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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실 [antonius1] 쪽지 캡슐

2000-10-17 ㅣ No.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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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전례

1. 미사의 용어

        우선 미사전례에서 미사의 용어를 먼저 알아야 한다. 각 시대별로 중점을 두는 부분에 따라서 그 용어를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미사의 용어가 생기게 되는 이유는 어떤 시대에는 미사 자체에서 어떤 동작이 매우 중요하게 받아 들여져서 그 동작으로 인해 미사의 의미가 드러낼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 동작 자체가 미사의 용어로 들어왔었고, 또 어떤 때에는 그 안의 기도문 자체가 너무 중요해서 그 기도문 자체가 미사의 용어로 되었었고, 또 어떤 예식의 한 부분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그것이 용어로 쓰이게 된 적도 있었다. 지금 우리가 쓰는 용어는 4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이루어진 용어로서 오랫동안 써온 것이다. 즉 미사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보내다. 파하다'라는 의미로 이는 미사의 맨 마지막 부분, 폐회식에서밖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자체가 사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용어만 가지고는 그 의미를 전혀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우선 초대교회에서의 미사에 대한 용어를 보면, 초기 사도 시대 때에는 동작에서 따와서, '빵의 쪼갬', '빵의 나눔'이란 용어가 초기시대 때의 미사의 용어였고, 두 번째로 사도 바오로가 즐겨 썼던 '주님의 만찬'이 미사의 용어가 되었다. 이 당시의 미사의 용어자체로 보면 제사적인 측면은 나타나지 않았다. 즉 각 시대마다 제사적인 측면, 식사적인 측면, 일치와 나눔의 측면이 있는데 용어를 보면 어떤 측면을 그 시대에서 중점을 두어서 미사의 용어로 썼는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시대에는 식사적인 측면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2-3세기에 이르러 희랍적인 용어들이 들어오게 된다. 즉 이때의 미사의 의미는 기도라는 의미에서 '감사'라는 용어가 미사의 용어로 쓰여지게 된다. 우리가 성찬례를 하는 의미는 하느님께 '감사'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성찬 전례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성찬의 전례를 하게 되는 의미를 알려 주게 된다. 감사송 전에 사제와 교우간에 삼중대화를 하게 된다. 삼중대화란 다시 한번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함께 계신다는 것, 모인 공동체 속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사제가 강조하는 것이다. 즉 중요한 순간순간에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하며 그리고 '마음을 드높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그리고 나서 사제가 성찬의 전례를 근본적인 의미를 미리 알려주는 '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합시다'하며 이어 교우들은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하며 응답한다. 이것이 바로 성찬 전례에 있어서의 '감사'의 의미가 부각된 삼중대화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감사하게 되면 자동적으로 찬미, 축복(에우로기아)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이제까지 어떤 제사적인 의미가 드러나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이는 감사의 내용을 지닌 기도문 자체만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가 포함하고 있는 내용, 즉 감사외에 성체성사, 빵과 포도주까지도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4세기에 들어서면서 제사적인 용어들이 드러나게 된다. 이때부터 '희생제사', '봉헌', '제물'등의 용어가 미사의 용어로서 쓰이게 된다. 이는 어떤 식사적인 측면보다 제사적인 측면이 더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사의 신학적 의미는 제사적인 의미 뿐만 아니라 식사적인 측면, 일치와 나눔의 의미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4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지금의 '미사' 라는 용어가 쓰인다. 원래 '미사'의 의미는 '보내다'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즉 '보냄, 파견'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집회에서, 회의에서, 군대의 행사등을 마칠 때 '파견'하는 의미였다. 라틴어 미사에서 마지막 부분에서 'Ite missa est''라고 하고 교우들은 'Deo gratias'(천주께 감사합니다)라고 응답하게 된다. 이때 'Ite missa est'는 집회의 행사들을 마칠 때 쓰였던 것인데 이것이 미사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즉 교회의 모임도 하나의 집회이기 때문에 그러한 의미 속에서 'Ite missa est' 즉 미사(보냄)라는 용어가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나중에 집회가 끝나고 사람들을 보내면서 마지막 축복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미사이기 때문에 미사의 고유 용어로 쓰이게 되었던 것이다.


