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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이전의 바오로의 의로움에 대하여 [성경용어_의로운자] [사울] [바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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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19 ㅣ No.1228


질문: 사도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에 의하여 회심을 당하기 이전에도 의로운 자 였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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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찬미 예수님

답변: 예, 그러하였다는 생각입니다.

이 글에서는, 왜 그러하였는지에 대하여, 상당히 자세하게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서 한 개의 결론으로서 도출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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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 이후의 피조물들의 "영원한 구원/생명"을 위한,

"부족한 의로움(imperfect righteousness)"인

"구약 시대의 의로움"은,
 

"무한하고 그리고 완미한 의로움(infinite and perfect righteousness)"을
가지고 계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 공로에 의하여

그리고

세례성사와 고해성사를 통하여 현실태화되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통공에 의하여,


"완미한 의로움(perfect righteousness)"인

 "신약 시대의 의로움",

즉 "의화(justification, 의롭게 됨)"로

완성되어

베풀어지고 있습니다.

---------------

 
1. 들어가면서

우선적으로, 우리는 다음의 질문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질문 2: "사악한 자(the wicked, 악한 자, 악인)"정의(definition)는 무엇일까요?

질문 2에 대한 답변: 다음은 시편 1,4에서 표현되고 있는 "사악한 자(the wicked)"에 대한 NAB의 주석에서의 용어 정의(definition)입니다:

출처: http://old.usccb.org/nab/bible/psalms/psalm1.htm

(발췌 시작)
The wicked: those who by their actions distance themselves from God’s life-giving presence.

사악한 자(악한 자, 악인, the wicked)들: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현존으로부터 자기 자신들을 행동들로써 멀리하는 자.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참고: 여기서 말하는 "행동들"에는 "말"과 "글"을 포함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바리사이들 중의 바리사이로서, 자신의 행동으로써 하느님 섬기기에 매우 열심이었던 자였기 때문에, 회심 이전의 사울은 결코 사악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의 사도행전 26,5; 갈라티아 1,14 를 읽어 보십시오:

(사도행전 26,5) "그들이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으므로 원하기만 하면, 내가 우리 종교에서도 가장 엄격한 바리사이파 사람으로 살아왔음을 증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라티아 1,14)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

2. 그렇다면, 회심 이전의 사울이 "의로운 자"였는지를 알고자 하면, 먼저 "의로운 자"의 정의(definition)부터 제대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질문 3: 구약 성경 시대의 "의로운 자(the just, 정의로운 자)"정의(definition)는 무엇일까요?  

질문 3에 대한 답변: "의로운 자(the just, 정의로운 자)"에 대한 다음의 정의들을 잘 읽어 보십시오: 

2-1.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시편 125,3에 대한 NAB(New American Bible)의 주석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old.usccb.org/nab/bible/psalms/psalm125.htm

(발췌 시작)
The just are the members of the people who are obedient to God.

의로운 자(the just, 의인, 정의로운 자)들이란 하느님께 순종하는 백성의 구성원들을 말한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참고: 여기서 순종한다는 말은, 아브라함성모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자신이 전해 들은 하느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2-2. 다음은, 잠언 1,2에 등장하는 "정의"라는 표현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에서 발췌한 "의로운 자(the just, 의인, 정의로운 자)"정의(definition)입니다:

(발췌 시작)
의인은 '주님을 경외하고' 자신의 삶을 그분의 뜻에 맞추는 사람이다.
(이상, 발췌 끝).

2-3. 그렇다면,

질문 4: 유다인들의 언어에 있어, "의로운 자(the just)"의 반대말은 "사악한 자(the wicked)"일까요?

질문 4에 답변: 결코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i) 의인(의로운 자, the just),
(ii) 의롭지 않은자(불의로운 자, the unjust),
(iii) 악인 (악한 자, 사악한 자, the wicked),
 
이들 세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상당히 인접한(adjacent) 성경 구절들이 있는지부터 먼저 알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만약에 있다면, 이들 세 단어의 뜻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음의 구약 성경 본분 중에 이들 세 단어들이 상당히 인접하여 모두 사용되고 있습니다:
 
시편 37
지혜서 10,3-7
지혜서 12,9-12
욥기 27,7.17
 
참고: 또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038에는 "의인"과 "의롭지 않은 자(불의로운 자)"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039항에서는 "악인(악한 자, 사악한 자)" 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출처: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038항으로 바로가기.. (클릭하십시요)

참고 일부 개신교측에서는, 이분법적으로 설명하여서는 안되는 경우에도, "의로운 자" 아니면 "사악한 자"로 거의 억지 수준의 이분법적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가끔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일부 개신교측에서와 같이 사람이 죽으면 "천당 아니면 지옥이다"라는 주장은, "의로운 자 아니면 사악한 자"라는 근본적으로 비성경적인 잘못된 이분법에 근거한 주장입니다.
 
