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그리스도의 평화란? - 창세 14,18; 이사야 9,5(6); 루카 2,14; 요한 14,27-31ㄱ; 에페소 2,14-17 [_peace] 1402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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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2 ㅣ No.1402


질문:

복음에서 하느님의 평화가 우리가 사는 세속의 평화와 다르다고 하는데요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요?

--------------------

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답변: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1-1.
"새 번역 성경"의, 네 복음서들의 본문 중에는, 글자 그대로의, 

"하느님의 평화"

라는 표현은 없는 것으로 파악이 되고 있습니다.

게시자 주: 다만,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가해 연중 제27주일 제2독서(필리피 4,6-9)에 포함되는 필리피서 4,7에서 "하느님의 평화" 라는 표현이 한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필자의 "... 성경공부 해설서" 이외에, 이 표현의 의미에 대한 주석은, "주석 성경", NAB을 포함하여, 필자가 평소에 들여다보는 영어본 성경들의 주석들에 없습니다. 

1-2. 다른 한편으로, 다음에 발췌 인용한 요한 복음서 14,27에는 "내 평화", 즉, "그리스도의 평화(즉,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 혹은 "예수님의 평화(즉,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 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발췌 시작)
[요한 복음서 14,27]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이상, 발췌 끝).

1-3. 그리고, 요한 복음서 14,27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바로 이 "그리스도의 평화(즉,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 를 언급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은 콜로새서 3,15입니다:

(발췌 시작)
[콜로새 3,15]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또한 한 몸 안에서 이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이상, 발췌 끝).

그리고 다음은 에페소서 6,23 전문입니다:

(발췌 시작)
[에페소 6,23]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평화가, 그리고 믿음과 더불어 사랑이 형제들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이상 발췌 끝).

     이 글에서는, 예수님께서 요한 복음서 14,27에서 또한 직접 "당신께서 주시는 평화"가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신, 바로 이 "그리스도의 평화(즉,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 의 의미(meaning)를 함께 학습하도록 하겠습니다.

2.
우선적으로, "그리스도의 평화"에서 언급되고 있는 "평화(peace, pax, shalom)"의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1. 다음은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평화(平和)"에 대한 설명입니다:

출처: http://124.137.201.223/search/View.jsp

(발췌 시작)
평화(平和)

「명사」
「1」평온하고 화목함.
「2」전쟁, 분쟁 또는 일체의 갈등이 없이 평온함. 또는 그런 상태.
-----

평온(平穩)

「명사」
조용하고 평안함.
-----

평안(平安)

「명사」
걱정이나 탈이 없음. 또는 무사히 잘 있음. ≒안평(安平)ㆍ평강01(平康).
-----

화목(和睦)

「명사」
서로 뜻이 맞고 정다움. ≒옹화(雍和)ㆍ집목(輯睦).
(이상, 발췌 끝)

질문 1: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위의 단어들에 대한 설명을 읽고서 "평화"의 원인(cause)이 무엇이고 그리고 실제로 언제(when) 우리가 그러한 상태를 가지게 되는지 알 수 있는지요?

질문 1에 대한 답변: 알 수 없습니다.

게시자 주: "새 번역 성경"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단어인 "평화"는, 라틴어로 "pax"로 번역이 되고 그리고 영어로 "peace"로 번역이 되는, 히브리어 단어인 "shalom"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기존에 사용해온 한자단어인 "평화(平和)"차용한 번역 용어이므로, 성경 본문에서의 "평화" 라는 단어의 의미는 위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주어진 의미와 동일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공생활 초기에 이 땅 위에 처음으로 개시하신 "하느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통상적으로 "정의(justice), 진리(truth), 사랑(love), 기쁨(joy), 그리고 평화(peace)의 나라"라고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2-1-1. 정의(justice)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justice_concept_error.htm

2-1-2. 진리(truth)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def_of_truth.htm

2-1-3. 사랑(love)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concept_of_love.htm

2-1-4. 기쁨(joy)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04.htm

2-1-5. 평화(peace)정의(definition)는 이 글에서 고찰합니다.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굿뉴스 서버 제공의 우리말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평화"라는 용어에 대한 대단히 긴 설명을 읽을 수 있는데, 그러나 문제는, 히브리어 단어인 "shalom"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3804
(이상, 게시자 주 끝)

2-2.
2-2-1.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가해-II, 나해-II, 다해-II,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1월 1일), 제1독서(민수 6,22-27)의 해설 전문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96.htm
(발췌 시작)
제1독서 - 민수기 6,22-27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궁극적 불순종인, 금송아지 사건 때문에, 가족 사제직(family priesthood)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맏아들이 자신의 가족을 위한 사제로서의 기능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유일한 사제들은 레위 지파(tribe of Levi)로부터 나오게 되었으며 그리고 공동체 위에 하느님의 이름을 기도 중에 부르는(invoking) 권한은 (레위의 손자이며 모세의 형인) 아론(Aaron)과 그의 자손(sons)들에게 주어졌다.(각주 2) 오늘 우리는 구약 성경에 처음으로 기록된 사제의 축복(first priestly blessing)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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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2) 레위(Levi)의 자손들에 대한 나열은 탈출기 6,14-25 및 1역대기 5,27-40에 있으니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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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3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일러라.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여라. 24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 주시리라. 25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그대에게 영광의 보상들을 주시리니, 주님의 즐거움을 함께 묵상하도록 하라(Give you glorious rewards, reflect His pleasure with you).
 
