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꼭필독] 애덕의 결여/부재(cupiditas)는 모든 죄의 뿌리-1티모테오6,10; 1요한2,15[교리용어_cupiditas][_사랑][_악의] 773_love curiosi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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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21(최초작성일자) [218.55.90.*] 2013-08-29 ㅣ No.1437
각 복음서에 보면 하느님과 재물을 같이 섬길 수 없다고 나옵니다. 이 말은 부자가 되면 하느님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인지요? 헷갈립니다. 부자가 되더라도 하느님을 모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요? --------------------
당부의 말씀:
답변:
+ 찬미 예수님!
1. 들어가면서 마태오 복음서 6,24와 루카 복음서 16,13 을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우선적으로, 아래에 발췌한 해당 구절에 있어 앞의 문장들이 제일 마지막 문장에 대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으며, 따라서 주신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생각입니다:
(발췌 시작)
(루카 16,13)
2.
(발췌 시작)
(1티모테오 6,17-19)
[내용 추가 일자: 2016년 1월 30일] ----- (*) 게시자 주: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라틴어 원문 및 영어본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IIae, q84, a1에 주어진 설명에 의하면, 여기서 말하는 "악(evil)"은, 소위 말하는 "윤리적 악(moral evil)", 즉, "죄(sin)"를 말하므로, 여기에서의 표현과 아래의 해당 표현을 오늘 날짜로 바로잡았습니다. ----- [이상, 내용 추가 끝]
2-2. 바로 위의 제2-1항에 발췌한 1티모테오 6,10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홀수해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제1독서(1티모테오 6ㄷ-12)에 포함되며, 이 제1독서의 제10절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ot_24_fri.htm
3.
왜냐하면, 물욕(物慾)은 곧 돈에 대한 욕망(desire)이기 때문입니다. 즉, 돈을 사랑하는(love) 자는 세상을 혹은 세상 안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love) 자이고, 그리고 그 역도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1티모테오 6,10의 첫 번째 문장은 다음의 문장과 논리적으로 등가입니다:
사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윤리적 악(즉, 죄)의 뿌리입니다.
(발췌 시작)
3-2. 바로 위의 제3-1항에 발췌한 1요한 2,15-17은,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매년 12월 30일 제1독서(1요한 2,12-17)에 포함되며, 이 제1독서의 제15-17절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Dec30.htm <----- 필독 권고 (이상, 주신 질문에 대한 답변 끝)
4.
4-1. 우선적으로, 1요한 2,15에서, "세상에 대한 사랑(the love of the world)" 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the love of God)" 이라는 언급과 함께, 이들 두 종류의 사랑(loves)들이, 곧바로 이어지는 1요한 2,15의 마지막 문장에서, 논리적으로 서로를 포함하지 않는, 서로 배타적임을 밝히고 있음에 크게 주목하십시오.
4-2. 그리고 이들 두 종류의 사랑(loves)들이, 논리적으로 서로를 포함하지 않는, 서로 배타적임은 다음에 발췌한 야고보서 4,4의 두 번째 문장이 또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발췌 시작)
게시자 주: (1) 이 글의 제3항과 제4항에서 언급되고 있는 "세상(world)" 이라는 차용된 번역 용어의 의미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의 결과로 인한, "현재의 나약하고 부패한 세상" (이사야 13,11) 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더 자세한 글은 다음에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84.htm <----- 필독 권고
(2) 그러므로 위의 제2-1항에 발췌된 1티모테오 6,10의 첫 번째 문장[따라서, 참인 명제(true statement)](*)은 다음의 각각의 명제와 논리적으로 등가입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윤리적 악[즉, 죄]의 뿌리입니다(1티모테오 6,10). 사실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윤리적 악[moral evil, 즉, 죄(sin)]의 뿌리입니다. 사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모든 윤리적 악[즉, 죄, 즉, 악행]의 뿌리입니다. 사실 하느님을 미워하는 것이 모든 윤리적 악[즉, 죄(sin), 즉, 악행]의 뿌리입니다. 사실 하느님을 덜 사랑하는 것이 모든 윤리적 악[즉, 죄, 즉, 악행]의 뿌리입니다. 사실 애덕(caritas)의 결여/부재(cupiditas)가 모든 윤리적 악[즉, 죄(sin)]의 뿌리입니다. Radix malorum est cupiditas (1티모테오 6,10).
사실 애덕(caritas, charity)은 모든 윤리적 선(moral good, 즉, 선행)의 뿌리입니다.
[내용 추가 일자: 2016년 1월 30일] ----- (*) 게시자 주: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라틴어 원문 및 영어본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IIae, q84, a1에 주어진 설명에 의하면, 여기서 말하는 "악(evil)"은, 소위 말하는 "윤리적 악(moral evil)", 즉, "죄(sin)"를 말하므로, 아래의 해당 표현을 오늘 날짜로 바로잡았습니다. ----- [이상, 내용 추가 끝]
5.
(발췌 시작)
5-2.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 즉, "애덕(charity)"을 우리의 심장(heart)에 가지게 되는 성경 근거가 왜 로마서 5,5인지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주소에 있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가해 사순 제3주일 제2독서(로마 5,1-2.5-8)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읽도록 하십시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of Hippo, 354-430년)의 가르침을 학습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a_lent_3.htm <----- 필독 권고
6.
특히 이 구절들과 관련하여, 원죄(original sin)의 결과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계심에 주목하십시오.
이성적 피조물들의 사랑(愛, love)은, 정의에 의하여(by definition), 어떤 대상(an object)에 대한 어떤, 통제를 벗어난, 욕망(a desire)인데 [주: 인간들의 경우에 있어, 사랑(love)이, 여기를 클릭하면 읽을 수 있는, 정(情, passions)들 중의 하나임을 상기하라], 아담(Adam)과 하와(Eve)가 원죄를 범한 이후부터, 원죄의 즉각적인 한 결과로서, 이 사랑(love)의 대상 자체가 크게, "하느님(God)" 과 "세상(the world)", 이렇게 둘로 그리고 서로 배타적으로 구분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래에 발췌한 문장들에서는 그 대상이 오로지 "세상"인 경우만을 다루고 있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audiences/alpha/ (발췌 시작)
'세상의 죄(the sin of the world)' 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이 성 요한의 복음서에서 발견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요한 복음서 1,29). 전례 정식은 "세상의 죄들" 이라고 말합니다. 성 요한의 첫 번째 서간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표현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나(reads):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the love of Father)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삶의 교만(the pride of life)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1요한 2,15-16). 그리고 다음과 같이 여전히 더 혹독하게: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1요한 5,19).