이에 반하여,
 
죽자마자 있게 되는 사심판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살아 있을 동안의 행실에 따라, "천당, 연옥, 아니면 지옥이다"가 결정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가톨릭 교회의 "연옥 교리"는, 논리적으로, 지금 말씀드리고 있는 "의로운 자, 의롭지 않은 자, 아니면 사악한 자"로 구분하는 삼분법적 논리 전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참고: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의로운 자가 차지하는 곳은 천상교회,

의롭지 않은 자가 죽은 후에 천상 교회에 들어가기 전에 당분간 머무르는 곳은 연옥교회,
 
사악한 자가 죽은 후에 떨어지는, 천상교회 및 지상교회 구성원들과의 통공이 끊어진, 곳은 지옥
 
2-4. 그러면 다른 한편으로,

질문 5: "의롭지 않은 자(the unjust)"는 누구일까요?

질문 5에 대한 답변: "하느님께 때로는 순종하고 때로는 순종하지 않는 자"가 바로 "의롭지 않은 자"입니다.
 
예를 들어, 하느님의 사람에 대한 정의인 하느님 사랑을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나누어 주시려는, 교회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 및 가르침들에 대하여. 자신 개인의 판단 기준에 근거하여,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은 받아들이고 협조하나, 그러나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협조하지 않는 자들은 "의롭지 않은 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의롭지 않은 상태"로 죽게 된 자의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는 사심판의 결과, 연옥(purgatory)에 가서 여죄와 잠벌에 대한 정화를 거친 후에 비로소 천상교회에 올라가 하느님을 뵈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에 반하여,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회개하지 않은 상태로 죽는 "사악한 자"는 죽는 즉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는 사심판의 결과로, 지옥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3.
이상, 구약 성경에 있어, "의로운 자(the just)", "의롭지 않은 자(the unjust)" , 그리고 "사악한 자(the wicked)" 라는 성경 용어들의 정의들과 이들을 비교/검토해 보았습니다.

3-1. (중간 결론 1)
위의 제1항제2항의 내용으로부터, 우리는 사울(회심 이전의 사도 바오로)이, 이들 용어들의 정의에 따라, 결코 "사악한 자(the wicked)"가 아니었음을, 쉽게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이 결론의 도출은 아래의 제4항에서 훨씬 더 자세하게 다시 다루고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사도행전 제9장에 기록된 내용을 읽고서, 회심하기 전의 사도 바오로가, "의롭지 않은 자"도 아니고, "악인(즉, 사악한 자)"이었다고 이분법적으로 추측/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심각한 "논리적 비약"이 아니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3-2. 지금부터는, 왜 사울(회심 이전의 사도 바오로)이, 위의 제2항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은, "의롭지 않은 자"가 아니고"의로운 자"인지에 대하여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회심 이전에 "의로운 자"였는지를 이성적으로 추론하기 위하여서는, 예수님의 공생활 시기에, 유다인들의 전통(구약 성경 포함) 안에서 "어떤 자가 의롭다고 불리는지", 즉 "어떤 자가 하느님께서 보실 때에 의로운 자"인지의 정의(definition)를 먼저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이미 위의 제2항에서 고찰하였는데, 이제 이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정의(definition)는, 그리스도교에서 가르치는 "의로운 자(the just)"를 정의하는(define) 데에 대단히 중요한 구성 요소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심을 참 진리로 믿음"과 결합되어, 소위 말하는, 의화(justification, 의롭게 됨)라는 완미한 정의(perfect definition)로 발전하게 되는, 대단히 중요한 참인 명제입니다.

게시자 주: 지금 말씀드린 바에 대하 더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주소에 있는 글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바쁘신 분들은, 클릭하신 후에, 제3항 결론만을 읽으셔도 됩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799.htm <----- 또한 필독 권유

3-2-1. 이를 위하여, 우선적으로 히브리서 제11장을 잘 읽고 제대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주석 성경"의 히브리서 제11장에 대한 주석 전문입니다:
 
(발췌 시작)
믿음과 그에 따른 인정(認定)을 강조하는 1-3절은 이어서 다루는 구약 성경의 모든 이야기에 적용되는 원칙을 제시한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 8,24-25; 1코린 13,12; 2코린 4,18에서 하듯이, 히브리서 필자도 여기에서 현실 곧 실현된 것과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을 대립시킨다. 7절에 나오는 노아는 보지 않고도 아는 믿음으로 행동하는 첫 번째 본보기가 된다.
(이상, 발췌 끝).
 