26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고통의 시기에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감추셨고’ 또 당신의 백성을 포기하셨다고 믿어졌다. 히브리 언어에 추상적 개념(abstractions)들을 위한 단어들이 없었기에 추상적 개념들은 형이하학적 용어(physical terms)들로 묘사되어,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듯 하는 문장(word-picture)들로 귀착하는(result in) 것을 상기하라.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
 
평화에 해당하는 히브리 단어는 shalom이다. 이 단어는 단순히 갈등이 없다는 의미보다는 훨씬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 단어는 전체(wholeness), 구현(fulfillment), 행복(well being)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내용 추가 일자: 2013년 6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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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엮은이 주:
(1) 다음은 1열왕기 5,26에서 언급되고 있는 "평화" 라는 번역 용어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 전문이다:

(발췌 시작)
"평화"로 옮긴 히브리 말 "샬롬"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낱말로 그 의미가 매우 풍부하다(예레 14,13 각주 참조).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즈카 9,10) 가리키지 않고 여러 가지 좋은 가치를 지닌 선물들을 뜻한다. 다시 말해 성경의 평화의 개념은 안녕(예레 23,17), 행복(1열왕 2,33), 건강(창세 43,28), 번영(시편 72,7), 안전(즈카 9,10), 구원(이사 55,12), 사회의 균형과 질서(1열왕 5,26; 예레 38,22),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일치(에제 34,25), 충만한 삶(잠언 3,2; 이사 26,3) 등의 가치를 지닌 선물이다. 주님 자신이(판관 6,24) 또는 우리에게 오실 임금님이(미카 5,4) 곧 평화이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을 만나 안녕을 기원할 때나(1사무 25,6, 그리고 요한 20,21 참조), 혹은 좋은 뜻으로 안부를 물을 때도(2열왕 5,21; 9,11) 쓰인다.
(이상, 발췌 끝).

(2) 다음은 예레미야서 14,13에서 언급되고 있는 "참평화" 라는 번역 용어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 전문이다:

(발췌 시작)
[예레미야서] 16,5; 29,7.11; 39,6.9에서와 같은 "평화"이다. 히브리말 "샬롬"은 본디 '충만' (13,19 참조: "모조리"), 공평한 사회적 관계로 이루어지는 '안녕' (16,14; 8,15; 15,5; 30,5; 38,4; 43,12), 전쟁과 기아와 흑사병에(4,10; 9,7; 12,5.12; 34,5)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평화' (28,9), 평화를 기초로 하는 '우정' (20,10; 38,22) 등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1열왕 5,26 각주 참조.
(이상, 발췌 끝).

(3) 또한, 아래의 제2-3항에 발췌된 유다 백과사전에 주어진 "peace(평화)"에 대한 설명을 읽도록 하라.
-----
[이상, 내용 추가 끝].
 
27 그들이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레위기 9,22-23은 구약 성경에 처음으로 기록된, 대사제 아론과 그의 동생 모세에 의한, 사제의 축복(the first priestly blessing)을 서술하고 있다.
(이상, 발췌 끝).

 

[내용 추가 일자: 2022년 6눵 4일]

2-2-2.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다해 성령 강림 대축일, 복음 말씀(요한 20,19-23)에 포함되는 제19절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예수님의 인사 말씀인 "평화가 너회와 함께"에 대한 해설 천문입니다:


(발췌 시작)

이 구절에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번역된 표현은 NAB에서는 ‘Peace be with you.’로 번역되었는데, 이 인사는 미사 중 성찬 전례에서 영성체를 하기 전인, ‘하느님의 어린양’ 기도 전에 교중이 함께 나누는 인사로, 즉, ‘평화를 빕니다’로, 사용되고 있다.


샬롬(shalom).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의 선물로서 생각하였던 일상적인 인사말. 샬롬이라는 단어는 제대로 번역이 되지 않으며, 우리말 번역 및 영어 번역에 있어 평화(peace)가 보통 사용되지만 그러나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풍부한 의미의 언외(言外)의 의미를 갖지(connote) 못한다: 완전함(completeness), 그 안에 어떠한 것도 부족하지 아니한 어떤 상태(a condition)를 말하는 완미(perfection).(*)


-----
(*) (i)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그리스도교 교의 신학 용어인 ‘평화/화목’(peace, shalom)이라는 차용 번역 용어의 정의(definition) 및 그 출처에 대한 글들을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peace.htm [주: 본글 포함]


(ii)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우리들의 성화(sanctification)의 끝/마지막 상태(end, terminal)를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차용 번역 용어인 ‘완미(完美)’(완전미호, perfection)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 및 그 출처에 대한 글들을 학습할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perfection.htm

(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2-2: 바로 아래의 제2-3항에서는 "shalom"이라는 단어가, 유다교 전통 안에서, 완전함(completeness), 그 안에 어떠한 것도 부족하지 아니한 어떤 상태(a condition)를 말하는 완미(perfection) 등과 같은, 풍부한 의미의 언외(言外)의 의미를 갖지(connote) 못함에 대하여, 실증적으로(positively)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2-3.

2-3-1.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Jewish Virtual Library"shalom"이라는 표현이 인사(greetings)들 및 축하(congratulations)들의 한 종류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jewishvirtuallibrary.org/hebrew-greetings-and-congratulations <----- 필히 확인하라


2-3-2.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영어 가톨릭대사전"shalom"이라는 단어가 표제어로 수록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newadvent.org/cathen/s.htm <----- 필히 확인하라


2-3-3.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대단히 이상하게도, 유다 백과사전"shalom"이라는 단어가 표제어로 수록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jewishencyclopedia.com/directory/S/13398?page=4 <----- 필히 확인하라

[이상, 2022년 6월 4일자 내용 추가 끝]


2-3-4. 유다 백과사전에 주어진 "peace"의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http://www.jewishencyclopedia.com/articles/11964-peace 
(발췌 시작)
PEACE().

—Biblical Data:

- 성경에서 나온 자료:
 
The primary meaning of the word is "prosperity," "health" (Jer. xxix. 7; Job xv. 21 [A. V. "prosperity"]; Isa. xlviii. 18; Ps. cxxii. 6; Abot iii. 2). It is used in salutations, as when Jacob asked the shepherds concerning Laban (Gen. xxix. 6), or when Joseph inquired of his brethren regarding his father (Gen. xliii. 27, Hebr.; comp. II Kings iv. 26). Later, in Hebrew, as in Aramaic and Arabic, "Peace unto you" became a regular form of salutation.
 
이 단어의 첫째의 의미는 "번영(prosperity)," "건강(health)" 입니다 (예레 26,7; 욥 15,21 [A.V. "번역(prosperity)"]; 이사 48,18; 시편 122,6; Abot 3:2). 이 단어는, 야곱(Jacob)이 라반(Laban)과 관련하여 목동들에게 물었던(창세 29,6), 혹은 요셉(Joseph)이 자신의 형제들에게 자신의 아버지에 관하여 물었던(창세 43,27, Hebr.; comp. 2열왕 4,26), 인사들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후에, 히브리어에 있어, 아람어 및 아랍어에 있어서 처럼, "그대 위에 평화" 는 인사의 통상적 형식이 되었습니다.

