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동성당 게시판

[멋진 배낭여행-9]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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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대 [changjhon] 쪽지 캡슐

1999-10-30 ㅣ No.1053

 

 ◎세계인과 대화하는 배낭여행-9회 {일본-1}

 

- The more we learn Korea, the more we love Korea.-

(한국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한국을 더 사랑하게 된다.)

 

         -후쿠오카 나가사키를 다녀보고-

 

일본! 참으로 멀고도 가까운 나라이다. 나는 오늘 드디어 마음으로부터 한없이 멀기만 했던 일본을 건너간다. 문명의 이기가 물리적 거리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 놓았건만 마음의 거리는 결코 가까워지지 않음이 나만의 감상(感傷)일까.

 

My visit to Japan especially through the sea(특히 바다를 통해) from Pusan port to Fukuoka port was very special and meaningful(특별한 의미). Not only because of the past but also for the future considering the bitter sorrow historic facts(비통한 역사적 사실을 생각한) between Korea and Japan.

 

나는 91년 8월, 5일 간의 일본 배낭 여행을 떠났다. 한일공동 승차권이라는 저렴한 티켓을 (당시 부산-하카다 왕복과 나가사키 왕복 열차권 포함이 75,000 원이었다. 최근 알아보니 IMF 이후 취급하지 않는다 함) 구입했다. 굳이 배편을 이용한 것은 나름대로의 뜻이 있었다. 불과 50여년 전 우리의 수많은 사랑하고 존경하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고국을 등지고 일본으로 강제 연행된 길이 바로 이 바닷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恨)많은 눈물과 피로 통한(痛恨)의 생을 마감한 불쌍한 우리 조상님들의 원혼(怨魂)의 숨결을 깊이 느껴 보고 싶었던 것이다.

 

수중익선(배가 속력을 내면 날개의 부력으로 선체가 떠올라 물의 저항을 극소화시킨 배)을 선택한 것은 시간 절약 상 그러했는데 부산에서 하카다까진 불과 2시간 55분의 거리였다. 정말 빨랐다.

 

그러나 이 지척간(咫尺間)을 우리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는 당시 부관 연락선에 강제 승선되어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면서 하카다로 그리고 시모노세끼로 거의 하루 내내 배멀리에 시달리시며 송출됐고, 일본 각처의 탄광, 금광, 토목공사(군 비행장 공사, 철도 터널 공사, 험난한 산악 요쇄 만들기...)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최악의 작업 현장에 투입되어 혹사(酷使)당하고 죽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그 정확한 사망자의 숫자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니 그 진상조차 확인할 수도 확인 할 힘도 의지도 없는 부끄러운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님들을 위한 진혼곡을 울리며 그 길을 따라가 본다.

 

일제 강점기 동안 그들은 갖가지 수단으로(군수공업동원법을 시작으로, 1938년 4월 ’국가 총동원법’ - 1939년 ’국민징용령’ - ’노무동원계획’ - 1942년 ’조선인노동자 활용에 관한 방안’ - 조선인 일본본토 도입 알선 요강’ - 악명 높은 ’조선 노무회’ 의 조선인 인간 사냥...) 우리 조상님들을 노무자와 징용으로(총 751만 6,234 명) 바로 오늘 내가 부끄럽게도 편안하게 가고 있는 이 뱃길을 따라 강제 송출한 것이다.                    <김상웅,’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참조>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 라는 표어가 있다. 과연 이 표어가 우리에게도 합당할까. 나는 단호히 아니다라고 말한다. 용서하는 주체는 강자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여 부끄러운 과오를 되풀이하면서 동시에 강자의 입장에 설 수는 없다는 현실이 그 이유이다.

 

나는 하카다 항 주변을 둘러보면서 부끄럽고 가슴아픈 그 시절을 더듬어 본다. 당시의 이곳 선창(船艙)의 하역장엔 잡다한 폐기물들이 여기저기 버려져 있었다. 우리의 조상님들은 그 가운데 아직 쓸 만한 물건이나 쇠붙이가 있으면 주어 모았고, 파도에 떠밀려 와 하얀 모래사장(沙場)둔덕에 흩어져 있는 타다 남은 나뭇가지나 숫덩이를 주어 모았다. 가난한 삶을 연명하기 위해서였다. 한 많은 후쿠오카(복깡) 항구에 당시의 가엾은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들의 고운 손길들이 오늘날은 저렇게 하얀 파도의 잔물결이 되어 해안(海岸)에 와 닿고 있었다.

