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동성당 게시판

[멋진 배낭여행-8] 태국

인쇄

장정대 [changjhon] 쪽지 캡슐

1999-10-28 ㅣ No.1049

   ◎세계인과 대화하는 배낭여행-8회 {태국 마지막 편}

 

    - The more you talk, the more you are satisfied.-

      (대화를 많이 할수록, 더 큰 만족감을 얻게된다.)

 

       - 역사의 현장 콰이강의 다리를 찾아가다 -

 

다시 돌아 온 방콕, 년 중 가장 북적댄다는 1월이다. 여전히 활기차고 새롭다.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베낭족들이 그 분위기를 실감케 한다. 이번엔 다른 게스트 하우스를 이용해 볼까 하여 몇 군데 알아보았지만

마음이 내키지 않아 다시 보니로 갔다. 주인과 종업원 아가씨들이 구면이라고 반긴다. 마침 조그만 독방이 하나 있어 60B(1,700원)에 그곳을 쓰기로 했다. 일찌감치 샤워하고 실컷 자기로 한다.

 

아직 이른 아침인데(7시) 여기 저기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우리 한국말이 우렁차게 들려 온다. 반가움에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가 보니 어젯밤에 도착했다는 4명의 한국 대학생들이 있었다. 반가움을 나누기도 잠깐 그들은 곧 푸켓으로 떠날 채비에 분주하다. 동행하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나의 일정상 무리여서 다음 기회로 미루고 서로 좋은 여행이 되기를 빌며 헤어졌다.

 

빵과 쥬스로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마당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고 있는데 또 다른 방에서 서양인 남녀 한 쌍이 나와 합석을 한다. 남자는 몰다인 죤이고 여자는 핀랜드인 애니였다. 그들은 일본에서 2년 동안 영어 강사를 하다 6개월 간 태국 여행을 하는 중이란다. 흔히 보는 일이지만 그들에겐 여행이 생활화 된 듯 하다. 마치 그들은 여행을 즐기기 위해 일하고 돈을 버는 것이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죤은 5년만에 다시 방콕을 찾았다고 하면서 그 땐 매우 조용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다더니 특히 한국 여행객들이 많이 눈에 띈다고 한다. 은연중에 아침에 있었던 우리 한국 학생들을 내비친다. 죤과 애니는 일종의 소란에 가까운, 큰 목소리로 떠들다시피 한 한국인들의 태도를 의식한 듯 한국의 문화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지한파(知韓派)가 아닌 이상 충분히 있을 법한 의문이다.

 

우리 특유의 큰 목소리와 분주하게 설치는 큰 행동들이 그렇다. 이러한 한국적 행동 특성을 그들은 특히 소위 선진국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과연 이러한 현상은 바람직한 것인가.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면 지양해야 할 것이다. 왜냐면 어차피 세계 시민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언행은 곧 국가의 이미지와 직결되고 그 결과에 따라 우리 한국인 모두에게 큰 이익이 되기고 하고 손해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름대로의 한국과 한국인에 관한 설명을 하면서 큰 보람을 느낌과 동시에 서운함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일반적으로 평범한 세계인들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한국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또 별 관심도 없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동양권이라도 한국의 위상은 분명 중국과 일본과는 다르다, 이러한 현실은 대화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우리는 한국과 일본에서의 영어 교육에 대한 문제점과 전망에 대해서도 의견을 나눠 보았다. 죤과 애니는 영어권의 내이티브들이 아니었다. 다만 그들은 미국에서 유학 공부를 했을 뿐이었다. 우리 나라에도 같은 현상을 쉽게 볼 수 있지만 일단 서구인으로서 영어를 잘 구사하면 그만한 대접도 받고 직장도 구하는 것이다. 일본도 비슷하다. 일본이 실용 영어를 배우기 위해 투자하는 열의나 비용의 규모는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된다. 그 점은 내가 직접 일본에서 확인했지만 죤과 애니와의 대화에서도 잘 나타난 것이다. 그들에게 나의 일본 배낭 여행담을 들려  주고 나니 벌써 점심때가 된 것이다.