The term is used also to denote friendship: "Even good friends, in whom I have trusted [lit. "men of my peace"], who have eaten my bread, lift up the heel against me" (Ps. xli. 9; comp. Isa. liv. 10; Jer. xvi. 5, xx. 10). 

이 용어는 다음과 같이 "우정"을 나타내기 위하여 또한 사용됩니다: "제가 믿어 온 친한 벗마저[글자 그대로, "내 평화의 사람들"], 제 빵을 먹던 그마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듭니다" (시편 41,9; comp. 이사 54,10; 예레 16,5; 20,10). 
 
The second distinct meaning of the term is "peace" as opposed to "war" (Eccl. iii. 8; et al.). It signifies also peace of mind and heart as opposed to the unrest and dissatisfaction caused by evil (Isa. xxxii. 17, xlviii. 22). The love of peace is inculcated as a virtue. The covenant of peace is, therefore, most highly esteemed. "Love the truth and peace" (Zech. viii. 19; comp. ib. 16; Ps. cxxxiii. 1; Abot i. 12). Peace is one of those blessings which God bestows upon man, for He is the creator of peace: "I make peace, and create evil" (Isa. xlv.7; comp. ib. lvii. 19; Gen. xv. 15; Ps. xxix. 11, cxlvii. 14).

이 용어의 두 번째 다른 의미는 "전쟁"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평화(peace)"입니다 (코헬 3,8; 등 등). 이 용어는, 악(evil)에 의하여 야기되는 불안(unrest)과 불만(dissatisfaction)에 반대되는 의미로서 (이사 32,17; 48,22), 마음(mind)과 심장(heart)의 평화를 또한 나타냅니다.(*) 평화에 대한 사랑(the love of peace)은 한 개의 덕(a virtue)으로서 되풀이하여 가르쳐집니다. 그러므로 평화의 계약(the covenant of peace)은 가장 높게 존중됩니다. "진실과 평화를 사랑하여라" (즈카 8,19; comp. 즈카 8,16; 시편 133,`; Abot 1,12). 평화는 하느님께서 사람 위에 수여하시는 바로 그 축복들 중의 한 개인데, 이는 당신께서 다음과 같이 평화의 창조자(the creator of peace)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행복[평화]을 만드는 이요 어둠[악]을 창조하는 이다" (이사 45,7; comp. 이사 57,19; 창세 15,15; 시편 29,11; 14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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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다음의 출처에 있는 글에서처럼, "마음(mind)"과 "심장(heart)"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32.htm 

즉,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Ia IIae, q44, a5 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1)
(i)
"마음(the mind)"으로 나타내어지는 지성(the intellect),
(ii) "영혼(the soul)"으로 나타내어지는 저급의 욕구력(the lower appetitive power), 그리고
(iii) "굳셈(strength)" 혹은 "힘(force or might)"으로 나타내어지는 외면적 수행력(the exterior exective power)은
의지(the will)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는 행위(행동, 능동, action)의 세 개의 원리들(the three principles of action)이고, 그리고
(2)
"심장(heart)"
은, 영혼(the soul)의 움직임(movements)들 모두의 원리인, 의지(will)의 어떤 행위(an action), 즉, 의지의 어떤 소행(所行), 즉, 의향(intention)을 나타낸다.
-----
 
In Messianic Conception.

메시아의 개념에 있어.

Among the blessings that Israel looks forward to in Messianic times the blessing of peace stands forth most prominently. Israel has so often felt the strong arm of the conqueror that peace and security seemed most desirable. The Prophets went still further; they longed for universal peace, for that peace which should unite all men and pervade the whole universe. Thus Isaiah pictures the Messianic time as a period in which all men will walk in the path of God; when He will judge between the nations and peoples, and war will be no longer known (ii. 2-4). Micah goes still further; every one shall enjoy peace and prosperity without any interference whatever (iv. 4). In Isaiah (xi. 6-9) the universal peace is to include also all beasts of the field. "Prince of Peace" is a designation for the anointed (Isa. ix. 6, comp. lx. 17, lxvi. 12; Zech. ix. 10). In the Apocrypha the blessing of peace finds repeated expression, especially in Ecclesiasticus (see xxviii. 13, l. 23). In Ecclus. (Sirach) xxv., among the things that are beautiful are enumerated the unity of brethren, and the "woman and her husband that walk together in agreement."

메시아의 시기에 이스라엘이 고대하는 축복들 중에서 평화의 축복(the blessing of peace)이 가장 현저하게 눈에 띕니다. 이스라엘은 정복자의 강한 팔을 대단히 자주 느껴왔기에 그 결과 평화(peace)와 안전(security)은 가장 바람직한 것인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예언자들은 한층 더 멀리 나아갔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보편적 평화(universal peace)를 갈망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러한 평화가 반드시 모든 사람들을 결합시켜야만 하고 그리고 전체 우주에 널리 퍼져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사야(Isaiah)는 메시아의 시기를 그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길을 밟는 어떤 시기로서, 그리고 당신께서 나라들과 백성들 사이에서 장차 심판하실, 그리하여 전쟁은 장차 더 이상 알려지지 않을 때로서, 묘사합니다 (이사 4,4). 미카(Micah)는 한층 더 멀리 나아가며, 그리하여 모든 이는 무엇이든지간에 어떠한 간섭(interference)도 없이 평화(peace)와 번영(prosperity)을 반드시 향유하여야만 합니다 (미카 4,4). 이사야서에서 (이사 11,6-9) 보편적 평화는 또한 들의 모든 야수들을 포함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평화의 군왕(Prince of Peace)"은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나타내는 칭호(a designation) 입니다 (이사 9,6; comp. 60,17; 66,12; 즈카 9,10). 구약 성경의 제2경전에서 평화의 축복(the blessing of peace)은, 특별히 집회서에서 (집회서 28,13; 50,23을 보라), 반복되는 표현을 발견합니다. 집회서 25에서, 아름다운 것들 중에 형제들의 일치(unity),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화목하게 사는 것"이 열거됩니다.

—In Rabbinical Literature:

(이하 생략)

[우리말 번역 등 추가 일자: 2013년 6월 25-26일]
(이상, 발췌 끝).