How are we to understand these expressions about the "sin of the world"? The passages quoted clearly indicate that here it is not a case of the "world" as a creation of God, but as a specific dimension, almost a spiritual space closed to God, in which evil arises on the basis of created freedom. This evil transferred into the "heart" of our first parents under the influence of the "ancient serpent" (cf. Gen 3 and Rev 12:9), that is, Satan, "the father of lies," has borne evil fruits from the beginning of human history. Original sin has left in its wake that "spark or incitement of evil desire," that is, the threefold concupiscence, which induces people to sin. In their turn the many personal sins that are committed form a kind of "environment of sin." This creates the conditions for new personal sins and in a certain way induces and attracts individuals to sin. Therefore "the sin of the world" is not to be identified with original sin, but it is, as it were, a synthesis or summing up of the consequences of original sin in the history of each generation and so in the whole history of humanity. From this it also follows that the various human initiatives, tendencies, achievements and institutions, even in those "ensembles" which constitute cultures and civilizations, bear a certain imprint of sin. In this sense one can perhaps speak of a sin of the structures as a kind of "infection" which is spread from human hearts into the environments in which they live and into the structures which support and condition their existence.
"세상의 죄" 에 관한 바로 이러한 표현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지요? 발췌된 단락들은 분명하게 다음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죄는 하느님의 어떤 피조물로서 "세상"의 경우가 아니라, 그 안에서 창조된 자유로운 상태(created freedom)를 기반으로 악(evil)이 일어나는(arises), 거의, 어떤 구체적인 양상으로서, 하느님을 향하여 닫혀진 어떤 영적 공간(a spiritual space)의 경우를 말합니다. 바로 이 악이 "고대의 뱀(ancient serpent)" 의 영향 아래에서 우리의 첫 부모들의 "심장(heart)" 안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창세기 3장과 요한 묵시록 12,9 참조), 즉, "거짓말들의 아비(the father of lies)"인 사탄(Satan)이 인간 역사의 처음부터 악한 열매(evil fruits)들을 이미 낳았습니다(has borne). 원죄(original sin)는, 이 죄의 결과로서, 사람들을 죄로 유도(誘導)하는(induces), "악한 욕망의 불꽃(spart) 혹은 자극(incitement)", 즉, 삼중의 사욕편정(私慾偏情)(the threefold concupiscence) 바로 그것을 이미 남겼습니다. 그들의 차례로(in their turn) 범하게 되는 많은 본죄(personal sins)들은 "죄의 환경(environment of sin)" 의 어떤 종류를 형성합니다. 바로 이 환경이 새로운 본죄들을 위한 조건(condition)을 창조하며 그리고 어떤 구체적인 방식으로 개인들을 죄로 유도하고(induces) 그리고 유인합니다(attracts). 그러므로 "세상의 죄" 는 원죄와 동일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죄는, 말하자면, 각 세대의 역사에 있어 그리하여 마찬가지로 인류의 전체 역사에 있어 원죄의 결과들의 어떤 종합(synthesis) 혹은 요약(summing up)을 말합니다. 바로 이 죄로부터 다양한 인간의 주도(initiatives)들, 경향(tendencies)들, 성과(achievements)들 그리고 제도(institutions)들이, 심지어 문화(cultures)들과 문명(civilizations)들을 구성하는 바로 그러한 "앙상블(ensembles)" 들 안에서, 죄의 어떤 구체적인 누른 자국(imprint)을 지니는 것이 또한 뒤따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로 우리는 아마도, 인간의 심장들로부터 그 안에서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들 안쪽으로 그리고 그들의 존재를 지탱하는(support) 그리고 좌우하는(condition) 조직들 안쪽으로 퍼지게 되는 "전염병(infection)"의 어떤 종류로서, 조직(structures)들의 어떤 죄에 대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6-2. 다음은,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of Hippo, 354-430년)의 1요한 2,12-17에 대한 강론[제목: Homily 2 on the First Epistle of John, 저술 시기: 407-409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1: http://www.newadvent.org/fathers/170202.htm (영문본) (발췌 시작)
8. 나의 형제들이여, 이들 일들 모두가, 즉, "처음부터 계신 그분을 여러분이 알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강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아버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1요한 2,14 참조), 이들 모두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지식을 권고함과 동시에, 애덕(charity)을 권고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면, 사랑하도록 합시다: 이는 애덕 없이 지식은 구조하지(save) 않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애덕은 성장하게 합니다" (1코린토 8,1). 만약에 그대가 고백할 마음은 가지고 있으나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마귀(the demons)들 처럼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귀들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고백하였으나, 그러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마태오 복음서 8,29) 라고 말하였으며, 그리고 거절하였습니다(repulsed). 고백하고 그리고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자신들의 부정 행위(iniquities)들 때문에 두려워하였던 자들의 경우에, 그대들(ye)은 그대들의 부정 행위들을 용서하시는 그분을 사랑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세상을 사랑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는지요? 그러므로 그분께서는 애덕에 의하여 살아가게 되도록 우리를 준비하게 하십니다. 다음과 같이 두 개의 사랑(loves, amoers)들이 있으며: 세상에 대한 사랑(mundi),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Dei), 그리고 세상에 대한 사랑(mundi amor) 안에서 살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amor Dei)이 안으로 들어올 길(way)이 전혀 없으므로, 세상에 대한 사랑이 길을 비켜주도록 하여, 그리하여 하느님에 대한 사랑 안에서 살도록 하십시오. 그대는 세상을 사랑하였는데, 세상을 사랑하지 않도록 하고, 그리고 그대가 세속의 사랑(earthly love)으로 이루어진 그대의 심장(heart)을 이미 비웠을 때에, 그대는 신성적 사랑(love Divine, amorem divinum)을 반드시 들이마실 것이며, 그리하여 바로 거기서부터 애덕(caritas)이 그대 안에 살기 시작하는데, 애덕으로부터는 악(evil)의 어떠한 것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정리를 하는 자의 방식으로 어떻게 그분께서 일을 시작하시는지, 그분의 말씀들을 경청하도록 하십시오. 그분께서는, 그분께서 차지하실 어떤 들판으로서, 사람들의 심장들로 오시나, 그러나 어떠한 상태로 그분께서는 이 들판을 발견하실까요? 만약에 그분께서 한 숲(a wood)을 발견하시면, 그분께서는 그것을 뿌리째 뽑으시고, 그리고 만약에 이 들판이 개간되어 있음을 발견하시면, 그분께서는 그것을 심으십니다. 그분께서는 거기에, 애덕(charity) 이라는 한 그루의 나무(a tree)를 심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뿌리째 뽑아버릴 숲은 무엇일까요? 바로 세상에 대한 사랑(the love of the world, Amorem mundi)입니다. 이 숲의 뿌리째 근절자(rooter up)이신, 그분을 경청하도록 하십시오! "세상도 사랑하지 마십시오(Nolite diligere mundum)" (이것을 위하여 다음의 것이 옵니다)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dilexerit mundum),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the love of the Father, dilectio Patris)이 없습니다." (1요한 2,15).
