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광장

원로를 찾아서/성 인호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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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숙 [dadia] 쪽지 캡슐

2005-10-13 ㅣ No.952

 

   


앞을 못 보지만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일은 중단할 수야 없지요

    “안녕하세요, 신부님! 저를 기억하시겠습니까?”
    “암, 기억하고말고. 반갑구만. 잘 지내고? 그래, 어인 일인가?”
    “내가 원로는 무슨 원로야. 나보다 훌륭하게 살아가시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사코 거절하시던 신부님을 찾아뵙고자 억지를 부려 전주로 내려갔다. 전주교구 소속으로 사목 일선에서 물러난 성민호 야고보 신부님(67세)이시다. 꼭 6년 만에 뵈었는데도 신부님은 기자의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하면서 알아보셨다.
    성 신부님은 앞을 전혀 보실 수 없다. 심지어 낮과 밤을 구별하시지 못할 정도로 시력을 잃으셨다. 그러나 신부님 스스로의 생각은 물론이요 겉으로 보기에도 연로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결코 아니다. 신부님의 말씀마따나 “하느님께 받은 우리 몸의 오관 가운데 ‘헤드라이트’가 나가 불편하기 이를 데 없지만” 당신의 소망을 하나하나 이루어나가고 계셨다.

   
    마흔넷에 본 늦둥이와 늘 함께 살고 싶었던 어머니
    내 고향은 전북 군산인데 5대째 내려오는 구교우 집안에서 4형제 가운데 막둥이로 태어났어. 어머니 나이 마흔넷에 낳았으니 늦둥이도 한참 늦둥이지. 이미 코흘리개 때부터 조·만과(아침·저녁 기도)를 좔좔 외울 정도로 철저한 ‘천주쟁이’ 집안에서 자랐으나 사제의 꿈은 생각조차 못했어. 중학교 2학년 때일 거야. 어머니께서 “우리 집안은 치명자 집안인데….” 하시며 은근히 신학교에 가기를 바라신 게 계기가 되었지.
    어머니는 내가 사제가 된 이후에도 늘 나하고 같이 사시기를 바랐고, 그래서 내가 군종신부로 광주 비행단에 있을 때 함께 지내시다가 돌아가셨어. 그게 1968년도 설 바로 다음날이었는데 고향땅 군산에다 모셨지.

    서글퍼서 울며 들어가 정이 들어 울며 나왔지
    사제생활 40년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5년의 군종사목과 19년의 본당사목, 그리고 시력을 잃고 사목 일선에서 떠난 6년의 요즘 생활이지.
    아무래도 사제품을 받고 처음으로 보좌신부를 지낸 전동성당의 시집살이가 먼저 떠오르네. 그때만 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고해성사를 보는 신자들이 참 많았는데, 열심한 거야 좋지만 신부들이야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지. 토요일 점심 먹고 고해소에 들어가면 밤 열시가 넘어서야 나오는 게 일쑤였어.
    전동에서 그렇게 보좌를 마치고 다음해에는 장계성당 주임신부로 갔지. 그때만 하더라도 전주만 벗어나면 대부분 돌길이라 요즈음 40-50분의 거리를 네다섯 시간이나 걸렸어. 하도 깊은 산중이라 ‘서글퍼서 울며’ 들어갔지만 교우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아기자기 살다보니까 ‘정들어 울며’ 떠나왔지.
    장계성玲〈?공소가 16개 있었는데, 한 주일에 4군데씩 방문한 게 기억에 많이 남는구만. 이, 벼룩, 빈대 등 물것이 많던 시절이라 공소 방문을 마치고 본당에 돌아오면 입고 있던 옷부터 빨리 벗어 빨아야 했어. 지프를 타고 가도 웬만큼은 걸어야 했고, 미사 가방은 교우들이 지게로 짊어지고, 아이들은 십리 밖 동네 어귀까지 나와 신부를 반기던 시절이었지. 그때 우리 신자들 사는 게 힘들었지만 정말 열심하고 순박했어.


치명자산 정상에는 유항검 가족 묘지(일명 루갈다 묘)를
참배하는 일은 매일 반복된다.

    광주, 대구, 서울에서 군종신부로 15년을 지냈어
    장계성당을 떠나 공군에서 군종신부로 15년?지냈는데, 육군과는 달리 광주 비행단, 대구 비행단, 그리고 서울 공군 본부가 모두야. 광주에서 2년을 보내고 대구 기지로 옮겨 5년을 참 재미있게 살았지. 당시 대구대교구 여러 신부들하고 친하게 지내면서 말이야.
    대구에서 가장 잊지 못할 얘기는 교회 건물 앞에 성모상을 세운 것이지. 우리 천주교와 개신교가 번갈아가며 함께 사용하는 교회 건물이었는데, 천주교 신자였던 사령관이 나한테 교회 앞에다 성모상을 세우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는 거야. 우리야 좋지만 개신교 쪽에서 난리가 날 것이라며 망설였더니 사령관의 고집이 대단했어. “아니, 장병들의 정서 순화를 위해 교회 건물 ‘안’도 아닌 ‘마당’이므로 괜찮다.”는 식으로 밀어붙여 결국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상을 세우고 말았지.
    그뒤 개신교 측의 반대로 국방부 장관의 명의로 “함께 사용하는 교회 건물에 특정 종교를 드러내는 상징물을 철거하라.”는 내용의 공문까지 내려왔으나 대구 사령관은 “이게 어찌 교회 건물이냐? 교회 앞마당이지.”라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고 버텼지. 지금 이렇게 얘기하니 재미있게 들리지만 당시에는 개신교 측과 일어난 갈등이 참으로 심각했어.

