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최근 750년 이상 홀대를 받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신성적 사랑이라는 법', 즉, '예수님의 새 계명'의 참 의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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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17 ㅣ No.3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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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1-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16년 전인 2008-06-08일부터 들여다보기 시작한 동일한 주제, "정의(正義)"(justice)를 다루는 졸고들의 목록을 접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Justice_concept_error.htm  

 

바로 위의 주소를 본글을 시작하자마자 제시한 이유는, 본글의 제목에서 지적한 바를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구체적으로 알아차리는 데에 적어도 약 16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참으로 슬픈 현실 때문입니다.

 

1-2. 특히, 바로 위의 주소에 안내된 목록에서, 천지 만물 및 이들 사이의 질서들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이들을 영원히 주관하고/통치하고 계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 나 그리고 이웃, 이들 3자들 사이의 관계의 상태가 존재한다는 "실재론" 사고의 틀 안에서 그 개념이 형성된 성경 용어인 "justice"의 개념이,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문 문화권에 없었음에 대한 졸고[제목: 義 글자의 의미에 대한 전공 교수님들의 견해들 외; 게시일자: 2009-03-16]를 읽을 수 있습니다.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36.htm <----- 꼭 필독 권고 

 

그리고 지금 지적한 바는, 예를 들어, 1583년에 중국 본토에 선교사로 파견된 예수회 소속의 마태오 리치 신부님이 구역口譯하고 서광계가 받아써서筆受 1607년에 초간된 유클리드(Euclid)의 "The Elements"(기원전 300년경)의 중국어 번역본인 "기하원본"의 출판 이전의 시기에, 다신교 문화권에 속하였던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 학파(기원전 500년 직전에 처음으로 형성됨)에 의하여 확립되어,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인과 철학을 논할 때에 사용된, 형이상학적 개념(metaphysical concepts)들 사이의 유의미한 관계들를 찾아내는 데에 있어 유일한 도구이기에, 따라서 필수적인, "p implies q" 논증(proof)이라는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그리고 또한 시공간의 제약을 초월하는, 유한 개의 공리(axioms)들로부터 새로운 진리(truth)를 찾아내는 공리적 논증 방식(an aximomatic proof method)이 한문 문화권에 없었다는 한 개의 역사적 사실이, 입증한다(demonstrates)는 생각입니다.

 

1-3. 그리고 위의 제1-1항에 안내된 주소에 나열된 필자의 졸고들의 목록의 첫 번째 졸고[제목: 정의(正義, justice)의 정의와 그 적용 예들; 게시일자: 2008-06-08]는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데,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799.htm <----- 꼭 필독 권고 

 

바로 위의 주소에 있는 졸고의 제2-2항에 발췌된 영어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1항에는 "the rectitude of divine love"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발췌 시작)

CCC 1991 "... 하느님의 의로움이란 하느님 사랑의 공정함을 뜻한다."

CCC 1991 "... Righteousness (or "justice") here means the rectitude of divine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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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하느님의 경우에, "righteousness"(의로움, 올바름)와 "justice"(正義, 정의, 정의로움)는 정확하게 동일하나, 그러나, 피조물인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들 용어들의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결코 그렇지 않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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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서, 첫 번째 문장은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991항에서 발췌하였으며, 다음과 같은, 두 개의 번역 오류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i) 영어로 "divine love"로 번역된 표현이, "신성적 사랑"으로 직역 번역이 되는 대신에, "하느님의 사랑"으로 번역된 번역 오류, 그리고 (ii) 영어로 "rectitude"로 번역된 표현이 "공정함"으로 번역된 대단히 심각한 번역 오류.

