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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외치는 이 는 누구? - 요한 1,23; CCC 719 #<나대림제3주일복음> 827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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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3 ㅣ No.1594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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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 찬미 예수님!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2월 20일]

이 글은 또한, (i)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목소리" 와, (ii)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의 차이점에 대한 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i)(ii)에 포함되나, 그러나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이상, 내용 추가 끝].

 

질문 1: 다음은, 요한 복음서 1,23 전문입니다:

 

(발췌 시작)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소리다.

(이상, 발췌 끝)

 

제23절에서 말하는 "외치는 이"는 누구입니까? 제23절 자체가 이 절에서 "외치는 이"가 세례자 요한이 아님을 또한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이상, 질문 1 끝)

 

질문 2: 요한 복음서 1,19-28에 기록되어 있듯이, "당시의 유다인들(여기에는 당시의 사두가이들, 바리사이들, 그리고 율법 학자들도 포함됨)이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세례자 요한의 사명(mission)"은 무엇입니까?

 

질문 3: 세례자 요한은 요한 복음서 1,21에서 자신이 "엘리야" 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는데, 그러나 이에 반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서 7,11에서 "세례자 요한" 이 곧 "엘리야" 라고 말씀하셨던 것인지요?

 

질문 4: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오로지 세 개의 탄생 축일들이 경축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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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부의 말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글들은 어떤 특정인의 감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마련된 글들이 결코 아니기에, 다음의 당부의 말씀을 드립니다:

(1) 지금까지 필자의 글들을 읽고서 필자에 대한 "분노(anger)" 혹은 "질투(envy)"를 가지게 된 분들은, 혹시라도 그분들께 "걸림돌(stumbling block)"일 수도 있는, 많이 부족한 죄인의 글들을 더 이상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2) 그리고 위의 제(1)항의 당부의 말씀을 읽고도 굳이 이 화면의 아래로 스스로 이동하여, 많이 부족한 죄인의 아래의 본글을 읽는 분들은, 필자에 대한 "분노(anger)"와 "질투(envy)" 둘 다를 가지지 않을 것임에 동의함을 필자와 다른 분들께 이미 밝힌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3) 그리 길지 않은 인생 여정에 있어, 누구에게나, 결국에, "유유상종[類類相從, 같은 무리끼리 서로 사귐 (출처: 표준국어대사전)]"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생각에 드리는 당부의 말씀입니다.

 

 

 

 

 

 

 

 

 

 

 

 

 

 

 

 

 

 

 

 

 

 

 

 

 

 

 

 

+ 찬미 예수님!

 

 

 

 

1. 들어 가면서

1-1. 다음은, 가톨릭 교회 전례력에 있어, 나해 대림 제3주일 복음 발씀(요한 1,6-8.19-28)전문 입니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missaid=6243&gomonth=2014-12-14

(발췌 시작)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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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1) 여기서 및 제25절에서 "그 예언자(the Prophet)" 는, 요한 복음서 6,14; 7,40 등에서처럼, 모세 오경 전체에 걸쳐 단 한 번, 신명기 18,15에서 모세에 의하여 "나와 같은 예언자(a prophet like me)"로 언급되고 있는, 바로 "그 예언자"를 말한다는 생각이다.

 

근거 자료: 다음에 있는, 요한 복음서 1,21의 "the Prophet" 에 대한 NAB(New American Bible) 주석: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X9.HTM#$3QE

 

(2) 그리고 바로 위의 제(1)항에서 말씀드린 바는, 마태오 복음서 11,3-6 가 또한 뒷받침한다는 생각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가해 대림 제3주일 복음 말씀(마태오 11,2-11) 중의 제3-6절들에 대한 다음의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또한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a_adv_3.htm

 

(**) 게시자 주: 최근에 들어와 이 지역이 어딘지가 고고학적 유물 등의 발견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고 그리하여 최근의 교황님들이 이 지역이라고 고고학적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대한 방문을 하셨던 바에 대한 글은 다음에 있다. 접속한 후에 게시자 주 2-2를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14.htm <----- 바쁘지 않은 분들의 필독 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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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1-2.

질문 2: 요한 복음서 1,19-28에 기록되어 있듯이, "당시의 유다인들(여기에는 당시의 사두가이들, 바리사이들, 그리고 율법 학자들도 포함됨)이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세례자 요한의 사명(mission)"은 무엇입니까?

 

(질문 2에 대한 답변)

다음에 있는, 가톨릭 교회 전례력에 있어, 매년 대림 제2주간 토요일 복음 말씀(마태오 17,9ㄱ.10-13) 중의 제10-13절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adv_2_sat.htm <----- 필독 권고

(이상, 질문 2에 대한 답변 끝) 

 

2.

질문 1: 다음은, 요한 복음서 1,23 전문입니다:

 

(발췌 시작)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소리다.

(이상, 발췌 끝)

 

제23절에서 말하는 "외치는 이"는 누구입니까? 제23절 자체가 이 절에서 "외치는 이"가 세례자 요한이 아님을 또한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에, 드리는 질문입니다.

(이상, 질문 1 끝)

 

(질문 1에 대한 답변)   

2-1. 우리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미사 중에 고백할 때에 다음의 문장을 또한 고백합니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missa/missa.asp [신앙 고백]

(발췌 시작)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이상, 발췌 끝)

 

2-2.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구약 시대의 마지막 예언자임을 우리는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2-3. 다음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19항에서 발췌한 문장입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ccc_css/archive/catechism/p1s2c3a8.htm#I

(발췌 시작)

719 John the Baptist is "more than a prophet."94 In him, the Holy Spirit concludes his speaking through the prophets. John completes the cycle of prophets begun by Elijah.95 He proclaims the imminence of the consolation of Israel; he is the "voice" of the Consoler who is coming.96 As the Spirit of truth will also do, John "came to bear witness to the light'"97 In John's sight, the Spirit thus brings to completion the careful search of the prophets and fulfills the longing of the angels.98 "He on whom you see the Spirit descend and remain, this is he who baptizes with the Holy Spirit. And I have seen and have borne witness that this is the Son of God. . . . Behold, the Lamb of God."99

 

719. 세례자 요한은 "어떤 예언자보다 더 나은" 자 입니다.94 그 안에서, 성령께서는 [구약 시대의] 예언자들을 통한 당신의 말하는 행위(speaking)를 끝맺습니다. 요한은 엘리야(Elijah)에 의하여 시작되었던 예언들의 순환을 완성합니다.95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에 의한] 위로(consolation)의 임박/촉박(imminence)을 선포하며, 그리하여 그는 오시는 중인 위로자(the Consoler who is coming)(#)"목소리(voice)" 입니다.96 진리의 영(the Spirit of truth)께서 장차 또한 증언하실 것이듯이, 요한은 "이 빛(the light)[목소리로] 증언하기 위하여 왔습니다."97 요한의 시야 안에서, 이 영(the Spirit)께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thus) 예언자들의 조심스러운 추구를 완성시키시고 그리하여 천사들의 갈망을 구현하십니다.98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 주셨다.] '그 위에 이 영께서 내려오시어 머무르시는 것을 그대[즉, 세례자 요한]가 보는 바로 그자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바로 그분이시다.' 이제 저는 바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the Son of God)이심을 이미 보았고 그리하여  바로 이분이 하느님의 아드님(the Son of God)이심을 이미 [목소리로] 증언합니다. ... 보라, 하느님의 어린 양(the Lamb of God)을!"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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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Lk 7:26(루카 복음서 7,26).
95 Cf. Mt 11:13-14(마태오 복음서 11,13-14 참조).

96 Jn 1:23(요한 복음서 1,23); cf. Isa 40:1-3(이사야 40,1-3 참조).

97 Jn 1:7(요한 복음서 1,7); cf. Jn 15:26; 5:35(요한 복음서 15,26; 5,35 참조).
98 Cf. 1 Pet 1:10-12(1베드로 1,10-12 참조).
99 Jn 1:33-36(요한 복음서 1,33-36).