3-2-2. 이제, 두 번째로,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4,3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으니, 하느님께서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라는 성경 말씀(창세기 15,6)을 직접 인용하고 있습니다.
 
3-2-3. 세 번째로, 창세기 15,6에서 언급되고 있는 "아브라함이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전해 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완전하게 복종/순종하면서 그리고 또한 자신이 전해 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무조건적으로 충만하게 행동으로 실천하는 바로 그러한 믿음만"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을 포함하여, 히브리서 제11장에서 열거되고 있는 구약 성경의 인물들이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을 포함하여, 신약 성경에서 "의로운 자/사람"로 당시의 유다인들에 의하여 불리었던 분들은 모두 그러하였습니다.
 
3-3. "바로 이러한 유일한 의로움"에 대하여, 예수님 공생활 당시의 유다인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며, 예를 들어, 성모 마리아께서 의로우신 이유, 그리고 성 요셉께서 의로운 사람으로 신약 성경의 해당 경전의 인간 저자들에 의하여 불리는 이유도 이제 충분하게 그리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3-4. 그리고 지금 말씀드린, 그리고, 우리 각자가 자신 고유의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바로 이 유일한 믿음"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4-149항에서 가르치고 있는, "하느님께서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시는 바로 그 믿음" 입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c144.htm

3-5. (중간 결론 2)
따라서, 지금까지 고찰한 바로부터 우리는, 사울(즉, 회심 이전의 사도 바오로)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회심(conversion)을 당하기 전에, 바리사이로서 지금 말씀드린 "바로 그 유일한 믿음"을 충실하게 실천해 왔기에, 구약 성경과 신약 네 복음서들의 본문에서 불리는 다른 "의로운 자"들처럼, "의로운 자"였습니다.

4. 지금부터는, 위의 제3-1항 혹은 제3-5항에서의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는 분들을 위하여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 보도록 하겠습니다.

4-1. 우선, 예수님께서도 마태오 복음서 5,20에서,

(마태오 복음서 5,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보시다시피, 예수님께서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부인하지 않고 계심, 즉 인정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십계명 자체를 부인하셨던가요? 즉 인정하지 않으셨던가요? 십계명이 (i) 하느님에 대한(처음 세 개의 계명들) 그리고 (ii) 이웃에 대한 (나머지 일곱 계명들) 정의(의로움, justices)들을 실제 생활하명서 각각 어떻게 실천하여야 한다고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명령하신 바임을 반드시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십계명을 준수하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예(example)에서 처럼, 구약의 시대나 신약의 시대나 할 것 없이,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바로 그 의로움"을 하느님에 의하여 인정받을 것입니다.
(이상, 예(example) 끝)
-----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의로움"이란 당연히 당시의 유다인들도 잘 알고 있었던, 제가 위에서 말씀드린, "바로 그 의로움"을 말합니다.
 즉, 율법이 의로움을 얻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다고 잘못 생각하여, "율법에 충실하기만 하면 얻게 된다는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이 모세를 통하여 주어지기 약430년 전에(갈아티아 3,17 참조), 즉 율법이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주어지기 전에, 이미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던 아브라함의 "바로 그 의로움"을 말합니다.

참고: 마태오 복음서 5,20은,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인정하셨다고 명기하고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054항에서, 또한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을 설교하였다고 언급할 때에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본문 중에 발췌 인용되고 있습니다. 

게시자 주:
여기를 클릭하면, 이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1987년 10월 14일자 교리 교육 일반 알현 강론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서 23,3에서,

(마태오 복음서 23,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은 심지어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바리사이들의 가르침 안에도 "구약 시대의 의로움"이 담겨 있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구약 시대의 의로움"이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시지 않았던 어떤 특정 개념이 아니라", 아래의 제5항에서 다루고 있는,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던 부족한 의로움/정의(imperfect righteousness/justice)"이었음가톨릭 교회 제2054항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참고하십시오.
(이상, 참고 끝).

