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객관적 구속/속량(objective redemption, 즉, 예수님의 구속/속량 위업)과, 우리들의 몫인, 주관적 구속/속량(subjective redemption)의 차이점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22.htm  

 

3-3. 이 글의 마지막으로, 다음의 질문을 드립니다:

 

질문 3: 그렇다면, 도대체 어떠한 이유 때문에 국내에서, 예수님의 "구속"/"속량"(redemption) 위업이, "죄들의 용서"(forgiveness of sins), 그리고 심지어, "구원"(salvation)과, 논리적으로 등가(logically equivalent)이라고 대단히 잘못 이해하게 되었을까요?

 

질문 3에 대한 답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그 주된 이유가, 마르틴 루터가 16세기에 개최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어떠한 교의 신학적 이유 때문에 단죄되었는지(excommunicated)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신약 성경 본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콜로새서 1,14 및 에페소 1,7의 국내의 개신교회 측의 대단히 잘못된 우리말본 성경 본문들을 수용한 결과라고 생각하며, 이 문제에 대하여서는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졸글/논문에서, 별도로 실증적으로(positively) 집중적으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106.htm <----- 필독 권고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마르틴 루터가 그리스도교 핵심 교의(dogmas)들인, 

 

(i) 예수님의 구속/속량(Redemption) 위업, 그리고 이 위업의 결과로서,

(ii) 그리스도교 세례(Baptism)가 원죄 및 본죄를 깨끗하게 소멸시킴, 그리고

(iii) 예수님의 부활에 의하여 개시된 "총귀"/"총괄복귀"(Recapitulation), 그리하여 그 결과, 유다인들 안식일 바로 그 다음날이, 바로 이 "총귀"/"총괄복귀" 신비를 경축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안식일", 즉, 소위 말하는, "주님의 날", 즉, "주일"로 경축되고 있음,

 

이들 셋 모두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진리가 아니라고 부정하였음을, 절대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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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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