 

(#) 번역자 주:

(1) 여기서 말하는 "오시는 중인 위로자(the Consoler who is coming)"는, "선구자, 예언자, 세례자인 요한" 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17-720항의 전후 문맥 안에서,

 

(i) ["하느님의 아드님(the Son of God)" 와 구분되나(distinct) 그러나 "이분" 과 분리될 수 없는(inseparable)(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89항)]  "하느님의 영", 즉, "성령(the Holy Spirit)", 혹은 성부 하느님(God the Father)을, 혹은 더 구체적으로,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2월 15일]

(ii)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전달되었던 바는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 이었으므로, "이 빛(the light)", 즉, "그리스도"(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48항; 제1202항), 즉,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 즉, "성자(the Son of God, 하느님의 아드님)"을 말한다.

[이상, 2014년 12월 15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2014년 12월 16일]

(2) 여기서 말하는 "오시는 중인 위로자(the Consoler who is coming)"는, 위의 제(i)항보다, 더 구체적인 제(ii)항을 말함의 근거는, (i) 바로 아래의 (#) 게시자 주에 제시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강론 말씀들과, (ii) 아래의 제5항에 있으니, 읽도록 하라.

[이상, 2014년 12월 16일자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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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따라서, 요한 복음서 1,23에서 말하는 "외치는 이" 는, 결코 세례자 요한 자신이 아니고, "오시는 중인 위로자(the Consoler who is coming)"를. 즉,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2월 15일]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전달되었던 바는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 이었으므로, "이 빛(the light)", 즉, "그리스도"(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48항; 제1202항), 즉,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 즉, "성자(the Son of God, 하느님의 아드님)"을 말합니다.(#)

[이상, 2014년 12월 15일자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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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2월 15일]

(1) 특히,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2009년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6월 24일) 교리 교육용 일반 알현(General Audience) 강론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benedict_xvi/audiences/2009/documents/
hf_ben-xvi_aud_20090624_en.html

(발췌 시작)

The priest cannot consider himself "master" of the Word, but its servant. He is not the Word but, as John the Baptist, whose birth we are celebrating precisely today, proclaimed, he is the "voice" of the Word: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of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Mk 1: 3).

 

사제는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말씀(the Word)의 "주인(master)"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단지(but) 이 말씀종/머슴(servant)입니다. 그는 이 말씀(the Word)이 아니라, 정확하게 오늘 우리가 그의 탄생을 경축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듯이, 단지(but) 그는 이 말씀"목소리(voice)"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마르코 복음서 1,3)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2014년 12월 15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2월 16일]

(2) 그리고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다해 대림 제2주일2012년 12월 9일삼종 기도(Angelus) 강론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benedict_xvi/angelus/2012/documents/
hf_ben-xvi_ang_20121209_en.html

(발췌 시작)

John the Baptist is described as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Lk 3:4). The voice proclaims the word, but in this case the Word of God comes first, since the word of God came to John, the son of Zechariah, in the wilderness (cf. Lk 3:2). He therefore plays an important role but always in terms of Christ. St Augustine comments: “John is the voice, but the Lord is the Word who was in the beginning (cf. Jn 1:1). John is the voice that lasts for a time; from the beginning Christ is the Word who lives for ever. Take away the word, the meaning, and what is the voice? Where there is no understanding, there is only a meaningless sound. The voice without the word strikes the ear but does not build up the heart” (In ev. Johannis tractatus 293, 3: pl 38, 1328).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목소리(voice).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로서 서술됩니다.(루카 복음서 3,4) 소리(the voice)는 그 말(the word)을 선포하나,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 첫 번째로 오는데,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 광야에서, 즈카르야의 아들인, 요한에게 과거에 왔기(came) 때문입니다(루카 복음서 3,2 참조). 그러므로 그는 한 개의 중요한 역할을 하나 그러나 항상 그리스도의 말들로서(in terms of) 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는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요한은 리(the voice)이나, 그러나 주님께서는 한처음에 계셨던 말씀(the Word)이시다(요한 복음서 1,1). 요한은 잠시 지속하는 소리(the voice)이나, 그러나 한처음부터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는 말씀(the Word)이시다. 그 의미인 말(the word)을 제거하라, 그리하면 그 목소리(the voice)는 무엇이 될까? 아무런 이해(understanding)가 있지 않은 곳에는 오로지 어떤 의미가 없는 소리(sound)만이 있을 뿐이다. 말(the word) 없는 소리(the voice)는 귀를 때릴 것이나 그러나 심장(the heart)을 강화하지(build up)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 In ev. Johannis tractatus 293, 3: pl 38, 1328].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2014년 12월 16일자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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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자 주 2-3: 이 답변에 대한 좀 더 나은 이해를 위하여, 다음에 있는 우리말본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17-720항을 여러 번 읽으면서 묵상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c717.htm <----- 필옥 권고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2월 15일]

혹은, 다음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 요약편 제141항을 여러 번 읽고 묵상하도록 하라:

 

출처: 가톨릭 교회의 말씀 전례에 따른 성경공부 해설서 (출판사: 가톨릭출판사, 엮은이: 소순태), 가해 II, 나해 II, 다해 II,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6월 24일), 3분 복음/교리 묵상.

(발췌 시작)
CCCC 141. 세례자 요한에게 성령께서는 무엇을 수행하셨습니까?
CCC 717-720

 

성령께서 세례자 요한 전체를 차지하셨는데, 그는 구약 성경의 마지막 예언자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성령의 감화(感化, inspiration) 아래에서,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하기 위하여”(루카 복음서 1,17) 보내졌습니다. 그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포할 때에,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요한 복음서 1,33) 분이신 그리스도 위에, 성령께서 내려오시어 머무시는 것을 그는 보았습니다(엮은이 번역).

 

주: 교황청 홈페이지가 제공하는 영어 등의 외국어로 된 위의 CCCC 문항들 및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제공 우리말 ‘가톨릭 교회 교리서(CCC)’의 해당 항목들은 다음의 인터넷 주소에 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http://ch.catholic.or.kr/pundang/4/johnbap_c717.htm
(이상, 발췌 끝)

[이상, 2014년 12월 15일자 내용 추가 끝]

(이상, 질문 1에 대한 답변 끝).

 

2-4. 그리 바쁘지 않으신 분들께서는 다음의 글[제목: 성경 말씀들에 대한 가장 탁월한 신뢰할 수 있는 해석은 어디에 주어져 있을까요?]을 또한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19.htm

 

3.

질문 3: 세례자 요한은 요한 복음서 1,21에서 자신이 "엘리야" 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였는데, 그러나 이에 반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서 7,11에서 "세례자 요한" 이 곧 "엘리야" 라고 말씀하셨던 것인지요?