 

There were once, relatively(비교적) a long time , many poor and miserable(가엾고 비참한) Koreans in Fukuoka who were taken compulsorily(강제로 끌려간) by Japanese. They had to try many ways to get something useful to survive(살아남기 위해) with their children. They had to pick up pieces of wood, charcoal, iron deserted(버려진 나무조각, 숯부스러기, 쇳조각) on the streets and sand beach. They were the very our parents and ancestors(바로 우리의 부모님들 그리고 조상님들). And all of these happened under the very my eyes then(당시의 이 모든 일들은 바로 내 눈앞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사실 이렇게 가슴아프고 부끄러운 통사(痛史)를 되뇌어 보는 것은 못난 후손으로서 우리 조상님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에 불과한 것이다. 일본내에서는 물론 중국 사할린 싱가폴 말레이시아 보르네오를 포함한 남양군도(南洋群島)의 곳곳에는 가슴에 한(恨)을 안고 생(生)을 마친 불쌍한 우리의 조상님들이 부지기수(不知其數)였다.

 

그야말로 일제(日帝) 강점기(强占期)에 자행된 반인륜적인 만행에 의한 참상(慘喪)을 생각하면 현재 밝혀진 역사적 진실은 구우일모(九牛一毛)에 불과하다. 진정한 자존심과 힘을 지닌 자랑스런 후손이 될 때만이 우리의 손으로 위령탑을 세우고 위령제를 올리며 조상님들의 원혼(怨魂)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그 출발점은 우리 조상님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정확히 아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정확히 알아야 할 의무가 있다. 떳떳하고 자랑스런 후손이 되기 위해서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점은 너무나 크다. 우선 부끄러운 역사의 전철(轉轍)을 밟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다.

 

I think it’s very important for us to know that if we would study *with profit(효과적으로) the history of our ancestors(조상들), we must be careful against some guys who often say, ‘Let bygones be bygones.’(지난 일은 잊는 게 좋다고 하는 작자들을 주의해야 한다)Because it is a kind of delusion(망상이거나 그릇된 생각). Strictly speaking(엄격히 말하면), those people who belong to the strongest countries(강대국에 속하는 국민들은) would never say to themselves that kind of stupid words(자기들끼리는 절대로 이런 어리석은 말들을 하지 않는다), especially it is once related to the matter of their people(특히 그런 문제가 일단 자신들의 국민과 관계되는 문제일 땐 더욱 그렇다) no matter it’s past or present(그것이 과거든 현재든 관계없이).

 

최근에(1999년 7월 17일 자의 일간지와 뉴스) 언론 매체를 통해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또 하나 공개되었다. 그것은 관동 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을 그린 것이다. 일본인들의 조작과 은폐 속에 입으로만 전해져 오던 끔찍한 사건이 확인된 것이다. 언젠가는 밝혀지는 역사적 진실일 뿐이지만.

 

                    ▼사건 개요▼

 

이 그림은 관동 대지진(1923년 9월 1일)때의 것이다. 약 6,600명의 무고(無告)한 조선인들을 포악(暴惡)한 만행(蠻行)의 광기(狂氣)로 무참(無慘)히 학살하는 참상(慘狀)을 이 대형 두루마리에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은 것이다.<일본 화가 ’가야하라’가 며칠 동안 직접 돌아다니며 목격한 장면들을 옮긴 것이라고 한다.> 지진이 계속되자 간교(奸巧)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뿌리고 가옥에 불을 지르고 다닌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마구 학살을 자행했다. 그들은 일본도를 높이 치켜들고 내리치는가 하면 곤봉을 마구 휘둘러 댄다. 죽창으로 목을 찌르는 장면 등이 치(齒)를 떨게 한다. 손을 뒤로 묶어 놓고 불가항력(不可抗力)인 상태에서 노약자는 물론 치마 저고리 차림의 여자와 어린이들을 잔인하게 학살하는 장면들이다.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 간 분들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의 조상님들 아닌가. 이 잔인무도(殘忍無道)한 학살자들 가운데는 제복 입은 순사(巡査)는 물론 기모노를 착용한 여자들도 합세하여 미친 듯이 아니 신명난 듯이 대학살을 자행하고 있다. 아비규환(阿鼻叫喚)아래 조상님들의 잘린 목이 나뒹굴고 시신들이 쌓여 있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위안부 문제가 처음 세상에 공개된 것도 그러했지만 이번에 밝혀진 두루마리 그림도 바로 가해자인 일본인들에 의한 것이다. 피해자인 당사자가 발벗고 나서도 부족할 터인데 이 어찌된 일인가. 주권국가로서 어느 민족보다 우수한 두뇌를 가진 그리고 자존심이 강하다는 한국인인데...사랑과 양심과 지성 그리고 정의를 앞세우는 종교단체와 교육기관들이 넘쳐나는 나라인데...세계교역 10위선을 지키고 있는 경제 상위권에 속한 나라인데... 참으로 부끄럽고 부끄러운 일이 반복되는 기이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선량한 우리 조상님들은 왜 이렇게 무고한 죽임을 당해야만 했을까. 그리고 그 후손들은 왜 분노(忿怒)하지도 할 줄도 모르는 걸까. 오늘의 자화상이 바로 미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서글퍼진다. 조상의 역사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아니 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는 태도에서 어떻게 밝고 활기찬 미래를 기대하며 강한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고 또 그것을 지킬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아직 가능성은 있다. 우리에겐 강자에겐 강하고 약자에겐 한없이 관대한 아름다운 심성을 지닌 정말 멋진 민족의 원형(原形)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제는 역시 힘! 국력의 뒷받침이 우선되어야 가능 할 것이다. 그 힘은 절로 생기지 않는다. 조상의 역사를 알지 못하고 분노할 줄 모르는 민족에겐 거저 공허한 메아리로 맴돌 뿐이다. 자신과 자신의 직계 가족에 직접 피해가 없으면 조상님들의 한 맺힌 사연은 마치 이웃집 불구경이나 하는 듯한 방관자적 태도에서 어떻게 힘의 원천인 민족 공동체의 하나 된 주인 의식을 찾을 수 있단 말인가. 강대국과 약소국의 근본 차이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나는 배낭여행을 하면서 일본인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는 편이다. 함께 숙식도 하고 여정(旅程)도 함께 할 때가 많다. 그들에 대한 감정적 앙금이 있다 하여 그들과의 만남이나 대화를 결코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많다. 나는 뭔가를 항상 대화를 통해 발견하고 또 확인하기 때문이다. 내가 만나는 일본인 친구들도 다른 나라의 배낭족들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20대 친구들이다.