2-4.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다해-II"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1독서(창세 14,18-20)의 제18절의 첫 부분과 이에 대한 해설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발췌 시작)
18 살렘 임금 멜키체덱도

멜키체덱이라는 이름은 ‘정의(justice)’를 뜻하며, 살렘(Salem)이라는 이름은 ‘평화(peace)’를 의미하므로, 그는 정의의 왕이며 또한 평화의 왕이다. 아람어로 번역된 구약성경, 즉 타르굼(targums)들에 반영된 바와 같은 유대인의 전통에 의하면, 멜키체덱은 노아(Noah)의 첫 번째 아들인 셈(Shem)인데, 창세기에 있어 아브람을 제외하고 단 한 명의 온당한(righteous) 첫 번째 아들이다. 창세기에 있는 가계들(genealogies)에 대한 재구성은 셈이 아브라함(Abraham)(아브람)보다 35년 더 살았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또한 나중에, 아브람이 그곳, 즉 모리야 땅(the land of Moriah)에서, 이사악(Isaac)을 희생제물로서 제공하였을 때인 창세기 22,14에서 살렘(Salem)‘야훼-이레(Yahweh-yireh)’라고 불리게 된다. 오늘날 우리는 이곳을 ‘이레-살렘(Yireh-Salem)’[예루살렘(Jerusalem)]으로 알고 있다.
(이상, 발췌 끝).

2-5. 다음은, St. Joseph 판 New American Bible(NAB)의 부록인 Bible Dictionary에 주어진 "peace" 라는 성경 용어에 대한 설명입니다:

(발췌 시작)
PEACE. This word is used in the Bible to express two ideas: (1) peace with God, reestablished by the covenant, often a synonym for reconciliation, and (2) peace between individuals and peoples.

     The promises of the messianic covenant are often accompanied by the announcement of peace. Thus the Messiah will be called the "Prince of Peace" (Is 9,5). The word "peace" is contained in the literal translation of the word Jerusalem (Salem) (Heb 7,2). Peace demands faithfulness to the covenant and justice among men (Ps 72.3-7) so often invoked by the prophets. Christ came to bring peace (Lk 2,14) and to render it effective by a recociliation of mankind to God (Jn 14,27; Eph 2,14-17). The extension of the peaceful reign of Christ is thus for the true Christian the condition and source of true peace and true justice between individuals and between nations.

평화(peace). 이 단어는 다음의 두 개념들을 나타내기 위하여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1) 자주 화해(reconciliation)에 동의어인, 계약(the covenant)에 의하여 재설정되는(reestablished), 하느님과의 평화, 그리고 (2) 개인들과 백성들 사이의 평화.

     메시아의 계약(the messianic covenant)의 약속들은 자주 평화의 선포를 동반합니다. 따라서 메시아(the Messiah)"평화의 군왕(Prince of Peace)" [
이사야 9,5(6)] 이라고 장차 불릴 것입니다. "평화(peace)" 라는 단어는 예루살렘(Jerusalem)이라는 단어의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살렘(Salem)] (히브리 7,2)(*). 평화는, 예언자들에 의하여 대단히 자주 기원하게 되는(invoked), 사람들 사이에서 계약에 대한 충실(faithfulness)정의(justice)를 (시편 72,3-7) 요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평화를 가져다 주기 위하여 (루카 복음서 2,14)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인류의 화해에 의하여 이 평화를 유효하게(effective) 하시고자 (요한 복음서 14,27; 에페소 2,14-17), 오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 의한 평화로운 통치의 확장(the extension of the peaceful reign of Christ)[즉, 그리스도의 나라의 확장]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 있어 개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나라들 사이에서 참된 평화(true peace)와 참된 정의(true justice)의 조건(condition)이며 원천(sourc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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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다음에 있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다해 그리스도 성체 성혈 대축일 제1독서(창세 14,18-20)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corpus.htm <-----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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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1) 이상, 성경 본문에 근거한 "평화(peace, pax, shalom)" 라는 용어의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에 대하여 함께 고찰하였습니다.

(2) (문제점 한 개) 그런데 문제는, 위에 주어진 "평화"에 대한 설명들을 잘 읽어보면, 이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평화"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에 있습니다. 따라서, 설명하는 과정에서 사용 중인 "평화"라는 용어의 의미/정의(definition)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한, 여전히 성경 본문에서 말하는 "평화"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이 "평화"의 정의(definition)에 대하여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게시자 주 끝)

3.
3-1.
다른 한편으로, 다음은 "전례사전"에 주어진 "평화(peace)"에 대한 설명입니다:

출처: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발췌 시작)
질서가 서 있어 평온한 상태를 가리킨다.(*) 죄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인간에게 무질서를 초래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구속으로 인간 삶에 질서를 회복하셨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파스카 신비의 가장 큰 결실이다. "나는 평화를 남겨 두고 갑니다. 내 평화를 줍니다"(요한 14,27 참조; 요한 20,19.20.26; 갈라 5,22). 교회는 특히 전례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과 세상에 평화를 전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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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1) 이 설명의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은 1코린토서 14,33ㄱ일 것이다:

"하느님은 무질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평화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 그리고 "평화(peace)"라는 용어의 의미에 대한 바로 이 정의(definition)는 위의 제2-2항부터 제2-5항까지의 "평화"라는 용어의 설명 중에 사용되고 있는 "평화"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인데, 이는 이어지는 제3-2항에서 제시하고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평화(peace)" 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 게시자 주: 이 설명의 근거는, 다음에 있는, 에페소서 1,10에 근거한 리옹의 성 이레네오의 총괄되돌림/총괄복귀(總括復歸, recapitulation)일 것이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recapitulation_
of_St_Irenaeu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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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3-2. 다음은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용어집"에 주어진 "peace"에 대한 설명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에 의하여 주어진 "peace" 라는 용어의 정의(defintion)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괄호 안의 번호는 유관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항의 번호입니다:

출처: http://old.usccb.org/catechism/text/glossary.shtml#p

(발췌 시작)

PEACE: One of the fruits of the Holy Spirit mentioned in Galations 5:22-23 (736). Peace is a goal of Christian living, as indicated by Jesus who said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children of God" (1716). The Fifth Commandment requires us to preserve and work for peace, which was defined by St. Augustine as "the tranquility of order," and which is the work of justice and the effect of charity (2304).


