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덕동성당 게시판

안충석신부님 고향 감곡성당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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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선호 [pete3200] 쪽지 캡슐

2004-09-22 ㅣ No.6254

[믿음의 고향을 찾아서]청주교구 감곡성당(상)
733 호
발행일 : 2003-07-20

107년간 충북, 경기 남동부에 복음의 씨앗 뿌려... 초대 주임 임가밀로 신부가 51년간 주춧돌 놓아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하였습니다."
좁디 좁은 골목길을 돌아 매산 기슭 청주교구 감곡성당(주임 신종섭 신부)으로 오르다 보니, 언제 세웠는지 모를 팻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만큼 작은 표지판…. 하지만 계속 그 내용을 새겨보니 초대 주임 임 가밀로 신부가 신자들에게 자주 건넸다는 한마디 말이 깊은 우물처럼 아련한 여운을 남겼다.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서울에서 이천을 지나 불과 한시간 남짓. 청미천을 경계로 경기도 장호원과 이웃하고 있는 '충북 장호원' 감곡에 도착한 것은 지역 특산 미백 복숭아가 막 익어가는 무렵이었다. 그 달콤한 복숭아 향기를 좇다보니 충북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 357의2, 감곡성당에 이르렀다.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188호 감곡성당은 그날도 그렇게 '고향집처럼' 편안했다. 파리외방전교회 시잘레(chizalle)신부가 설계,1928년 공사에 들어가 3년만에 완공한 고딕식 붉은 벽돌 성당은 107년간 충북은 물론 경기 남동부 일원에 복음의 씨앗을 뿌려온 믿음의 고향답게 신앙의 정취가 물씬 배어났다. 붉은 벽돌에 낀 이끼 하나에도, 성당 구내 성모상에도, 느티나무 은행나무 하나 하나에도 정감이 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다는 36.5m의 중앙종탑에 8각 첨탑 또한 위압감을 주기보다는 포근하게 다가섰고 금세라도 종소리가 퍼질듯 했다. 성당으로 오르는 가파른 계단엔 할머니 한 분이 '예쁜' 손녀딸을 안고 한가롭게 산책을 즐겼고, 성당 발치엔 감곡 들녘이 시원하게 펼쳐졌다.

성당에 들어서니 스물대여섯명의 할머니 신자들이 참례한 가운데 신종섭 신부가 미사를 집전하고 나서 순례온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창 공지 중이었다.

"감곡매괴성모성당은 처음부터 성모님께 봉헌된 곳입니다. 또한 성모신심과 성체신심을 바탕으로 신앙의 못자리가 된 곳이며, 150여명의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성소의 못자리입니다…."

신 신부의 말을 차근차근 새기며 성전을 둘러보았다. 제대 정면에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게 7발의 총탄을 맞았다는 본당 주보 묵주기도 성모상이 눈에 들어왔다. 프랑스 루르드성지에서 제작돼 1930년 성전 봉헌 당시 제대 중앙에 안치된 성모상은 70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건재했다. 지금에 와서야 그 총탄 흔적을 두고 성모께서 예수 그리스도가 겪은 7가지 고통인 '성모칠고(聖母七苦)'와 연관짓기도 하고 전쟁을 겪은 우리 겨레의 아픔에 동참하고자 한 성모의 마음이라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그런 해석을 넘어서서 70년 넘게 '전구하심'을 통해 사랑을 넘치도록 베풀어 온 성모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편안했고 위로를 주었다. 성당 내부 천장 원형 돔(Dome)이나 제대 양쪽의 4개 소제대, 기둥으로 구분되어 세개의 회랑으로 나뉘어진 신자석, 라틴 십자형 평면 구성은 국내 다른 옛 성당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성체신심'과 '성모신심'을 두 기둥으로 삼아 성장해온 복음화율 28.3%(2002년말 현재 주민수 9967명에 신자 2823명)의 감곡성당은 생각보다는 그리 크지 않다. 명동성당과 비교하자면 3분의1쯤 될까 싶을 정도. 이처럼 조그마한 성당에 세워진 공동체가 어떻게 이처럼 큰 '사도행전'을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이에 대해 신 신부는 한마디로 요약했다. "감곡매괴성당은 한마디로 임 가밀로 신부를 통한 성모님 사랑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선교사 체취 고이 간직>
이윽고 성당을 나서 오른쪽 쪽문을 나서자 그 '사랑의 선교사' 임 가밀로(Bouillon Camill, 한국명 임가미) 신부의 동상이 나타났다. 감곡본당에서만 51년간 사목하다 1945년 10월25일 "성모여, 저를 구하소서'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선교사는 여전히 감곡 공동체의 주춧돌로 남아 있는 듯했다. 둥근 차양의 선교사용 모자를 오른손에 들고 긴 수단을 걸친 채 매산기슭 성모광장의 로사리오 성모를 응시하는 듯한 임 가밀로 신부의 모습은 감곡 공동체에 드리워진 임 신부의 그림자를 그만큼 반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징표들은 1934년 건립된 옛 사제관을 개축, 지난해 10월 개관한 '유물관'에 풍부하게 담겨 있다. 1914년 국내 첫 성체거동 때부터 사용했던 성광과 금색 제의, 영대, 구두, 그리고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순교자가 지은  룗주교요지(主敎要旨)룘 1906년판 등 문서류, 본당사를 개괄한 각종 사진 등 50여점은 100여년간 신앙의 발자취를 그대로 담고 있다. 더 대단한 것은 항온·항습시설이 완벽한 수장고에 수장된 나머지 250여점의 유물이었다.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제구와 서적, 심지어는 은행놀이판과 카드까지 각종 유물이 완벽하게 정리돼 유물번호까지 매겨져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돼 있다는 것이 놀라움을 안겼다.

하지만 유물관에서 빠뜨리지 말아야 할 것은 다락방 성체조배실. 해거름 무렵의 얇은 햇살이 천장 창문을 통해 야트막하게 비겨드는 성체조배실에 들어서 한점 소음도 스미지 않는 다락방에서  무릎을 꿇고 빛나는 성광 속 성체를 바라보며 조배를 하노라니,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에 금세 빠져버릴 것만 같다. 역시 국내에서 첫 성체거동을 거행한 성당의 성체조배실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신앙의 현장이다. (계속)
글=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사진=전대식 기자
jfaco@pbc.co.kr

***감곡성당 가는 길
중부고속도로 일죽IC를 거쳐 17km 떨어진 장호원을 거쳐 감곡면으로 들어가거나, 영동고속도로 여주 분기점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빠져 장호원IC로 나와 약 3km를 가면 감곡면 소재지가 나온다. 감곡면에 들어서서 매괴여중·매괴고 골목길을 지나 성당으로 들어가거나 장호원에서 청미천 다리를 건너자마자 죄회전, 들녘 제방을 따라가면 성당 표지판이 나온다. 문의 : 043-881-2808, 감곡본당 사무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사진설명)
1. '성모신심'과 '성체신심'을 두 기둥으로 107년간 '신앙의 못자리'가 돼온 청주교구 감곡성당. 고색창연한 성당에서 매일미사를 보고 성당 문을 나서는 할머니 신자들의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2. 성당 오른쪽 쪽문을 나서면, 감곡성당에서만 51년간 사목했던 '사랑의 선교사' 임 가밀로 신부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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