 

질문 3에 대한 답변: 결코 아닙니다:. 다음의 영어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설명을 읽도록 하십시오:

 

출처: http://www.newadvent.org/cathen/08486b.htm
(발췌 시작)
John denied he was Elias, whom the Jews were looking for (Matthew 17:10; Mark 9:10). Nor did Jesus admit it, though His words to His disciples at first sight seem to point that way; "Elias indeed shall come, and restore all things. But I say to you, that Elias is already come" (Matthew 17:11; Mark 9:11-12). St. Matthew notes "the disciples understood, that he had spoken to them of John the Baptist" (Matthew 17:13). This was equal to saying, "Elias is not to come in the flesh." But, in speaking of John before the multitude, Jesus made it plain that he called John Elias figuratively: "If you will receive it, he is Elias that is to come. He that hath ears to hear, let him hear" (Matthew 11:14, 15). This had been anticipated by the angel when, announcing John's birth to Zachary, he foretold that the child would go before the Lord "in the spirit and power of Elias" (Luke 1:17).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유다인들이 기다려온(마태오 복음서 17,10; 마르코 복음서 9,10), 엘리야임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비록 당신을 제자들을 향하는 당신의 말씀들이 다음과 같이 바로 그러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았으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마태오 복음서 17,11-12; 마르코 복음서 9,11-12). 성 마태오(St. Matthew)는 "그제야 제자들은 그것이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마태오 복음서 17,13)를 글로 써서 기록합니다(notes). 바로 이 말은 "엘리야가 육으로(in the flesh) 온 것[즉, 환생한 것]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was equal to). 그러나, 군중 앞에서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라고 비유적/표상적으로(figuratively) 부르셨음을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마태오 복음서 11,14.15). 바로 이 말씀은, 즈카르야(Zachary)에게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선포하면서, 그가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루카 복음서 1,17) 주님보다 먼저 올 것이라고 천사가 예견하였을(foretold) 때에, 이 천사에 의하여 이미 예상되었던(had been anticipated) 것입니다.(#1)

 

[내용 추가 일자: 2015년 8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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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번역자 주:

(1) 바로 여기에 주어진 설명은, 소위 말하는, "환생(reincartation)", "윤회(metempsychosis, transmigration)", "영혼 출생설(traducianism)" 등의 세속의 주장들이 성경 본문에 결코 근거할 수 없음을 또한 한 개의 따름 정리(a corollary)로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음에 주목하라.

 

(2) 더 나아가, 그러한 주장들이 그리스도교 신학적으로 불가능함에 대하여서는, 다음에 주어진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가르침들을 학습하도록 하라:

http://www.newadvent.org/cathen/09580c.htm [소제목 The nature of man 의 마지막 부분]

http://dhspriory.org/thomas/ContraGentiles3b.htm#87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Summa Contra Gentiles", 87]

http://www.logicmuseum.com/authors/aquinas/summa/Summa-I-115-119.htm#q118pr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a, q118]

 

(3) 그리고 교황청 홈페이 제공의 다음의 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International Theological Commission) 문헌, Some Current Questions in Eschatology), 제9항을 또한 읽도록 하라: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faith/cti_documents/
rc_cti_1990_problemi-attuali-escatologia_en.html
 [제9항]

 

(4) 다른 한편으로, 어떤 자들은 예레미야서 1,5의 첫 번째 문장, "모태에서 너를 빚기 전에 나는 너를 알았다." 가 "환생(reincartation)", "윤회(metempsychosis, transmigration)" 의 구약 성경 근거라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또한 그리스도교 신학적으로 어불성설입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서 1,5의 첫 번째 문장은, 예레미야라는 예언자의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 그가 잉태되기/창조되기 전에 하느님께서 그의 직무/사명을 이미 예정/계획하셨음에 대한, 소위 말하는, 하느님의 영원한 법(eternal law)(#2)에 대한, 언급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서 1,5는, 성 바오로의 표현에 따르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내시는 하느님" (로마 4,17)(#3)에 대한 한 개의 언급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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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게시자 주: 모든 법의 근거/원천인 영원한 법(영법, eternal law)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글을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85_eternal_law.htm <----- 필독권고

 

(#3) 게시자 주: 다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에 주어진 영원한 법(eternal law) 에 대한 설명을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64_eternal_law.htm  <----- 필독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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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중궁 명나라 말기에 중국에 파견되었던 예수회 소속의 마테오 리치 신부님의 저서인 "천주실의" 에 주어진 "윤회" 의 어불성설에 대한 설명은, 다음에 있는, 우리말본 가톨릭 대사전에 주어진 "천주실의" 에 대한 설명에서 약간 접할 수 있다: http://info.catholic.or.kr/dictionary/view.asp?ctxtIdNum=3437

 

다만, 이 사전 설명에서, "천국" 으로 표현된 단어는 반드시 "천당" 으로 교체하여 읽도록 하십시오. 왜냐하면, 조만간 그 문헌적 출처의 제시와 함께 구체적으로 보고드릴 계획입니다만, 여태까지 국내의 천주교에서 알고 있었듯이 "천당" 은 "천국" 의 옛말이 결코 아니고, 이들 두 차용 번역 용어들은, 예수 재림의 날까지 결코 그 의미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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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15년 8월 30일자 내용 추가 끝]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2월 15일]

이제, 바로 위의 질문 3에 대한 답변을 지지하는 위의 제1-2항에 안내되어 있는, 다음의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다시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adv_2_sat.htm <----- 필독 권고

 

또한, 다음에 있는, 루카 복음서 1,14-17에 대한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Dec19.htm <----- 필독 권고

(이상, 질문 3에 대한 답변 끝)

 

4.

질문 4: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오로지 세 개의 출생일들이 경축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4-1. 우선적으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이미 파악한 바에 의하면, 이들 세 개의 탄생 축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 1: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147.htm [2011년 12얼 27일자 글]

출처 2: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797.htm [2008년 5얼 17일자 글, 제5항]

 

(i) 피조물인 성모 마리아 탄생 축일: 매년 9월 8일 (단, 의무 축일은 아님)

(ii) 피조물인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 매년 6월 24일

(iii) 강생하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탄생 대축일: 매년 12월 25일.

 

4-2. (질문 4에 대한 답변)

 이들 세 분들의 탄생들의 공통점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은총의 새 법(the New Law of grace)으로써 하느님의 일(Opus Dei, 오푸스 데이)을 역사(役事)하심에 있어, 하느님의 영, 즉 성령께서 이 세 분들의 탄생을 개시(開始)하시고자(to initiate) 인류와 직접 접촉(touch)을 하셨다는 점인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생각에,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들 세 개의 탄생일들이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에 있어 탄생 축일들로 경축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다들 잘 알고 계시듯이,

 

4-2-1. 바로 위의 제(iii)항성경(Sacred Scriptures) 근거루카 복음서 1,26-38 (특히, 1,26-35)이고,

 

4-2-2. 바로 위의 제(ii)항성경(Sacred Scriptures) 근거루카 복음서 1,5-25 (특히, 1,11-17)입니다.

 

그리고 또한 바로 위의 제(ii)항의 성전(Sacred Tradition) 근거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17-720항들의 유래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4-2-3. 바로 위의 제(i)항성경(Sacred Scriptures) 근거루카 복음서 1,18("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입니다.

 

그리고 또한 바로 위의 제(i)항의 성전(Sacred Tradition) 근거는, 또한 바로 이 루카 복음서 1,18에 근거하여 매년 12월 8일에 경축되고 있는, 무염시태(Immaculate Conception) 대축일의 유래에서 찾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삳, 칠문 4에 대한 답변 끝)

 

게시자 주 4: 따라서, 바로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전례력(1969년에 개정되었음) 자체가, 위의 제2-3항에 발췌된 (1992년에 초판 발행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19항에서 "외치는 이" (요한 복음서 1,23)"오시는 중인 위로자(the Consoler who is coming)", 즉,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2월 15일]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전달되었던 바는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 이었으므로, "이 빛(the light)", 즉, "그리스도"(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48항; 제1202항), 즉,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 즉, "성자(the Son of God, 하느님의 아드님)"을 말함을(#),

[이상, 2014년 12월 15일자 내용 추가 끝]

  

살아있는 방식으로 강력하게 증거하면서, 가톨릭 보편 교회의 교도권(Magisterium)이 가르치고 있음에 또한 주목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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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2월 15일]

(1) 특히,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2009년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6월 24일) 교리 교육용 일반 알현(General Audience) 강론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benedict_xvi/audiences/2009/documents/
hf_ben-xvi_aud_20090624_en.html

(발췌 시작)

The priest cannot consider himself "master" of the Word, but its servant. He is not the Word but, as John the Baptist, whose birth we are celebrating precisely today, proclaimed, he is the "voice" of the Word: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of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Mk 1: 3).