9. You have heard that "
9. 그대는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the love of Father, dilectio Patris)이 없습니다." 를 이미 들었습니다. 형제들이여, 누가 자신의 심장 안에서 이것이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게 합시다, 이는 하느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시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 사도에 의하여 성령께서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에, 더한 어떠한 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the love of Father)이 없습니다." 그대가 성자와 함께 공동 상속자(joint-heir)가 되기 위하여 그대는 성부에 대한 사랑을 가져 주시겠습니까? 세상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그대가 하느님에 대한 사랑(the love of God)으로 채워지도록, 세상의 악한 사랑(the evil love of the world)을 못 들어오게 하십시오. 그대는 한 개의 그릇(a vessel)이나, 그러나 지금까지는 그대는 가득 차있습니다. 그대가 가지지 못한 바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대가 가지고 있는 바를 밖으로 쏟으십시오. 확실하게, 우리의 형제들은 이제 물로부터 그리고 거룩한 영(the Spirit)으로부터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우리도 또한 얼마 전에 물로부터 그리고 거룩한 영으로부터 다시 태어났습니다. 성사(the sacraments)들이 우리 안에, 구원(salvation)까지 굳세게 함의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저주(damnation)까지 남아있지 않도록,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을 위하여 선(good)한 것입니다. 구원까지 굳세게 하는 바로 그것은 애덕(charity)의 뿌리를 가지는 것, 단지 "형식(the form)" 만이 아니라, "신심의 힘(the power of godliness)" (2티모테오 3,5)을 가지는 것입니다. 선(good)은 형식(the form), 오로지 형식인데, 그러나 이 형식이, 만약에 그 뿌리를 붙들지(hold) 않고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지요? 잘려 나간 가지는, 불 속으로 던져지는 것이 아닌지요? 이 형식을 가지되, 반드시 그 뿌리 안에서 가지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그대가 뿌리째 뽑히지 않기 위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그대가 뿌리박혀져야 할까요? 사도 바오로(Paul)가 "사랑(charity)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에페소 3,17) 라고 말하듯이, 애덕(charity)을 붙잡고 있음으로써 입니다. 애덕이, 세상에 대한 사랑(the love of the world)이라는 너무 자란 황야(wilderness) 한 가운데서, 거기에 어떻게 뿌리박혀져야만 할까요? 이 숲의 제거를 분명하게 하십시오. 한 개의 힘센 씨앗(a mighty seed)을 그대(you)가 이제 막 뿌리려고 하는데, 이 들판에 이 씨앗을 질식시킬 것이 있지 않도록 하십시오. 다음의 말들은 그가 이미 말하셨던 뿌리째 뽑는 말들입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the love of Father)이 없습니다." (1요한 2,15).
10. "
10. "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삶의 교만(the pride of life)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1요한 2,16-17) 라고, 성부로부터가 아니고 세상으로부터인, 세 가지 일들을 그는 이미 말하였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의지/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바로 당신께서 영원히 남듯이. 제가 왜 하느님께서 만드셨던 바를 사랑하지 않아야 합니까? 그대는 무엇을 할 것입니까? 그대는 시대 풍조의, 그리고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사물들을 사랑할 것인지요, 아니면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그리하여 하느님과 함께 영원을 향하여 살 것인지요? 일시적인 사물들로 구성된 강(river)은 우리를 함께 서두르게 하나, 그러나 싹이 튼 한 그루의 나무처럼 이 강 옆에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당신께서는 육을 취하셨고, 죽으셨으며, 다시 일어나셨고, 하늘로 오르셨습니다. 시간의 사물들로 이루어진 강 옆에, 어떤 방식으로, 당신 자신을 심으셨던 것은 당신의 의지/뜻였습니다. 곤두박이의 심연(深淵)을 향하여 하류로 돌진하고 있는 중입니까? 이 나무를 꽉 붙잡으십시오. 세상에 대한 사랑이 그대를 계속하여 현기증을 일으키게 하고 있는지요? 그리스도륵 꽉 붙잡으십시오. 이는 그대를 위하여 그대가 영원하게 될 수 있도록 당신께서 일시적인 것이 되셨기 때문이며, 그리고 여전히 영원한 것으로 머물러 계시기 위하여, 당신께서 또한 그러한 종류 안에서 일시적인 것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영원성으로부터 어떤 것이 나온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이 시간으로부터 당신께 추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일시적인 것으로 태어나게 되었으며, 그리고 죄에 의하여 일시적이 되었습니다: 그대는 죄에 의하여 일시적이 되었으나, 당신께서는 자비로써 죄들을 용서하기 위해 일시적이 되셨습니다. 범죄자와 그를 방문하신 당신께서, 둘이 한 개의 감옥에 있을 때에, 이 차이가 얼마나 큰지! 이는 때가 되었을 때에 한 위격(a person)께서 자신의 친구에게 오시어 그를 방문하기 위하여 도착하시며, 그리고 둘 다는 감옥에 있는 것 같으나, 그러나 그들은 어떤 광대한 차이점에 의하여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명은 아래로 압박(presses)들을 야기시키나, 다른 분께서는, 거기에 인성(humanity)을 이미 가져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죽음에 이르는 상태 안에서, 우리는 바로 이러한 우리의 죄있는 상태(mortal state)에 의하여 꽉 붙잡혀 있었는데, 당신께서 자비 안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억압자가 아니라 유일한 구속주(a Redeemer)이신 당신께서 포로들에게 들어오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당신의 피를 흘리셨고, 우리를 구속/속량하셨으며, 우리의 희망을 바꾸셨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육의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운명(the mortality of the flesh)을 가지고 있으나, 미래의 불사(immortality)를 신용으로(upon trust) 취하며, 그리하여 바다에서 우리가 파도들에 의하여 내던져지나, 그러나 우리는 땅 위에 이미 고정된 희망이라는 닻(anchor of hope)을 가지고 있습니다.
