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성당 게시판

2008년 겨울, 죽은 사람의 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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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08-12-15 ㅣ No.11903

제가 접한 첫번째 죽음은 초등학교 때 작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을 실제로 알게 된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무섭기도 하고, 정말 작은 할아버지가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더군요.

그 후로 몇 번의 죽음을 더 접하게 되었습니다. 몇 명의 친지, 친구, 건너 아는 사람들을 떠나 보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과 살갑게 인사하며 대면하는 죽음은 그렇게 와닿지가 않더군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장례가 더 많았습니다.

죽은 사람을 처음 본 건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였습니다. 삼베에 꽁꽁 쌓여있는 할아버지의 실루엣을 포크레인이 번쩍 들어 장지에 묻는 순간이었습니다. 비현실적으로 올곧게 뻗어 있던 그 모습은, 그 안에 동여 매어 놓은 것이 할아버지라는 생각을 하기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직접적으로 본 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입니다. 병원 안치실에서 흰 천에 덮여 있던 모습을 봤습니다. 아주 피곤하실 때 주무시던 모습처럼 천장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계시더군요. 어떤 감흥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저 울고 있던 엄마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모두 편안한 죽음이었고, 정갈하게 정리된 분위기였으며, 의례와 형식적인 측면이 강했기에, 매우 주관적인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저를 발견하곤 했었습니다.

저번에 국과수 얘기를 썼었지만, 기자이기에 사진으로 본 죽음들도 몇 있었습니다. 현장을 담은 사진들은 충격적이었지요. 그 전까지 봐오고 접했던 편안한 죽음들이 아니었기에 그랬을 겁니다. 영화에서 나오는 모습과 별반 차이는 없었지만 픽션이 아닌 팩트라는 강렬한 냄새가 제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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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보다 직접적이고 가까이서 현장의 죽음을 접하게 됐습니다. 쪽방촌의 한 할아버지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저는 식상한 것을 매우 싫어하는 편입니다. 기자가 됐다고 해서 한 겨울 서울역의 노숙자들을 찾아가 "요즘 살기 힘드시죠?" "많이 추우시죠?" 하는 질문들을 하는 저를 상상해본 적이 없습니다. 60억 명이 먹는 밥상 위에 제가 숟가락 하나 더 올려 놓는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의미 없는 일들을 하긴 싫었습니다.

바닷가에 가서 오늘도 어김없이 오징어를 잡아 올리고, 갯벌에서 조개를 캐며 옆에서 환호하고 회 떠서 입에 넣는 수많은 리포터들을 보면 노동의 신성함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기분이 어떠세요?" "신부 모습이 어떤 것 같아요?" 같은 의미 없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는 연예인들의 결혼식장 tv 화면은 보는 것 자체가 고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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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리셰를 증오하는 제가 오늘은 이런 사진을 찍고 있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앵글을 보기만 해도 저는 닭살이 돋네요. 저 뒤의 호텔과 얼기설기 얽혀 있는 전깃줄을 대비해 뭐라도 얘기해보려는 꼼수가 보이는 듯하지 않습니까. 동생이 사진학과라 이런저런 사진이 집에 굴러다닙니다. 사진학과 학생이라면 꼭 찍는 사진들이 있죠. 굵게 파인 주름살의 노파가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흑백사진을 보곤 한마디 합니다. 야. 이런 식상한 사진들 좀 찍지마라.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도 경험의 천박함을 드러낸 얕은 사고가 아니었나 싶어 부끄럽습니다. 갯벌에서 조개를 캐는 사람들, 각종 루머를 이겨내고 결혼에 골인하는 연예인들의 입장을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다는 거겠죠.

오늘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그런 일을 직접적으로 겪은 셈입니다. 하루에 동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한 둘은 아니겠습니다만, 일주일이 채 되기 전에 자살하는 사람들을 대여섯씩 보고 있는 지금이지만, 조서로 보는 죽음과 사진으로 보는 죽음, 현장에서 직접 보는 죽음은 다른 것이 당연하다고, 클리셰에 빠져 허우적 대고 있는 제 모습을 자위하고 있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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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전까지 사람이 살던 방이었습니다. 주변의 쓰레기들을 일부러 그러 모아 방안에 쌓아 둔 것이 아닙니다. 할아버지는 바로 저 위에 꾸겨져 누워 숨져 있었습니다. 10년째 이 방에서 살아오셨다고 합니다. 15만원짜리 방입니다. 40만원 남짓 나오는 정부 생활보조비로 한 달을 버텨야 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큰 돈이었을 겁니다. 사진을 시각이 아닌 후각으로 느낄 수 있음을 저는 알게 됐습니다. 지금도 코를 찌르는 약 냄새와 쉰 냄새와 오래된 천의 복합적인 냄새가 모니터 화면에서 풀풀 새어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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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노숙자 많은 거 하루이틀 일인가. 그 사람들 거기 있는 거 어제오늘 일인가. 안 봐도 뻔하지. 뭐 새로울 거 있나? 늘 이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직접 가보기 전엔 상상할 수 없었던 사진을 찍고 있던 오늘 제 모습은 그래서였습니다. 흔히 '기자는 현장'이라는 선배들의 충고를 꺼내봐도 좋은 순간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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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고시원 화재 참변이 일어났을 때도 무미건조하게 기사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 살던 사람들의 애환과 사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뭐 새로운 거 없나, 재미있는 거 없나, 말초적인 신경만을 자극하려 하는 저를 발견합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됩니다. 할아버지의 성기는 추운 날씨에 얼었던 듯 반으로 꺾여 있었습니다. 냄새가 지독했는지, 방에 들어가기 전 담배 한 모금을 깊게도 빨아들인 형사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며 거친 일상의 애환을 간접적으로나마 드러냅니다. 얼마나 많은 죽음을 접했을까요.

장례식장의 직원들은 또 어떻습니까. 따뜻한 난로 앞 컴퓨터에서 '리니지'를 열심히 하다온 직원들은 꾸겨져 있던 할아버지를 펴 옮기는 일보다는 좁은 골목길에 해야 하는 어려운 주차에 대해 투정을 합니다. 시신을 처음 발견한 주인집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동년배였습니다. 사람들이 시신을 거둬간 뒤,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마늘을 빻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끼니를 준비하고 계셨겠지요.  

기초생활 수급자가 무엇을 먹고 어떻게 살고 있는지 상상해본 적이 없습니다. 어느 재벌집 자제가 어디 룸살롱을 빌려 어떻게 환각파티를 벌이고 있는지에 대해 알고싶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 게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러리라고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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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들었던 멋진 말이 있어 옮겨 볼까 합니다. "기자 위에 없고, 기자 밑에 없다."

'기자 위에 없다는 것'에만 방점을 찍은 것은 아닌지, 아니 분명히 그랬을 테지만, 다시 한번 그간을 돌아보게 되는 아침입니다.

                                                             - 조선일보 -에서 [박국희 님]의 글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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