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암동성당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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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선 [indangpong] 쪽지 캡슐

1999-09-20 ㅣ No.268

월요일. 안도현님의 글을 올립니다. 한해가 얼마 남지 않았네요... 정든 세월에게 안도현 홍매화 꽃망울 달기 시작하는데 싸락눈이 내렸다 나는 이제 너의 상처를 감싸주지 않을 거야 너 아픈 동안, 얼마나 고통스럽냐고 너 아프면 나도 아프다고 백지 위에다 쓰지 않을 거야 매화나무는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채 나뭇가지 속이 뜨거워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너를 위하여 내가 흘릴 눈물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거야 쿨룩쿨룩, 기침을 하며 싸락눈이 봄날을 건너가고 있었다 상처받은 이들과 함께 하고 싶십니다. 삶 안도현 게는 이 세상이 질척질척해서 진흙 뻘에 산다 진흙 뻘이 늘 부드러워서 게는 등껍질이 딱딱하다 그게 붉은 투구처럼 보이는 것은 이 세상이 바로 싸움터이기 때문이다 뒤로 물러설 줄 모르고 게가 납작하게 엎드린 것은 살아 남고 싶다는 뜻이다 끝끝내 그래도 붙잡히면? 까짓것, 집게발 하나쯤 몸에서 떼어주고 가는 것이다 언젠가는 세살이 상처 위에 자신도 모르게 몽개몽개 돋아날 테니까 그냥 같이하고 싶어서요. 섬 안도현 섬, 하면 가고 싶지만 섬에 가면 섬을 볼 수가 없다 지워지지 않으려고 바다를 꽉 붙잡고는 섬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수평선 밖으로 밀어내느라 안간힘 쓰는 것을 보지 못한다 세상한테 이기지 못하고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한 며칠 하면서 짐을 꾸려 떠나고 싶겠지 혼자서 훌쩍, 하면서 섬에 한번 가봐라, 그 곳에 파도 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민박집 형광등 불빛 아래 혼자 한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봐라 삶이란 게 뭔가 삶이란 게 뭔가 너는 밤새도록 뜬눈 밝혀야 하리 좋은 하루 되세요. 행복한 일주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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