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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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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린 [dlchang] 쪽지 캡슐

2006-02-10 ㅣ No.4766

 

시간의 흐름이 시작된 후로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혀온 질병 중에 가장 몹쓸 병이라고 생각


되는 것은 ‘치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정신을 놓아버린 환자의 행동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을 뿐 아니라 가족들의 마음까지 잃게


되는 누를 범하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는 가족들의 생활은 마치 지옥속의 삶으


로 비유되기도 한다. 반면 본인은 모든 걸 잊음으로 해서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물욕에서


벗어나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 홀로 천당에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요즈음 무뎌진 감각과 함께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지난번에는 값비싼 핸드폰과 지갑을 잃어버리기도 하였고 어느 날에는 아침마다 먹는 약을


먹었는지 기억해 낼 수 없는 날도 있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내 머리 속에 오래도록 강한 매듭처럼 각인되었던 요지부동의 기억들이 


느슨하게 풀어져 긴장을 강요하는 생활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가끔 당시의 정확한 기억이 나지 않는 나는 잃어버린 물건뿐만 아니라 자신감도 함께 잃어


가고 있었다. 요즈음 나에게 일어나는 이러한 일들이 아직까지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


세월 반목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에는 누구나 나타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 한 곳에는 벌써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한 기억의


해마들이 길을 잃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출근길에 전철역 매표소를 지나면서 이러한 현상이 나에게만 나타나는


유별난 일이 아닐 것으로 사료되는 광경을 목격하고 다소 안도하게 되었다.





아침 일곱 시 경의 7호선 하계전철역은 출근시간의 전쟁이 막 시작하는


사람들의 부산한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분주한 사람들 틈 사이에서 정장을 갖춘 중년 사내가 매표소에 서서 창구직원에게 말을


건네며 사정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침에 지갑을 두고 나왔는데 표를 한 장 주시면 퇴근 후에 돈을 갔다 드리겠습니다.


저는 00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거명되자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


내 나이또래의 흰머리가 희끗희끗 나기 시작하는 중년의 사내였다.


베이지색 코트의 뒷모습 라인을 따라 등도 약간 굽어 보였다.


마치 내가 실수를 해서 그가 지갑을 놓고 나온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문득 그를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을 빼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저도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가끔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우선 이 돈을 사용하시고 나중에


주세요..”하고 우리 집 동 호수를 알려 주었다. 돈을 건네며 그가 지갑을 잊고 나왔던 것처럼

 

우리 집 호수를 잊어 버린 다해도 나는 만원으로 선행을 베푼 이 아침 의 뿌듯한 느낌에 만족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고맙다는 말과 함께 멋쩍게 웃으며 내게 명함을 건넸다. 제약회사에 근무하는 사람이었다.


그와의 머쓱해진 관계에서 벗어나고자 전철 앞 승강장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짧은 시간에 신속하게 지나간 일이었지만, 누군가를 도왔다는 생각이 가져오는 기분좋은


생각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그날 저녁 내가 우리 집 강아지 아롱이를 데리고 산책을 나간 사이에 아침에 만났던 그의


아내가 우리 집을 방문하였다.


서로 어색한 관계로 만나게 될 때 부부는 대역을 맡는다하더라도 동일인과 마찬가지의 효과


을 얻는 이점이 있다.  아내는 그날 아침에 있었던 작은 사건을 그의 아내로부터 전해 들었다.


사양을 하였으나 그녀는 그가 빌려간 돈과 함께 준비한 선물을 놓고 갔다.


그의 제약회사에서 생산되는 판촉물인 비타민 정제와 화장용 비누였다.


어떤 보상을 받고자 행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날은 그동안 머릿속에서만 머물던 선행을 


실행하므로 써 얻은 성취감과 함께 보너스 상품을 받은 기분 좋은 날이었다.


나이 들어 직장에 나가는 일이 죄인처럼 취급되어지는 사회병리 현상 속에서 그가 처한


난처한 입장이 내 속에 잠재한 범죄 심리와 유사한 공범의식을 자극 시켰었나보다.


아파트 단지에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보내준 선물에 감사하며, 오륙도에 출현했던


도둑의 느낌으로 호프집 맥주를 나누어 마셔야 할 것 같다. 만약에 그와 마음이 통해


술이 오르게 되면 정말로 오랜만에 하늘에 대고 폼 나게 소리라도 한번 질러보고 싶다.


“운다고 옛사랑이 돌아 오리오만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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