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수동성당 게시판

[멋진 배낭여행-12] 일본

인쇄

장정대 [changjhon] 쪽지 캡슐

1999-11-03 ㅣ No.1062

◎세계인과 대화하는 배낭여행- 12회 {일본-4}

 

-The less I think of my race, the more I am ignored by others.-

(내 민족에 대한 생각이 짧을수록, 타민족으로부터 더 무시 받는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관문에 서서-

 

일찍이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그들은 오늘날 서방 선진국 G-7그룹에동양권에선 유일한 국가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세계인의 눈, 특히 서구인들의 눈엔 일본이 동양 제국(諸國)의 대표격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본은 세계 최대의 채권국으로서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위력을 실감케하고 급기야는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의 문턱까지 다가가 있다. 참 부럽다. 과연 그들은 우리 한국인보다 무엇이 더 우월해서일까? 이와같은 나의 우문(愚問)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나는 거리를 오가는 많은 일본인들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저들의 외모 어느 구석을 뜯어봐도 우리 보다 잘난 데가 없는데, 특히 여자들은 완연한 대조를 이루는데.... 대화를 해봐도 대부분이 수줍어하거나 소심하거나 박력도 없는 맹맹한 친구들이 많은데...그저 겉으로 보기엔 철저한 개인주의요 상호간섭도 관심도 없어 보이는데...그런데 저들이 국가와 민족에 대해선 일사불란하게 뭉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나의 짧은 생각에 은근히 약도 오르고 시샘도 나고 급기야는 우리 조상님 탓도 해보는 못난이가 되기도 한다.

 

간략하게나마 오늘의 일본, 그 배경을 추적해 보는 것도 일본 여행에 있어 그 의미를 더 할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소위 선진국 대열에 낀 나라들의 특징 중 하나는 외부 지향적 태도가 아닌가 싶다. 선진 문물을 받아들임에 게을리 하지 않았고 젊은이들의 해외 여행이 적극 장려된 점이 그렇다.

 

임진왜란 10년 전인 1582년 일본의 오이따(大分) 항에서는 4명의 청소년들이 유럽 유학을 떠난다. 그리고 이들은 로마 바티칸 시국의 교황도 알현하는 등 그야말로 아직 까진 폐쇄된 농경 국가에 불과한 섬나라 치곤 파격적이자 폭넓은 해외 견학을 마치고 8년만에 귀국한다. 그리고 우리 민족의 원흉들 가운데 하나인 이토우히로부미(이등박문: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통감을 지내면서 실질적인 식민통치를 시작한 민족의 대적)도 1860년대 초부터 여러 일본인 젊은이들과 함께 영국에서 유학 공부를 하고 귀국해 메이지유신 등 일본의 근대화에 앞장 선 것이다. 그들의 초등학생 해외 여행 시작도 이미 메이지유신 3년 후인 1871년부터 시작된다. 눈여겨볼 시점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세계 곳곳을 누비는 일본의 젊은이들은 그 연장선이다.(우리 나라 최초의 해외 유학자는 1881년에 일본으로 간 서유견문의 저자 구당 유길준이다. 당시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일본의 청소년들이 유럽 선진국을 돌아다니며 앞선 학문과 기술 문명을 배울 때 우리 조선은 어떠했는가. 쇄국 정책의 일환으로 서방 선진 문명과는 담을 쌓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신 당시의 조선은 향촌 사림이 정치, 사회, 문화를 주도해 가면서 도덕 문화를 크게 성장시켰으나, 상대적으로 양이(攘夷)정책이 득세를 해 국력은 약화되고 사회가 분열되어 결국 왜란과 호란을 초래하고 만 것이다.

 

또 다른 면을 보자. 일본은 1543년 최초의 서양 총 한 자루를 포루투칼인으로부터 건네 받는다. 우리 조선은 이보다 30여년 후에 서양총을 구입했다. 문제는 이와 같이 실익을 가져다주는 서양의 최신 무기를 대하는 양국의 입장 차이인데 그 결과는 임란에서의 참담한 패배를 가져왔다. 즉, 일본에선 재빨리 모방하여 반년이 채 못되어 600자루 이상의 총이 만들어지고 10년 후에는 30만 자루가 넘었다.

