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리성당 장년게시판

십대에겐 정말 못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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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호 [cary] 쪽지 캡슐

2000-04-09 ㅣ No.742

며칠 전 딸아이 방을 청소하는데 책상 위에 쪽지 하나가 보입니다.

평소에도 친구들과 주고받은 쪽지를 별 간수하지 않는 아이라 무심코 펴 보았습니다.

시작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십대 소녀들의 시시껄렁한 수다 그것이었습니다.

아, 그런데... 맨 밑 네모상자 안의 p.s. 부분을 읽고 나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더군요.

워낙 내용이 충격적이어서 줄 하나,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여기에 옮깁니다.

 

병원에 가야 돼. 나 임

신했어.  아마도.  누

구  앤지  알지?   바

라지도   않았는데...

야, 어뜨케~

 

청소기를 미는둥 마는둥 하고 뒷산으로 달렸습니다.

빠른 걸음으로 산길을 걷는데 그 예쁜 진달래도 물오르기 시작한 어떤  속잎도

제게 아무런 위안이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그저 마음속으로 기도만 계속하며 몸을 혹사시켰습니다.

오후에 딸아이 책상을 표나게 말끔히 치우고 그 쪽지만  달랑 눈에 띄게 놓아 두고는 화살기도를 입에 달고 초콜릿 케잌을 구웠습니다.

케잌이 알맞게 식을 무렵 딸아이가 문제의 그 친구와 또 다른 친구 하나와 함께

기분좋게 인사하며 들어섭니다.

도저히 마주볼 자신이 없어 쟁반에 우유랑 케잌을 얹어 제 방 앞에 놓아 주니

재잘재잘대며 잘도 먹습니다. 그 쪽지를 못 본 것일까요...

 

그날 밤 그 전날 했던 대로 피정간 아빠 자리에 베개를 들이밀기에

네 방 가서 자라고 아무리 밀어내도 막무가내로 들어와 눕습니다.

제 엄만 잠을 설쳐 부시시한데 다음날 아침 등교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딸아이의 얼굴은 맑은 봄날만큼 뽀사시하기만 합니다.

구름 잔뜩 낀 엄마  눈치보며 겨우 한다는 말이,

"엄마, 나 오늘 학교 갔다오거든 스웨터 하나 사 주실 수 있어요..."

 

친구 엄마에게 알려야 하나, 내가 병원에 데려가 봐야 하나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또 뒷산을 달렸습니다.

부러 옷 살 돈을 깨끗한 봉투에 넣어 놓고 점심상을 보고 있으려니

그 친구와 함께 딸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착잡한 심정으로 점심을 먹여 친구를 보내고는 딸아이와 마주앉았습니다.

 

"엄마가 어제부터 왜 기분이 엉망인지 아니?"

"아니..."

"정말 모르겠어?"

"응."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어 부드럽게 달래도 딸아이는 생경한 얼굴입니다.

"어제 네 방 청소하다가 쪽지 보고 엄마 기절할 뻔 했어. 그런 사실도 무서운데 그걸 그렇게 아무렇게나 쪽지에 적어 네게 준 친구도 무섭고 그 쪽지를 함부로 두는 너도 무섭고..."

"???"

할수없이 문제의 그 쪽지 p.s.부분을 얘기하니... 기가 막히게도...

딸아이는 웃느라고 아예 넘어갑니다.

제 방 가서 쪽지를 가져와 내 눈앞에 대 주며 하는 말...

"엄마, 세로로 한 줄만 읽어 봐. 우리 만우절 전부터 이런 장난 많이 했어."

 

병 신 구 라 야

 

세상에 이럴 수가... 이것이 18세 소녀들의 만우절 놀이라니요...

덕분에 이틀 동안 전 기도 엄청 하고 입술엔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습니다요.

엄마 되긴 쉬워도 엄마 노릇하긴 무지 어렵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그런데 피정이 좋긴 좋네요. 정간 제 아빠는 이런 우환을 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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