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계동성당 게시판

여보, 내 '얼굴 밝힘증'을 용서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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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2008-12-17 ㅣ No.11908

어머니는 말씀하셨지. "마누라 얼굴 뜯어먹고 살 거냐. 여자는 뭐니뭐니해도 마음 착한 것이 제일이다."
그때마다 팽하고 코웃음치며 독백했었지. "아이고 어머니, 예쁜 여자가 마음도 착한 거고, 미인 아내는 남자의 권력이라고요."
세상에는 '예쁜 여자'와 '안 예쁜 여자'가 있을 뿐이라고 친구들 앞에서 떠벌리던 때였으니 독백도 겸손이었으리.

그러나 운명과 인연이라는 괴물은 사람을 변덕쟁이로 만들어버린다.
소개팅으로 아내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안 예쁜 여자'였지만 사랑의 콩깍지 안에서 그녀는 '예쁜 여자'였고 설령 그녀가 '안 예쁜 여자'라 해도 귀엽거나, 착하거나, 순진하거나 등의 오만 가지 이유가 결혼 결정에의 명분으로 이미 대기 중이었다.
훗날 부모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살면서 했던 유일한 효도는 제 날짜에 군대 간 거랑 에미랑 결혼한 두 개"였다고.

그러나 당시 친구들은 뜨악했다.
자유연애로 천년은 놀 것 같던 놈이 조기 결혼을 한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청첩장 신부 이름이 저들도 알고 있는 A양, B양도 아닌 생소한 X양이라는 것에 경악했다.
결혼식 당일, 식장에 몰려온 친구들은 아기공룡 둘리 보듯 신부 얼굴을 요리 보고 조리 본 후 쑥덕거렸다. "저 자식 사고쳤군. 신부가 돈이 많든가."
 
차라리 그 소리를 듣지나 말 것을.
마누라 못생겼다는 친구들의 말이 비수가 되어 의식의 한쪽에 똬리 틀고 앉을 줄은 당시엔 몰랐다.
그것이 작은 콤플렉스가 되리라는 것도 그때는 몰랐다.
회식 자리에서 누군가 상사 부인의 미모를 칭찬할 때, 마트에서 함께 장을 보는 어느 부부의 아내가 절세미인일 때 나는 기가 죽었다.
심지어 부부동반 모임을 알리는 안내장 앞에서도 살짝 움츠러들었다.
 
따지고 보면 아내의 얼굴이 허물 벗기 전 '박씨 부인'보다 만 배는 더 예쁘고, 아내 스스로 자기 얼굴에 큰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데도 혼자서만 '옴메 기죽어'였다.
죄라면 이 죽일 놈의 마초근성이겠고, 더 큰 죄인이라면 남의 결혼식에 와서 망발을 날린, 15년 동안 군만두만을 먹여도 시원치 않을 친구 놈들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기도 하여라.
그 병이 사라진 것이다!
나이 마흔이 넘으면서 못난 놈의 못난 병이 감쪽같이 증발한 것이다.
연예인이 아닌 바에야, 일명 여염집 중년 여인들의 얼굴은 모두 똑같이 변해버린다.
 
그녀들은 한결같이 적당히 여유롭고, 적당히 후덕하며, 적당히 지혜롭고, 또 적당히 뻔뻔하게 통일돼간다.
사람들은 이들을 통틀어 '아줌마'라 호칭했고 이제 와 정정하나니, 세상에는 '예쁜 여자' '안 예쁜 여자' 그리고 외모지상주의를 혁명적으로 타파하고 얼굴의 평등시대를 열어젖힌 '아줌마'가 존재하는 것이다.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르며 인상 좋은 아줌마로 변하는 아내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부부동반 모임을 먼저 챙기는 요즘이다.
여보, 철딱서니 없었던 내 과거를 용서해줘.

                                                                                                 - 조선일보 [윤용인의 아저씨 가라사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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