1-4. 바로 위의 두 개의 번역 오류들 중에서 특히 두 번째 번역 오류는, 왜냐하면 통상적으로 영어 단어 "fairness""공정"으로 번역되고 있기 때문에천지 만물 및 이들 사이의 질서들을 창조하시고 그리고 이들을 영원히 주관하고/통치하고 계시는 한 분이신 하느님, 나 그리고 이웃, 이들 3자들 사이의 관계의 상태가 존재한다는 "실재론" 사고의 틀 안에서 그 개념이 형성된 성경 용어인 "rectitude""공정함"으로 번역된 것은, 매우 심각한 번역 오류이라 아니 지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필자가 이 지적을 그 근거의 제시와 함께 하게 되는 것은, 다음의 주소에 접소하면 읽을 수 있는 졸고[제목: piety 라는 윤리덕의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 게시일자: 2013-09-27]를 작성한 이후 3년 뒤의 일이었습니다:

"piety"라는 용어가 나타내는 개념은 "justice"라는 용어가 나타내는 개념에 포함되며, 따라서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한문 문화권에는 이 개념이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회복한, "piety"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 입니다:
(발췌 시작)
"경의(敬意, respect)/존중(尊重, esteem)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
(이상, 발췌 끝)

1-5. 바로 위의 제1-4항에서 말씀드린 개념을 학습을 통하여 이해하고 난 후에, 위의 제1-3항에서 언급한 "rectitude"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성 토마스 아퀴나스"신학 대전"의 학습을 통하여, 비로소 회복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수용(受容)된 올바름(rectitude) 안에서만 오로지 의화가 가능하다" 제목의 졸고[게시일자: 2016-04-21]를 읽을 수 있습니다:


2. 최근 750년 이상 홀대를 받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신성적 사랑이라는 법', 즉, '예수님의 새 계명'의 참 의미에 대하여

2-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그리스도교 윤리 규범(moral precepts)들을 충족시켜야 하는 (i) 사욕(私慾) 사랑(love of concupiscience) 및 (ii) 자연적/본성적 애덕(natural caritas)[즉, 우의적 사랑(love of friendship) 및 편애(偏愛)/애모(愛慕)/사전 선호(選好)(dilection)], 그리고 (iii) 초자연적 애덕(supernatural caritas), 이들 셋으로 구성되는 속(屬)적 애덕(generic caritas), 즉, 속(屬)적 사랑(generic amor)에 대한 졸고[제목: 신성(神性)적 사랑(divine love)과 인성(人性)적 사랑(human love)의 차이점; 게시일자: 2016-04-30]를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2-2. 특히, 바로 위의 제1-5항에 안내된 졸고에서 필자가 또한 이해하게 된 "divine love"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에 근거하여,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졸고[제목: Ubi caritas et amor 혹은 Ubi caritas est vera?; 게시일자: 2016-07-20]에서 대단히 중요한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04.htm <----- 꼭 필독 권고 

2-3. 또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위의 제2-1항에 안내된 졸고에 이어지는 한 개의 졸고[제목: 성가정의 정의(definition); 게시일자: 2022-12-30; 최종 내용 추가/보강 완료 일자: 2024-05-17]를 학습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love_of_piety_2892.htm <----- 꼭 필독 권고 

 

2-4. 그리고 또한, 위의 제1-5항에 안내된 졸고에서 필자가 이해하게 된 "divine love"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에 근거하여,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대단히 중요한 결과들을 담은 필자의 졸고[제목: 영원한 구원에 필수적인 하느님의 도움들 두 개 - 법과 은총; 예수님의 새 계명 = 신성적 사랑이라는 법 = 하느님의 뜻; 최초 게시일자: 2014-07-22; 내용 추가 재개 일자: 2023-12-17; 최종 내용 추가 완료 일자: 2024-05-10]를 읽을 수 있습니다. 제1항부터 끝까지, 여러 번 반목하여, 읽도록 하십시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62.htm <----- 꼭 필독 권고 


특히, 다음은 바로 위의 출처로부터 발췌한 바입니다:

(발췌 시작)

[내용 추가 일자: 2024-05-10]

게시자 주 6-2-5: (1) (이 글의 결론 11) 더 나아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아래의 명제들 사이에 논리적 등가(logical equivalence)가 성립함에 대한 졸고들을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3316.htm <----- 꼭 필독 권고  

 

(iii) 예수님을 사랑함;
(ix) 예수님의 계명들을 실천함;
(x) 예수님 안에 머무름;
(xi) 예수님의 사랑의 행위 안에 머무름;
(xii) 예수님과의 통공(communion)이라는 관계의 상태에 머무름;

(viii) 예수님의 새 계명을 실천함;

 

(2) (이 글의 결론 1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바로 위의 (이 글의 결론 11)에 이어지는 졸고를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예수님_안에_머무르다의_의미_2212.htm <----- 꼭 필독 권고 

(발췌 시작)

Pre-2.

