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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한국인의 종교심성에 끼친 무속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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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선교분과 [dangin] 쪽지 캡슐

2002-04-27 ㅣ No.8

한국 사람의 종교 심성에는 특이한 구석이 많다. 백일기도, 새벽기도에 철야기도도 예사로 드리고, 그 열의와 정성이 사람을 감동시키기 족하다. 또 별의별 종교가 이 땅에 있고, 한 집안의 식구들이 다른 종교를 믿어도 그리 큰 갈등을 보이지 않는다. 그 만큼 한국 사람은 매우 종교적이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다른 민족들과 비교하여 보면 확연히 두드러진다. 이런 특성의 형성에 무(巫)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막연히 거론되나 좀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았고 잘못된 면도 적지 않았다.

 

무가 한국인 종교 심성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가정은 그 역사성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 고조선의 신교(神敎)가 바로 무였고 우리 고대 사회에서는 일년의 정해진 때에 온 나라에 크게  하늘 굿 내지 마을 굿을 벌였다는 것은 이미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삼국시대 때 유교, 불교, 도교가 중국으로부터 수입되어 나라에서 신앙되는 통에 무는 옛 권세를 많이 잃어버리지만, 저들과 함께 공존하면서 민중에 의해 전통신앙으로 내내 믿어졌었다. 수입된 종교라도 예를 들어 불교는 산신(山神),삼신(三神)과 같은 무의 신령과 그 신앙 내용을 수용하고서야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무도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의 신령이나 의례를 다분히 받아들였으니 한국인 종교심성의 포용적인 성격을 예서부터 미리 엿보게 된다.

 

조선조 때 무는 내내 천대와 핍박을 받고 무당은 천민의 하나로 사회로부터 격리되었다. 신내려 무당이 되는 것이 곧 사회적 죽음이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도 무당은 도성 안에서, 시골 마을에서 끊임없이 생겨났고 무는 계속 신앙되어졌다. 조선 왕조 말 몇몇 기독교 선교사들은 그러한 정황에다 그들의 종교적 염원을 곁들여 이제 얼마가지 않아 이 미신은 사라질 것이라 했으나, 일제의 탄압과 해방 이후의 서양화, 산업화에도 불구하고 무는 전통신앙, 민중신앙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믿어져 온다.

 

무를 이쯤 이해하고 보면 한국인 종교 심성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가정보다 오히려 한국 종교 문화 및 종교 심성의 기층(其層)임을 대뜸 알아차릴 수 있다. 중국에서는 진즉 무가 도교에 흡수되어 민간도교(民間道敎)로 전개되었고 일본의 무 또한 신도(神道)로 승화되었으며, 우리 나라에서는 무로서 존재한다. 그뿐 아니라 고전적 의미에서의 샤머니즘(무)은 아시아 대륙에서 이미 소멸해 버린 반면, 오직 이 땅에 그것도 올림픽을 치른 서울 한복판에 생생히 살아있다. 무는 한국 사람의 종교심성에 그토록 바탕이 되는 것이다.

 

 

 

무(巫)에 대한 잘못된 인식

 

한국 샤머니즘 연구의 개척자인 어느 교수는 한국 샤머니즘의 정신 풍토에서 귀신 신앙, 요행주의, 윤리의식의 결여, 역사의식의 결여, 주술 신앙 등 역기능(逆機能)적 요소가 민중 의식에 형성되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가운데 역사의식의 결여를 제외하고는 모두 종교 심성과 관련된다. 그는 "샤머니즘의 극복이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부과된 하늘의 사명이요 지상의 과제"라고 결론을 맺었다. 그러나 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선입견과 어떤 의도에 의해 처음부터 무를 부정적인 것으로 치부하려는 비논리적이고도 비 학문적인 자세가 거기에 있다. 무당이나 그 신도인 단골은 결코 귀신을 모시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받드는 이는 조상과 하늘 신을 중심한 신령들이다. 귀신의 존재를 인정하고는 있으나 그것들은 다만 위로 받아야 할 가련한 존재일 뿐이다. 서양의 신학자나 종교학자들은 서양 이외의 민족들의 토착신앙대상을 두고 기독교적인 안목에서 그들을 ’귀신’으로 격하하여 불렀다. 여하튼 무의 신령은 전체적으로 보아 거의 조상의 성격을 띠며 무는 조상숭배의 종교가 된다. 운명신앙이나 요행주의가 무의 특징이라 함은 어불성설이다. 요행주의의 대표 격인 복권이 유럽이나 미 대륙에 성행하는 것으로 보아 저들이 요행주의 적이라면 몰라도 무의 단골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드리는 치성(致誠)의 정성만 보아도 알 만하다. 단골은 운명이나 요행을 기대하지 않고 현실생활에서 노력한다. 문제가 생기면 무당과 상의하여 그 해결을 위해 애쓰고 그것이 끝내 심각한 것으로 드러나면 치성이나 굿을 올린다. 즉 무는 인간과 조상과 자연과의 조화를 꾀한다. 윤리 의식이 없어 모든 문제를 귀신이나 조상의 탓으로 돌린다느니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의 구별이 모호하다는 따위의 비판도 귀기울일 바 못된다. 먼저 그 내용의 출처가 의심스럽고 다음으로 그 윤리의 기준이 실로 애매 모호하다. 어느 한 종교의 윤리를 기준으로 다른 종교의 것을 비판하는 일은 철없는 아이에게나 적합하다. 무당이나 단골들도 윤리를 매우 강조하여 가르치고 행한다. 신내려 내림굿을 하고 갓 태어난 애기 무당에게 그 신 부모(神父母)는 가난하고 늙고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아 주어야한다는 등의 가르침을 어김없이 준다. 굿거리는 주술과 무관하고, 혼합주의는 모든 종교에 공통된 현상으로서 결코 역기능으로 파악될 수 없다.