4-2. 다른 한편으로, 혹자는 "사울은 회심 이전에 선행을 베푼 예가 없다. 오히려 박해 등의 온갖 악행만 저질렀다." 라는 주장을 하는데, 이 주장은, 거짓(false) 주장이 명백한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4-2-1. 첫 번째로, "사울이 자신의 회심 이전에, 선행을 베푼 예가 없다"는 주장, 그리고 "사울이 자신의 회심 이전에, 온갖 악행만을 저질렀다"는 등의 주장은, 성경 본문 중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그리고 더 나아가, 성경 본문으로부터 이성적으로 추론(reasoning)할 수도 없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주장은 극히 개인적 사견이라는 생각이며, 그리고 성경적 근거가 없기에, 거짓(false) 주장이라는 생각입니다.

4-2-2. 두 번째로,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예루살렘 최고 의회의 의원인) 가말리엘의 제자인, 바리사이들 중의 바리사이로 알려져 있는(사도행전 22,3 참조), 사울(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회심을 당한 이후 어느 시점부터 "사도 바오로"로 불림)은, 그 당시의 바리사이들처럼, 비록 하느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바로 그러한 선행(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게 된 선행)은 아닐 수 있을지라도, 모세 율법에 따른 선행을 충실히 하였기에(필리피서 3,6 필히 참조 할 것), 위의 주장 자체는 설득력이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4-2-3. 세 번째로, 사실 사도행전 등에 기록된 성경 말씀에 의하면, 사울의 회심(conversion)은 사울 자신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개시되고 또 진행된 것이므로, 만약에 사울이 자신의 회심 이전에 온갖 악행만을 저질렀던 자이라면, 그러한 자는 "사악한 자(the wicked)"이라고 구약 성경 시절에 이미 불리는 자인데, 만약에 사울이 "사악한 자"였더라면, 그러한 바는, 성경 본문에 의하면, 사울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을 듣지도 않고 사울의 회심을 주도하셨던,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의지의 행사라는 참진리(즉, 계시 진리)부합되지 않는 주장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는, 정의(definition)에 의하여, 진리(truth)란 마음과 실제의 부합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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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여기를 클릭하면, 가톨릭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치는 "진리(truth, 참)"정의(definition)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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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오로는
이와 관련하여
에페소 1,4-5에서, 자신의 말로써,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발췌 시작)
(에페소 1,4-5)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상, 발췌 끝).

달리 말하여,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게 되는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의 죄들에 대하여 회개를 하면서 하느님의 용서를 받지 않으면 지옥(즉, 게헤나)로 가는 자, 즉 사울은 회심 이전에도 "사악한 자(the wicked, 악한 자, 악인)"가 결코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3. 또 다른 한편으로, 혹자는 "사울(회심 이전의 사도 바오로)가 의로운 자였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서, 사울이 의로운 자였다면 또한 "예수님을 못박은 사람들도 의로운자였다"는 주장을 펼칩니다만. 이러한 주장은, 성경 내용을 대단히 잘못 이해하고 있을 때나 어쩌면 가능한, 거짓(false) 주장입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4-3-1. 예수님을 죽이자고 음모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질투한 자들이기에, 적어도, 자신들의 자유의지(free will)의 개입과 함께,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기로 마음을 먹는 순간부터는, 예수님께서도 간접적으로 인정하셨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가진 자들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나중에 사도 바오로로 불림)이 그리스도 사람들을 박해한 것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또 실제로 십자가에 매달리도록 추진하였던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과 당신의 제자들을 질투하였던 것이 아니라, "시기(jealousy)"와 그 어원이 동일한 단어인 "zeal" 가 사용되는, "하느님에 대한 열정(zeal for God)" 때문이었기에, 위의 제2항에서 고찰한 바에서처럼, 사울은 예수님께서 간접적으로 인정하셨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계속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이어지는 글에저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4-3-2.
하긴, 지금 드린 이 말씀도, "시기(jealousy)""질투(envy)"의 신학적 개념상의 차이점을 모르는 분들에게야 위의 제4-3-1항에서의 설명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습니다:

"질투는 "시기"에 포함됩니다. 즉, "시기"하는 자들 중에서만 "질투"하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말본이 아닌)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259항에서, "분노(anger)"와 함께 거명되면서 "원죄의 결과"라고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질투(envy)""칠죄종(seven capital sins)들" 중의 한 개인, 대죄(mortal sin)입니다. 