 

죤과 애니의 제안으로 그들이 잘 간다는 식당에 가서 점심을 하기로 했다. 10여분 걸어갔을까, 허름한 식당이 있어 들어갔다. 닭튀김, 생선튀김, 볶음밥 등 아주 싸고 맛있는 먹거리가 풍부했다. 10~ 15B 면 거뜬히 한 끼 해결된다. 식사 후 우리는 선착장으로 갔다. 함께 배를 타고 차오프라야강을 구경했다. 방콕인들의 수상 버스인데 요금은 2B(약 60원). 선상에서 함께 사진도 찍는 등 우리는 그날 오후 내내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서로 주소 교환도 했다. 그들은 언젠가 꼭 한 번 한국을 찾게 될 것이다.  

 

오늘은 타마삿 대학 구경도 하고 거기서 점심도 먹어 볼 양 쓸쓸 걸어 나섰다. 대학 후문으로 가는 길엔 재봉틀을 길에 내놓고 옷수선하는 여자들이 꽤 있다. 나도 색의 실밥 터진 곳을 다시 재봉질했다. 15B. 후문이 가까울수록 빈민가가 많았다. 막상 대학 캠프스안에 들어서니 예상외로 조용했다. 몇몇 학생들이 보였지만 얘기 친구가 될 만큼 한가해 뵈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저쪽 한 구석에 한국 사람 같아 보이는 젊은 여성 한 명이 쥬스를 마시며 앉아 있지 않는가. 인사를 나눠 보니 일본 배낭 여행자였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직장 생활 3년 동안 모은 돈으로 남미 페루를 중심으로 1년간 배낭 여행을 하고 귀국 길에 방콕을 들렀다고 했다. 나는 눈과 귀가 번쩍 뜨였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젠가는 꼭 가보고 싶었던 잉카 문명의 발상지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남미 배낭 여행이란 시간상 그리고 경비 문제 등 나에겐 너무나 벅찬 꿈에 불과했다. 우리는 매점에서 옥수수와 과일 등을 사다 놓고 먹어 가며 얘길 나눴다. 나는 그녀로부터 특히 페루, 콜롬비아에 관한 여행담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들었다. 나는 그로부터 4년 후인 97년에야 잉카제국의 마츄비츄, 티티카카 호수...를 향해 나 홀로 배낭 메고 찾아 간 것이다.

 

오늘 저녁엔 팟퐁을 갔다. 혼자 그곳을 가는 것은 여간 위험한 곳이 아니라 하여 몇 명이 모여서 갔다. 그곳이야말로 소문난 그대로 아니 그 이상이었다. 성인 쇼라고 하기엔 너무나 잔인한 장면들이 연출된다. 후반부의 절정은 A Real Intercourse로 마무리한다. 역시 대부분의 고객들은 서양인들이다. 특이한 점은, 적어도 내 눈엔, 서양인들은 가족 단위로 혹은 연인과 함께 구경하고 즐긴다는 것이다.

 

한쪽에는 서양인 부부와 할머니 그리고 어린 남학생이 함께 쇼를 구경하고 있었다. 정말 가족일까? 설마 하고 조심스레 물어 봤더니,

 

"Hi, are you all the same members of your family?" "Yes. We are. She is my mother-in-law(장모). She is my wife and he is my son." 나는 다시 물었다."Is it ok to have your young kid watch this kind of show?" 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얘기한다. " Why not? It’s a practical sexual education."(물론이지요. 실용적인 성교육이잖아요.)

 

이런 형상은 분명 인식의 차이였다. 그들에겐 열린 교육의 현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우리에겐 퇴폐 문화의 현장으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누리는 삶의 한 부분인 사실적 현상을 대하는 인식의 차가 이렇게 클 수가...,과연 우리도 자녀들을 데리고 리얼한 현장 교육에 함께 참여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계속 양보할 줄 모르는 세계 성범죄율 상위권에서 밀려날까 아니면 더 악화될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팟퐁의 쇼 구경이었다. 어쨌든 그 서양인 가족들은 그들의 악섹트로 미루어 봐 미국인들은 아니었다.