평화(PEACE):
갈라티아서 5,22-23에서 언급되고 있는 성령의 선물들 중의 한 개입니다(CCC 736). 평화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마태오 복음서 5,9) 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에 의하여 지적되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목표입니다(CCC 1716). [십계명들 중의] 다섯 번째 계명은 우리가 평화를 보존하고 또 평화를 위하여 일할 것을 요구하는데, 평화는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에 의하여 "질서에 있어서의 평온(the tranquility of order)"으로서 정의되었으며(was defined), 그리고 평화는 의덕(justice, 정의)의 일(work)이고(이사야 32,17) 애덕(charity)의 결과(effect)입니다(*)(CCC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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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아래의 제4-3항에 안내되어 있는 교황 비오 11세의 첫 번째 회칙 제35항은, 평화가 의덕의 일이고 애덕의 결과임이, 아래의 질문 2에 대한 답변에 안내되어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Ia IIae, q29, a3 에 서술되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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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3-3. 다음은 Modern Catholic Dictionay 에 주어진 "peace" 에 대한 설명입니다. 첫 번째 문장이 이 용어의 정의(definition)입니다:

출처: http://www.catholicreference.net/index.cfm?id=35483 

(발췌 시작)
PEACE

The tranquillity of order. Peace is first of all the absence of conflict. But it is also the serenity experienced because there is no conflict. It is the calm that accompanies agreement of human wills, and is the foundation of every well-ordered society.

 

평화(peace)

질서에 있어서의 평온(the tranquility of order)을 말합니다.
평화는 무엇보다도 먼저 대립의 부재(the absence of conflict)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경험 있는 고요함(the serenity experienced)인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아무런 대립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human wills)들의 동의를 수반하는 (마음의) 평정(平靜)(calm)이며, 그리고 모든, 질서가 잡힌(well-ordered), 사회의 기초입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질문 2: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용어집)""Modern Catholic Dictionary"에서 따르고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평화(peace)"정의(definition)는 누구가 어디에서 또한 따르고 있을까요?

질문 2에 대한 답변: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는 자신의 저술인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Ia IIae, q29, a2 에서 성 아우구스티노의 "평화(peace)"정의(definition)를 따르고 있습니다. 다음의 글을 잘 읽어 보십시오. 

특히, 성 아우구스티노"평화(peace)"정의(definition)"질서에 있어서의 평온(the tranquility of order)"에서 사용 중인 "평온(tranquility)"정의(definition)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신학 대전 본문 중에서 정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03.htm <----- 필독 권고

이상, 성경 및 가톨릭 교회 교리서 등의 가톨릭 교회의 핵심 문헌들에서 말하는 "평화(peace)"정의(definition)가 무엇인지 함께 고찰하였습니다.


4.
4-1.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짝수해 연중 제28주간 목요일 제1독서(에페소 1,1-10)의 제2절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즉, 메시아의 평화)" 가 무엇을 말하는지 대단히 잘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28_thu.htm

(발췌 시작)
2. "Shalom!"--"Peace!"--is the usual way Jews greet one another. According to the prophets, peace was one of the gifts the Messiah would bring. After the incarnation of the Son of God, now that the "prince of peace" has come among men (cf. Is 9:5), when the Apostles use this greeting they are joyfully proclaiming the advent of messianic peace: all good things, heavenly and earthly, are attainable because by his death and resurrection Jesus, the Messiah, has removed, once and for all, the enmity between God and men: "since we are justified by faith, we have peace with God through our Lord Jesus Christ" (
Rom 5:1).


2. "샬롬(Shalom) -- "평화(Peace)!" -- 는 유다인들이 서로 인사하는 통상의 방식입니다. 예언자들에 따르면, 평화는 메시아가 가져다 줄 선물(gifts)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의 강생 후에, "평화의 군왕(prince of peace)" 께서 사람들 사이에 이미 오셨기(
이사야 9,5(6) 참조) 때문에, 사도들이 바로 이러한 인사말을 사용할 때에 그들은 다음과 같은 메시아의 평화(messianic peace, 즉 그리스도의 평화)의 도래(advent)를 기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heavenly) 그리고 땅에 있는(earthly) 좋은 것들 모두는 획득할 수(attainable) 있는데 왜냐하면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의하여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의 적개심(enmity)을, 단 한번으로 그리고 영원히(once and for all, 결정적으로), 이미 제거하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로마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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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1) 이 문장에서 말하는 "평화(peace)"의 정의(definition)는,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의 경우에 있어, 위의 제3-2항에 전달해 드린, 성 아우구스티노"평화(peace)"정의(defintion)를 따르고 있음을 숙지하라. 

(2) 여기서는 "평화(peace, pax)"를 메시아, 즉, 그리스도께서 가져다 줄 "선물(gift)"이라고 설명하는데, 다른 한편으로, 평화(peace, pax)는, 애덕(charity)를 으뜸으로 나열하는 완미(perfections)들인, 성령의 열두 열매(fruits)들 중의 한 개이다. 성령의 "선물(gift)"과 성령의 "열매(fruit)"의 정의(definitions)들 및 차이점은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69.htm 

(**) 번역자 주: ["그리스도의 평화"정의(definition)]
따라서, "그리스도의 평화" 란, 하느님과의 화해, 즉, 하느니과의 평화[위의 제2-5 (1)],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한 인류와 하느님과의 화해/평화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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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4-2.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부활 제5주간 화요일 복음 말씀(요한 14,27-31ㄱ)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east_5_tue.htm <---- 필독 권유

4-3.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나해 연중 제16주일 제2독서(에페소 2,13-18)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ot_16.htm <----- 필독 권유

4-4.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홀수해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제1독서(콜로새 3,12-17)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23_thu.htm <----- 필독 권유
[내용 추가 일자: 2013년 8월 18일]

4-5.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다해 연중 제20주간 복음 말씀(루카 12,49-53)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ot_20.htm <----- 필독 권유
[이상, 내용 추가 끝].