4-3-3. 사울(회심 이전의 사도 바오로)가 그리스도교 사람들의 박해에 가담하였던 것은, 바리사이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던 그가 알고 있었던 하느님에 대한 열정 때문이었기에, 따라서, 소위 말하는, 하느님을 거스러는 죄인줄 모르고 행한 행동이었기에, 무엇이 죄가 되는지를 알려주었던 율법을 적용하였을 때에 죄가 성립하지 않았던 당시의 기준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그 이후의 시대의 죄의 성립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 (즉, 자신이 행하려고 하는 바가 죄임을 알면서도 자신의 자유의지를 발동하여 실행하는 순간에 즉시 죄가 성립함)을 적용하더라도, 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어떤 행위가 죄인지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발췌문[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집 제392항]을 잘 읽어 보십시오:

(발췌 시작)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41.htm 

CCCC 392. 무엇이 죄입니까?
CCC 1849-1851, 1871-1872

“영원한 하느님의 법(Law)에 반하는 말, 행위, 혹은 욕구”가 죄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죄(sin)는 하느님의 사랑(love)(*)에 불순종하여 하느님께 맞서는 거스르는 행위(offense)입니다. 죄는 인간의 본성을 해치며 인간의 연대성(human solidarity)을 손상시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수난(passion)에서 죄의 심각성을 완전히 드러내셨으며 그리고 당신의 자비로써 죄를 이기셨습니다(overcame)(엮은이 번역).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a_heart_c1849.htm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b_ot_9_c184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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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하느님의 사랑"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에 있으니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86.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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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CC 391.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뜻합니까?
CCC 1846-1848, 1870

하느님의 자비(mercy)를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잘못들을 시인하고 우리의 죄들에 대하여 회개하는 것을 뜻합니다(implique). 하느님 스스로 당신의 거룩하신 말씀과 당신의 성령으로써 우리의 죄들에 대하여 털어놓게 하시며(lays bare) 우리에게 양심에 기인하는 진리(truth of conscience)와 용서에서 비롯되는 희망(hope of forgiveness)을 주십니다(엮은이 번역).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a_heart_c1846.htm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b_ot_9_c1846.htm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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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서 11,11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서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다른 한편으로, 다음은 사도행전 23,9 전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이 사도 바오로에게서 아무런 찰못을 찾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즉 그것도 최고 의회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은 바리사이들이, 이미 그리스도교로 개종한(사도행전 9,18) 사울(즉, 회심이전의 사도 바오로)이 여전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지니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발췌 시작)
(사도행전 23,9) 그래서 큰 소란이 벌어졌는데, 바리사이파에서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일어나 강력히 항의하였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면 어떻게 할 셈입니까?”
(이상, 발췌 끝)

사실 위의 바리사이파에 속하는 율법 학자 몇 사람이 하였던 답변은, 사울(회심 이전의 사도 바오로)의 스승인 가말리엘이 역시 최고 의회에서 하였던 사도행전 5,38-40에서 하였던 다음의 답변과 그 내용에 있어 동일한 답변입니다:

(발췌 시작)
(사도행전 5,38-40) "그래서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말리엘의 말에 수긍하고, 사도들을 불러들여 매질한 다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지시하고서는 놓아주었다. 
(이상, 발췌 끝).

즉, 가말리엘최고 의회에서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에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이 있음을 증언하였고, 또 이 증언은 최고 의회에 의하여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면, 당시의 약 70명의 유다교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최고 의회의 의원들 중에는 일부 바리사이들을 포함하여,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서 5,20에서 인정하셨던 바로 그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지니고 있었던 자들이 상당수 있었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구약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의 의로움이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부인하지 않는 분들이라면,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셨던(마태오 복음서 5,20), 그리고 사울(회심 이전의 사도 바오로)지녔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 을 부인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4-5. 또 다른 한편으로,