 

사제는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말씀(the Word)의 "주인(master)"이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단지(but) 이 말씀종/머슴(servant)입니다. 그는 이 말씀(the Word)이 아니라, 정확하게 오늘 우리가 그의 탄생을 경축하고 있는, 세례자 요한이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듯이, 단지(but) 그는 이 말씀"목소리(voice)"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마르코 복음서 1,3)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상, 2014년 12월 15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2월 16일]

(2) 그리고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다해 대림 제2주일2012년 12월 9일삼종 기도(Angelus) 강론 말씀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holy_father/benedict_xvi/angelus/2012/documents/
hf_ben-xvi_ang_20121209_en.html

(발췌 시작)

John the Baptist is described as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make his paths straight” (Lk 3:4). The voice proclaims the word, but in this case the Word of God comes first, since the word of God came to John, the son of Zechariah, in the wilderness (cf. Lk 3:2). He therefore plays an important role but always in terms of Christ. St Augustine comments: “John is the voice, but the Lord is the Word who was in the beginning (cf. Jn 1:1). John is the voice that lasts for a time; from the beginning Christ is the Word who lives for ever. Take away the word, the meaning, and what is the voice? Where there is no understanding, there is only a meaningless sound. The voice without the word strikes the ear but does not build up the heart” (In ev. Johannis tractatus 293, 3: pl 38, 1328).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목소리(voice).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로서 서술됩니다.(루카 복음서 3,4) 소리(the voice)는 그 말(the word)을 선포하나,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 첫 번째로 오는데,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 광야에서, 즈카르야의 아들인, 요한에게 과거에 왔기(came) 때문입니다(루카 복음서 3,2 참조). 그러므로 그는 한 개의 중요한 역할을 하나 그러나 항상 그리스도의 말들로서(in terms of) 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는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 "요한은 리(the voice)이나, 그러나 주님께서는 한처음에 계셨던 말씀(the Word)이시다(요한 복음서 1,1). 요한은 잠시 지속하는 소리(the voice)이나, 그러나 한처음부터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는 말씀(the Word)이시다. 그 의미인 말(the word)을 제거하라, 그리하면 그 목소리(the voice)는 무엇이 될까? 아무런 이해(understanding)가 있지 않은 곳에는 오로지 어떤 의미가 없는 소리(sound)만이 있을 뿐이다. 말(the word) 없는 소리(the voice)는 귀를 때릴 것이나 그러나 심장(the heart)을 강화하지(build up) 않는다"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 In ev. Johannis tractatus 293, 3: pl 38, 1328].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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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이번 항에서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19항에서의 "오시는 중인 위로자(the Consoler who is coming)"가, "선구자, 예언자, 세례자인 요한" 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17-720항의 전후 문맥 안에서, 

 

["하느님의 아드님(the Son of God)" 와 구분되나(distinct) 그러나 "이분" 과 분리될 수 없는(inseparable)(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89항)]  "하느님의 영", 즉, "성령(the Holy Spirit)", 혹은 성부 하느님(God the Father)보다는,

 

더 구체적으로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전달되었던 바는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 이었으므로, "이 빛(the light)", 즉, "그리스도"(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48항; 제1202항), 즉,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 즉, "성자(the Son of God, 하느님의 아드님)"을 말함에 대하여,

 

저술 연대순에 있어 거슬러 올라가면서, 신약 네 복음서 중의 유관 절들에 대한 가톨릭 주석들을 함께 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5-1. 우선적으로, 다음의 주소를 클릭하면, "공동번역 성서"와 "새 번역 성경"의 본문 모두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라는 번역 표현이 등장하고 있는 절들이, 마태오 복음서 3,3; 마르코 복음서 1,3; 루카 복음서 3,4; 요한 복음서 1,23, 이렇게 네 군데뿐임을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info.catholic.or.kr/bible/view.asp?ctindex=all&prindex=0&Keyword=외치는 이의 <----- 클릭하여 직접 확인하십시오.

 

5-2.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들 마태오 복음서 3,3; 마르코 복음서 1,3; 루카 복음서 3,4; 요한 복음서 1,23,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에서 "외치는 이"가 누구인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게시자 주 5-2: 다음은 "새 번역 성경"의 마태오 복음서 3,3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 전문인데, 마태오 복음서 3,3에서 인용되고 있는 이사야서 40,3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이다:

 

(발췌 시작)

마태오를 비롯한 공관 복음서의 저자들은 칠십인역에 따라 이사 40,3을 인용한다. 그래서 히브리말 분문(#)과는 달리,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외치는 것이 된다. 그리고 복음서 저자들은 칠십인역의 "우리 하느님"을 "그분"으로 고쳐, 이 성경 구절이 예수님께도 적용될 수 있게 만든다.(##)

(이상, 발췌 끝)

 

(#) 게시자 주:

(1) 위의 주석에서 말하는 "히브리말 본문"은, 기원후 9세기경에, 모음들이 없기에 자음들만으로 기록된 히브리어 성경의 본문에, 예를 들어, 칠십인역을 참고하여, 처음으로 모음 방점들을 각 절의 아래, 위에 추가하여, 특히 유다교 용도로 편집된, 소위 말하는, 마소라본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말함을 꼭 기억하도록 하라.

 

(2) 그리고 위의 주석에서 말하는 칠십인역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전에 유다교측에서 그리스어로 번역을 한 구약 성경으로서, 지중해 지역의 대다수의 유다인들이 사용하였던 구약 성경을 말하므로, 신약 네 복음서들이 저술될 때에, 자음들만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대다수의 유다인들이 제대로 읽고 이해하지도 못하였던 이미 죽어 버린 언어인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 대신에, 당연히, 당시에 이미 자음들과 모음들을 가지고 있었던 이미 대단히 정교한 언어였던 그리스어로, 예수님이 탄생 이전에 유다교측에서 번역을 한, 이 칠십인역을 인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지금 말씀드린 바는, 위에 발췌된 "주석 성경"의 주석을 독자들이 대단히 열심히, 예를 들어, 백 번을 읽더라도, 독자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내용임에 반드시 주목하라.

 

(3) 위의 주석 성경의 주석에서 언급되고 있는 이사야서 40,3에서처럼, 신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련한 칠십인역 구약 성경의 본문과 마소라본 구약 성경의 본문에 심각한 차이가 있는 경우가 한 두 개 정도가 아닌데, 이에 대한 지적의 글은 다음에 있으니 꼭 읽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45.htm <----- 필독 권고

 

(##) 게시자 주:

(1) 다음은 칠십인역 이사야서 40,3의 영문본이다:

 

출처: http://www.ellopos.net/elpenor/greek-texts/septuagint/chapter.asp?book=43&page=40

(발췌 시작)

3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Prepare ye the way of the Lord, make straight the paths of our God.

(이상, 발췌 끝)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고백하는 복음서 저자들에게 있어, 여기서 말하는 "우리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분" 즉,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 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생각이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2월 20일]

(2) 그리고 또한, 예를 들어, 다음의 논문의 제14-15쪽을 읽도록 하라:

http://www.calvin.edu/library/database/crcpi/fulltext/ctj/108278.pdf

[이상, 2014년 12월 20일자 내용 추가 끝]

 (이상, 게시자 주 5-2 끝)

 

5-3. 또한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들 마태오 복음서 3,3; 마르코 복음서 1,3; 루카 복음서 3,4; 요한 복음서 1,23,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에 대한 다음의 나바르 성경 주석서의 해설들에서 "외치는 이"가 누구인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a_adv_2.htm [가해 대림 제2주일 전례 성경 본문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adv_2.htm [나해 대림 제2주일 전례 성경 본문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c_adv_2.htm [다해 대림 제2주일 전례 성경 본문들]

http://ch.catholic.or.kr/pundang/4/navarre/b_adv_3.htm [나해 대림 제3주일 전례 성경 본문들]

 

5-4.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들 마태오 복음서 3,3; 마르코 복음서 1,3; 루카 복음서 3,4; 요한 복음서 1,23,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에 대한 1996년에 초판 발행된 성 요셉 출판사의 "주석 성서 신약"의 주석들에서 "외치는 이"가 누구인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루카 복음서 3,4,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에 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은 주석을 하고 있는데, 아무런 출처의 제시도 없이 주어지고 있는 이 주석은, 위의 제4항(#) 게시자 주에 발췌된, 성서 학자인,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해석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발췌 시작)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이하 생략)