    서울에 있는 공군 본부에서는 주로 행정 업무로 사무실 생활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지. 내 집이 없어 이사를 자주 다니다가 은행에서 돈을 빌려 1974년에 작은 집 하나를 마련했는데 제대하고 나서 한참 뒤에 그것을 처분했더니 엄청난 차익금이 생긴 거야. 사제인 내가 결코 술 먹고 노는 데 돈을 낭비하지 않겠다고 오래 전부터 다짐해 왔고, 또 돈을 모으면 참으로 보람되게 사용해야겠다고 생각해 온 터였지. 시력을 잃고 본당 사목을 떠나 ‘앞을 볼 수 없는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할까?’ 한참 동안 궁리하다가 지금의 성가복지회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오래 전부터 절약생활을 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해 온 내 각오가 씨앗이 되었다고 믿어.
    1979년 1월에 제8대 군종감으로 취임하여 2년을 일한 뒤 15년 동안의 군종사목을 마치고 예비역 공군 대령으로 제대하였지. 오랜 군생활을 가만히 돌아보면 어려운 점도 많았지만 참으로 고마운 분들을 많이 만났어. 특히 군대를 제대한 뒤 전국 여러 성당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신자들을 가끔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단 말이야.


오랫동안 성민호 신부?도와주고 있는 도우미 마리아 씨와
방학을 이용해 할아버지 신부님을 찾은 외손주 김승한 요셉 신학생(5학년, 서울 봉천1동성당)이 거실에서 함께 했다.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일을 중단할 수야 없지
    군종사목을 마치고는 정읍 신태인성당, 전주 중앙성당, 익산 황등성당과 주현동성당에서 사목했는데, 공소에 가다가 차가 논두렁에 빠져 애먹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고, 성당이 철길 바로 옆이라 미사 때 기차가 지나가면 벼락 떨어지는 것같이 요란했고…. 가만히 돌아보면 주마등처럼 스치는 일이야 끝이 없지. 아무래도 도시보다는 시골 본당에서 지내던 기억이 더 떠올라. 특히 신태인성당의 동막공소 신자들은 지금도 나를 한 식구처럼 반겨줘 정말 고맙지.

    큰 본당이라고는 주교좌 중앙성당이지. 1985년부터 4년 동안 있으면서 사제 수품 은경축도 지냈는데, 거기서 무엇보다도 강론 준비에 많은 시간을 쏟아부었지. 주일 강론을 일일이 원고지에다 쓰고 하느라 밤 두세시를 넘길 때가 많았어.
    주현동성당은 나에게 마지막 사목 현장이었는데, 본당에 부임한 1년 뒤부터 눈이 나빠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눈앞의 사물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할 정도에 이른 거야. 말 그대로 앞이 캄캄하더구만. 마침 1996년 회갑을 앞두고 잔치를 거창하게 치르는 것보다는 뜻있는 일을 하나 해야겠다는 생각에 중앙성당에서 4년 동안 준비해 놓은 강론 원고에다 살을 붙이고 붙여 강론 모음집으로 「씨뿌리는 사람들?616쪽)을 내가지고 군부대 등 여러 군데에 보내주었어. 비록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나빠졌지만 하느님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일은 중단할 수 없다는 생각이 내 머리에 꽉 박혀있었기 때문이야.

    안경 하나 필요없을 정도로 시력이 유난히 좋던 신부님은 회갑을 앞둔 3년 전부터 점점 나빠져 1미터 앞의 사물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에 이른 1996년 9월 익산 주현동성당 주임신부를 끝으로 사목 현장에서 물러나셨다. 회갑을 지낸 바로 뒤였다.
    “나잇살도 어느 정도 먹고 사목생활의 맛도 얼추 알 만해 좀더 멋들어지게 사목하고 싶은” 신부님에게 십자가치고는 감당하기 너무 힘든 고통이었다. 그러나 십자가를 단지 고통으로만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로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나서셨고, 3년 전부터는 그 소망의 결실을 하나하나 거두고 계시다.
    “본당 사목을 그만두면서, 어려운 가정을 꾸린 어머니께 못다 한 효성을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바치고자 사회복지재단을 세우겠다고 스스로 약속했지.” 그 약속의 열매가 1999년 7월에 설립한 전주교구 사회사목국 산하 ‘성가복지회’(이사장 이병호 주교)이다.
    신부님이 그 동안 틈틈이 모아온 돈과 군대생활 퇴직금에다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세운 성가복지회는 교구장 주교님을 이사장으로 모시고 교구 사회사목국장 신부님 등 몇몇 신부님들이 이사를 맡고 있는데, 그야말로 먹을 것이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 신부님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도 이미 성가복지회 이름으로 등록해 놓았다.
    미사를 봉헌하고 신문을 보며 오전을 보내는 성 야고보 신부님은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며 치명자산(승암산)에 올라가 동정 부부 유 요한과 이 루갈다 묘지를 참배하고 성지에 있는 성당에서 성체조배를 한다. 또한 성지를 찾는 순례객들을 위해 토요일마다 특전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이 모든 일에는 오랫동안 신부님을 도와주고 있는 도우미 마리아 씨가 함께한다.
    “찾아오는 사람이 별로 없어 사람이 그리워. 많이들 찾아오라고 글을 써줘.” 이렇게 당신의 고독을 토로하는 성민호 야고보 신부님. 비록 시력을 잃었지만 영혼의 눈은 더욱 강한 빛을 내뿜는다는 것을 해질녘까지 이어진 이야기 내내 느낄 수 있었다.

kjb@cbck.or.kr">구술 정리/김진복(경향잡지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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