11. But let us "
11.그러나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말도록" 합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삶의 교만(the pride of life)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바로 이들 셋이 그들이며, 우연히 어느 사람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 즉 하늘과 땅, 바다, 그리고 해와 달, 별들, 하늘들의 장식물 모두를, 하느님께서 만드셨습니다. 바다의 장식물은 무엇인가요? 기어다니는 사물들 모두. 땅의 장식물은 무엇인가요? 동물들, 나무들, 날아다니는 피조물들. 이들은 '세상 안에' 있는데, 하느님께서 그들을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왜 하느님께서 이미 만드셨던 바를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까?" 라고 말할까 염려하여서 입니다. 그대가 이들 사물들 모두가 선(good)임을 보기 위하여 하느님의 거룩한 영께서 그대 안에 계시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만약에 그대가 만들어진 사물들을 사랑하면서, 그러나 그들의 창조주(Maker)를 저버릴 때에는 언제나, 그대에게 슬픔입니다! 그들은 그대에게 공평한데(fair), 그러나 그들을 형성하셨던 분께서는 얼마나 더 공평하실 것인지! 친애하는 여러분, 잘 주목하십시오. 이는 다음과 같이 비유(similitudes)들에 의하여 그대가 교육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그가 늘 말하는 바, 즉, 하느님의 피조물 안에서 그대의 향유(enjoyment)를 취하도록 하십시오, 무엇 때문에 그분께서 그러한 사물들을 오로지 그대의 향유를 위하여 만드셨지요? 를 말하면서, 그대에게 살며시 다가올까(steal upon) 염려하여서 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스스로 술취하게 되도록 술을 마시며, 그리하여 소멸하는데,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자신들 고유의 창조주를 망각합니다: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탐욕적으로(lustfully) 창조된 사물들을 사용하는 동안에, 창조주께서는 멸시를 당하시는 것입니다(is despised). 그러한 것에 대하여 이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은 ...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 받으실 분이십니다" (로마 1,25). 하느님께서는 그대가 이들 사물들을 사랑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으십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blessedness)을 위하여 그대의 애정(affections)들을 그들 위에 설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대가 그대의 창조주를 사랑하도록 함이라는, 바로 이 끝(end)을 향하여 그들을 허락하시고 그리고 칭찬하십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나의 형제들이여, 신랑이 자신의 신부를 위하여 한 개의 반지를 마련하여야 하는 것처럼, 이 반지를 이미 받은 신부가 그녀를 위하여 이 반지를 마련하였던 신랑을 그녀가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이 반지를 사랑한다면, 그녀의 영혼은, 비록 그녀가 신랑이 그녀에게 주었던 바를 오로지 사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랑의 바로 그 선물 안에서 불륜에 대한 유죄(guilty of adultery)가 발견된 것이 아닙니까? 확실하게 신랑이 주었던 바를 그녀가 사랑하게 하십시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에 그녀가 "이 반지는 나를 위하여 충분하며, 나는 이제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을 원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면, 그녀는 여성의 어떤 종류인 것입니까? 그대가 사람 대신에(in place of) 금(gold)을 사랑한다는 것은 신랑 대신에 한 개의 반지를 사랑하는 것인데, 만약에, 그대가 그대의 신랑 대신에 한 개의 반지를 사랑하여, 그리하여 그대의 신랑을 보는 것을 바라지 않는 바로 이것이 그대 안에 있다면, 그가 그대에게 어떤 진심을 이미 주었음이, 그대를 그에게 맹세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그대의 심장을 외면하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신랑이 자신의 진심 안에서 그 자신이 사랑받기 위한 바로 이것을 위하여 신랑은 진심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그대에게 이러한 사물들 모두를 주셨는데, 그들을 만들어주신 그분을 사랑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분께서 그대에게 기꺼이 제공하시는 것 이상의 것, 즉, 이러한 사물들을 만드셨던 그분의 바로 그 거룩한 자신(Self)이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대가, 하느님께서 그들을 만드셨다 해서 어쨌다는 것인가 하면서, 이들을 사랑하나, 그러나 창조주를 무시하고 그리고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대의 사랑은 간통이라고 간주되지 말아야 할까요?
12. For "
12. 이는 "세상(the world)"는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 바다, 가시적 및 비가시적 사물들로 만드셨던 바로 그 체제(fabric)에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세상의 거주자들은, 우리가 벽들과 그 안에 거주하는 그들 둘 다를 "집(house)" 라고 부르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세상이라고 불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가 어떤 집을 칭찬하고, 그리고 거주자들의 흠을 찾아냅니다. 우리가 어떤 선한 집(a good house)이라고 말할 경우에, 왜냐하면 그것이 대리석 무늬가 넣어졌으며 그리고 아름답게 천장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그리고 또다른 의미에 있어, 다음의 경우들에 있어, 우리가 어떤 선한 집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에 있는 어느 사람도 해를 당하지 않고, 거기에서 아무런 약탈 행위들도, 아무런 억압 행위들도, 거기에서 행하여지지 않을 경우. 그런데 우리는 건물이 아니라, 이 건물의 안쪽에서 거주하는 자들을 칭찬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과 저것 둘 다를 집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 모두가, 왜냐하면, 하늘에 거주하는 자들이 땅 위에서 육으로 걷는 동안에 그들의 심장이 높은 곳에 있는 하늘에 거주하는 자들과 꼭 마찬가지로, 사랑 때문에(by) 그들이 세상에 거주하는 자들이기 때문인데,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저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 모두가 세상이라고 불린다고 말합니다. 동일한 자들이 오로지 "육의 욕망, 눈의 욕망,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 이라는 세 개의 사물들을 가집니다. 이는 그들이 먹고, 마시고, 동거 생활하며(cohabit), 그리고 이들 즐거움(pleasures)들을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확실하지 않게, 이러한 사물들에 있어 허락된 척도(measure)가 전혀 없는 것, 혹은 이러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해질 때에, 그것은 그대는 먹어서도 아니 되고, 마셔서도 아니 되며, 혹은 자녀들을 낳아서도 아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입니까? 이것이 말해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사물들이 그들에 대한 그대의 사랑함에 의하여 그대를 속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창조주 때문에, 척도가 있도록 하십시오, [이것은] 그대가 사용하기 위하여 가져야만 하는 것을 그대가 향유(enjoyment)를 위하여 사랑할까(love) 염려하여서 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두 사물들이 그대에게 제시된(propounded) 때를 제외하고는, 이것 혹은 저것을 시험해 보지 말아야 하는데, 그대가 의로움(righteousness) 혹은 이득(gains)들을 의도하는 것입니까(will)? 저는 그것으로 살려고 하지 않고, 그것으로 먹으려고 하지 않으며, 그것으로 마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대가 불공정(inequity)에 의하여 이외에는 이들을 가질 수가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대가, 불공정에 의하여 자기 자신을 잃는 것보다, 잃지 않는 것을 사랑하는(love)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닐까요? 그대가 황금의 이득을 보면, 그대는 신앙의 상실(the loss of faith)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그가 우리에게 말하는, "육의 욕망", 즉, 음식, 그리고 육욕적 동거(carnal cohabitation), 그리고 다른 그러한 것들 모두와 같은, 육(flesh)에 적절한(pertain to) 바로 그러한 사물들을 추구하여 갈망함(lusting after)입니다.
13.