(이상, 발췌 끝)

 

그런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알기로, 성 요셉 출판사 발행 "주석 성서"의 주석들의 대부분은 NAB(New American Bible)의 주석들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러나 위의 주석은 다음의 NAB 루카 복음서 3,4에 대한 주석에는 없습니다: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WM.HTM#$3I9

[이상, 2014년 12월 16일자 내용 추가 끝]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2월 17일] 

게시자 주 5-4:

(1) 다른 한편으로, (i)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목소리(voice)" 는 (ii)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voice)"를 의미하나, 즉, (ii)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voices)들" 중에서만 오로지 (i)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voice)"가 있을 수 있으나, 그러나 그 역은 일반적으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는, (i)에서의 목소리(voice)는 그 소리의 주체가, 그 소리를 내는 자[예를 들어, 요한 복음서 1,23에서의 세례자 요한]가 아니라"외치는 이"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느나, 그러나 (ii)에서의 목소리(voice)는 그 소리의 주체가 그 소리를 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ii)의 경우에는 짐승들의 목소리(voice)들도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중간 결론 1) 따라서, 세례자 요한은 그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목소리(voice)" 이기 때문에, 지금 바로 위에서 지적한 바에 의하여,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voice)" 라고 불릴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유다교 용도로 기원후 9세기경에 편집된, 소위 말하는, 마소라본 히브리어 구약 성경 이사야서 40,3과는 달리, 칠십인역 이사야서 40,3에서처럼, "이 외치는 이""하느님"인 것이 요한 복음서 1,23에서 세례자 요한의 경우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

(#) 게시자 주: 예를 들어, 요한 복음서 3,29-36 에 대한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의 해설, Tractate 14 (John 3:29-36), 6 에는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출처: http://www.newadvent.org/fathers/1701014.htm

(발췌 시작)

Are they not voices of God that are heard from John, when he bears witness of Christ?

 

세레자 요한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목소리로] 증언할 때에, 그로부터 듣게 되는 목소리들은 하느님의 목소리(voices of God)이 아닙니까?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 

 

(2) 그리고, 위의 제4항(#) 게시자 주에서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두 번째 강론 말씀 중에서 언급되고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매년 대림 제3주일 성무일도/시간경 독서기도에서 제2독서로 발췌되고 있습니다:

 

출처 1: http://info.catholic.or.kr/divine_office/default.asp?sunseo=1&gomonth=2014-12-14&stype=re [우리말본] <----- "heart(s)""마음"으로 번역한 번역 오류 있음.

출처 2: https://www.crossroadsinitiative.com/library_article/336/
John_is_the_Voice__Jesus_is_the_Word__St._Augustine.html
 [영어본]

(출처 2에서 발췌 시작)

John is the Voice, Jesus is the Word--St. Augustine

 

John is the Voice
Jesus is the Word

 

by St. Augustine of Hippo

 

Early Church Father and Doctor of the Church

 

Saint Augustine, Early Church Father, Dr, Marcellino D'Ambrosio

This excerpt from a sermon by St. Augustine (Sermo 293, 3: PL 1328-1329) is used in the Roman Office of Readings for the Third Sunday in Advent known as Gaudete or Rejoice Sunday.  It presents a wonderful contrast between the role of John the Baptist, the voice crying out in the wilderness, and that of his cousin, Jesus, the Word of God made flesh.  The humility of John, whose role was to prepare the way of the Lord, is highlighted.  His joy was complete to see Jesus increase and himself decrease in importance.

 

John is the voice, but the Lord is the Word who was in the beginning. John is the voice that lasts for a time; from the beginning Christ is the Word who lives for ever.


Take away the word, the meaning, and what is the voice? Where there is no understanding, there is only a meaningless sound. The voice without the word strikes the ear but does not build up the heart.


However, let us observe what happens when we first seek to build up our hearts. When I think about what I am going to say, the word or message is already in my heart. When I want to speak to you, I look for a way to share with your heart what is already in mine.


In my search for a way to let this message reach you, so that the word already in my heart may find place also in yours, I use my voice to speak to you. The sound of my voice brings the meaning of the word to you and then passes away. The word which the sound has brought to you is now in your heart, and yet it is still also in mine.


When the word has been conveyed to you, does not the sound seem to say: The word ought to grow, and I should diminish? The sound of the voice has made itself heard in the service of the word, and has gone away, as though it were saying: My joy is complete. Let us hold on to the word; we must not lose the word conceived inwardly in our hearts.


Do you need proof that the voice passes away but the divine Word remains? Where is John’s baptism today? It served its purpose, and it went away. Now it is Christ’s baptism that we celebrate. It is in Christ that we all believe; we hope for salvation in him. This is the message the voice cried out.


Because it is hard to distinguish word from voice, even John himself was thought to be the Christ. The voice was thought to be the word. But the voice acknowledged what it was, anxious not to give offence to the word. I am not the Christ, he said, nor Elijah, nor the prophet. And the question came: Who are you, then? He replied: I am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is the voice of one breaking the silence.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he says, as though he were saying: “I speak out in order to lead him into your hearts, but he does not choose to come where I lead him unless you prepare the way for him”.


What does prepare the way mean, if not “pray well”? What does prepare the way mean, if not “be humble in your thoughts”? We should take our lesson from John the Baptist. He is thought to be the Christ; he declares he is not what they think. He does not take advantage of their mistake to further his own glory.


If he had said, “I am the Christ”, you can imagine how readily he would have been believed, since they believed he was the Christ even before he spoke. But he did not say it; he acknowledged what he was. He pointed out clearly who he was; he humbled himself.


He saw where his salvation lay. He understood that he was a lamp, and his fear was that it might be blown out by the wind of pride.

 

(이상, 발췌 끝)

 

(3) (번역 오류) 그런데, 바로 위의 출처 2에서 "heart(s)" 로 번역된 표현의 자구적 의미(literal sense)"인간의 심장(염통)(the human heart)"이므로, 바로 위의 출처 1에서, "heart(s)" 로 번역된 여덟 개의 표현들에 대응하는 현재의 차용(借用) 번역 표현인 "마음"을 모두 "심장(들)" 으로 교체하여 주실 것을 요청드립니다. 이 지적에 대하여서는 다음의 글들을 꼭 읽도록 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032.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84.htm <----- 필독 권고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95.htm <----- 필독 권고

(이상, 게시자 주 5-4 끝).

  

5-5.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들 마태오 복음서 3,3; 마르코 복음서 1,3; 루카 복음서 3,4; 요한 복음서 1,23,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에 대한 1970년에 초판 발행된 NAB(New American Bible)의 주석들에도 "외치는 이"가 누구인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INDEX.HTM

 

게시자 주 5-5: 다음은 요한 복음서 1,23에 대한 NAB(New American Bible) 주석 전문이다. 이 주석이, 위의 게시자 주 5-2에 발췌된 마태오 복음서 3,3에 대한 "주석 성경"의 주석과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도록 하라:

 

출처: http://www.vatican.va/archive/ENG0839/__PX9.HTM

(발췌 시작)
[23] This is a repunctuation and reinterpretation (as in the synoptic gospels and Septuagint) of the Hebrew text of ⇒ Isaiah 40:3 which reads, "A voice cries out: In the desert prepare the way of the Lord."

