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성당 게시판

★ 묵시 5장 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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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austin] 쪽지 캡슐

2002-02-07 ㅣ No.8754

 

묵시록 4장에서는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이 강조되었다. 이제 5장에서는 ‘인류구속’이라는 주제가 다루어진다. 어린양이 죽임을 당하신 표를 지닌 채 하늘의 옥좌에 나타나셨다는 것은 어린양이 희생으로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승리하신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이다.

5장에서 다루어지는 ‘어린양의 환시’는 6장 이하에서 전개될 내용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옥좌에 앉아 계신 분이 오른손에 들고 계신 두루마리(봉인된 책)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 기록된 비밀문서이지만, 결국 어린양이 개봉함으로써 그 내용들이 공개된다.

 

“안팎에 글이 기록된 두루마리”(5,1) : 예전에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책장을 넘길 수 있게끔 쪽(페이지)을 명시한 책은 없었고 대부분 낱장마다 글을 써서 한 장식 모으거나, 파피루스나 양피지 같은 것에 써서 그 길이대로 둘둘 말아두거나 하였다. 이 경우에 흔히 글씨는 자연적으로 한 쪽 면에만 썼고, 다 쓴 다음에는 그 것을 감으면 안쪽에 써진 내용을 아무도 알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양면에 쓴 경우도 있는데 에제키엘이 예언자 소명을 받는 대목에서 앞 뒤 양면에 글씨가 적혀있는 두루마리를 받는 장면이 소개된다(에제 2,9~10 참조). 그리고 이 두루마리는 일곱 봉인이 찍혀 있는 것으로서 자격이 없는 자는 아무도 펼쳐볼 수 없는 비밀문서이지만, 결국 어린양이 개봉함으로써 그 내용이 공개(계시)되는 것이다.

 

“일곱 개의 봉인”(5,1) : 봉인이라는 이미지 속에는 지켜야만 할 비밀과 보증이라는 개념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그 두루마리가 ‘옥좌에 앉아 계신 분’ 즉 하느님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다는 말은, 그 책이 하느님의 뜻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에서도 땅 위에서도 땅 아래서도 아무도 두루마리를 펴고 그것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5,3) : 힘센 천사의 이 선포로 이제 관심의 초점은 누가 봉인을 떼고 그 두루마리를 열 수 있는지에 모아진다. 그 두루마리의 내용이 아니라 그 두루마리를 열 수 있는 인물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5,5) : 스물 네 명의 장로들 중의 하나는 울고 있는 묵시록 저자를 위로하며, 그 두루마리를 열 수 있는 자격을 가지신 분이 즉 그리스도가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임을 처음으로 밝힌다.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라는 묘사는 야곱의 마지막 축복 중에서 유다를 지칭하는 창세 49,9에서 유래된 것으로 창세기에서는 ‘사자새끼’로 나온다. ‘다윗의 뿌리’라는 묘사는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이사 11,1)는 메시아에 관한 예언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므로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는 호칭은 유다 지파의 다윗의 후손이라는 메시아의 역사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어린양”(5,6) : 이 용어는 가장 빈번히 그리스도께 붙여드리는 칭호의 하나로 묵시록에만도 30여 번이나 나오는 말이다.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용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요한 1,29.36에서도 ‘어린양’으로 지칭되고 있다. 또한 똑같은 경향이 1베드 1,19에서도 나타난다. 이 용어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구약성서적 배경, 특히 이사 53,7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고난받는) 어린양’과 ‘하느님의 종’ 사상을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종’ 사상은 ‘죽임을 당하는 어린양’ 사상과 일맥상통한다. 묵시 5장에서도 중요시해야 할 것은 바로 이 ‘희생’이라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묵시 5장의 ‘어린양’은 죽임을 당한 흔적을 몸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5,6). 또한 ‘옥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가운데에 어린양이 서 있다’고 소개하는 것은 승리와 부활 사상에 연계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그분께서는 지금 ‘서 계시고’, 하늘에 서 계시며, 하느님의 옥좌 한 가운데 서 계신 분으로서, 죽음을 이기고 승리자가 되신 분이지만, 먼저 희생의 흔적을 간직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묵시록 전체를 통해서 사용된 ‘어린양’을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는 매우 흥미롭다. 요한 1,29.36과 1베드 1,19의 ‘어린양’은 ‘암노스’(amnos)인데 반해 묵시록에서는 ‘아르니온’(arnion)으로 표기하고 있다. 또 묵시록에서 ‘어린양’의 적대자로 등장하는 ‘짐승’에 대해서도 ‘테리온’(therion)이라는 단어를 골라서 표기했다. 묵시록 저자는 아마도 두 상대적 개념인 ‘어린양’과 ‘짐승’을 단어 끝이 모두 ~이온(-ion)으로 되게금 ‘아르니온’(arnion)과 ‘테리온’(therion)을 의도적으로 대비시키지 않았나 생각된다. 묵시록에서 ‘짐승’은 11장 이전까지는 한 번도 나오지 않다가 묵시록 후반부인 12장 이후에 나타나서 ‘어린양’의 적수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일곱 뿔과 일곱 눈”(5,6) : 전통적으로 ‘뿔’은 권세와 권능을 상징하며 (민수 23,22; 신명 33,17; 1열왕 22,11), ‘눈’은 일반적으로 지혜를 상징한다 (즈가 4,10). 그리고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성과 완전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숫자이므로 ‘일곱 뿔과 일곱 눈’은 일곱이라는 숫자의 상징성과 함께 ‘어린양’이 얼마나 강한 분이며 또 얼마나 전지(全知)하신 분인가를 암시해준다.

