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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를 알고 싶으신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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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현우 [dohshim] 쪽지 캡슐

2001-03-11 ㅣ No.2037

신유박해 200주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작은 관심을...

 

† 신유교난(1801년)

 

정조 임금 때는 이렇다 할 박해가 없었으며, 중국인 주문모 신부 이하 신도수가 1만여 명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순조가 즉위하자 순조의 조모인 대왕대비 김씨가 실권을 잡고 전 시대의 실권자인 시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시파와 가까웠던 천주교 신도들을 탄압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주문모 신부와 3백여 명의 신도들이 순교하였습니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후 1834년에 유방제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 조선교회는 성직자 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나 신도들의 열성으로 1831년에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빠리외방전교회가 전교를 맡게 됨으로써 새로운 활기를 띠어 신도수가 9천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836년에는 김대건 등 신학생들이 유학을 떠났습니다.

 

☞ 척사윤음

 

’척사윤음’은 1802년(신유박해), 1839년(기해박해), 1866년(병인박해), 1881년(신사년) 등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반포되고 있습니다. 이는 천주교 신자에 대한 대대적인 피의 박해를 일으켰고, 그 때마다 조선교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피해와 함께 수많은 순교자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척사윤음이란 뭘까? 한마디로 척사위정(斥邪衛正)이라는 유교적 이념에 근거,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규정하고 천주교도들을 박해하기 위해 내려진 왕의 유시(諭示)입니다. 조선왕조의 공식·비공식 박해는 결국 척사윤음에 터전하고 있으며, 박해를 전후해 항상 척사윤음이 내려졌습니다.

신유박해가 종결될 때인 1802년 1월 25일 내려진 첫 척사윤음인 신유척사윤음은 대제학 이만수가 작성한 것으로 ’토역반교문(討逆頒敎文)’이란 이름이 붙어 있으며, 유교의 근본이념을 전제로 신유박해 상황 및 결과를 중심으로 서술했습니다. 검교제학 조인영의 기해척사윤음(1839년 12월 16일)은 기해박해를 마무리하며 태조 이후 역대 왕의 교서 등을 근거로 척사위정을 옹호하고 있으며, 예문제학 신석희의 병인척사윤음(1866년 9월 12일)은 병인박해와 제너럴 셔먼호 사건으로 인해 내려졌습니다. 신사척사윤음(1881년 8월7일)은 천주교와 서양세력을 배척하는 전국 유생들의 격렬한 상소 때문에 내려졌고 원본 뒤에는 한글 해석이 첨부돼 있어 이채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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