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성당 게시판

생애 가장 기쁜날중에 하루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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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경 [lsk55] 쪽지 캡슐

2002-09-16 ㅣ No.3912

 

제 생애 가장 기쁜날의 하루였습니다.

 

지는 고향이 그리워서... 어제 논에서 벼베고 왔어요.

9월 15일(일) 아침새벽 긴급조성된 동창생들과 수해지역인 강릉으로 달렸습니다.

이틀전 우리 용산성당의 많은 형제자매님의 도움으로 "수재의연품"을 그곳 수재민들에게 전달드렸지만, 한번 진하게 몸으로 때우는 봉사를 못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렸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은 독수리 5형제와 "등산을 가기로 했던 날인데..."

그러나 소풍날을 기다리는 어린시절 소녀처럼 마음이 무척 들떴을 전례분과장님과 수산나 자매님은 행사를 빵구낸 저를 이해하여 주실 것이라 믿사옵니다.

정 경우 엉아와 이 승국오빠도 괜찮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지 않겠느냐고 위로해 주셔서 감사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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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이 하는 일, 오른 손이 모르도록 해야하는데..."

허나 "징징 울지 않으면, 그 현장의 아픔을 모르실 것 같아서 그간 제가 본의 아니게 풍각을 좀 떨었지요."

부디 용서해 주시와요. 앞으론 안그럴께요. 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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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길 영동 고속도로를 쌩쌩 거리며 달린 덕분에 3시간도 채 안되어서 우리일행은 수해농가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강릉시청에서 지정해준 곳은 주문진 장덕이였습니다.

자원봉사처 장소는 장덕리에 한 村老의 반쯤 수몰된 논이었으며, 여기서 제대로 익지도 않은 나락을 수확하는 작업이었답니다.

주변의 논들 중 어떤 곳은 이삭에서 벼가 싹이 터서 잔디밭처럼 변한 곳에서부터 이삭목만 겨우 빠져나와 낫으로 수확이 안 되는 논, 아예 그냥 자갈밭이 되어버린 농토등으로 변한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村老의 처진 어깨만큼이나 우리의 가슴도 가라앉았지만, 그것을 뒤로하고 이내 반은 말라 비틀어지고 쓰러지고 수발아(수확 전 이삭에서 싹이 나오는 현상)된 벼의 수확 작업에 들어갔지요.

처음에는 의욕적으로 낫질을 했지만, 작업성이 워낙 나빠서 진척이 거의 되지 않았습니다.

일이 진행되면서 손에 낫질이 익어가고 또 왕년에 학교 다니던 시절에 답작에서 벼 수확하던 솜씨가 발휘되면서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였드랬지요.

서너 시간 작업을 하고나니 서너뱀이가 말끔이 수확이 되고, 짧아진 가을 해도 서녘으로 뉘엿뉘엿 기울어 가고 있었습니다.

갈길이 먼 우리 서울 팀 20여명의 전사들은 손발에 묻은 흙을 제대로 털 사이도 없이 이내 버스에 올랐습니다.

벌초 그리고 고향의 문안을 위하여 귀향하였던 차들이 고속도로로 몰리면서 귀경 버스안에서 고역을 치렀지만, 얼마나 마음이 기뻤는지 모른답니다.

귀경 버스안에서 저는 언제나 처럼 "기쁨조 역할"로 이틀전과 같이 "악을 쓰면서 가요 30년사를 두루 읊었지요."

그러다 보니 서울이 금방이었습니다.

용산 성당에서 단체로 꽃동네 피정을 간 마누라와 거의 같은 시각 서울에 도착했으나, 자원봉사대의 의리의 용팔이들은 그냥 헤어질 수 없어서 버스안에서 그렇게 퍼마신것도 부족하야 또다시 기념 쐬주를 진하게 하곤 늦은 밤 살짝 Key를 따고 집에 들어왔지요. 마치 아무일도 없었듯이...

비록 생전 안하던 일을 해서 마아~ 허리가 뻑적찌근하고, 몸이 파김치지가 됬지만 이렇게 행복할 수가...?

수해로 인하여 실의에 빠져 낮에는 봉사를 왔데도 그냥 말도 않던 촌노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지는 모습을 그려보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꿀맛같은 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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