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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분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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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생 [vnfmsrnfna] 쪽지 캡슐

2003-02-08 ㅣ No.300

讚美예수

 

兄弟님 人間은 고민을 하고 살아야 만하는 갈대와 같은 存在라고 저는 생각이 듭니다. 마르코 14:32-42 게세마니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苦惱(고뇌)가 생각이 남니다. 예수님의 고뇌와 제자들의 고뇌가 너무나도 잘 들어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苦難의  잔을 멀리 해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계시고  3명의 親弟子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기도를 해달라고 하는데도 그만 자고만 있습니다.  主 曰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구나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3 名의제자의 고민은 몸(肉身)이 말을 듣지 않는 고민이 있습니다. 兄弟님 형제님도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 心情이 형제님의 메일을 보면 생각이 납니다. 형제님 형제님이 기도를 하려고 하는 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민하는 모습은 너무나도 우리 信仰人들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너무나도 흔들리는 인간의 모습을 볼수가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은 아무도 없습니다.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고민하지 않는 신앙인은 정말로 이상한 신앙인입니다. 非信仰人들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고민을 합니다. 하물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 그리고 이웃을 위해서 고민하지 않는 다는 것은 정말로 너무나도 이상하지요.

聖베드로 사도도 예수님을 豪言壯談 속에서 3번이나 否認한(마르코14:66-72) 사실은 얼마나 하느님께로 향한  우리의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다시 하느님께 로 向하는 것이지요.

유다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회개를 못하였습니다. 실망한 나머지 자살을 했습니다. 실망 낙담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았습을 알수 있습니다.

형제님 예수님께서는요 겨자씨 만한 믿음(마태오17:20)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요.  고작 겨자씨지요.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聖使徒들도 흔들리고 쓰러지는 모습. 바로 우리자신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 겠어요.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물위를 걸으신후 이리오너라 하시면서 베드로 사도를 부르자 베드로 사도께서는 主님께로 가느데 풍덩 물에 빠지시지요(마태오14:30). 형제님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는  진정한  우리의 모습입니다.

舊約에 신앙의 아버지  아브란함도 아들 이삭을 산제물로 바칠때에 고민하는 모습, 성모님도 아들을 十字架에 斷末魔(단말마) 고통중에 잃어버리고 泣幽咽(읍유열)하면서 고민하는 모습(루가 2:41-52) 强心臟도 견디기 어려운데  말이에요,

아드님 예수도 쓸개를 탄 포도주를 거부하시고 十字架刑을 맨 정신으로 聖父께서 주신 고통을 받으신 예수님, 성부께서 주신 고통을 성모님께서도 소리없는 泣幽咽속에 母子가 고통을 하느님을 위해서 인내 감당한 모습, 하느님의 어머님도 흔들리는 고통,아들을 죽여야만 하는 고통, 너무나도 聖父이신 하느님을 怨望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順命이라는 殉敎를 하신 것입니다.  

兄弟님 고민을 하지 않는 신앙인,하느님의 視角으로 이 세상을 보려고 하지 않는 신앙인은 이미 하느님께로 가는 視角이

올바르지 않는 신앙인입니다.

많은 것을 바라고 원하는 마음보다 日常生活 즉 日常道안에서 하느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발견하고 그분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 큰일보다 작은일에 충실하는 모습, 저는 신학교에 진학에 좌절되고 나서 마음을 진정시키는 중에 小花데레서 聖女의 自敍傳에서 작은일에 충실한 모습,日常道속에서 성녀가 되신 그분의 모습은 오늘날 現代를 살아가는 신앙인이 바로 배워야할 점이 너무나도 많다고 생각 됩니다.한 번 읽어 보셔요.  형제님 하느님은 全能하셔요. 그리고요 우리가 그분께로 향하는 마음을 너무나도 중요하게 여기셔요. 하느님을 위해서 한번도 善한일을 하지 않은 예수님 십자가 고통중에 右盜도 그분을 향한 마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루가23;41-43)

너무나도 이상하지요.  

인간은 고민과 고통이 없다면 정말로 하느님 大殿에  나갈수가 없습니다.  아빌라의 大데레사 聖女의 기도는 "主님 저에게 고통을 주셔요 아니면 죽움을 주셔요" 참 정신나간 기도지요. 고통중에 주님을 만나는 길을 완전히 터득하신 분이시지요.

우리가  아주 어려울 때 그리고 바로 그 때가 주님을 맞을 좋은 기회임에는 두 말할 나위가 없지요.

  小花데레사 성녀는 갈멜의 封鎖修道院에서 똑 같이 기도하고 똑 같이 일하는 共同體生活을 하였습니다. 그분은 日常道에서 하느님께 자신을 삶을 봉헌하는 데 그 누구보다도 앞서 있었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日常道속에서 완전히 神人一化의  경지에 도달하셨지요. 그리고 그분이 그렇게 성덕이 뛰어난 분인 줄을 잘알지 못하였답니다. 형제님 外形的인 삶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도에서 어떻게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받아 드리리느냐에 달려 있음을 저는 말씀 드릴수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20:1-16에 달란트의 比喩에서 인간의 생각한 것과 하느님께 서 생각하신 것이 아주 判異하게 다름을 우리는 알수 있습니다.

고민하지 마셔요 우리는 하느님을 만날 때  까지 고민하지요.

저도 형제님도요. 우리가 앞으로 50년후에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그 누가 장담하겠어요.

형제님 傳道書를 읽어 보셔요. 그리고  즐겁게 사셔요.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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