2. 미사의 기원

        미사의 기원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며 이는 유대인들의 과월절 예식을 따르고 있다. 복음사가들은 그러한 구체적인 방법들은 제시해 주지 않고 중요한 것만 전해주고있는데 그것은 빵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잔을 들고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빵과 잔을 나누었다는 것이 핵심적인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가 성찬례를 거행해 오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초대 교회때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을 거행했던 의미를 알아야 한다. 2천년 대희년을 준비하는 우리는 초대 교회공동체때에 살았던 그들의 모습대로 돌아가야 한다. 그때의 최후의 만찬의 거행은 신자들은 예수님의 사건을 기억하는 축제였다. 그 사건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는 축제였으며 이것이 성찬례였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가 공동체 사람들에게 말했던 내용도 '우리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즉 성찬례, 미사를 거행할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며 …'라고 말했다. 따라서 초대교회 공동체에서의 성찬례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사건을 기억하는 축제였으며, 사건을 기억하는 '회상제'였다.

        그리고 두 번째 의미는 주님의 성찬례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를 '현존제'라고 하며 오늘날에도 그러한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서 사제가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찬례는 주일, 주님의 날에 거행되었다. 그 당시의 하루의 계산법은 해질 무렵부터 시작해서 다음날 해질 무렵까지였는데, 따라서 주님의 날인 주일의 계산도 토요일 저녁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일주일을 설레임 속에 성찬례를 기다리며 토요일 저녁때 성찬례가 이루어 졌던 것이다. 따라서 세 번째 성찬례의 의미는 그러한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오시지만 이제는 그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 모습을 그대로 뵙게 되기를 기다리고 희망하는 때가 성찬례라는 것이다. 즉 어떤 종말론적인 의미를 띠며 그리스도의 본모습을 기다리고 희망하는 때라는 뜻에서 '희망제'라고 하였다.

        이상의 세 가지가 초대교회에서의 성찬례에 있어서 미사의 의미이며, 이는 모두 오늘날의 미사 안의 환호에서 모두 드러난다. 그 환호는 '알렐루야'이며, '신앙의 신비여'에 이어서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며, 주님의 부활하심을 굳세게 믿나이다'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아주 짧은 대답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환호인 것이다. 그래서 그 의미가 더 잘 드러내 주기 위해 노래로 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미사의 신학적 의미,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축제라든가 파스카를 기념하는 축제라든가, 일치와 나눔의 식사적인 차원이라든가 하는 의미가 있으며 이는 모두 초대교회때의 미사의 의미와 상통하는 것이다.

 

3. 미사의 구조

        미사의 구조는 일반적으로 네 부분 즉, 시작예식과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와 마침 예식으로 나누어진다.

(1) 말씀의 전례

        시작예식에서 우선 미사경본의 맨 첫머리에서 보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사제가 준비가 되면 입당한다'에서 '신자들이 준비가 되면 입당한다'로 그 정신과 의미가 바뀌었다. 즉 하느님백성의 모임, 집회라는 사실에 중점을 두고 있다. 시작예식은 입당에서 본기도 까지이다. 입당은 사제와 봉사자가 입당해서 제단 앞에 이르게 되는데, 그러한 입당의 의미는 입당할 때 봉사자가 함께 들어온다는 것은 하느님 백성과 함께 거행한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그래서 사제와 함께 봉사자, 즉 복사,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 제단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이 함께 입당해서 그 사람들이 자기의 임무,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장소로 가게 된다. 예를 들어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은 독서대가 있는 장소로 가게 되는데, 이는 그 사람이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는데에 불편하지 않고, 전례상 맥이 끊어지지 않고 바로 이어 질 수 있도록 적합한 장소에서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입당의 의미는 봉사자들과 함께 미사를 시작하면서 마음으로 제단앞에 그리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 입당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입당성가도 충분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사제가 봉사자와 함께 제단앞에 이르게 되면, 그리스도께 대한 존경과 찬미의 표시로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에 인사를 하게 되는데, 이때 전례 거행에 있어서 감실보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제대이다. 원래는 공간이 넉넉하다면 경당을 따로 만들어서 감실을 따로 모셔 놓고 신자들이 성체조배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근본적인 정신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성당 내에 신자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을 마련해서 놓게 되는 것이다. 인사를 한 후 제단 위에 올라와서 사제는 제대에 친구를 하고 주례자석으로 가게 된다. 그러한 주례자석은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예식을 거행하는 자리라는 것을 드러내주어야 한다. 그리고 사제가 먼저 성호경을 긋는데 이는 부활날, 즉 주일날에 다시 한번 세례때의 신앙을 기억하며 미사를 시작하게 되