사울의 회심 과정과 그 이후의 그의 일생을 정밀하게 들여다 보면 다음을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i) 사울은 이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회심을 당하기 전에, 바리사이들 중의 바리사이였기에, 우선적으로, 아브라함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그의 믿음이 하느님에 의하여 의로움으로 인정받았는지를 잘 알고 있었으며, 그리고 바로 이 "구약 시대의 의로움""정의(definition)"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기준으로서 이미 받아들여 수용하였던 바리사이였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ii) 자기 자신의 눈과 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격하자, 즉시 자신에게 전달된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구하셨던 회심(conversion)에 적극적으로 화답하여 참여하였던 자였기에, 바로 이러한 그의 실천 행위가 그가 "구약 시대의 의로움""정의(definition)"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기준으로서 이미 받아들여 수용하였던 바리사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시자 주: 사도행전 5,38-40에서 등장하는 사도 바오로의 스승인, 바리사이들의 스승인, 가말리엘 그리고 사도행전 23,9에 등장하는 율법 학자들성향/태도에 따르면, 만약에 이들이, 사울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였더라면, 이들 또한 사울처럼 분명히 회심을 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사울과 마찬가지로, "구약 성경의 의로움"의 "정의(definition)"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기준으로서 이미 받아들여 수용하였던 유다인들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당시에 그들이 적용 중이던 율법의 잣대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주장들을 펼치는 "예수님의 사도들"과 그리고, 심지어 바로 이 주장들을 수용하였기에 개종까지 한 바리사이들 중의 바리사이인, "사도 바오로"를, 각각 최고 의회에서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iii)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였던 이방인들의 선교 사명에 대단히 충실하였던 자였기에, "구약 시대의 의로움"의 "정의(definition)"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는 기준으로서 이미 받아들여 수용하였던 바리사이였음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구약 시대의 의로움"의 "정의(definition)" 자체를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활 중에 처음으로 당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것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자신이 회심을 당하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심을 알게 되었기에,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구약 시대의 의로움"의 "정의(definition)"에 따라 대단히 철저하게 실천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iv)
사도행전과 사도 바오로의 서간문들에 기록된 사건들은, 그리스도교가 유다교로부터 완전하게 분리되기 전에 발생한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기에, 지금의 입장이 아닌 당시의 정황 안에서는, 사도행전 제9장에 기록된 사울의 회심과 세례를 읽고서, 사울이 유다교로부터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고 뚜렷하게 선을 그어면서 말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은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성 바오로 대성당 홈페이지에서 사울(회심 이전의 사도 바오로)의 회심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부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또한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san_paolo_conversione.htm

(발췌 시작)
The radical “conversion” of Saul did not represent for him a change of religion: he felt more than ever before to be a Jew, because the “God of our Fathers” was sending him to spread the Gospel. The evangelizer of the pagans continued to preach to the Jews as much as he could, up to his final appeal to Rome. Paul’s conversion and baptism meant that he had discovered his true and proper place in the life of Israel.

사울(Saul)의 "급진적인" 회심은 다음과 같이 그에게 있어 개종(a change of religion)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전보다 훨씬 더 유다인이라고 느꼈는데, 왜냐하면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God of our Fathers)"이 복음을 퍼뜨리라고 그를 파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2,14; 24,14; 갈라티아 1,14). 이교도인들에 대한 복음 설교가인 그는, 로마에서 그의 최후의 상소(appeal)에 이르기까지, 그가 할 수 있는 한 많이 유다인들에게 설교하는 것을 계속하였습니다. 바오로의 회심과 세례는 이스라엘의 삶 안에서 자신의 참된 그리고 고유한 자리를 그가 이미 발견하였음을 뜻하였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그리스도교가 유다교에서 분리된 시점은 기원후 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대성전의 파괴 이후에, 기원후 약85년쯤에 팔레스티나의 얌니아 지역에서 팔레스티나 지역의 라삐들의 모임인, 소위 말하는, "얌니아 회의" 이후임을 기억하도록 하라. 그리고 여기를 클릭하면, 이에 대한 더 자세한 글을 읽을 수 있다.


(이 글의 결론)
따라서, 위의 (i), (ii), (iii), 그리고 (iv)로부터 우리는 사울(회심 이전의 사도 바오로)가, 회심 이전에 이미
 "구약 성경의 의로움"의 정의(definition)를 지녔던 자,"의로운 자"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4-6. 그러면,

질문 6: 위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으로 불리는 이 의로움은, 예를 들어, 또한 구약 성경 어디에서 어떻게 언급되고 있을까요?

질문 6에 대한 답변: 이사야서에는, 소위 말하는, 네 편의 고통 받는 종의 노래가 있는데 그 첫 번째인 이사야서 42,1-4.6-6제6절에서 입니다.

다음은 나해 주님 세례 축일(즉, 연중 제1주일) 제1독서(이사야 42,1-4.6-7)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가해-I"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에 주어진 해설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28.htm

(발췌 시작)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의로움으로’으로 번역된 표현은 NAB 영어 성경에서 ‘for the victory of justice’ 로 번역되었는데,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한 단어이다. 이 한 단어는 ‘나의 구원 계획에 순종함으로써(conformable to my plan of salvation)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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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여기서 말하는 ‘의로움’은 하느님 보시기에 사람이 의롭게 됨(justified)을 뜻하는데 구약 성경의  한 구절이므로, 바로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에 대한 순종(obedience of faith)’을 말한다. 따라서 이 의로움은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에 대한 복종’을 뜻한다.
     