4-6. 다음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여러 번 언급하고 있는, 교황 비오 11세의 1922년 12월 23일자 첫 번째 회칙 [제목: 그리스도의 나라에 있는 그리스도의 평화에 대하여(UBI ARCANO DEI CONSILIO)] 입니다. 대단히 좋은 내용이므로, 영어가 가능한 분들께서 읽으실 것을 강력하게 권고드립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vatican/hf_p-xi_enc_23121922_
adc_en.htm


[내용 추가 일자: 2013년 6월 24일]

게시자 주: 다음은 이 글에서 지금까지 함께 학습한 바에 대한 요약을 포한하고 있습니다:

5.
지금까지, "평화(peace)"정의(definition) 그리고 "그리스도의 평화(the peace of Christ)"정의(definition) 를 함께 고찰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이들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i)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480-482항,

(ii)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304항과 제2305항, 그리고

(iii)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네 개의 핵심 문헌들 중의 한 개인, 현대 사회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제78항 전문

등을 학습하도록 하겠습니다.

5-1.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480-482항 전문입니다. 번역은 필자가 하였습니다:

출처: http://ch.catholic.or.kr/pundang/4/va2005cccc.htm

(발췌 시작)

CCCC 480. What does the Lord ask of every person in regard to peace?
CCC 2302-2303

The Lord proclaimed “Blessed are the peacemakers” (Matthew 5:9). He called for peace of heart and denounced the immorality of anger which is a desire for revenge for some evil suffered. He also denounced hatred which leads one to wish evil on one’s neighbor. These attitudes, if voluntary and consented to in matters of great importance, are mortal sins against charity.

CCCC 480. 주님께서는 평화에 관하여 모든 인격에 대하여 무엇을 요구하시는지요?
CCC 2303-2303

주님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마태오 복음서 5,9) 를 선포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심장(heart, 본심)의 평화를 요구하셨으며 그리고, 고통을 겪게 된 어떠한 악(evil)에 대한 복수를 하고자 하는 욕망(desire)인, 분노(anger)의 비윤리성(immorality)을 비난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자신의 이웃에 대하여 악을 바라도록 우리를 이르게 하는, 증오(hatred)를 또한 비난하셨습니다. 이러한 태도들은, 만약에 중대한 중요성을 지닌 사안들에 대하여 자발적이고 그리고 동의하게 된다면, 애덕(charity)에 반하는 죽음에 이르는 죄(대죄, mortal sins)들입니다.


CCCC 481. What is peace in this world?
CCC 2304-2305

Peace in this world, which is required for the respect and development of human life, is not simply the absence of war or a balance of power between adversaries. It is “the tranquility of order” (Saint Augustine), “the work of justice” (Isaiah 32:17) and the effect of charity. Earthly peace is the image and fruit of the peace of Christ.

CCCC 481. 이 세상에 있어 평화는 무엇인지요?
CCC 2304-2305

인간의 삶에 대한 존중(respect)과 이 삶에 대한 계발(defelopment)을 위하여 요구되는, 이 세상에 있어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 혹은 적대자들 사이의 힘에 있어서의 어떤 균형인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어] 평화(peace, pax)는 "질서에 있어서의 평온(the tranquility of order)" (성 아우구스티노),(*) "정의(justice, 의덕)의 일(the work)" (이사야 32,17) 그리고 애덕(charity, 사랑)의 결과(the effect)입니다. 땅에 있는 평화(earthly peace, 지상의 평화) 그리스도의 평화의 모습(image)이며 그리고 열매(fruit)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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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여기서 도입되고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평화(peace)"정의(definition)"질서에 있어서의 평온(the tranquility of order)"에서 사용 중인 "평온(tranquility)"정의(definition)는, 다음에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신학 대전 본문 중에 주어져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403.htm <----- 필독 권고

(**) 번역자 주: 여기서 "지상의 평화(earthly peace)" 의 정의(definition)가 주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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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CC 482. What is required for earthly peace?
CCC 2304, 2307-2308

Earthly peace requires the equal distribution and safeguarding of the goods of persons, free communication among human beings, respect for the dignity of persons and peoples, and the assiduous practice of justice and fraternity.

CCCC 482. 땅에 있는 평화를 위하여 무엇이 요구되는지요?
CCC 2304, 2307-2308

땅에 있는 평화(지상의 평화)는 인격(persons)들의 재화(goods)들의 동등한 분배와 보호 행위(safeguarding), 인간들 사이의 자유로운 함께 나눔(communication), 인격(persons)들과 백성(peopels)들의 존엄(dignity)에 대한 존중, 그리고 정의(justice, 의덕)와 형제애(fraternity)의 끊임없는 실천을 요구합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5-2.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304항과 제2305항 전문입니다. 번역은 필자가 하였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015/__P81.HTM

(발췌 시작)

Peace

평화


...

2304 Respect for and development of human life require peace. Peace is not merely the absence of war, and it is not limited to maintaining a balance of powers between adversaries. Peace cannot be attained on earth without safeguarding the goods of persons, free communication among men, respect for the dignity of persons and peoples, and the assiduous practice of fraternity. Peace is "the tranquillity of order."97 Peace is the work of justice and the effect of charity.98

2304. 인간의 삶에 대한 존중(respect)과 이 삶에 대한 계발(development)은 평화(peace)를 요구합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the absence of war)가 아니며, 그리고 평화는 적대자들 사이에 힘들에 있어서의 어떤 균형을 유지하는 것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평화는, 인격(persons)들의 재화(goods)들에 대한 보호 행위(safeguarding), 사람들 사이의 자유로운 함께 나눔(communication), 인격(persons)들과 백성(peoples)들의 존엄(dignity)에 대한 존중, 그리고 형제애의 끊임없는 실천 없이, 획득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어] 평화(peace, pax)는 "질서에 있어서의 평온(the tranquility of order)" 입니다. 평화는 의덕(justice, 정의)의 일이며 그리고 애덕(charity, 사랑)의 결과입니다.

