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나해) 마르 14,12-16.22-26; ’21/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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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1-05-28 ㅣ No.4677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나해마르 14,12-16.22-26; ’21/06/06

 

 

 

 

 

 

 1990년대 초에 국제노동사목신부 모임이 필리핀에서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해외 나들이였기에, 나가는 기회에 일본까지 가서 노동사목 사제를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는 여성이 주로 집안에서 전업주부로 가정을 일구고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며 자녀를 키우는 상황이었는데, 반해 일본에서는 여성도 사회생활을 활발히 하는 시기였습니다. 저는 일본 여성의 사회생활을 바라보면서, “아이가 엄마를 세상에 뺏겼구나!”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를 키우기 위한 양육비를 벌기 위해, 여성도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여성도 사회생활을 통해 자신을 계발하고, 발휘한다고 합니다. 시대가 바뀌면 생활상도 바뀌고, 굳이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서라도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살아가는 현상입니다.

 

이런 시대의 변화되는 상황 속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고 싶습니다.

내가 내 배우자를 좋아하고 사랑하는가?

내가 내 배우자를, 내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고 지원을 해줄 내조자로만 여기는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신혼 초도 아니라면, 대략 일 년여 간다는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만으로 서로를 하나로 묶어 두기에는 서로 힘들지 않겠는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사랑보다는 정으로 산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는데, 우리 모든 부부가 되새겨 보아야 할 질문인가 싶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부부로 묶어주고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부부로서 살아가고 있는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은 남녀의 육체관계로 발전하고, 사랑의 결실로 자녀를 낳게 됩니다. 방긋방긋 웃는 우리 아이는 예쁘고 귀여운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그랬고, 우리 아이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인간 사회에 태어났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른 의미에서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가 서로를 도우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관계로 그치고 만다면, 우리가 서로의 이해관계 때문에 만나고 헤어지게 된다면, 우리는 가정을 꾸리고 부부생활을 하는 데 실패할 수 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자취하면서, 내 아내가 내 밥을 차려주고, 내 빨래를 해주고, 내가 힘겨우면 위로해 주고, 경제적 사회적인 지원을 바라면서 결혼생활을 시작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결혼생활이 순탄할 수 없음을 우리 모두는 잘 압니다. 배우자 중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제공하면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유효기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한쪽이 영육적으로 건강하고 경제사회적으로 계속 뒷바라지를 할 수 있는 한계까지만 가능할 것입니다. 부부뿐만 아니라 자녀와의 관계도 그러할 것이고, 세상 모든 사람과의 관계도 그러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라고 하셨는가 봅니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의 연속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해 희생하면서 역할을 서로 분담할 수는 있겠지만, 희생한다고 느끼지 않을 정도의 사랑이라는 감정이 유효하고 지속될 수 있는 신뢰관계가 이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내 배우자를 사랑하는가?

나는 어떻게 내 배우자를 사랑하는가?

나는 어떻게 내 사랑을 배우자에게 전달하는가?

나는 어떻게 내 배우자를 위하여 희생하는가?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 사회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 사회에 오셔서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상대인 우리를 위해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가 사회의 굴레속에서 어렵고 힘겹게 살아가는 것을 보시고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회의 굴레속에서 건져주시고자,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말로 가르쳐 주시고, 직접 새로운 삶의 표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공감하면서도 따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안타깝게 바라보시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마지막 방법과 표현을 사용하셔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악에 갇혀 있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우리 대신 우리 몸값으로 예수님의 생명을 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2-24)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생명을 바쳐 희생하신 예수님을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으로 모십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십자가를 세우고, 예수님께서 희생하신 사랑의 의미를 성체성사를 통해 거행합니다. 우리가 매일 주 예수님의 구원사업을 기억하고 재현하는 이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생명을 나눠주시기 전에 알려 주신 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 곧 희생제사의 의미를 이렇게 알려 주시고, 또 거듭 행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성 루카 사도에 이어 성 바로오 사도도 증언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1코린 11,23-25)

 

우리가 주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기억하여 행하라고 명하신 성체성사는 단지 미사 중에 거행하는 예식상의 성체성사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1973년에 출판된 미하엘 엔데의 아동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인 모모를 기억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들이 먹고 사는 데 바빠서 아무도 서로의 어려움을 헤아려주지 않을 때, 누군가의 어려움과 고민을 들어주는 모모가 나타나 사람들의 말을 경청해줌으로써 사람들을 치유해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시간 저축과 시간 절약을 통한 경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소외와 자기착취로 소모되는 삶의 방식에 휩쓸려, 인격과 인성과 품성과 품격을 비롯한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개인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삶을 바라보면서, 우리 스스로 자문해 봅시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내 배우자에게 힘과 생명을 불어넣는 성체가 되어 주고 있는지?

내가 어떤 방식으로 내 가족에게 힘과 생기를 북돋아주는 성체가 되어 주고 있는지?

내가 어떤 방식으로 내 직장 동료들에게 힘과 생명을 불어넣는 성체가 되어 주고 있는지?

내가 어떤 방식으로 내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에서 이웃들에게 힘과 생명을 불어넣는 성체가 되어 주고 있는지?

앞으로 내가 나와 함께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생기를 북돋아 주고 생명을 나누겠는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기억하는 대축일인 오늘,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생명을 바치신 우리 주님이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내 삶의 성체성사를 살아갑시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마르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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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꽃꽂이

https://bbs.catholic.or.kr/home/bbs_view.asp?num=1&id=183367&menu=frpeterspds2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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