13. 그리고 "눈의 욕망:" "눈의 욕망" 으로써, 그는 모든 호기심(curiosity)을 의미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호기심의 범위가 얼마나 넓은지! 이것은 구경꺼리들에서, 극장들에서, 악마의 감추어진 일(sacraments of the devil)들에서, 마술적인 기술(magical arts)들에서, 어두움을 다루는 행위들에서, 동요하는(works) 바로 그것을 말하는데, 호기심 바로 그것입니다. 때로는 이것은 하느님의 봉사자들을 유혹하는데(tempt), 그리하여 그 결과 그들이 어떤 기적을 행하는 것을, 그분께서 기적들을 행하심에 있어 그들의 기도들을 들으실 것인지 하느님을 시험하는(tempt) 것을, 바라는데, 그것은 호기심이며, 이것이 바로 "눈의 욕망"이며, 그것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하느님께서 힘을 이미 주셨다면, 기적을 행하십시오, 이는 그분께서 당신의 방식으로 그것을 행하도록 이미 배치하셨기 때문이며, 그리고 이는 기적들을 행한 적이 없는 자들이 하느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에 적절하지(pertain to)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도록 하기 위하여서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마귀들이 그들에게 복종하였음을 즐거워 하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지요?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루카 복음서 10,20). 그분께서는 그 안에서 당신 또한 기뻐하시는 바로 그 안에서 사도들로 하여금 기뻐하도록 하십니다. 만약에 그대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지 않는다면 진실고 그대에게 슬픔이라! 만약에 그대가 죽은 이들을 일으키지 못한다면 그대에게 슬픔입니까? 만약에 그대가 바다 위를 걷지 못한다면 그대에게 슬픔입니까? 만약에 그대가 마귀들을 쫓아내지 못한다면 그대에게 슬픔입니까? 만약에 그대가 그들을 행할 힘들을 이미 받았다면, 이 힘을, 뽐내지 않고, 겸손하게 사용하십시오. 이는 심지어 특정한 거짓 예언자들에 대하여서도 주님께서 "그들이 큰 표징과 기적(prodigies, 경이)들을 일으킬 것이다" (마태오 복음서 24,24) 라고 이미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야망(ambition of the world)"이 없도록 합시다, 이는 자만(pride)이 바로 Ambitio sæculi (세상에 대한 야망) 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명예(honours)들 안에서 자기 자신을 중히 여기고자 바라며, 그리고 그는, 부(riches) 때문이건, 혹은 어떤 힘 때문이건, 자기 자신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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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therealpresence.org/dictionary/c/c654.htm (발췌 시작) CURIOSITY
The natural tendency of the human mind to seek knowledge. But this tendency needs to be controlled, no less than other urges of fallen human nature in order to conform to right reason and faith. (Etym. Latin curiosus, attentive, inquisitive.) 호기(好奇)/호기심(好奇心)(curiosity) 지식(knowledge)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human mind)의 자연적 성향(natural tendency)을 말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성향은, 올바른(right) 이성(reason) 및 신앙(faith) 쪽으로 부합하도록(conform to), 타락하게 된 인성(human nature, 인간의 본성)의 다른 충동(urges)들과 마찬가지로(no less than), 통제될 필요가 있습니다. (어원. Latin curiosus, attentive, inquisitive.) -----
14. These three there are, and you can find nothing whereby human cupidity can be tempted, but either by the lust of the flesh, or the lust of the eyes, or the pride of life. By these three was the Lord tempted of the devil. (Matthew 4:1-10). By the lust of the flesh He was tempted when it was said to Him, "
14. 이들 세 개가 거기에 있으며, 그리고, 육의 욕망, 눈의 욕망, 혹은 삶의 교만(the pride of life) 이들 중의 하나에 의하여서를 제외하고는(but), 그것에 의하여 인간의 애덕이 아닌 사랑(human cupidity)이 유혹받을 수 있는 어떠한 것도 그대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들 셋에 의하여 주님께서는 악마에 의하여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마태오 복음서 4,1-10). 그분께서 당신의 단식 후에 시장하였을 때인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시오" 라고 그분께 말해졌을 떄에, 육의 욕망에 의하여, 그분께서는 유혹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유혹자에게 무슨 방식으로 답변하셨으며, 그리고 그분의 병사에게 어떻게 싸우라고 가르치셨는지요? 그분께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를 주목하십시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그분께서는, 그가 그분께,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라고 말하였을 떄에, 한 개의 기적과 관련하여 눈의 욕망에 의하여 또한 유혹받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유혹자에 저항하셨는데, 이는 이 기적을 행하는 것이, 오로지 굴복하였거나, 혹은 호기심에서부터 그것을 행하였을 것 둘 중의 하나인 것처럼 생각되어졌을 것이기 떄문인데, 이는 그분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약한 자들을 치유하심과 같이, 하느님으로서, 그분께서는 하고자 하실 때에,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만약에 그분께서 그것을 그 때에 행하셨더라면, 그분께서는 오로지 한 개의 기적을 행하시는 것만을 바라신 것으로 생각되어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바로 이것을 생각할까 염려하시면서, 그분께서 답변하셨던 바를 주목하면서, 그리고 그대에게 비슷한 유혹이 있을 때에,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십시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즉, 만약에 제가 이것을 행하면 제가 하느님을 유혹하는 것일 것입니다. 이 원수가 그대에게 "그대는 사람의 어떤 종류, 그리스도인의 어떤 종류인가? 지금까지 그대가 한 개의 기적을 행하였는가, 혹은 그대의 기도들에 의하여 죽은 자들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혹은 그대가 열병에 걸린 자들을 치유한 적이 있는가? 만약에 그대가 진실로 조금이라도 중요한 순간에 있었더라면(of any moment), 그대는 어떤 기적을 행하였을 것인데." 라고 넌지시 말할(suggests) 때에, 다음과 같이 답변하고 말하십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그러므로, 만약에 제가 한 개의 기적을 행한다면 마치 제가 하느님께 속하듯이, 그리고 제가 아무런 기적도 행하지 못한다면 하느님께 속하지 않는듯이, 저는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을 것인데, 그리고 그렇다면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라는 당신의 말씀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삶의 교만(the pride of life)" 에 의하여 주님께서는 어떻게 유혹받으셨는지요? 그가 그분을 어떤 높은 장소로 운반하였을 때에, 그분께 "당신이 땅에 엎드려 나에게 경배하면 저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라고 말하였습니다. 한 개의 세속의 나라의 거만함(loftiness)으로써 그는 모든 세상들의 거룩한 임금(King)을 유혹하는 것을 바랐으나, 그러나 하늘과 땅을 만드셨던 주님께서는 악마를 발 아래에 짓밟으셨습니다. 악마가 주님에 의하여 정복되는 것이 무슨 커다란 일입니까? 그렇다면 그분께서는 악마에게 하셨던 답변에서 무슨 답변을 하셨으며 그리고(but) 그분께서는 그대가 하여야 하는 어떤 답변을 그대에게 가르치셨는지요?