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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2.1 아름다운 쉼터(눈이 게으른 거다(정희재,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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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훈 [4rang2] 쪽지 캡슐

2011-02-01 ㅣ No.604

눈이 게으른 거다(정희재, ‘도시에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중에서)

어느 여름, 엄마를 도와 밭에 나가 김을 맨 적이 있었다. 시골에 가도 항상 손님처럼 놀다 오기 일쑤였지만, 그날은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호미를 들고 엄마를 따라나섰다. 한여름 넓은 콩밭에 쏟아지는 햇빛은 온몸을 삶을 것처럼 따가웠다.

똑같이 한쪽 고랑씩을 맡아 시작했건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는 벌써 저만치 앞서 갔다. 열린 땀구멍에서 더운 물줄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입에서 단내가 났다.

“엄마야! 이 넓은 콩밭을 언제 다 맨대요?”

그때 엄마가 던진 한마디.

“야야, 눈이 게으른 거란다.”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엄마는 나를 돌아보지 않은 채 오직 당신 앞에 난 잡초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풀의 머리끄덩이 한 번 잡아당기고, 콩밭 한 번 둘러보고 한숨 쉬고, 그러느라 더 덥고 힘들었다.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벽에 부딪쳐 그만 포기하고 싶어질 때면 엄마의 어록을 떠올린다. 해가 지면 안도하고 새벽이 오면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겁났다던 엄마. 그런 세월을 살면서 엄마는 알아차린 것이다. 게으른 눈에 속으면 안 된다는 것을. 사람의 눈은 어리석기 짝이 없어서 해야 할 일 전부를, 인생 전체를 돌아보며 겁먹기 쉽다는 것을. 엄마는 말했다. 오직 지금 내딛는 한 걸음, 손에 집히는 잡초 하나부터 시작하면 어느새 넓은 콩밭은 말끔해진다고. 반드시 끝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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