는 것이다.

        그리고 제대에 인사를 하고 이어서 교우들에 대한 인사가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후 여러 가지의 인사(양식)가 생겼는데, 이는 그 장소나 공동체 모임의 특성이나 상황에 맞는 인사를 고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즉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와 '은총과 평화를 내리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과 함께' 등이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하느님 편에서의 교우들에 대한 축복이 드러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사실을 드러내어 주기 위해서 이는 성서에서 따온 것이다. 즉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는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탄생 예고를 전해준 후에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전달자로서 첫 번째 인사했던 것이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라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참회예식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중요한 예식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특별히 거룩한 예를 행하기 앞서서 참회 예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참회예식 중에 옛날에는 사제가 입당하면서 성수를 뿌리는 성수 예식이 있었다. 이때 성수는 세례로서 다시 깨끗해짐을 나타내게 되기 때문에 참회 예식을 대신 했던 것이다.  

        이어서 자비송(기리에)을 세 번하게 되는데 그 자비송의 의미는 그리스도께 관계된 것이다. 여기서 3이란 숫자의 의미는 최상급으로서 더없이 거룩함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러한 거룩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비송을 세 번하게 되고, 그러므로써 우리는 그리스도께 자비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마르코 10장에 보면 바르티메오가 눈이 멀어서 예수님을 보지 못했지만 귀로 들음으로서 알았다. 즉 그 분이 귀를 열어주시고, 절름발이들을 낫게 해주시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신다는 분이라는 것을 들어서 알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예수님만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고 나의 눈먼 것을 고쳐 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마음에서 터져 나온 환호가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였다. 따라서 우리가 자비송을 할 때에도 그러한 마음가짐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자비송에 이어 나오는 대영광송이다. 그리고 대영광송은 찬미의 기도이며, 그 중에 마지막 부분에서는 성삼위께 대한 영광으로 끝나게 된다.

        본기도는 Collecta라고 한다. 여기서 Collecta는 모음이라는 뜻으로, 신자들의 기도를 모아서 주례자가 하느님께 올리며 바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례자가 이 기도를 바칠 때에는 '기도합시다'하며 잠깐 침묵을 하게 되는데, 이는 신자들의 기도를 모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나서 본기도를 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주는 세세에 영원히 살아계시고 다스리시나이다' 로서 기도를 맺게 되는데 이는 인성이 아닌 천주성, 신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말씀의 전례는 예수님 시대의 장면이나 사건 등의 신비를 말씀을 통해서 되새겨주면서 감사의 전례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이다. 즉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성찬의 전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독서를 할 때 성서를 놓고 그대로 읽어 나가다가 별도의 독서책이 나오게 되고, 그러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말씀의 전례에 중점을 두면서 성서의 중요한 부분을 신자들이 모두 들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3독서 3양식으로 만들었는데 1독서는 구약, 2독서는 신약이고, 3독서는 복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복음을 보면 3년 주기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그 해를 3으로 나누어서 1이 나오면 가해, 2가 나오면 나해, 0이 나오면 다해이다. 이는 공관복음을 중심으로 해서 나누게 되는데, 가해는 연중주일 때, 그 외에 특별시기에는 다른 요한 복음을 쓰며, 가해에는 마태오, 나해에는 마르코, 다해에는 루가를 봉독하게 된다.