 

우리는 어떠했는가. 화약내 나는 흉칙한 무기를 영의정 유성룡의 지휘로 어전(御前)에서 시험방포(발사)를 했다 하여 유생(儒生) 선비 나리들이 연명 상소를 올리는 등 일대 혼란을 일으키며 명분 쌓기 입씨름으로 세월을 보내고 만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나라꼴도 어쩜 그 때와 크게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하니 답답하기 그지없다. 한 예를 든다면, 우리 한국엔 영어를 잘 한다거나 해외 경험을 많이 쌓은 사람들에게 칭찬보다는 아니꼽다는 시선으로 보는 이가 많다는 것이다. 이점은 분명히 일본을 포함한 강대국과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없지 않으나 오늘 날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참신한 젊은이들을 발굴하여 세계 무대로 진출 시켜야 한다. 폐쇄된 공간에서 개방된 공간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참담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다. 강대국이 되기 위한 필수 코스이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라도 젊은이들의 해외 여행을 용기와 격려는커녕 매도의 대상으로 보아 선 안될 것이다.

 

오늘 날 열강들의 각축전도 옛날의 분위기와 전혀 다르지 않다. 이 무한 국제 경쟁의 시대를 살며 힘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각국은 서로 핵무기 실험을 앞다투고 있는 마당에 여전히 우물안 개구리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채 우리끼리 티격태격 서로 잘났다고 물어뜯고 흔들어 돼서야 어느 세월에 부국강병을 이룰 수 있겠는가. 강대국들을 보자. 그들에겐 정신적 구심점이 있다. 그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선 기꺼이 자신의 이익을 양보하고 함께 뭉치는 단결력을 보여주지 않던가. 우리는 우리 후손들에게 더 이상 국치(國恥)의 전철을 되밟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일본 성인(聖人) 순교지를 찾아보면서 자의든 타의든 서양 종교 문화를 받아들임에 있어서도 일본이 우리 보다 훨씬 앞섰기에 당시 서방의 열강인 포루투칼이나 에스파냐 그리고 네델란드같은 나라들과 교역의 활로를 터고 근대화의 지름길을 달릴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니시자카(西板) 공원엔 서양종교 금지령에 의하여 1597년 처형당한 26명의 스페인 가톨릭 신부와 일본인 신자가 경건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조각상이 대형 대리석에 조각되어 있다. 이곳은 600여명의 일반 신자들이 처형된 곳이기도 하다. 순교자 26명은 1862년 로마 교황에 의해 시성(성인 반열에 오름)되고 그 100주년이 되는 1962년에 비로소 성당과 기념관이 세워진 것이다.

 

A few minutes’ walk from JR Nagasaki station(나가사끼역에서 몇분만 걸어가면), there is a big memorial statue carved in 26 Martyrs (26인의 성인이 새겨진 큰 기념 조각상) with reliefs of them crucified(처형된 성인들의 모습이 돋보이는) in 1597. In this, Japan’s most brutal crackdown(잔인한 탄압) on Christianity, six of those crucified were Spanish friars(스페인 수사), the other 20 were Japanese and the two youngest were boys aged 12 and 13. The memorial dates from 1962 and behind it is an interesting museum with displays about Christianity in the area(그 지방의 기독교와 관련된 전시품들이 있는 재미있는 박물관이 있다).

