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릉동성당 게시판

사순일기-아홉번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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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진 [fromrahel] 쪽지 캡슐

2002-03-25 ㅣ No.1289

오늘을 위한 기도 - 이해인

 

오늘 하루에 숲속에서

제가 원치 않아도

어느새 돋아나는 우울의 이끼

욕심의 곰팡이 교만의 넝쿨들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러하오나 주님

이러한 제 자신에 대해서도

너무 쉽게 절망하지 말고

자신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어 가는

꿋꿋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게 하소서 어제의 열매이며

내일의 씨앗인 오늘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 때는

어느 날 닥칠 저의 죽음을

미리 학습해 보는 겸허함으로

조용히 눈을 감게 하소서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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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될때 들르는 병원이 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에게 더없는 기쁨과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말이 봉사지..사실은 그곳에서 내가 되살아 나는 것을 느낀다. 누군가 본당 청년은 나더러 병원에 오니까 딴 사람같다고까지 했다.

평소보다 훨씬 밝은 표정과 농담? 에...웃음도 많아지고 목소리가 한톤 높아진다고 한다. 글쎄....내가 그랬던가...--;;

아픈 사람들이 있는 곳이 어둡고 우울할것 같지만 성가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표정이 참 밝아서 좋다.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동정심이 앞서기보다 정말로 겸손한 어른들을 많이 만나서인지 한마디 한마디 나눌때마다 내 영혼이 무언가로 가득채워짐을 느낄수 있어서 참 좋다.

그들이 모두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부르짖는것만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자기가 처한 환경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힘을 주는것 같다.

엊그제는 어느 형제님과의 대화중에 이런 얘길 듣게 되었다. 그분은 원래도 아는것이 많아 늘 새로운 재미를 주시는 분이었는데 요즘은 성서에 푹 빠져계신다고 한다.

움직이질 못해서 녹음된 테잎으로 성서내용을 수없이 반복해서 듣고 계신다고 하셨다. 대화중에 웃으시면서 "여기 아무나 못오는데예요.."그래서 "네?"라고 물었더니..

"여긴 대단한 빽이 있어야 오는데예요...내가 대학병원4년있었지만 여기만큼 사랑으로 보살펴 주는 곳이 없어요..."라고 하는것이다. 그 다음에 그분 하시는 말씀.

"여기 오는 사람들은 하느님 빽 믿구 온 사람들이예여...수녀님빽으로도 못 들어와요..."하느님 빽 없는 사람은 여기 못 들어와요" 하며 빙그레 웃으셨다.

유독 표정이 밝으신 그분..누워서 본인의 몸 어느부위도 스스로 맘껏 움직이지 못하시고 봉사자의 손길이 닿아야 밥한술이라도 뜨시는 분인데 그 미소의 이유를 알것 같았다.

 

기껏해야 내가 병원에 들르는 시간은 하루도 채 안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어느새 그 나머지 나의 시간들을 움직이게 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병원에 가는 날 하루를 위해서 나머지 엿새를 더욱 열심히 보내다보면 가슴이 벅차온다...나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최근들어 나는 집에 계신 울 아부지 흉을 보았다. 태어나서 한번도 이렇게 미워해본적이 없었는데 나이가 드시고...뭔지 모르게 약해지시는 모습이 도저히 받아들이기가 싫었나부다. 항상 논리정연하고 합리적이고...인간적이고...남들은 어떤지 몰라도 적어도 내겐 참으로 존경스러운 아빠였는데 회사를 그만두시고부터는 사소한 일에 집중하시고....잔소리가 많아지셨다. 아빠가 줄어드는 모습이 너무나 싫었는데도 불구하고 이제 너무나 많이 줄어들어버리신 아빠에게 말대답만 많이 했었다. 어려서부터 아침과 저녁에만 잠깐씩 만나서 그런지 낮시간에도 아빠를 집에서 보고 있는 것이 이상했고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아빠의 모습과 많이 다르게 느껴졌다. 사춘기 이후로 이렇게 많이 말대답? 을 한 때가 없었던 것 같다.

병원에 가면 더없이 친절하고 밝은데 집에서는 너무나 못된 딸이다보니 스스로 숨통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정말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이 더 큰데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내가 왜 그렇게 흥분했었는지 묵상을 할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 어제 저녁엔 기분 좋게 술을 드시고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네가 아빠를 기준으로 삼으면 안돼..너희와 나는 세대가 다른데 똑같이 비교해봤자 당연히 네가 낫지. 더 나은 삶을 살라고 충고하는건데 넌 겨우 아빠만큼 될꺼니?

더 큰 사람 되려면 스스로 자꾸자꾸 점검하고 노력해야지...다른거 없다...너 잘 되라구 하는 말이지 뭐.." 시선을 맞췄다가는 울어버릴 것 같아서 그냥 텔레비젼만 쳐다보면서 대충 듣는척 했다. 병원에 다니다보면 감춰졌던 나의 못된 모습들이 투명하게 비춰진다. 썩은 이를 발견하는것처럼...갈때마다 새롭게 내가 변해야 할 모습을 하나씩 깨닫게 된다.

다행히 하느님은 내게도 선한 마음을 주셔서...이제 더이상은 지금의 나의 모습을 외면하지 못하게 하셨다.

’오늘’이라고 하는 귀한 시간 속에 또한번 나를 사랑으로 일깨워주심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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