 

“그 향은 곧 성도들의 기도입니다”(5,8) : 전통적으로 번제물로 바치는 제물이 타면서 내는 연기와 향이 하늘로 올라가 하느님께 바쳐지는 기도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시편작가도 “나의 기도 분향으로 받아 주시고”(시편 141,2)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이 구절은 앞서 언급되고 있는 ‘4생물과 24원로가 가지고 나온 거문고와 향이 담긴 금대접’과 함께 전례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것이다.

 

“당신 피로 값을 치러”(5,9) : 그리스도의 피는 그의 십자가상 죽음에 비추어볼 때 생명으로 나가는 길이다. ‘값을 치러 (샀다)’는 개념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사상에서 유래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 아버지께 절대적으로 순종하셨고, 그 피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셔서 우리를 그분(그리스도)께 속하게 하셨다는 사상이다. 바울로가 말한 것처럼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여러분의 몸을 사셨습니다.”(1고린 16,19~20)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피는 ‘죄에서의 해방, 즉 씻음, 승리’(묵시 1,5; 7,14; 12,11)와도 직결된다.

 

“모든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5.9) : 교회의 보편성이 이 구절에서 강하게 부각된다. 이 구절에 나오는 네 개의 단어들은 묵시 13,7의 짐승에 관한 언급에서도 그대로 똑같이 나온다. “그 짐승은 성도들과 싸워 이길 힘을 받았고 모든 종족과(나라와) 백성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릴 권세를 받았습니다.”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한 왕국을 이루게 하셨고 사제들이 되게 하셨으니 그들은 땅위에서 왕노릇할 것입니다”(5,10) : 묵시 1,6에서처럼 출애 19,5~6의 말씀에서 유래하는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새로운 하느님 백성)들의 사제직과 왕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권능과 부귀와 지혜와 힘과 영예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자격이 있으십니다”(5,12) : 이 ‘구속찬가’(救贖讚歌)는 묵시 4,11에 나오는 ‘창조찬가’(創造讚歌)의 응답송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성부께 바치는 경배인 “주님이신 우리 하느님 하느님은 영광과 영예와 권능을 누리실 만한 분이십니다.”(묵시 4,11)와 똑같은 경배를 그리스도께 드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 ‘어린양 찬가’는 매우 흥미로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네 생물과 스물네 원로들이(5,8~10), 그 다음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사들과 생물들과 원로들이(5,11~12), 마지막에는 하늘과 땅과 땅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 곧 우주 안에 있는 만물이(5,13) 차례로 수적으로나 노랫소리나 모두 점점 고조되어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묵시록 5장에는 ‘어린양’에 관한 주목할 만한 용모 묘사가 있었고 ‘유다의 사자(獅子)’라는 표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린양은 죽임을 당한 흔적을 몸에 지닌 분으로 나타난다. 묵시록 후반부에서 어린양의 적대자인 - 표범, 곰, 사자의 흉포성과 잔인성을 한 몸에 지닌 존재로 묵시록 13장에 묘사되고 있는 - ‘짐승’을 대적하게 된다. 순전히 이런 묘사만 놓고 본다면 어린양과 짐승의 대결에서 어린양이 이길 수 있으리라는 승산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승리는 선과 희생적 사랑의 전형적 존재이신 어린양에게 돌아가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이토록 ‘어린양이 온 우주의 왕좌에 군림하신다’는 사상은 성서에서 가장 장엄하게 소개되는 내용 중의 하나다.

또한 사랑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가르쳐주는 내용이다. 묵시록 전체를 통해서 이 사상은 흔들림 없이 일관된 진리로 나타난다. 요한복음에서도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긴 것은 오직 십자가에 의해서라고 단언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승리를 따로 떼어내서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요한 12,31~33참조). 이런 생각이 묵시 5장에서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묵시록 후반부에 가서 어린양은 ‘흰말을 타신 분’ - 원수의 피로 젖은 옷을 입었고, 예리한 칼로 나라들을 쳐부수시며, 최상의 주권과 신적 권능을 드러내시는 분 - 으로 모습이 바뀐다(묵시 19,11~21 참조).

역사적으로도 교회는 로마 제국과의 대결에서 오직 영적인 무기로서 이길 수 있었다. 교회는 로마제국의 10명의 대박해자들에 의해(‘네로’에서부터 4세기초의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이르기까지 무려 4세기 동안이나) 말할 수 없는 곤욕을 치렀지만 끝내 그들 모두를 이겨냈다. 교회역사가들은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격심한 대결에서 오직 한쪽 편만 무장하고 있었는데 파멸된 것도 오직 그 한쪽 편뿐이었다”(H.B. Workman, Persecution in the Early Church, 240~241 참조).

여기서 “’어린양’의 길이 항상 올바른 길”이라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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