 

이제 왕궁과 왓 프랏케오를 간다. 먼저 까만 바지를 렌트(30B)하여 입어야 입장 가능하다. 입장료(100B)까지 내고 나면 솔직히 너무 비싼 것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틀 생활비는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궁을 입장하면서 그런 생각은 달아나고 만다. 이곳은 아름답고 위대한 불교 문화의 정수가 한 곳에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직접 보고, 듣고 만져 봄으로서 느끼는 감성의 영역은 분명 차가운 이성의 깊이보다 앞서는 것 같다. ’Seeing is Believing’이란 표현이 잘 말해 주는 것 같다.

 

서너 시간을 돌아 본 후 왕궁을 나왔다. 이제 거대한 열반 불사를 보러 간다. 길이 46m에 높이가 15m의 황금빛 거대 불상이라는데 안 볼 수 없는 일. 왓포의 정문을 향해 걷고 있는데 어느 여성 한 명이 조용히 내 옆에 다가와서 말을 건넨다.

 

A: May I speak English with you?

B: Sure. How are you doing? (She looked shy and unnatural-어색하고 부자연스런- I mean she was different from other guys who often come to me and ask something that really bothered-귀찮게 구는- me.)

A: Are you a tourist? And where are you from?

B: Yes. I am a traveler a budget traveler(배낭여행자). You know?

A: I want to show you around here if you don’t mind.(괜찮으시다면) OK?

 

 너무 갑작스런 돌발 상황에 주춤했지만 대화가 이어지면서 곧 자연스런 분위기로 바뀌었다. 내가 왓포를 간다고 하니 자기가 안내를 하겠다고 했다. 왓포 경내에 들어서니 바로 건너 왕궁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조용하고 안정된 분위기다. 취우(그 녀의 이름)는 나무 밑 그늘에 앉는다.

 

그녀는 자기 소개를 한다. 자기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대생이 되어 3학년까지 공부를 하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후 자신은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영문학을 하려고 다시 1학년부터 시작한단다. 기회만 나면 외국인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어학 실력을 높이는데 열중이라고 했다.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취우의 분명한 목적의식과 열성이 그렇고 그들의 가족 제도, 특히 자녀 진학 문제에 있어 부모님의 뜻에 좌우되는 점이 우리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취우와 함께 거대한 황금빛의 열반불을 둘러본다. 이상하게도 관광객은 우리가 전부다. 취우를 따라 들어간 또 다른 불당에 들어서니 넓은

불당 앞에 노여승 한 분이 기도에 전념하고 있다. 우리는 눈이 마주치자 가벼운 미소로 인사를 교환한다. 참으로 경건한 분위기다. 취우도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한다. 그들에겐 생활화 된 종교의식으로서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갑자기 어벙벙해졌다. 마치 무언의 강요를 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도 시주함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우리는 다시 뜰로 나와 거닐다 시원한 곳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취우는 나의 배낭 여행담을 좋아 할 뿐만 아니라 부러워했다.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미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우리는 민주 기념탑 쪽으로 걸었다. 내 숙소가 있는 코산로드 가까이 다다랐을 때 나는 작별의 인사로 손을 내밀었다. 순간 나는 나의 행동이 결례를 범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끝내 억지 악수를 한 셈이 되고 말았다. 역시 문화 교류에 있어 무엇보다도 우선 인 것은 만남과 대화임을 다시 확인한 소중한 기회였다.

 