2305 Earthly peace is the image and fruit of the peace of Christ, the messianic "Prince of Peace."
99 By the blood of his Cross, "in his own person he killed the hostility,"100 he reconciled men with God and made his Church the sacrament of the unity of the human race and of its union with God. "He is our peace."101 He has declared: "Blessed are the peacemakers."102


2305.
땅에 있는 평화(지상의 평화)는, 메시아이신 [messianic, 즉, 기름 부음 받으신 분이신] "평화의 군왕(Prince of Peace)"이신 그리스도의 평화(the peace of Christ)의 모습(image)이며 그리고 열매(fruit)입니다.(*) "당신 고유의 인격 안에서 당신께서 적대 행위(hostility)를 소멸시키셨던(killed)," 당신의 십자가의 피에 의하여, 당신께서는 하느님과 사람을 화해시키셨으며(reconciled) 그리하여 당신의 교회를 인류 단일(unity)의 그리고 하느님과 인류 결합(union)의 성사(sacrament)로 만드셨습니다. 당신께서는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마태오 복음서 5,9) 라고 선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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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여기서 "지상의 평화(earthly peace)" 의 정의(definition)가 주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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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5-3. 다음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네 개의 핵심 문헌들 중의 한 개인, 현대 사회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Part II, Chapter V: THE FOSTERING OF PEACE AND THE PROMOTION OF A COMMUNITY OF NATIONS, 제78항(평화의 본질) 전문입니다. 우리말 번역과 그리고,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드리고자, 번역자 주들을 제공 및 글자를 굵게 쓰고 색깔을 입힌 것은, 필자가 한 것입니다:

출처 1: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영문본]
출처 2: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우리말본]

(발췌 시작)
 
Part II

Chapter V 

THE FOSTERING OF PEACE AND THE PROMOTION OF A COMMUNITY OF NATIONS
평화의 육성 및 나라들로 이루어진 한 개의 공동체의 장려 [평화 증진과 국제 공동체]

서론

77.


...

평화의 본질

78. Peace is not merely the absence of war; nor can it be reduced solely to the maintenance of a balance of power between enemies; nor is it brought about by dictatorship. Instead, it is rightly and appropriately called an enterprise of justice. Peace results from that order structured into human society by its divine Founder, and actualized by men as they thirst after ever greater justice. The common good of humanity finds its ultimate meaning in the eternal law. But since the concrete demands of this common good are constantly changing as time goes on, peace is never attained once and for all, but must be built up ceaselessly. Moreover, since the human will is unsteady and wounded by sin, the achievement of peace requires a constant mastering of passions and the vigilance of lawful authority.

78.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the absence of war)가 아니며, 그리고 그것은 원수들 사이에 있는 힘에 있어서의 어떤 균형의 유지로 단지 환원될(be reduced) 수 없고, 그리고 그것은 독재에 의하여 초래될 수 없습니다. 대신에, 평화는 정의(justice, 의덕)의 사업(enterprise)이라고 올바르게 그리고 적절하게 불립니다. 평화는 인간 사회 안쪽으로 이 사회에 대한 하느님이라는 창립자(divine Founder)에 의하여 구조가 잡힌(structured), 그리고 사람들에 의하여, 그들이 더욱(ever) 더 커다란 정의(justice)를 갈망함에 따라, 현실태화되는(actualized), 바로 그러한 질서로부터 결과로서 발생합니다. 인류의 공동선(common good)(**)은 [하느님의] 영원한 법(the eternal law) 안에서 그 궁극적 의미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로 이 공동선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들은 지속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평화는 단 한 번 그리고 영원히 결코 획득되는 것이 아니고, 중단없이 확립되어야만 합니다. 더구나, 인간의 의지(human will)는 안정적이지 않고(unsteady) 그리고 죄에 의하여 부상당하였기(wounded) 때문에,(***) 평화의 달성은 정(情, passions)들(****)에 대한 어떤 지속적인 제어함(mastering)과 그리고 적법한 권위(lawful authority)의 깨어있음(vigilance)을 요구합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3년 6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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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여기서 말하는 "평화(peace)"는, 위의 제5-1항제5-2항에서처럼, 성 아우구스티노에 의하여 정의된(defined) "평화"를 말한다. 

(**) 번역자 주: 가톨릭 교회가 말하는 "공동선(the common good)"의 정의(definition)은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57.htm

(***) 번역자 주: 아담과 하와가 원죄(the original sin)를 범하였던 결과로 인류가 상실당한 바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다.

(****) 번역자 주: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말하는 "정(passions)들"에 대한 글은 다음의 글에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passion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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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13년 6월 28일자 내용 추가 끝]

 

But this is not enough. This peace on earth cannot be obtained unless personal well-being is safeguarded and men freely and trustingly share with one another the riches of their inner spirits and their talents. A firm determination to respect other men and peoples and their dignity, as well as the studied practice of brotherhood are absolutely necessary for the establishment of peace. Hence peace is likewise the fruit of love, which goes beyond what justice can provide.

그러나 이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땅 위에 있는 바로 이 평화(this peace on earth)는, 인격적 행복(personal well-being)이 보호받고(is safeguarded)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내면의 영들(inner spirits)과 자신들의 재능(talents)들이라는 재화(riches)들을 서로 자유롭게 그리고 신뢰하면서 함께 나누지 못한다면, 획득될 수 없습니다. 연구된, 형제다운 우애(brotherhood)의 실천(practice)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백성들을 그리고 그들의 존엄(dignity)을 존중하고자 하는 확고한 결심(determination)들은 평화의 확립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따라서
평화는 추가적으로(likewise), 정의(justice, 의덕)가 제공할 수 있는 바를 능가하는 사랑(love, 애덕)의 열매(fruit)입니다. 


That earthly peace which arises from love of neighbor symbolizes and results from the peace of Christ which radiates from God the Father. For by the cross the incarnate Son, the prince of peace reconciled all men with God. By thus restoring all men to the unity of one people and one body, He slew hatred in His own flesh; and, after being lifted on high by His resurrection, He poured forth the spirit of love into the hearts of men.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기인하는 바로 이러한 땅에 있는 평화(지상의 평화, this earthly peace)는 성부 하느님으로부터 발산하는(radiates) 그리스도의 평화(the peace of Christ)를 상징하며(symbolizes) 그리고 이 평화로부터 결과로서 발생합니다.(*) 이는, 평화의 군왕(the prince of peace)이신, 십자가에 의하여 강생하신 성자께서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과 화해시키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을 한 개의 백성 그리고 한 개의 몸이라는 단일(unity)로 회복시킴으로써, 당신께서는 당신 고유의 육(flesh)으로 증오(hatred)를 소멸시키셨으며(slew), 그리고, 당신의 부활에 의하여 위로 높이 들어 올려지신 후에, 당신께서는 사람들의 심장(hearts)들 안쪽으로 사랑의 정신(the spirit of love)을 부어주셨습니다(poured forth) [번역자 주: 로마서 5,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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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바로 이 가르침이, 위의 제5-2항에 또한 제시되어 있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305항 첫 문장에 주어진 "지상의 평화(earthly peace)" 의 정의(definition)의 근거임에 주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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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this reason, all Christians are urgently summoned to do in love what the truth requires, and to join with all true peacemakers in pleading for peace and bringing it about.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사랑 안에서 진리가 요구하는 바를 행하도록, 그리고 평화를 호소하고 그리고 평화를 이룩함에 있어 참된 평화를 이루는 사람(true peacemakers)들과 합류하도록, 다급하게 명해집니다. 