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이들 사물(these things)들을 꼭 붙잡고서, 그대는 세상에 대한 사욕편정(私慾偏情)(the concupiscence of the world)을 가져서는 아니 됩니다: 세상에 대한 사욕편정을 가지지 않음으로써, 육의 욕망, 혹은 눈의 욕망, 혹은 삶의 교만(the pride of life) 어느 것도 그대를 복종시키지 못할 것이며, 그리하여, 그대가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거룩한 애덕(Charity)이 올 때에 그대는 애덕이 들어갈 여지를 그대가 마련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세상에 대한 사랑이 거기에 있다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거기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하느님께서 영구히이시듯이, 마찬가지로 그대 또한 영구히 살아남기 위하여,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꼭 붙잡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그분의 사랑이 그러하듯이 각자는 그러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땅(earth)을 사랑하면, 그대는 땅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제가 무엇을 말하여야 하는지요? 그대가 한 명의 신(a god)가 되어야 합니까? 제가 이것을 제 스스로 감히 말하지 않으며, 다음과 같은 성경 본문을 함께 듣도록 합시다: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gods)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sons)이다" (시편 82,6; 요한 복음서 10,34 참조). 만약에 그러하다면 그대는 신들이고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들 입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the love of Father)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삶의 교만(the pride of life)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1요한 2,15-17), 즉,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인 사람(men)들로부터 옵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6-3. 다음은,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of Hippo, 354-430년)의 저술 [제목: On the Grace of Christ, and on Original Sin (Book I), 저술 시기: 418년] 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게시자 주: 라틴어 원문과 비교해 보시면 알겠지만, 일부 영어본의 경우에, "caritas" 를, "charity" 로 직역 번역(literal translation)하는 대신에, "love"로 잘못 번역하였는데, 이렇게 ""love"로 번역을 하면 이 번역 용어인 "love" 가 라틴어 원문에서 "caritas(charity)" 를 말하는 것인지 혹은 "cupiditas(cupidity)" 를 말하는 것인지를 독자 스스로 판단하여야 하는 문제가 번역 과정에서 삽입되기 때문에, 번역 오류입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위의 제6-2항의 발췌문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cupiditas"를, "cupidity"로 직역 번역하는 대신에, "covetousness"로 번역한 것도 또한, 유사한 이유로, 번역 오류일 것입니다:
출처 1: http://www.augustinus.it/latino/grazia_cristo/grazia_cristo_1.htm (라틴어 원문) (발췌 시작)
18. 19. De qua possibilitate Pelagius in libro primo Pro libero arbitrio ita loquitur: "Habemus autem", inquit, "possibilitatem utriusque partis a Deo insitam, velut quamdam, ut ita dicam, radicem fructiferam atque fecundam, quae ex voluntate hominis diversa gignat et pariat, et quae possit ad proprii cultoris arbitrium, vel nitere flore virtutum, vel sentibus horrere vitiorum" 50. Ubi non intuens quid loquatur, unam eamdemque radicem constituit bonorum et malorum, contra evangelicam veritatem doctrinamque apostolicam. Nam et Dominus nec arborem bonam dicit posse facere fructus malos, nec malam bonos 51: et apostolus Paulus cum dicit radicem malorum omnium esse cupiditatem 52, admonet utique intellegi radicem bonorum omnium caritatem. Unde si duae arbores, bona et mala, duo sunt homines, bonus et malus, quid est bonus homo, nisi voluntatis bonae, hoc est, arbor radicis bonae? et quid est homo malus, nisi voluntatis malae, hoc est, arbor radicis malae? Fructus enim harum radicum atque arborum, facta sunt, dicta sunt, cogitata sunt, quae bona de bona voluntate procedunt, et mala de mala.
Facit homo arborem bonam, quando Dei accipit gratiam.
19. 20. Facit autem homo arborem bonam, quando Dei accipit gratiam. Non enim se ex malo bonum per se ipsum facit; sed ex illo et per illum et in illo qui semper est bonus: nec tantum ut arbor sit bona, sed etiam ut faciat fructus bonos, eadem gratia necessarium est ut adiuvetur, sine qua boni aliquid facere non potest. Ipse quippe in bonis arboribus cooperatur fructum, qui et forinsecus rigat atque excolit per quemlibet ministrum, et per se dat intrinsecus incrementum 53. Malam vero arborem homo facit, quando se ipsum malum facit, quando a bono incommutabili deficit: ab eo quippe defectus est origo voluntatis malae. Qui defectus non aliam naturam malam initiat, sed eam quae bona condita est vitiat. Sanato autem vitio nullum malum remanet; quia vitium naturae quidem inerat, sed vitium natura non erat.
Aliud est caritas radix bonorum, aliud cupiditas radix malorum.
20. 21. Illa ergo possibilitas, non ut iste opinatur, una eademque radix est bonorum et malorum. Aliud est enim caritas radix bonorum, aliud cupiditas radix malorum 54; tantumque inter se differunt, quantum virtus et vitium. Sed plane illa possibilitas utriusque radicis est capax; quia non solum potest homo habere caritatem, qua sit arbor bona, sed potest etiam cupiditatem, qua sit arbor mala. Sed cupiditas hominis quae vitium est, hominem habet auctorem, vel hominis deceptorem, non hominis creatorem. Ipsa est enim concupiscentia carnis, et concupiscentia oculorum, et ambitio saeculi, quae non est ex Patre, sed ex mundo est 55. Quis autem nesciat, mundi nomine solere appellare Scripturam, a quibus habitatur hic mundus?
[출처 2로부터 발췌]
Concerning this " possibility," Pelagius thus writes in the first book of his Defence of the Freedom of the Will : " Now," says he, " we have implanted in us by God a possibility for
제19장. [xviii.] - 행위의 두 뿌리들인 애덕(charity)과 애덕이 아닌 사랑(cupidity); 선한 사람, 그리고 악한 사람.