귀국 후 몇 일 안돼 나는 취우로부터 자기 가족 사진 한 장을 받았다. 자기 엄마와 이모 그리고 자기와 조카들이었다. 모두들 후덕한 인품을 지닌 평화롭고 사랑이 가득한 분들로 보였다.

~~~~~~~~~~~~~~~~~

※일본군의 만행으로 피로 얼룩진 곳, 영원히 용서받지 못할 반인륜적 역사의 현장은 동아시아와 태평양 군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오늘 나는 그 중 한 곳에 불과한 콰이강의 다리를 찾아갔다. 한 때 세인의 관심을 끌었던 영화,’콰이강의 다리’를 되새기며 그 현장을 바라본다. 전쟁 놀이에 미쳐 날뛰던 소아병적 일본인들이 완전히 이성을 잃은 채 목적 달성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행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콰이강의 다리 공사였다.

 

일본인들은 서울과 부산 사이의 길이와 맞먹는 군사 도로를 태국과 미얀마의 국경 지대인 열대림 속을 가로질러 건설했다. 그 기간은 15개월에 불과하다. 그와 같이 무리하게 추진된 광기 놀음의 대가는 너무나 엄청나 무려 45,000명이란 고귀한 생명을 희생시켜야만 했다. 그 희생자들 가운덴 일제 식민지 시대의 젊고 건장한 한국인, 우리의 조상님들이 얼마나 많이 포함돼 있을까.

 

당시 콰이강 철교 공사장과 비행장 등에 투입된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는 감시 요원으로 강제 징집된 한국의 젋은이들은 자그마치 3,223명이었다. 그리고 그 분들은 일본의 패전 후 여러 가지 죄목으로 투옥되거나 처형됨으로써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한 것이다.(동아일보 99. 7. 25 참조)

 

이와 같이 천추의 한을 품고 희생된 연합군과 원주민들 그리고 우리 조상님들의 영혼은 55년이 지난 오늘도 콰이강의 다리를 바라보며 통한의 눈물을 짓 고 있는 듯 했다. 완만히 흐르는 콰이강의 혼탁한 물결이 유난히 그렇게 보였다.

 

『콰이강의 다리는 20세기 인류에게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잔혹하게 인간 자신을 파괴하고 능멸할 수 있는가를 처절하게 증명해 보인, 일본 제국주의의 일그러진 초상이다. 콰이강의 다리로 상징되는 연합국과 일본군이 동남아시아와 중국, 한국에 새겨 놓은 잔혹의 증거들은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과 일본군의 남경대학살이라는 양적 크기에 가려서 잊혀지거나 무시되었다. 콰이강의 험준한 계곡을 물어뜯듯이 흘러내리는 강물에 휩쓸려 가면서 절규하던 인간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보고 싶다! 배불리 먹고 싶다! 물을 마시고 싶다! 약을 다오! 실컷 자고 싶다!』

 

                               <정동주, 콰이강의 다리 중에서>

 

 

일본인 전쟁 일 세대와 그 후손들이 서울에 오면 그들의 위업(?)을 자랑이라도 하듯 구 총독부 건물(중앙청, 철거)앞에 서서 사진을 찍고 한

강 철교를 배경으로 그들의 기술을 뽐내듯 사진을 찍는다. 콰이강의 철교에서도 근처의 전쟁 박물관 앞에서도 기념 사진들을 찍어 대는 그들의 뻔뻔스런 얼굴을 쉽게 볼 수 있다. (당 해 나는 유럽 배낭 여행을 하다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의 집(기념관)을 찾았다. 나치 독일의 잔혹상을 전시하는 곳인데 많은 일본 관광객들도 온다. 그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한 목소리로 외친다. "오! 이렇게 잔인할 수가 ~쯧쯧 !")

 

현대 의학으론 절대로 고칠 수 없는 희귀 균질을 지닌 일본인들, 그들의 심각한 중증 현상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도저히 인간의 탈을 쓰고는 할 수 없는 연출을 해되니 말이다. 혹시, 일본인들은 뛰어난 문화 선진 국민(?)이라서 모두가 명 연출가 내지 연기자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감정까지 살려 역겨우리만큼 철저하게 포장된 위선의  허상을 보일 수 있겠는가 말이다.

 

+ 나는 7,000 여명이 잠들어 있는 연합군 공동묘지까지 걸었다. 조용히 걸었다. 명복을 빌면서....그런데 우리 조상님들의 묘지는 어디에 있나?

 

♥태국 마지막 편을 마치며, 두서없는 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여러분께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그 동안 체험한 지구촌 경험담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왜냐면 이것은 나의 사랑하는 가족, 민족 그리고 조국이 있기에 가능했던 소중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국가, 힘있는 국가의 소중함을 항상 느끼면서.......

 

▶감사합니다.       <일본으로 갑니다>      -장 정 대-

 

▶Email: jackchang7@yahoo.com           ◎All rights reserved.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우고 바보는 경험에서 배운다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어느 쪽 입니까?  우리 민족    은 어느 편에 속한다고 생각하십니까? <Jack Chang>

 



21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