 

 

 

’조화’에 바탕을 둔 무(巫)의 정신

 

한국의 무는 긴 역사의 과정 속에서 여러 종교들과 공존하여야 했고 조선시대이래 모진 핍박과 오해를 견디어 오느라 현재 매우 퇴화 내지 변질된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 본질적인 성격은 굿이나 신내림 등에 여전하고, 옛 문헌이 무의 종교의례를 전하고 있으며, 마을 굿(洞祭)에서도 옛 풍류를 더듬어 알 수 있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무가 한국인 종교 심성의 어떤 기반을 이루어 왔는지 살펴본다. 굿은 무의 가장 중심되는 종교의례이다. 치성,기도,부적,예언,점복등의 일도 있으나 규모나 내용 면에서 그것에 견줄 바 아니다. 한 집안의 굿은 친인척과 이웃이 함께 자리하여 음식과 춤과 음악이 더불어 베풀어지고,  마을 굿에는 온 마을이 한데 어울려 논다. 노는 거리거리에는 조상신과 신령님이 모셔져 함께 놀리고 잡귀잡신(雜鬼雜神)마저 배불리 먹이고 놀린다. 그 각개의 거리에서 무당은 해당 신령에 씌여 제가(祭家)집에 공수 또는 덕담(德談)을 내린다. 그것은 신령과 단골이 무당의 중재로 만나는 종교 체험의 장면이다. 단골은 그 집안의 문제를 하늘과 땅과 사람의 조화 가운데 풀어버리는 것이다. 말을 바꾸어 집안의 잃어진, 깨어진 조화가 여기서 되찾아지는 것이다. 노는 것과 신내림은 둘이 아니다. 종이의 양면과 같아서 그러한 놀이 가운데 신명이 오르고 조화를 회복하는 체험이 얻어진다. 이것이 한국인 종교 심성의 바탕을 이루어 온다. 그래서 고려 때 팔관회 연등회 같은 불교행사도 잘 놀고 깨달음을 얻는 법회였던 것이다. 종교 의례에서 잘 논다함은 멋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네 종교 심성은 멋을 풍기고 그것을 갖추어야하는 법이다. 그 멋 가운데 신명을 체험한다. 신내림은 달리 말하여 깨달음,도통(道通),도각(道覺)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체질화되어 있기에 한국인의 종교 심성은 그 깨달음의 세계에 쉽고 다양하게 들고 그것을 또한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그 본질이 되는 조화를 생리로 한다. 한국 종교사가 다 종교 공존(多宗敎共存)의 특징을 보이고 종교의 스승들이 모두 조화를 내세워 가르친 사실이 여기에 기반을 둔다. 이러한 종교 심성에서 우리 조상들은 낙천적이고 현실적이며 남을 이롭게 하는 일에 마음을 썼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그러하듯이 단골이 제 개인을 위해 기도하는 법은 없다. 언제나 자식과 집안과 나라를 위하였다. 그리고 멋을 잃지 않았다. 오늘날 고도의 산업화에 묻혀 그런 종교심성이 잊혀져 가고있는 현실을 보며 우리 민족의 심성에 깔려있는 ’조화’의 정신을 되살리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흥윤 교수의 한국인의 종교심성에 끼친 무속의 영향을 요약 정리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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