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1주간 금요일 ’21/01/14

인쇄

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1-08 ㅣ No.4900

연중 제1주간 금요일 ’22/01/14

 

유다인들은 사람이 죄를 지어 병에 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크면 병이 심해서 죽게 된다고들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일반적인 종교심성도 비슷하겠지요. 착한 일을 하면 상을 받고, 나쁜 일을 하면 별을 받는다는 상선벌악과도 같은 인류 상식 차원의 종교적 기대이겠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의 생각에 맞추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며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라고 말씀하시고, 또 환우도 자신의 죄가 씻어졌다는 생각에 아무런 부담이나 거리낌없이 활기차게 다시 살아나 걸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유다의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인식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고 있으면서도, 종교적 믿음과 삶을 굳이 구분하여,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7) 라며 딴지를 겁니다. 하느님께서만 죄를 용서하실 수 있지, 사람은 자기에게 잘못한 것에 대한 사죄는 해 줄망정, 살면서 지은 죄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을 영으로 알아차리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8-10) 라고 응수하십니다. 어찌보면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라고 말하는 것이 더 쉬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정작 그렇게 된다면 그 사람이 기존의 시대상황에서 심어지고 그래서 간직하고 있는, 이른바 죄를 지어 병을 가지게 되었다는 데에 따른 죄의식으로 꺼림칙하고 어딘지 모르게 남아있는 죄 때문에, 또 다시 힘들어 질 수 있다는 불완전성으로 편안하지 않을 수도 있어 쉽지 않으리라는 또 다른 고통을 예지하셨는가 봅니다. 그래서 그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셨고, 그는 그 소리를 드고 쉽게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함으로써 치유된 것에 대한 실증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여러 사람들 앞에서 환우였던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11)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갑니다. 이에 모든 사람이 그동안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과 실제와는 너무나도 다른 새로운 실재에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합니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12)

 

오늘 이 복음을 읽으며 생각해 봅니다.

중풍병자를 들것에 실어 집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면서까지 예수님께 데려온 네 사람처럼, 내 스스로 죄를 씻을 수 없을 때, 누군가가 내가 죄를 씻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줄 사람이 있는가?

또는 내가 오늘 누구의 죄를 씻고 건강해지는 데 기회를 제공하며 협력하고 있는가?

현실과 괴리된 종교의식으로 신앙생활을 반쪽만 또는 왜곡되어 살고 있는 경우는 없는가?

죄를 용서받음으로써 현실에서 재생의 삶을 살고 영으로 구원된 중풍병자를 그려봅니다.

 



214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