 

[23] 이 절은 (공관 복음서들칠십인역에서처럼), 다음과 같이 씌어 있는(reads), 이사야서 40,3 히브리어 본문(#)에 대한 [옛 법(Old Testament/Old Law)이 아니라 새 법(New Testament/New Law)에 의거한] 한 개의 재구두(再句讀)와 재해석(再解釋, [표준국어대사전] 옛 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다)(a repuncuation and reinterpretation)입니다: "한 목소리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사막에서 주님의 길을 준비하여라." (A voice cries out: In the desert prepare the way of the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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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역자 주: 여기서 말하는 히브리어 본문은, 유다교 용도로 기원후 9세기경에 편집된, 소위 말하는, 마소라본 히브리어 구약 성경 이사야서 40,3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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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5-6.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들 마태오 복음서 3,3; 마르코 복음서 1,3; 루카 복음서 3,4; 요한 복음서 1,23,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에 대한 Haydock's Catholic Bible Commentary 1859의 주석들에도 "외치는 이"가 누구인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출처: http://haydock1859.tripod.com/ 

 

게시자 주 5-6:

(1) 1611년 King James Version 이 개신교의 한 분파인 영국 성공회에 의하여 처음 마련될 때에 영향을 준 것으로 널리 알려진, 16세기에 가톨릭 용으로 영어로 번역된 Douay-Rheims Bible마태오 복음서 3,3; 마르코 복음서 1,3; 루카 복음서 3,4; 요한 복음서 1,23 은, 1611년 King James Version 의 해당 절들과 마찬가지로, "외치는 이의 소리(the voice of one crying)" 라는 표현을 하고 있음은 또한 바로 위의 출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그리고 1611년에 개신교의 한 분파인 영국 성공회에 의하여 처음 마련된 King James Version 마태오 복음서 3,3; 마르코 복음서 1,3; 루카 복음서 3,4; 요한 복음서 1,23

의 해당 절들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the voice of one crying)" 라고 번역되었음은 다음의 출처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biblestudytools.com/kjv/

 

5-7. 다음은 가톨릭 교회의 사제였던 Cornelius Cornelii a Lapide(1567-1637년)에 의하여 마련된 가톨릭 주석서인 The Great Biblical Commentary of Cornelius a Lapide마태오 복음서 3,3에 대한 주석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http://www.corneliusbiblecommentary.faithweb.com/3&4matth.htm

(발췌 시작)

S. John was the voice of God, 1. Announcing that Christ was about to come. 2. Pointing out that He was now born, and inviting men to repent and prepare for the grace of Christ. “By the expression, crying, the strength of his preaching is denoted,” says Raban. Aptly says Bede, “God, indeed, cried by means of others, but He Himself is the only Voice, because He shows the present Word.” (이하 생략)


성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목소리(the voice of God)였는데, 1.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임을 선포하였고, 2. 그분께서 이제 태어나셨음을 지적하였으며,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총을 얻기 위하여 사람들을 회개하도록 그리고 준비하도록 초대하였습니다. Raban은 "외치는(crying) 이라는 표현에 의하여 그의 설교 행위의 강도(strength)가 나타내어졌다" 라고 말합니다. 성 베다 가경자(Bede)는 "하느님께서는, 정말로, 다른 이들을 써서 외치셨는데, 그러나 당신 자신이 유일한 목소리(the only Voice)이신데, 왜냐하면 당신께서 현존하는 말씀(the present Word)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라고 적절하게 말합니다. (이하 생략)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5-8. 다음은, 요한 복음서 1,23을 발췌하여 본문 중에서 인용하고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신학 대전(Summa Theologica), IIIa, q38, a2, Reply to Objection 2 전문입니다:

 

출처: http://www.logicmuseum.com/authors/aquinas/summa/Summa-III-35-39.htm#q38a2ad2

(발췌 시작)

IIIª q. 38 a. 2 ad 2 Ad secundum dicendum quod tota doctrina et operatio Ioannis ordinabatur ad Christum, qui multitudine signorum et suam doctrinam et Ioannis confirmavit. Si autem Ioannes signa fecisset, homines ex aequo Ioanni et Christo attendissent. Et ideo, ut homines principaliter Christo attenderent, non est datum Ioanni ut faceret signum. Iudaeis tamen quaerentibus quare baptizaret, confirmavit suum officium auctoritate Scripturae, dicens, ego vox clamantis in deserto, etc., ut dicitur Ioan. I. Ipsa etiam austeritas vitae eius officium eius commendabat, quia, ut Chrysostomus dicit, super Matth. mirabile erat in humano corpore tantam patientiam videre.

 

Reply to Objection 2. The whole teaching and work of John was ordered unto Christ, who, by many miracles confirmed both His own teaching and that of John. But if John had worked signs, men would have paid equal attention to John and to Christ. Wherefore, in order that men might pay greater attention to Christ, it was not given to John to work a sign. Yet when the Jews asked him why he baptized, he confirmed his office by the authority of Scripture, saying: "I am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etc. as related, John 1:23 (cf. Isaiah 40:3). Moreover, the very austerity of his life was a commendation of his office, because, as Chrysostom says, commenting on Matthew (Hom. x in Matth.), "it was wonderful to witness such endurance in a human body." 

 

반론 2에 대한 답변. [세례자] 요한의 전체 가르침 및 일은 그리스도 쪽으로 명해졌는데, 당신께서는 많은 기적(miracles)들에 의하여 당신 고유의 가르침과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 둘 다를 확증하셨습니다(confirmed). 그러나 만약에 요한이 표징(signs)들을 일하였더라면,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 쪽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쪽으로 동등한 관심을 나타내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그리스도 쪽으로 더 커다란 관심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하고자, 어떤 표징(a sign)을 일하는 것이 [세례자] 요한에게 부여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이 그가 왜 세례를 주느냐고 그에게 질문하였을 때에, 그는, 다음과 같이, 요한 복음서 1,23 (이사야 40,3 참조)에서 말해지고 있듯이, 말함으로써, 성경의 권위에 의하여 자신의 직무를 확증하였습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소리(I am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이다" 등. (이하 문장에 대한 우리말 번역 생략)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게시자 주 5-8:

(1) 위의 라틴어 정본과 영어본을 정밀하게 비교/검토하면, (i) 라틴어 문장 "ego vox clamantis in deserto." 가 (ii) 영어로 "I am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로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i) 라틴어 문장 "ego vox clamantis in deserto." 을 영어로 직역 번역하면 (iii) "I am a voice that cries in the wilderness(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한 개의 목소리이다)" 이므로(#), 이 (iii)의 영어 번역문이, (ii) 의 영어 번역문 "I am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와 동일하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이유 때문에라도, 위의 게시자 주 5-4와 게시자 주 5-5에서 말씀드린 바가 유의미하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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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이 번역문은 다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의 요한 복음서 1,23에 대한 해서, 제236항에 주어진 영어 번역문이다:

http://dhspriory.org/thomas/John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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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간 결론 2) 바로 위의 제(2)항의 끝부분에서 말씀드린 바가 무슨 말씀인고 하면, 만약에 4세기성 예로니모(St. Jerome, 347-420년)가, 예를 들어, 마태오 복음서 3,3요한 복음서 1,23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구절이기에 유다교측에 의하여 이미 변조되었을 수도 있는 당시의) 히브리어 이사야서 40,3칠십인역 이사야서 40,3보다 더 신뢰하여, "I am a voice that cries in the wilderness(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한 개의 목소리이다)."에 등가인 라틴어 문장으로 번역하지 않고, 16세기 이후처럼칠십인역 이사야 40,3을 더 신뢰하고 또 존중하여, "I am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소리이다)," 에 등가인 라틴어 문장으로 번역을 하였더라면, "외치는 이"가 "하느님"임이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대단히 분명하게 전달되어, 그리하여, 예를 들어, 다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에 의하여 마련된 마태오 복음서 3,3요한 복음서 1,23에 대한 해설들과 이어지는 제5-9항에서 말씀드릴 문헌인 "황금 사슬들(Golden Chains, Catena Aurea)"에서의 해당 절들에 대한 초기 교회 시절의 교부들의 주석들이, 다루어야 하는 경우의 수가 줄어들게 되어, 훨씬 더 간단 명료하게 마련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출처 1: http://dhspriory.org/thomas/SSMatthew.htm#3 [3-1, (3)]