Motivated by this same spirit, we cannot fail to praise those who renounce the use of violence in the vindication of their rights and who resort to methods of defense which are otherwise available to weaker parties too, provided this can be done without injury to the rights and duties of others or of the community itself.

바로 이러한 동일한 정신(spirit)에 의하여 자극을 받게 되어, 우리는 자신들의 권리들을 옹호함에 있어 폭력의 사용을 포기하고 그리고, 또한 더 약한 당사자들에게도 다른 방식으로(otherwise) 쓸모 있는(available to), 방어의 방식들에 의존하는 자들을, 만약에 이러한 의존이 다른 이들의 혹은 공동체 자체의 권리들과 의무들에 대한 손상(injury) 없이 행하여질 수 있다면,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Insofar as men are sinful, the threat of war hangs over them, and hang over them it will until the return of Christ. But insofar as men vanquish sin by a union of love, they will vanquish violence as well and make these words come true: "They shall turn their swords into plough-shares, and their spears into sickles. Nation shall not lift up sword against nation, neither shall they learn war any more" (Isaiah 2:4).

사람들이 죄가 있는(sinful) 한, 전쟁의 위협은 그들 위에 미결인 채로 남아 있으며, 그리고 이 위협은 그리스도의 귀환 때까지 그들 위에 미결인 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결합(a union of love)에 의하여 사람들이 죄를 정복하는(vanquish) 한, 그들은 또한 폭력을 장차 정복할 것이며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표현이 현실화되게 할 것입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이사야 2,4).

(이상, 발췌 끝)

[내용 추가 일자: 2013년 6월 28일]
질문 3:
예를 들어, 교황님들께서 "'지상의 평화(the earthly peace, the peace on the earth)' 혹은 '세상의 평화(the peace of the world)'를 추구하기 위하여" 라는 표현을 하셨을 때에, 교황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이" 평화는 어떤 평화일까요?

질문 3에 대한 답변: 장소, 시기, 상황/여건, 개별 국가, 혹은 사람 등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를 수 있는, 요한 복음서 14,27에서 언급되고 있는 "세상이 주는 평화" 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당연히, 위의 제5항에서 정의된(is defined) "지상의 평화", 즉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305항의 첫 문장에 정의된 "지상의 평화"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코 상대적일 수 없는 바로 "이" 평화를 추구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행하여야하는지의 윤곽/꼭지도 위의 제5항의 문헌들에 의하여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바와 관련하여, 예를 들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직 제25주년에 즈음하여, 교황청 홈페이지 제공의, 2003년 10월 18일자, 제목: A 25-YEAR PONTIFICATE AT THE SERVICE OF PEACE (평화에 대한 봉사에 있어 25년의 교황직) 의 다음의 글을 잘 읽어 보십시오.: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그리고 또한

여기를 클릭하면,

1979년부터 2005년까지 매년, 세계 평화의 날(the Day of World Peace)을 위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메시지들을 읽을 수 있는데, 또한 당연히, 여기서 말하는 "세계 평화(World Peace)"는, 장소, 시기, 상황/여건, 개별 국가, 혹은 사람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를 수 있는 요한 복음서 14,27에서 언급되고 있는 "세상이 주는 평화"아니고, 위의 제5항에서 정의된(is defined) "지상의 평화", 즉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2305항의 첫 문장에 정의된 "지상의 평화"를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상의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역대 교황님들은, 예를 들어, "세속의 정치인들"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3년 7월 3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교황청 홈페지지 제공의 "지상의 평화(peace on earth)"를 주제로 하는 교황님들의 문헌들 및 강론들, 그리고 유관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 항들 등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vatican.va/holy_father/special_features/peace/
prayer-peace_index.html


[내용 추가 일자: 2013년 7월 27일]
[예수의 평화는 성령이 주는 생명의 지혜에서 옵니다.]

<----- (소순태) 이것을 읽고서 가톨릭 교우님들이 교리적으로 헷갈릴 수도 있겠다 싶어 말씀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는 다음의 언급에서처럼, 성령의 위업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위업입니다:

출처: St. Joseph 판 New American Bible(NAB)의 부록인 Bible Dictionary에 주어진 "peace(평화)" 라는 성경 용어에 대한 설명.


(발췌 시작)
Christ came to bring peace (Lk 2,14) and to render it effective by a recociliation of mankind to God (Jn 14,27; Eph 2,14-17).

그리스도께서는, 평화를 가져다 주기 위하여 (루카 복음서 2,14)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인류의 화해에 의하여 이 평화를 유효하게(effective) 하시고자 (요한 복음서 14,27; 에페소 2,14-17), 오셨습니다.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그리고 [ ... 성령이 주는 생명의 지혜에서 옵니다.] 에서 말하는 말하는 "지혜"는 이사야서 11,2-3에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는 "성령의 일곱 선물(성령칠은)들" 중의 한 개인 "초자연적 지혜(the supernatural wisdom)"를 말한다는 생각이며,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389항에서, 이 초자연적 지혜를 포함하는 "성령칠은"의 역할이 다음과 같다고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발췌 시작)
성령의 선물(gifts, 은사)들은 하느님의 영감(divine inspirations)들을 뒤따름에 있어 우리를 온순하게 만드는 항구적인 성향(dispositions)들입니다.
(이상, 발췌 끝)


그리고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969.htm <----- 필독 권고

에 있습니다.
[이상,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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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19시간 (자료조사 및 우리말 번역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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