바로 이 "가능성(possibility)" 에 관련하여, 따라서 펠라지오(Pelagius, 펠라지우스, 360-422년)(*)는 자신의 [저술] Defence of the Freedom of the Will (의지의 자유로움에 대한 답변)의 첫 번째 책에서 다음과 같이 씁니다: 그는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안에 하느님에 의하여 심어진 두 방향들로 행동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a possibility)을 가지고 있다. 제가 말할 수도 있듯이, 이 가능성은 열매라는 그 산출물에 있어 가장 풍부한 어떤 뿌리를 닮았다(resembles). 이 가능성은 사람의 의지(man's will)에 따라 다양하게 초래하고 그리고 산출하며, 그리고 경작자(planter)의 고유한 선택에 따라 덕(virtues)들의 어떤 아름다운 꽃을 솟구치게 함 혹은 악덕(vices)들의, 가시가 많은, 가장 굵은 부분(thickets)들로 꽉 참 이들 둘 중의 하나를 서슴지 않을 수 있다(is capable of)" 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말하는 바에 거의 주의하지 않으면서, 그는 여기서, 복음 진리와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가르침에 반대하여, 한 개의 그리고 동일한 뿌리가 선한 열매들 및 악한 열매들 둘 다의 생산력을 가지게 만듭니다. 이는 주님께서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마태오 복음서 7,18) 라고 선포하시고(declares), 그리고 사도 바오로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1티모테오 6,10) 라고 말할 때에 그가 우리에게, 당연히, 애덕(charity)이 모든 선한 사물(good things)들의 뿌리로 간주될 수도 있다고 공표하고 있기(intimates)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는 선하고 그리고 다른 하나는 타락한(corrupt) 두 그루의 나무들이, 한 명의 선한 자와 한 명의 나쁜 자인, 두 명의 인간들을 나타낸다는 가정(supposition) 위에서, 한 개의 선한 뿌리를 가진 한 그루의 나무 이외에(than), 그 밖의(else) 무엇이 자신의 선한 의지(good will)를 가진 선한 사람(good man)일까요? 그리고 한 개의 나쁜 뿌리를 가진 한 그루의 나무를 제외하고(but), 무엇이 자신의 나쁜 의지(bad will)를 가진 나쁜 사람(bad man)일까요? 그러한 뿌리들 및 나무들로부터 솟아나오는 열매들은, 선(good)일 때에는 어떤 선한 의지(a good will)로부터 그리고 악(evil)일 때에는 어떤 악한 의지(an evil will)로부터, 발출하는(proceed) 행동(deeds)들, 그리고 말(words)들, 그리고 생각(thoughts)들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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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 20. [xix.] — In what sense a man makes a good or a bad tree; whence the evil will originates.
Now a man makes the tree good when he receives the grace of God. For it is not by himself that he does good instead of evil ; but it is of Him, and through Him, and in Him who is always good. And in order that he may not only be a good tree, but also bear good fruit, it is necessary for him to be assisted by the self-same grace, without which he can do nothing good. For God does Himself contribute to the production of fruit in good trees, when He both externally waters and tends them by the agency of His servants, and internally by Himself also gives the increase. (1 Cor iii. 7.) A man, however, makes the tree corrupt when he corrupts his own self, when he falls away from Him who is the unchanging good ; for such a declension from Him is the origin of an evil will. Now this decline does not initiate some other nature in a corrupt state, but it vitiates that which has been already created good. When this vitiation, however, has been healed, no evil remains ; for although there was no doubt a vitium naturce, [since nature had received an injury], yet it was not vitium natura, [for nature was not itself essentially wrong].
제20장. [xix.] - 어떠한 의미로, 한 사람이 한 그루의 선한 혹은 한 그루의 나쁜 나무를 만들며, 그리고 거기로부터 악한 의지가 기원하는지(evil will originates)
이제 한 사람(a man)은, 그가 하느님의 은총(the grace of God)을 받을 때에, 한 그루의 선한 나무를 만듭니다.(*) 이는 그가 악(evil) 대신에 선(good)을 행하는(does good, 즉, 선행을 하는) 것은, 그것이 자기 자신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그분에 기인하고(of),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through), 그리고 항상 선한 분이신 그분 안에 있기(in),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한 그루의 선한 나무가 되기 위하여 뿐만이 아니라, 또한 선한 열매(good fruit)를 맺기 위하여, 이 정확하게 동일한 은총(the self-same grace)에 의하여 그가 도움을 받는 것이 필요한데, 이 도움 없이 그는 선한 어떠한 것도 행할 수 없습니다(without which he can do nothing good).(***) 이는 하느님께서 스스로, 당신께서 외면적으로 당신의 종들의 대행 행위(agency)에 의하여 그들에게 물을 주고 그리고 돌보며, 그리고 내면적으로 또한 당신 자신을 위하여(by Himself) 그 증가(the increase)를 제공하실 때에 (1코린토 3,7), 선한 나무들에 있어 열매의 산출에 정말로 기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a man)은, 그가 자신 고유의 그 자신(self)을 타락시킬 때에, 즉 그가 불변의 선인 분(the unchanging good)이신 그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때에, 이 나무를 타락시키는데(corrupts), 이는 그분으로부터 그러한 멀리 떨어짐(declesion)이 어떤 악한 의지(an evil will)의 기원(origin)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분으로부터 바로 이러한 퇴보(退步, decline)는 어떤 타락한 상태에 일부(some) 다른 본성을 가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퇴보는 이미 창조되었던 선(good) 바로 그것을 무효로 합니다(vitiates). 그러나 이러한 무효(vitiation)가 이미 치유되었을 때에, 아무런 악(evil)도 잔존하지 않는데, 이는 비록 의심할 여지 없이 [본성이 어떤 상해(an injury)를 이미 받았기 때문에] 어떤 자연적 결함(a vitium naturce)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그것은 [본성 자체는 본질적으로 잘못된(wrong) 것이 아니기에] 자연적 결함(vitium natura)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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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of Hippo)는, 예를 들어, 1코린토 3,7 및 2코린토 9,8-10을 성경 근거로 하여 바로 이 문장과 직전 문장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자들은 선행들을 한다", 즉 논리적 등가(logical equivalence)로 달리 말하여, "오로지 선행들을 하는 자들 중에서만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 라는 명제(statement)가 참(true)임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선행(good works)들, 즉 윤리적으로 선한 행위(morally good acts)들(#)은, 당연히, 하느님 중심의, 하느님을 위한, 그리고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 생활", "성사 생활", 그리고 "실천 생활"을 포함한다. "선행(good works)들"에 대한 전례사전[Dictionary of the Liturgy(New York, 1989), 원저자: Jovian Peter Lang]의 설명은 다음에 있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0월 26일] -----
(#) 번역자 주: "인간의 행위(human act)" 라는 대단히 중요한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 용어의 정의(definition)는 다음의 글 중의 게시자 주 1-1에 있으니 필독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56.htm <----- 필독 권고 [이상, 2014년 10월 26일자 내용 추가 끝]
그리고 Modern Catholic Dictionary에 주어진 "good works(선행들)" 라는 가톨릭 그리스도교 신학적 용어에 대한 설명은 다음에 있다. 클릭한 후에 제3-4항을 읽도록 하라:
예를 들어, 다음은, 가톨릭 교호의 전례력에 있어, 홀수해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제1독서(2코린토 9,6-11)로 발췌되어 미사 중의 말씀 전례에서 읽히는 독서에 포함되어 있는, 2코린토 9,8에서 발췌한 것이다:
(발췌 시작)
출처 2: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새 번역 성경 2코린토 9,8)
그리고 선행들의 효능(the efficacy of good works)에 대한 고전적 성경 본문이라고 NAB(New American Bible) 주석이 밝히고 있는 다음의 다니엘서 4,24를 또한 읽도록 하라:
(발췌 시작)
출처 2: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새 번역 성경 다니엘 4,24)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새 번역 성경의 구약 본문에서 "선행"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절들을 읽을 수 있다:
다음의 주소주소를 클릭하면, 새 번역 성경의 구약 본문에서, 선행의 한 종류인, "자선"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절들을 읽을 수 있다: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새 번역 성경의 신약 본문에서 "선행"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절들을 읽을 수 있다. 특히, 논리적 등가(logical equivalence)로, 하느님의 은총을 더 많이 받을 수록 선행(good works)들을 더 많이 하게 된다고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2코린토 9,8을 전후 문맥 안에서 여러 번 읽도록 하라: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새 번역 성경의 신약 본문에서, 선행의 한 종류인, "자선"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절들을 읽을 수 있다:
(***) 번역자 주: 여기서 말하는 "선한 열매(good fruit)" 는, 소위 말하는, 하느님에 의하여 인정받는 공로, 즉 "적정 공로(適正功勞, meritum de condigno)" 를 말한다.