주: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제 144항에 정의된 ‘믿음에 대한 복종(obedience of faith)’, 즉 “자신이 들은 하느님 말씀에 기꺼이 순종”: 믿음에 대한 복종[‘복종하다’라는 라틴어 oboedire는 ob(에게)와 audire(듣다)의 합성어이다]이란 자신이 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기꺼이 순종하는 것이며, 이는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그 말씀이 진리임을 보증하시기 때문이다. 성서는 아브라함을 이러한 복종의 모범으로 제시하며, 동정 마리아께서는 이를 가장 완미하게 실현하셨다.

참고 자료:
http://ch.catholic.or.kr/pundang/4/c144.htm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144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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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이 구절은 최초의 사람을 창조하는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창세기 2,7). 이 단어는 자신의 진흙을 조심스럽게 빚는 옹기장이에 의하여 또한 사용된다(이사야 45,9; 64,8; 예레미야 18,6; 로마 9,21).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하느님의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이스라엘은 나라들 중에 맏배(firstborn)이며, 장자로서 본(example)을 보여야 하고, 또 다른 나라들을 인도하여야 한다.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그들을 어둠으로부터 인도하기 위하여.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사람들은 죄로부터 치유되고 또 자유롭게 되기 전에 자신들이 눈이 멀었고 또 죄의 노예임을 깨달아야 한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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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에 대한 요약)
"구약 시대의 의로움"
정의(definition)가 무엇인지, 그리고 사울(회심 이전의 사도 바오로)이 이 의로움을 만족시켰던 자임에 대하여 성경의 근거 구절들을 함께 고찰하였습니다.
(이상, 요약 끝).

여기까지가, 이 글의 제목에 대한 답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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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미 말씀드렸듯이, "구약 시대의 의로움""부족한 의로움"이었기에, "구약 시대의 의로움"이, 하느님께서 보실 때에 어떠한 의미로서, "부족한 의로움"인지를 또한 고찰하여야 하는데, 이 고찰은 이어지는 아래의 제5장에서 다루고 있으며, 가톨릭 보편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인 "통공 교의""그리스도교 세례"와 하느님과의 화해의 성사인 "고해성사"에 의하여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가톨릭 신자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이 항에서는 "구약 시대의 의로움"과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구속, 그리고 그리스도교 세례와 관련하여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5-1.

질문 7: 구약의 시대에 하느님께서 피조물의 의로움을 인정해 주실 때에, 인정 받는 바로 그 의로움이,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인 "무한한 그리고 완미한 의로움(infinite and perfect righteousness/justice)" 일까요, 아니면 "유한하고 그리고 완미하지 않은 [즉, 완전하지 않거나 혹은 결여가 있는 (즉 충만하지 않은)] 의로움(finite and imperfect righteousness/justice, 즉 부족한 의로움)"일까요?

질문 7에 대한 답변: 천주의 성모 마리아를 제외하고, 하느님에 의하여 인정 받는 의로움이 어느 특정 피조물에 있다고 한다면, 하느님 보실 때에, 여전히 개인에 따라 정도에 차이가 있는, "부족한 의로움(imperfect righteousness/justice)"이라고 답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족한 의로움"을 가진 자들을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자"들로 인정해 주셨음을 반드시 기억하도록 하십시오. 이는, 예를 들어, 연옥 영혼들도 단련 후에 천국(하늘, 천당, heaven)으로 들어간다고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심지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다음은 예수님의 산상 설교(마태오 복음서 제5-7장)에 표함된 마태오 복음서 5,17-20 전문입니다:

(발췌 시작)
예수님과 율법

17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19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20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상, 발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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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예수님의 공생활 3년 중의 가르침들은 바로 이 "부족한 의로움""완미한 의로움"으로 완성시키는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적어도 16세기 중반에 개최되었던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가톨릭 보편 교회의 가르침의 범주 내에서 말씀드리는, 위의 제3-2항에서 이미 말씀드린 바에 대한 더 구체적인 설명입니다:

즉, 그리스도교 세례 예식에서, 구약 시대의 바로 이 "부족한 의로움(imperfect righteousness/justice)"은  

(i) "성삼위 하느님을 믿는다"사도 신경(세례 신경) 신앙 고백과 결합되어, 드디어,

(ii) 성령(Holy Spirit)에 의한 기름부음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셨던 바로 그 세례와 동일한 세례를 받기 때문에 유일하게 형성되는, 예수 그리스도와 세례를 받는 자 사이의 통공(communion)의 결과, 

(iii) "무한한 그리고 완미한 의로움(infinite and perfect righteousness/justice)"을 지니신, 하느님이신 성자(Son of God)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구속 공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당신의 성혈(Blood)이 바로 이 통공을 통하여 세례를 받는 자의 영혼(soul)에 주입되어(infused), 그 결과 세례를 받는 자는 원죄(original sin)와 본죄(personal sins)의 완미한 사함(perfect remission)을 현실태적으로(actually) 받게 되고, 그리고 

(iv) 하느님이신 성부와 하느님이신 성자로부터 나오시는 하느님이신 성령(Holy Spirit)에 의하여 세례를 받는 자의 영혼에 주입되는(infused) 초자연적 선물들인 성화 은총(sanctifying grace)과 [신덕(faith, 믿음), 애덕(love,charity, caritas, 사랑), 망덕(hope, 희망)으로 이루어진 (1코린토 13,1-13 참조)] 향주삼덕(three theological virtues)들에 의하여,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는 자가 비로소 처음으로 소유하게 되는, 그리고

(v) 성삼위 하느님께서 완미하게 인정해주시는,

"유한한 그리고 완미한 의로움(finite and pefect righteousness/justice)"이라는 "완미한 정의(perfect definition)", 즉, "의화(justification, 의롭게 됨)가 세례를 받는 자에게 현실태적으로(actually) 발생하게 됨을 또한 반드시 기억하도록 하십시오.

(vi) 그리고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은 자가 혹시라도 자신의 잘못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와의 통공(communion, 하나 됨, 친교)의 상태를 상실 당하였을 때에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련해 주신 (마태오 복음서 16,19; 요한 복음서 20,23) 하느님과의 화해의 성사인 "고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교 세례시에 세례를 받는 자에게,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공로에 의하여, 속량(redemption, 구속)의 과정을 거쳐 마련되었 바로 그 은총의 지위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통공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5-2. 따라서, 지금까지 말씀드린 바에 의하면, "구약 시대의 의로운 자""신약 시대의 의롭지 않은 자"는 동일한 자로 간주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우선적으로, 적용되는 기준(norm, standard)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즉, 구약의 시대에는 "부족한 의로움(imperfect righteousness/justice)"을 인정받았던 "아브라함의 의로움"이 이스라엘의 자손들의 "의로움"의 표준(norm, standard)이었는데, 신약의 시대에는 "무한한 그리고 완미한 의로움(infinite and perfect righteousness/justice)"을 지니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이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의로움의 표준(norm, standard)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자신이 전해 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하여 자신이 취사 선택하여 순종하는 자"를 말하는 "의롭지 않은 자"는, 분명히, "자신이 전해 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자", 즉 "구약 시대의 의로움을 가진 자", 즉 "부족한 의로움을 가진 자"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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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지금 말씀드린 바, 즉 정의[justice, 의로움(righteousness)]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예를 들어, 여기를 클릭하면 가지게 되는 새 화면에서 제2-2항을 읽도록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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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다른 한편으로, "구약 시대의 의로운 자"들이란 살아가면서 전혀 죄를 짓지 않았던 자들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속죄 제물을 바치는 제사들에 관하여 구약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고 유다인들이 충실하게 이 제사들을 지키는 경우들도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심지어 해마다 "속죄의 날(the day of atonement)"로 불리는 날을 특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제사를 아무리 하느님께 바쳐도 정작에, 하느님 보실 때에, 그들의 죄가 제거되지 않았음에 있으며, 바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신 분이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셨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예를 들어, 히브리서 제9-10장을 반드시 읽도록 하십시오.

(제5장 요약)
이상, 제5항에서는 "구약 시대의 의로움"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신약 시대의 의로움"으로 완성되는 지, 그리고 우리가 어떠한 과정을 거침으로써 이렇게 완성된 의로움을 가질 수 있게 되는 지에 대하여 함께 고찰하였습니다.
(이상 요약 끝)

질문: 혹시라도, 하느님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을 하는 신약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구약의 시대의 "부족한 의로움"을 여전히 "의화(justification, 의롭게 됨)"의 기준(norm, standard)으로 알고 있는 신앙 생활을 해 온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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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2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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