출처 2: http://dhspriory.org/thomas/John1.htm [제236항]

 

(4) 왜냐하면, 만약에 성 예로니모(St. Jerome, 347-420년)에 의하여 마태오 복음서 3,3; 마르코 복음서 1,3; 루카 복음서 3,4; 요한 복음서 1,23 에서의 대응하는 라틴어 문장이 모두 "I am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소리이다)," 와 등가인 라틴어 문장으로 번역되었더라면, 이미 이 글의 질문 1에서 지적하였듯이, 이 문장에 있어, 어법상, "외치는 이" 는 결코 이 문장의 주어인 세례자 요한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은 바로 위의 출처 1에서 발췌한 단락입니다.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두 가지의 경우들에 해당하는 두 부분들에 필자가 초록 색칠하였습니니다:

 

(발췌 시작)
Therefore, the voice of one crying... This can be understood in two ways: first, of Christ crying: "Since you desire proof that Christ is speaking in me" (2 Cor 13:3). This is the way he cried in all the prophets. Hence, it always says: "The word of the Lord was made to Jeremiah or Isaiah, etc." Yet none is called a voice, because they did not immediately precede Christ: "Behold, I sent my messenger to prepare a way before me, and the Lord whom you seek will suddenly come to his temple; the messenger of the covenant in whom you delight" (Mal 3:1). Or the voice of one crying, i.e. John shouting. It should be noted that a shout is made to the deaf: "Hear, you deaf; and look, you blind, that you may see. Who is blind but my servant, or deaf as my messenger whom I sent?" (Is 42:18) Secondly, from indignation: "Then the anger of the Lord was kindled against his people, and he abhorred his heritage" (Ps 106:40). Thirdly, to those who are distant; and they were far from God.

(이상, 발췌 끝)

 

위의 발췌문에서 빨간 색칠이 되어 있는 표현은, 최근의 번역 표현이 사용된 것인데, 4세기에 성 예로니모(St. Jerome, 347-420년)에 의하여 번역된 대중 라틴말 성경((Vulgate)에 있는, 이 표현에 대응하는, 라틴어 표현의 영어 번역문은 위의 빨간 색칠이 되어 있는 표현이 아니라,  "a voice that cries(외치는 한 개의 목소리이다)."에 등가인 라틴어 표현, "vox clamantis" 입니다. 그리고, 위의 발췌문의 빨간 색칠이 되어 있는 표현을 "a voice that cries(외치는 한 개의 목소리이다)."로 교체한 후에라야, 위의 발췌문 중의 두 번쨰 빨간 색칠이 되어 있는 표현 이후의 문장들이 유의미하게 됨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달리 말하여, 무슨 말씀인고 하면, 위의 발췌문에서 두 번째 빨간 색칠을 한 부분 이후의 해설은, 이 글의 질문 1에서 이미 지적하였듯이, 바로 이 빨간 색칠을 한 부분 자체가 세례자 요한이 외치는 자가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에, 위의 발췌문에서 "John Shouting" 이후의 해설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됨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혹시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분들께서는, 지금 드린 이 지적을 여러 번 차분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5-9. 다음은, 가톨릭 보편 교회 교도권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교황 우르바노 4세의 명에 따라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 1225-1274년)에 의하여 편집되어 마렸되었다고 알려진, "황금 사슬(Golden Chains, Catena Aurea)들"에 주어진 마태오 복음서 3,3에 대한 교부들의 주석들의 모음입니다.

 

게시자 주 5-9:
(1) 이 주석들은 애초에 4세기에 성 예로니모(St. Jerome)에 의하여 "vox clamantis" 라는 라틴어로 번역된 표현에 대한 주석들이므로, 바로 위의 게시자 주 5-8 (3)에서 이미 지적하였듯이, 아래의 영문본에서, 발췌 인용임을 표시하는 "" 안에 있는 "the voice of one crying" 는 모두 "voice that cries(외치는 한 개의 목소리이다)"로 교체한 후에 읽어야만, 해당 주석의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음에 반드시 주목하십시오. 그리고 발췌 인용임을 표시하는 "" 없이 언급되고 있는, the word of the Father (patris verbum), 그리고 the voice of the word crying (vox verbi clamantis)는, 각각 해당 교부 고유의 주석이라는 생각입니다:

 

출처 1: http://dhspriory.org/thomas/CAMatthew.htm#3

출처 2: http://www.clerus.org/bibliaclerusonline/en/cwl.htm#a3q

(출처 1과 출처 2에서 발췌 시작)

Augustinus de Cons. Evang: Haec autem verba Ioannis alii Evangelistae praetermiserunt. Iam vero quod sequitur hic est qui dictus est per Isaiam prophetam dicentem: vox clamantis in deserto: rectas facite semitas eius, ambigue positum est, nec elucet utrum ex persona sua Evangelista commemoraverit, an adhuc verba eiusdem Ioannis secutus adiunxerit, ut totum hoc Ioannes dixisse intelligatur: poenitentiam agite: appropinquabit enim regnum caelorum. Hic est enim de quo dictum est per Isaiam prophetam. Neque enim hoc movere debet quia non ait: ego sum, sed hic est; nam et Matthaeus dixit: invenit hominem sedentem in telonio, et non dixit: invenit me. Quod si ita est, non est mirum si et interrogatus quid diceret de seipso, sicut narrat Ioannes Evangelista, respondit: ego vox clamantis in deserto.


Aug., de Cons. Evan., ii, 12: The other Evangelists omit these words of John. What follows, "This is He, &c." it is not clear whether the Evangelist speaks them in his own person, or whether they are part of John's preaching, and the whole from "Repent ye," to "Esaias the prophet," is to be assigned to John. It is of no importance [p. 94] that he says, "This is he," and not, "I am he;" for Matthew speaking of himself says, "He found a man sitting at the toll-office;" (Mt 9,9) not "He found me." Though when asked what he said of himself, he answered, as is related by John the Evangelist, "I am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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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ius in Evang: Sicut autem, quia unigenitus filius verbum patris vocatur, secundum illud: in principio erat verbum. Ex ipsa autem nostra locutione cognoscimur, quia vox sonat ut verbum possit audiri. Adventum itaque domini Ioannes praecurrens vox dicitur, quia per eius ministerium patris verbum ab hominibus auditur.


Greg., Hom. in Ev., i. 7: It is well known that the Only-begotten Son is called the Word of the Father; as in John,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Jn 1,1) But it is by our own speech that we are known; the voice sounds that the words may be heard. Thus John the forerunner of the Lord's coming is called, "The voice," because by his ministry the Word of the Father(#) is heard by 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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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위에 발췌된 영문본의 여기에서 "patris verbum" 를, "the Word of the Father" 대신에, "the voice of the Father" 로 번역하였는데, 이것은 명백한 번역 오류이기에,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바로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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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ysostomus super Matth: Vox etiam est sonus confusus, nullum secretum cordis ostendens, sed hoc tantummodo significans quia vult aliquid dicere ille qui clamat; verbum autem est sermo mysterium cordis aperiens. Ad haec, vox inter homines et animalia communis est; verbum autem est hominum tantum. Ideo ergo Ioannes dictus est vox, non verbum, quia per eum Deus sua consilia non demonstravit, sed hoc solum quod Deus aliquid facere in hominibus meditabatur; postea autem per filium suum plenissime mysterium suae voluntatis aperuit.


Pseudo-Chrys.: The voice is a confused sound, discovering no secret of the heart, only signifying that he who utters it desires to say somewhat; it is the word that is the speech that openeth the mystery of the heart. Voice is common to men and other animals, word peculiar to man. John then is called the voice and not the word, because God did not discover His counsels through him, but only signified that He was about to do something among men; but afterwards by His Son he fully opened the mystery of his 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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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banus: Qui recte vox clamantis ob fortitudinem praedicationis dicitur. Tribus autem modis clamor accidit: hoc est, si longe positus est cui loquatur, si surdus, si per indignationem; et haec humano generi acciderunt.