        이러한 독서중에 중심이 되는 독서는 복음이다. 그래서 1독서는 복음과 주제가 조화가 되어있다. 예를 들어 1독서에서 방탕을 이야기하면, 복음에서는 회개를 이야기하게 된다. 반면에 2독서는 주제와 조화가 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까 2독서와 복음하고는 차례대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즉 1독서에서 어떤 때는 열왕기가 나오고, 또 어떤 때에는 사무엘이 나오고 하는 이유는 복음의 주제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 복음은 사순이나 대림, 성탄, 부활등의 특별시기에 거의 봉독이 되며, 그리고 공관복음 중에서 마르코 복음이 제일 짧기 때문에 나해를 모두 채울 수 가 없기 때문에 일부분을 요한 복음으로 봉독을 하게 된다. 그리고 평일 독서는 주일 독서의 보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평일 독서는 독서와 복음으로 되어 있으며, 독서는 2년주기이며 복음은 1년주기로 되어 있다.

        독서자는 누구나 할 수 있으나, 복음은 평신도는 할 수 없다. 이는 등급의 차이라기 보다 고유한 역할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이미사 또는 수난 복음 때에는 평신도도 가능하다. 독서의 방법은 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이면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라고 하며, 기타 1독서, 또는 2독서, 몇 장 몇 절 등은 하지 않는다. 이는 그 독서를 하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읽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독서자가 봉독을 할 때 '사도 바오로가 전한 고린토 전서의 말씀입니다'등의 저자의 명을 할 경우가 있다. 그리고 해설자가 '제 1독서는 …'라고 말했어도 독서자는 다시 제목을 선포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회중이 주목하게 하기 위하여 봉독자는 다시 봉독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독서자는 자신의 입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됨을 깨닫고, 자신이 봉독해야 할 성서 말씀을 이해하고 깨닫는 내적인 준비를 해야 하며, 또한 봉독할때의 속도, 음량, 톤 등의 외적인 준비도 잘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독서자는 자기의 위치에서 마음을 가다듬으며 준비하다가 나와서 독서를 하기 전에 주례자에게 인사를 하고 강복을 받고, 봉독대 또는 독서대에서 다시 전례 성서와 교우들에게 인사를 하고, 말씀을 선포를 하고 그것이 끝나면 다시 인사를 하고 내려오게 된다. 사제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봉독하기 전에 합당하게 봉독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제대에 인사를 하고, 복음을 봉독하게 된다. 독서대는 제대와 마찬가지로 다른 용도로 쓰면 안된다. 그래서 한 곳에 고정을 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1독서에 대한 응답으로서 화답송을 하게 된다. 그리고 독서와 복음 환호송이 이어지게 된다. 이는 그리스도를  맞이한다는 존경의 의미에서 복음 환호송을 하게 되는데, 복음을 봉독하기 전에 사제가 하는 여러 가지 동작들, 즉 복음에 대한 친구 등의 동작들도 그리스도께 대한 존경의 표시를 드러내주기 위함인 것이다. 그리고 강론을 하게 되는데, 강론시간은 선포된 하느님 말씀을 생활에 적용시키는 시간인 것이다. 그리고 강론 후에 신앙고백이 있는데, 근본적인 신앙고백으로서 세례 때의 신앙고백인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앙 고백이 있고, 그 외에 사도 신경이 있다. 이러한 신앙고백은 우리가 지금까지 들은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최종적인 응답이다.

        보편지향기도는 처음에는 신자들의 기도라고 했다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후 새로운 용어로서, 이름 그대로 폭넓게 기도 드리는 보편지향기도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일반적으로 4가지의 지향으로 하며 6개를 넘지 말아야 한다. 보편지향기도의 지향의 순서는 넓은 차원에서 좁은 차원으로 하게되는데 예를 들면, 먼저 교회를 위하여, 그리고 지역교회나 모든 민족, 구체적으로 기도를 필요로 하는 공동체, 본당의 공동체등의 순서로 하게 된다. 이러한 보편 지향기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교우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지향하고 있다. 그래서 매일미사책에 나온 것만 그대로 보편지향기도를 하는 것보다, 그것을 참고로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을 위해서 전례에 맞게 기도를 해야한다.