 

우리 나라에서의 천주교 박해도 대단하여 최초의 신자 허균(1610년 선조 때 영의정 허엽의 아들, 저서로 홍길동전. 고산집. 비한정록 등 남김) 이래로 100년 동안 만 여명이 순교하였지만 1839년 기해박해(헌종

5년), 1866년 병인 대박해(고종 3년) 때 순교한 이들 중에서 1925년에79위, 1968년에 24위 모두 103위가 시복(준성인)되었고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인 1984년 여의도 광장에서 기념 대회 및 103위 시성식을 가졌다. 깊은 종교적 의미는 차치하고라도 이와 같은 역사성을 갖는 주요한 대행사는 전세계에 국가 이미지 향상은 물론 국가에 실익을 가져다주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길준은 일본 미국 등에서 유학하고 귀국 길에 유럽 각국을 순방한다. 그는 만 1년 동안 긴 여행을 통해 부강한 선진국들을 직접 보고 듣고 1885년 12월에 귀국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서유견문(西遊見聞)을 남김으로서 개화(開化)에 눈을 뜨게 한다. 그는 그 책을 출판하기 위해서 그 엄청난 원고지 보따리를 들고 일본 땅을 찾아야 했다. 일본에는 이미 1880년대부터 동경의 여러 곳에 한글 활자를 갖춘 인쇄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근대화에 앞선 일본의 한 단면을 설명하는 것이다. 지금은 그때와 비교해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다고 볼 수 있겠는가?

 

I think that change only is the master key(변화만이 관건이라고) for us in order not to repeat the past of trial and error such as the national isolation policy(과거의 쇄국정책과 같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Don’t you think that it’s hard for us to forecast in which direction the powerful attacks of the strong countries will move(강대국의 강력한 공격이 어느 방향으로 이동할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생각치 않습니까). It might move toward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just like the past(꼭 옛날과 같이 우리를 겨누고 있는지 모르지요). I mean that we may be hit again to death or to be slavery(다시 강타를 맞고 죽거나 노예 신세가 될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로프웨이(케이블 카)를 타고 이나사산을 올랐다. 해발 332m의 별로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그래도 정상에서 내려다보면 나가사키의 항구와 먼 앞 바다까지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이다. 물론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500여년 전에 일본의 근대화에 주역을 담당했던 서양의 큰 상선들이 저 짙푸른 바다에 하얀 물 꼬리를 매달고 오갔을 모습을 상상하고 음미하는 맛도 느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전망대 주변에는 식당도 있고 선물 판매 코너도 있다. 그곳엔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많은 꼬맹이들을 인솔하고 올라온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의 모습에서도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한다. 꼬맹이들이 하나같이 그야말로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인솔자의 지시를 따르는 것을 보면 마치 잘 훈련된 군인들의 열병이라도 보는 것 같다. 도저히 어린이들 같지가 않다. 더욱 놀라운 장면은 식당에서였다. 나는 밥을 곁들인 돈까스를 주문했다. 잠시 후 나온 식사를 보고 나는 너무 황당했다. 밥에 조그만 가로세로 3cm 정도의 일장기가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동안 그 조그만 일장기를 쳐다 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밥이 나오는 식사에는 다 일장기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뽑아 들고 어린이들에게는 뭔가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나는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궁금하여 웨이터에게 물어 보았다. 그 웨이터는 영어 질문에 거저 미소만 지었지 의사 소통은 불가능했다.

 

"Excuse me. What does this little flag mean? I mean why you put those flags in the center of rice(밥 한 가운데). What does it stand for?(무엇을 상징하느냐)" He said nothing but smiled(미소만 지을 뿐). So I tried again to another waitress *in vain(허사).

 

어쨌든 그들의 국가 사랑은 구체적이며 적극적이었다. 또 그렇게 어린이들은 길들여지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나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케 하고 또 우리의 현실에 대한 비교 의식을 갖게 했다.

 

<참고: 1)이광린, 한국개화사상연구. 2)이의령,축소지향의 일본인>

 

▶감사합니다.       <일본편 5회 계속>          -장 정 대-

 

▶E-mail: jackchang7@yahoo.com          ◎All rights reserved.

 

◆영국인은 조국의 사태가 얼마나 험악한가를 알기 좋아하는 유일한 국민이며, 최악의 경우임을 듣는 것을 더욱 싫어하지 않는 국민이다. 장차 더한층 악화할 가능성이 있고 더 이상의 불운을 위해서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충고를 듣고 기뻐하는 사람들이다.

           

                        <W.L.S. 처칠>

 



19 0

추천 반대(0)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