 

나는 그들에게 자주 묻는 질문이 있다. 일본인들이 가장 싫어하고 증오하는 나라가 있느냐고. 그렇게 물으면 그들은 좀처럼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다. 그러나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일본인은 미국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그제야 고개를 흔들며 No라고 한다. 왜냐고 물으면 그들의 대답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미국이 자기 나라에 원자폭탄을 던져 수많은 조상들을 죽게 했고 또 심한 고통을 주었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미국에 대한 적개심(敵愾心)을 갖게 되어 미국(美國)을 표기할 때의 아름다울 미(美)대신 쌀 미(米)를 쓴다고도 한다. 즉 밥을 먹을 때 쌀을 씹듯이 미국을 증오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폭을 맞은 년도를 잊지 말라는 의미에서 그들의 중등교육용 상용한자 수를 1945개로 정했다고 한다. 우리의 상용한자 수는 1800개인데 그 숫자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얘길 나는 아직 들어 본 적이 없다. 어쨌든 그들은 그러한 정신력(증오심)으로 노력한 결과 오늘날의 일본이 존재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물론 객관적으로 볼 때 일본인들의 논리는 억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에겐 그 억지 논리를 합리화시켜 엄청난 정신력을 창출하여 다시 힘을 구축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악독한 이율배반(二律背反)이다. 그들이 저지른 만행이 어찌 미국의 원폭보다 덜 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원폭 사망자 20만명 중 2만명은 우리 조상님들, 그러나 그들은 한국인 사망자에 대해 외면한다.) 자기 조상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어 간 우리 조상님들의 고귀한 생명들과 아직도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서 신음(呻吟)하고 있는 일, 이, 삼 세대의 수는 수 백만 명을 헤아린다. 그러나 그들은 틀에 박힌 말로 자신들의 죄악을 철저히 외면한다. 즉, 과거는 잊는 게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죄악은 잊는 게 좋다 하고 자기들이 받은 피해와 고통에 대해서는 결코 용서하거나 잊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들의 뇌리속 깊은 곳에 그들의 나라와 조상들에게 죽음과 고통을 준 상대국과 그 민족을 증오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운다. 그리고 반드시 보복을 다짐하는 게 일본인들이다.

 

그런데 우리의 입장과 태도는 어떠한가. 나는 우리 한국 친구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 본 적이 많다. 일본을 좋아하느냐고. 단연 그렇다고 당당히 대답하는 친구들이 많다. 그들은 과거지향 주의는 미래의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는 설명까지 덧붙인다. 아무런 부끄럼 없이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을 대변하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다. 정복 국가의 젊은이와 피정복 국가의 젊은이의 의식구조가 이렇게 확연히 다를 수가...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는지 통탄할 일이다.

 

미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생각을 들어보면 정복자의 의식구조를 느끼게 되지만 일본에 대한 우리들의 호의적 태도에선 패배 주의자의 기색만 느껴진다. 자괴심(自愧心)을 떨칠 수 없는 현상이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미국에 대해 와신상담(臥薪嘗膽:원수를 갚고자 고생을 참고 견딤)하는 정신을 지니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조상에 대해 고통은 물론 민족 말살까지 시도한 일본인들임에도 불구하고 와신상담은 커녕 오불관언(吾不關焉:나는 그 일에 상관하지 않음)하는가 하면 오월동주(吳越同舟: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끼리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선 행동을 같이 함)하는 면까지 없지 않으니!!!

 

▶감사합니다.          <일본편 계속>         - 장 정 대 -

 

▶Email: jackchang7@yahoo.com          ◎All rights reserved.

 

◆조상의 아픈 역사를 뒤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 자손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 고통은 반복되는 것이다.

 

                <J.E. 스타인벡의 不滿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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