(2) 성찬의 전례

        성찬의 전례 기도는 그 기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 있으며,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기도를 잘 듣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성찬의 전례를 들어가기 전에 삼중대화를 하게된다. 이는 앞으로 중요한 기도에 들어가기 때문에 다시 한번 주님의 현존을 알리고 우리의 마음을 모으며, 성찬기도가 담고 있는 의미를 미리 교우들에게 알린다는 의미에서 삼중대화를 하게 된다. 그리고 기본적인 교리의 내용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구원의 내용을 나열해 주는 감사송을 하게 되며, 이러한 감사송은 시기별로 다르다. 그리고 나서 구원에 대한 대답으로서 터져나오는 것이 '거룩하시도다'라는 환호가 나오게 된다. 이어서 축성 전에 교우들에게 이 미사가 누구에게 봉헌되는지 다시 한번 교우들에게 알리는, 즉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거룩함의 샘이시옵니다…' 그래서 이 미사가 성부께, 즉 하느님께 봉헌된다는 것임을 알리는 기도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의미를 자연스럽게 기도하며 축성 기원문을 하게 된다. 이는 성찬기도 안에서 모두 두 번 성령께 간구하게 된다. 이때 드리는 축성기도는 제대 위에 놓인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서 변화되게 해 달라고 성령의 작용을 끌어들이며 기도하는 것이다. 즉, 사제가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하며 성령을 불러들이는 기도하게 된다. 그러면서 사제는 성령의 작용을 드러내는 동작, 축성의 동작으로서 안수를 하게되고, 십자표를하게된다. 이러한 축성 기원문을 한 후에 성찬 제정 축성문을 하게 된다. 이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에 하셨던 그 말씀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양성체가 이루어진다. 거양성체는 초세기때에는 없었고 11세기 이후에 들러오기 시작했다. 이는 미사를 벽을 보고하던 시대에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변했음을 보고싶어하는 마음과 열정이 생기게 되었고 그래서 거양성체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신앙의 신비여'라는 환호를 하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기념하고 그리고 봉헌이 있게되고, 그 다음에 또다시 성령께 간구하게 된다. 즉 영성체를 하기 전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그 순간에 먼저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신자상호간에 일치하기 위하여 일치의 성령께 간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사제는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성령으로 모두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하는 성령을 끌어들이며 간구하는 일치의 기도를 하게 된다. 그래서 위와 같이 미사에 있어서 성령을 끌어들이는 두 가지 기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끝나면 폭넓게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즉 산 이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교황을 위하여, 성인 성녀를 위하여 등의 전구를 하게 된다. 그리고 위의  모든 것들이 하나의 기도문이기 때문에 마침 영광송으로서 끝을 맺게된다. 이러한 전체의 기도문에 대한 응답으로서 교우들이 아멘으로서 응답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내 마음에 모시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영성체를 하게 된다. 교회에서는 특별한 경우 외에 두 번의 영성체를 할 수있다라고 하고 있다. 물론 여러 번 해도 큰 문제는 없지만, 이러한 규정을 둔 이유는 여러 번 영성체함으로서, 그리고 영성체를 많이 하면 할 수록 큰 은혜를 받는다는 잘못된 생각, 잘못된 신심에 빠지지 않게 하게 위하여 정해 놓은 것이다. 영성체를 하는 방법은 무릎을 꿇고 하던지 서서하던지, 손으로 또는 입으로 하던지 관계는 없지만, 위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신앙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교회에서 올바른 신심과 신앙을 위해서 정해놓은 방법대로 따라야 한다. 그리고 영성체를 하기 전에 마음과 몸의 준비로서 공심재를 지키고 있다. 예전에는 자정이후부터, 그러다가 3시간 전에, 지금은 영성체 전 1시간 전에 마음과 몸의 준비로서 공심재를 지키고 있으나 이것 역시 너무 시간에 얽매이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할 수도 있다.  영성체의 방법은 본래 성체와 성혈을 함께 영하는 양형 영성체였으나 12세기 이후 성체나 성혈을 떨어뜨리는 것 때문에 특별한 경우 이외에 성체만 모시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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