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연중 제6주일(다해) 루카 6,17.20-26; ’2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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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2-03 ㅣ No.4930

연중 제6주일(다해) 루카 6,17.20-26; ’22/02/13

 

 

 

 

 

 

 

어떤 예비신자가 와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가난이 싫습니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살아서 가난이 정말 싫습니다. 그런데 성당에 오면 가난하게 살라고 하니 불편합니다.”

 

,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물질적인 결핍과 불편한 삶의 조건을 유지하라고 권장하지 않습니다. 교회 역시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과 물질을 인정하고 소유하도록 권장합니다. 교회는 사람이 최소한의 검소한 생활을 하는 데에도 부족한 물질적인 결핍을 주위 사람들이 함께 채워주고 메꿔주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그렇게 채워주려고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라고 선언하십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가난을 바라봅니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켜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 2,6-7) 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서 하늘에서 지복직관을 누리며 그냥 사실 수도 있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굳이 하느님의 권한과 복된 환경을 두고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셔서 오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예수님을 처음 발견한 목동들은 사회적으로 최하층에 속하는 자신들보다도 더 가련하고 불쌍하게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발견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얻었습니다.

 

이런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가족이 한방에서 살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가족들이 모두 서로 공유하며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자라면서 내 방이 생기고, 내 것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구분이 생기기 시작했고, 내 것이 생기면서 그만큼 가족은 멀어져갔고, 내 것이 생기면서 전과 같은 행복은 누리지 못했습니다. 가족은 점점 가 아니라 가 되었고, ‘우리라는 상징적인 단어로만 하나였습니다.

 

이는 비단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라고 하는 관계도 비슷하게 되어갔습니다. 처음 성당을 지을 때는 우리 신자 모두가 한 식구였다가, 더 깊은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어느덧 구역반으로 나누면서, 어제까지는 한 식구였던 우리 교우가 지금은 다른 구역이 되었습니다. 구분과 전문화로 얻는 장점이 분명 있지만, 그전처럼 피부로 느끼는 하나와는 구별되었고 점차 낯설어 가고 행사할 때만 만나는 이웃이 되어갑니다.

 

되돌아보면, 없을 때는 우리 모두 하나였다가, 뭔가 가지기 시작했을 때, 뭔가 구분하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전처럼 행복해지지 않다는 어설픈 아쉬움도 간직하게 되었습니다. ‘품 안에 있을 때나 내 자식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제 성장하여 일가를 이루며 떠나가는 자식을 보면서 그저 행복하게 살기만 바라면서 축복을 하고 마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가난한 것이 죄악은 아닙니다. 가난할 때의 장점이 분명 있습니다. 가난할 때는 너와 내가 하나였고, 또 가난하기에 서로 비교도 많이 안 되고, 서로가 서로를 격 없이 받아들이고 나누며, 희로애락을 함께 나누며 하나로서 누리는 행복을 느끼고 삽니다.

 

그런데 더 성장하고, 더 많은 물질을 가지고, 더 높아졌을 때는 그만큼 자신이 가진 것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하여 그리고 더 많은 재물을 가지고 더 높아지기 위하여, 아예 가난할 때보다 더 많은 재물과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형제자매들과 이웃 친지들과 함께하는 시간과 공유가 줄어들고 오히려 경계마저 하게 되어, 함께한다는 것이 행복하기 보다는 불편할 때도 있습니다.

 

교회는 과거로 돌아가라고, 가진 것을 무작정 버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것을 지키고 나와 너를 구분하며 스스로 자신 안에 갇혀 외롭게 고립되어 살지 말 것을 권장합니다. 교회는 함께할 때의 장점을 발견하고, 함께할 때 얻는 우정과 협동, 우리의 전통적 가치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실현됨으로써 얻게 되는 잔잔한 기쁨을 간직하라고 제안합니다.

 

삶을 공유하고 인격을 나눌 때 얻을 수 있는 행복! 한 소년이 자신이 가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드리고 되돌려 받아 나눌 때 오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다 함께 먹을 수 있는 기적이 발생했듯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한계상황을 함께함으로써 기적처럼 발생하는 행복한 상태를 복원하기를 지향합니다.

 

비록 자신이 가진 것은 다른 이들과 공유하기 위해 내놓아 없어져 버리는 듯하지만,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다른 이들을 형제자매로 얻고 자신이 땀 흘려 얻은 것을 공유함으로써 얻게 되는 내적인 풍요와 만족과 자부심과 보람으로 행복해질 수 있음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복의 원형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한평생 자신의 신분상승과 재산축적을 위해 사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위로하고, 다른 이들의 결핍을 채워주시다가,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 죗값으로 송두리째 바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바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21)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다시 이런 예수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어 부활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결국 생명을 바쳐 구하신 우리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다시 오실 것을 희망하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22) 우리는 우리 본당의 주보이신 103위 한국순교성인들을 기억합니다. 주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간직하고 지키기 위하여, 사회에서 재산을 몰수당하고 사람들에게서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까지 생명을 바치신 순교성인들은 하늘에서 지금 주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계십니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23) 비단 순교성인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예수님을 닮아, 우리를 낳으시고 길러주시며 우리를 위해 인생을 다 바치신 부모님들과 우리의 긍정적인 성장을 위해 사회에서 수고하고 희생하신 일가친척들과 선생님들과 모든 공직자분들과 봉사자분들도 기억합니다. 그분들 역시 주 하느님 나라에서 예수님의 품 안에서 성인들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분들이 우리를 위해 희생하시는 대신 자신들의 신분상승과 재산축재를 위해 신경을 쓰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마도 그렇게 사셨다면, 그분들은 우리와 헤어질 때보다 더 좋은 환경을 누리고 계셨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같이 우리의 감사와 공경까지는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24) 평소에 자신이 무엇인가를 가지고 누릴 때에는 많은 사람이 찾아오겠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잃거나 자신의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님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아무도 찾아오지도 온정의 손길도 내밀지 않을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25) 설사 누군가에게는 인정과 존경을 받을지언정, 지금 우리가 부모님이나 은인들에게 바치는 감사의 온정은 받지 못할 것입니다. 겉으로는 허울좋은 부러움과 시샘의 영광과 칭송을 받을지언정, 마음속으로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차디차고 외로운 대접을 받아 슬퍼하며 울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26)

 

우리 모두 마음을 모아 하느님 나라를 간직한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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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6주일 꽃꽂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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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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