Rabanus: He is rightly called, "The voice of one crying," on account of the loud sound of his preaching. Three things cause a man to speak loud; when the person he speaks to is at a distance, or is deaf, or if the speaker be angry; and all these three were then found in the human 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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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ossa: Est igitur Ioannes quasi vox verbi clamantis: verbum enim clamat in voce, idest Christus in Ioanne.


Gloss: John then is, as it were, the voice of the word crying. The word is heard by the voice, that is, Christ by J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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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da: Sicut etiam clamavit in omnibus qui a principio aliquid divinitus dixerunt; et tamen iste solus est vox: quia per eum praesens verbum ostenditur, quod alii longe nuntiaverunt.


Bede, Gloss. ord. in cap. iv. 1: In like manner has He cried from the beginning through the voice of all who have spoken aught by inspiration. And yet is John only called, "The voice;" because the Word which others shewed after off, he declares as ni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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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gorius in Evang: Ipse autem Ioannes est clamans in deserto, quia derelictae ac destitutae Iudaeae solatium redemptoris annuntiat.(##)


Greg., Hom. in Ev., i. 7. 2: "Crying in the desert," because he shews to deserted and forlorn Judaea the approaching consolation of her Redee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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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중간 결론 3) 바로 이 표현이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19항 중의 한 개의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등가로(equivalently) 표현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He proclaims the imminence of the consolation of Israel; he is the "voice" of the Consoler who is coming[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에 의한] 위로(consolation)의 임박/촉박(imminence)을 선포하며, 그리하여 그는 오시는 중인 위로자(the Consoler who is coming)"목소리(voice)"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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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발췌 끝)

 

게시자 주 5-9:

(2) 이상, 지금까지 함께 고찰한 바로부터, 다음의 결론들을 도출합니다:

 

(중간 결론 4)

(i) "황금 사슬(Golden Chains, Catena Aurea)들"에 주어진 마태오 복음서 3,3에 대한 교부들의 주석들 중의 대 교황 그레고리오 1세(Gregory I, the Great, 540-604년)의 주석들은, 위의 게시자 주 5-4에 발췌된, 매년 대림 제3주일 성무일도/시간경 독서기도에서 제2독서로 발췌되고 있는 성 아우구스티노(St. Augustine, 354-430년)의 강론을 뒤따르고 있다.

 

(ii) 그리고, "황금 사슬(Golden Chains, Catena Aurea)들"에 주어진 마태오 복음서 3,3에 대한 교부들의 주석들 중의 대 교황 그레고리오 1세(Gregory I, the Great, 540-604년)의 주석들에 의하여,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19항에서 언급되고 있는 하느님이신 "오시는 중인 위로자(the Consoler who is coming)"는, 더 구체적으로, 하느님의 영, 즉, 성령(the Holy Spirit)아니라구속주(the Redeemer), 즉,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 즉, 성자(the Son of God, 하느님의 아드님)을 말한다.

 

(iii) 따라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19항 중의 다음의 문장은, 위의 게시자 주 4에 발췌된, 교황 베네딕토 16세2009년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6월 24일) 교리 교육용 일반 알현(General Audience) 강론 말씀의 신학적 근거이다:

 

(발췌 시작)
CCC 719 ... 그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에 의한] 위로(consolation)의 임박/촉박(imminence)을 선포하며, 그리하여 그는 오시는 중인 위로자(the Consoler who is coming)"목소리(voice)" 입니다.

(이상, 발췌 끝)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2월 21일]

(iv) 세례자 요한의 "회개하여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voice)(마태오 복음서 3,2)는, "회개하여랴.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하느님의 말씀(the Word of God), 즉, 성자의 말씀, 즉, 하느님의 아드님의 말씀(마태오 복음서4,17; 마르코 복음서 1,15)과거에 듣고서, 자신이 들은 바로 이 말씀(word)을 외치는 목소리(voice)였다. 그리고 바로 이 특별한 하느님의 말씀을 바로 이 말씀, 즉, 오시는 중인 위로자(the Consoler who is coming) 직전에 외친 자는 성경 본문 전체에 걸쳐 오로지 세례자 요한뿐이었기 때문에, 선구자로 불리어 왔다는 생각이며, 따라서,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19항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332항, 제523항, 제524항, 제717항, 제718항의 신학적 근거이다.
[이상, 2014년 12월 21일자 내용 추가 끝]

 

(v)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692항은, 아무런 설명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첫 번째 위로자(the first Consoler)" 라고 불린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우리의 심장(hearts)들을 성령 쪽으로 열어 주시는 참된 위로자(the true Consoler)라는 의미(#)를 지닌 이러한 칭호(title)의 신약 성경 근거는 마태오 복음서 3,3; 마르코 복음서 1,3; 루카 복음서 3,4; 요한 복음서 1,23, 그리고 1요한 1,2이고, 그리고 교리 근거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719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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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이것은 다음에 있는 2007년 2월 17일자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연설문 중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다:

http://www.vatican.va/holy_father/benedict_xvi/speeches/2007/february/documents/
hf_ben-xvi_spe_20070217_seminario-romano_e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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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기원후 9세기경에 갈릴래아 호수 서쪽 해변에 위치한 티베리아스에서, 유다교 용도로 편집되어 마련된, "새 번역 성경" 의 구약 성경의 번역 대본인, 마소라본 히브리어 구약 성경 이사야서 40,3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이전에 유다교측에 의하여 그리스어로 번역이 된 칠십인역 구약 성경 이사야서 40,3과 다른 부분이 혹시라도 유다교측의 고의적/의도적 변조에 의한 것이라면, 성 예로니모(St. Jerome, 347-420년)가, 당시의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칠십인역 구약 성경보다 더 신뢰하여, 당시의 히브리어 구약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전에, 즉, 기원후 1세기부터 4세기 사이의 어느 시점에, 이 다른 부분이 이미 유다교측에 의하여 유다교 용도로 고의적/의도적으로 변조되었을 수도 있다는 추정(presumption)을 하게 된다.(##)

 

[내용 추가 일자: 2014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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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자 주: 혹시 지금 지적한 바에 대하여 관심이 있으신 분들께서는 다음 글들과 검색 결과를 참고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45.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55.htm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860.htm  

http://www.ecclesia.org/truth/comparisons.html

http://www.kalvesmaki.com/LXX/NTChart.htm

여기를 클릭하십시오 [구글 검색 결과 with "isaiah 40:3" "septuagint" "Masoretic" "Qumr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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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다른 한편으로, 다음의 출처 3은 꿈란(Qumran) 동굴에서 발견된, 소위 말하는, "The Great Isaiah Scroll (위대한 이사야 두루마리)" 의 이사야서 40,3의 영어본인데, 만약에 이 영어 번역이 직역 번역이고 그리고 신뢰할 수 있다면, 바로 위의 제(vi)항의 추정은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출처 1: http://dss.collections.imj.org.il/isaiah [예루살렘에 위치한 이스라엘 박물관 제공의 자료로서, "The Great Isaiah Scroll (위대한 이사야 두루마리)" 본문의 각 절들을 확대하여 정밀하게 들여다 볼 수 있음]

출처 2: http://www.ao.net/~fmoeller/qum-33.htm ["The Great Isaiah Scroll (위대한 이사야 두루마리)" 의 이사야서 40,2 부터 40,26 까지 사진]

출처 3: http://www.ao.net/~fmoeller/qa-tran.htm#c33 [영어본]

 

(출처 3에서 발췌 시작)

2. her sins (3.) A voice crying in the wilderness, Prepare the way of the YHWH, make straight in the desert
3. a highway for our God.

(이상, 발췌 끝)

 

따라서, 우리는 위의 게시자 주 5-2 및 게시자 주 5-5를 다시 한 번 더 유념하게 된다:

[이상, 2014년 12월 20일자 내용 추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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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수 소순태 미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23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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