(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요한 15,9-17에서 -사랑 안에 머물다-는 -사랑의 행위 안에 머물다-로 번역되어야 한다[번역미숙]' 제목의 졸고를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2213.htm <----- 꼭 필독 권고  

 

(나)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예수님 안메 머무르다’‘예수님과의 통공(communion)이라는 관계의 상태(relationship) 안에 머무른다’와 논리적으로 등가임에 대하여 학습할 수 있다. 필독을 권고드린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진리와_행복의_충만함을_발견하기_위한_필요_조건은_무엇일까_2204.htm <----- 꼭 필독 권고  

 

(다) 더 나아가, 지금까지 고찰한 바로부터, 아래의 명제들 사이에 논리적 등가(logical equivalence)가 성립함을 알 수 있다:  


(i)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실천함;

(ii) 사랑이라는 새 계명(the New Commandment of love)을 실천함;


(iii) 예수님을 사랑함;
(iv) 예수님의 계명들을 실천함;
(v) 예수님 안에 머무름;
(vi) 예수님의 사랑의 행위 안에 머무름;
(vii) 예수님과의 통공(communion)이라는 관계의 상태에 머무름;

(viii) 예수님의 새 계명을 실천함;


(ix) 신성적 사랑(divine love)이라는 법에 순종함;
(x) 하느님의 뜻/의지에 순종함;
(xi) 하느님의 영원한 법에 순종함;
(xii) 그리스도교 윤리법에 순종함.  

 

(라) (이 글의 결론 13) 더욱더 나아가(a) 바로 위의 제(다)항(b)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졸고[제목: Ubi caritas et amor 혹은 Ubi caritas est vera?; 게시일자: 2016-07-20]에서 내린 결론들에 의하여,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704.htm <----- 꼭 필독 권고  

 

아래의 명제들 사이에 논리적 등가(logical equivalence)가 성립함을 알 수 있다:

 

(i)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완미하게(perfectly) 실천함;

(ii) 사랑이라는 새 계명(the New Commandment of love)을 완미하게(perfectly) 실천함;
(iii) 예수님을 완미하게(perfectly) 사랑함;
(iv) 예수님의 계명들을 완미하게(perfectly) 실천함;
(v) 예수님 안에 완미하게(perfectly) 머무름;
(vi) 예수님의 사랑의 행위 안에 완미하게(perfectly) 머무름;
(vii) 예수님과의 통공(communion)이라는 관계의 상태에 완미하게(perfectly) 머무름; 


(viii) 예수님의 새 계명을 완미하게(perfectly) 실천함;

(xiii) 신성적 사랑의 행위(divine love, amour divin)의 완미(perfectiion)에 도달하게 됨;

(xiv) 당사자의 심장이 애덕의 완미(perfection of charity)에 도달하게 됨
[주: 이를 위한 충분조건 한 개(즉, 예수님의 새 계명을 실천함)가 1요한 4,12에 제시되어 있음];

(xv) 거룩(holiness, 聖性)에 도달하게 됨

[주: 임종한 자의 영혼이 천당(heaven)에 들어가게 되는 유일한 조건]; 


(ix) 신성적 사랑(divine love)이라는 법에 완미하게(perfectly) 순종함;
(x) 하느님의 뜻/의지에 완미하게(perfectly) 순종함;
(xi) 하느님의 영원한 법에 완미하게(perfectly) 순종함;
(xii) 그리스도교 윤리법에 완미하게(perfectly) 순종함. 

(이상, 발췌 끝)

[이상, 2024-05-10일자 내용 추가 끝]

(이상, 발췌 끝) 

 

 

작성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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