Chap. 21. [xx.] — Charity the root of all good things ; cupidity, of all evil ones.
The inhabitants of the world are in Scripture called " the world." The " possibility," then, of which we speak is not (as he supposes) the one identical root both of good things and evil. For the charity which is the root of good things is quite different from the cupidity which is the root oi evil things—as different, indeed, as virtue is from vice. But no doubt this possibility is capable of contributing both roots : because a man may not only possess charity, whereby the tree becomes a good one ; but he may likewise have cupidity, which makes the tree evil. This cupidity, however, which is the fault of man, has for its author man, or man's deceiver, but not man's Creator. It is indeed that " lust of the flesh, and the lust of the eyes, and the pride of life, which is not of the Father, but is of the world." (1 John ii. 16) And who can be ignorant of the usage of the Scripture, which under the designation of "the world" is accustomed to describe those who inhabit the world?
제21장. [xx.] - 애덕(charity)은 모든 선한 사물(good things)들의 뿌리이고, 그리고 애덕이 아닌 사랑(cupidity)은 모든 악한 사물(evil things)들의 뿌리이다.
세상의 거주자들은 성경 본문에서 "세상(the world)" 이라고 불립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하여 우리가 말하는 "가능성(possibility)" 은 (그가 가정하듯이) 선한 사물(good things)들과 악한 사물(evil things)들 둘 다의 한 개의 동일한 뿌리가 아닙니다. 이는 선한 사물들의 뿌리인 애덕(charity)은 악한 사물들의 뿌리인 애덕이 아닌 사랑(cupidity)과, 정말로, 덕(virtue)이 악덕(vice)과 서로 다른 만큼, 상당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이러한 가능성(this possibility)은 뿌리들 둘 다를 제공함을 서슴지 않을 수 있는데(is capable of), 왜냐하면 한 사람(a man)이, 바로 그것에 의하여 이 나무가 한 그루의 선한 나무가 되는, 애덕(charity)를 소유할 수도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가, 마찬가지로, 나무를 악하게 만드는, 애덕이 아닌 사랑(cupidity)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결함(the defect of man)인, 바로 이러한 애덕이 아닌 사랑(cupiditas)은 그 주관자(author)로서 사람(man), 혹은 사람을 속이는 자(man's deceiver)를 가지는 것이지, 사람의 창조주(man's Creator)를 가지지 않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삶의 교만(the pride of life)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1요한 2,16)는 정말입니다. 그리고, "세상(the world)" 이라는 명칭(designation) 아래에서 세상에 거주하는 자들을 묘사하는 성경 본문의 이 사용에 대하여 누구가 무지일 수가 있습니까?
[출처 3으로부터 발췌]
Concerning this “capacity,” Pelagius thus writes in the first book of his Defence of Free Will: “Now,” says he, “we have implanted in us by God a capacity for either part. It resembles, as I may say, a fruitful and fecund root which yields and produces diversely according to the will of man, and which is capable, at the planter's own choice, of either shedding a beautiful bloom of virtues, or of bristling with the thorny thickets of vices.” Scarcely heeding what he says, he here makes one and the same root productive both of good and evil fruits, in opposition to gospel truth and apostolic teaching. For the Lord declares that “a good tree cannot bring forth evil fruit, neither can a corrupt tree bring forth good fruit;” (Matthew 7:18) and when the Apostle Paul says that covetousness is “the root of all evils,” (1 Timothy 6:10) he intimates to us, of course, that love may be regarded as the root of all good things. On the supposition, therefore, that two trees, one good and the other corrupt, represent two human beings, a good one and a bad, what else is the good man except one with a good will, that is, a tree with a good root? And what is the bad man except one with a bad will, that is, a tree with a bad root? The fruits which spring from such roots and trees are deeds, are words, are thoughts, which proceed, when good, from a good will, and when evil, from an evil one.
Chapter 20 [XIX.]— How a Man Makes a Good or a Bad Tree.
Now a man makes a good tree when he receives the grace of God. For it is not by himself that he makes himself good instead of evil; but it is of Him, and through Him, and in Him who is always good. And in order that he may not only be a good tree, but also bear good fruit, it is necessary for him to be assisted by the self-same grace, without which he can do nothing good. For God Himself cooperates in the production of fruit in good trees, when He both externally waters and tends them by the agency of His servants, and internally by Himself also gives the increase. (1 Corinthians 3:7) A man, however, makes a corrupt tree when he makes himself corrupt, when he falls away from Him who is the unchanging good; for such a declension from Him is the origin of an evil will. Now this decline does not initiate some other corrupt nature, but it corrupts that which has been already created good. When this corruption, however, has been healed, no evil remains; for although nature no doubt had received an injury, yet nature was not itself a blemish.
Chapter 21 [XX.]— Love the Root of All Good Things; Cupidity, of All Evil Ones.
The “capacity,” then, of which we speak is not (as he supposes) the one identical root both of good things and evil. For the love which is the root of good things is quite different from the cupidity which is the root of evil things— as different, indeed, as virtue is from vice. But without doubt this “capacity” is capable of either root: because a man is not only able to possess love, whereby the tree becomes a good one; but he is likewise able to have cupidity, which makes the tree evil. This human cupidity, however, which is a vice, has for its author man, or man's deceiver, but not man's Creator. It is indeed that “lust of the flesh, and the lust of the eyes, and the pride of life, which is not of the Father, but is of the world.” (1 John 2:16) And who can be ignorant of the usage of the Scripture, which under the designation of “the world” is accustomed to describe those who inhabit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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