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동성당 게시판

★ 묵시 4장 해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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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호 [austin] 쪽지 캡슐

2002-02-04 ㅣ No.8727

 

일곱 교회에 보내는 말씀이 끝나고 묵시록 6장에서 일곱 봉인의 두루마리를 개봉하기 앞서서, 4장에서의 ‘하느님 환시’와 5장에서의 ‘어린양 환시’는 하나의 거대한 장면을 서로 다른 두 각도에서 하느님을 바라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묵시록 4장에서는 유다인적인 색채를 강하게 띠면서 ‘창조주’ 하느님을, 5장에서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는 모상으로 표현되는 ‘구세주’ 하느님을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두개의 부분이 ‘창조와 구속’이라는 주제로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어린양에게 바쳐지는 찬미가의 마지막 구절인 5,13의 내용이 4,11에서 이미 선포된 바 있는 내용을 다시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지는데, 5,13과 4,11은 창조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묵시록 4장에서 언급된 바 있는 자연 질서의 항구성은 하느님의 구원적 개입에 대한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해 주는 것이다.

 

5,1에서 언급하고 있는 ‘일곱 봉인’에 대한 내용이 본격적으로 서술되는 것은 6~8장에서다. 그러므로 묵시 4~5장은 일곱 봉인의 의미를 밝히 드러내 보여주는 6~8장의 전주곡과 같은 것이다. 4~5장에서는 3개의 환시가 소개되고 있는데, 그것들은 서로 긴밀하게 연계되고 있다. 그 세 개의 환시는 하늘에 열려져 있는 문과 옥좌에 앉아 계신 분(하느님) 그리고 일곱 봉인된 두루마리를 받아 든 어린양에 관한 것이다.

 

“하늘에 한 문이 열려 있었다”(4,1) : 하늘에 열려져 있는 문을 이해하기 위해 에제키엘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에제 46,1~12). 에제키엘이 묘사해 주고 있는 미래의 성전에서 백성들이 접근할 수 있는 첫 번째 현관과 번제물을 바치는 제단이 있는 두 번째 현관 사이에 있는 문은 축제를 지내는 동안 열려져 있어야만 한다. 열려져 있는 이 문은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 특별히 어린양을 번제물로 바치는 것을 백성들로 하여금 첫 번째 현관에서 지켜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이 자리에서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의 환시가 나타나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창세기를 통해 ‘하늘에 열려져 있는 문’과 베델에서 야곱이 본 환시가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세 28,17).

 

이처럼 요한이 본 환시 속에는 에제키엘이 전해주는 성전에서의 환시와 어쩌면 베델에서의 환시가 포개져 나타나고 있다. 하늘의 문은 열려져 있다. 열려진 문은 이미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은총이며 하나의 초대이기도 하다. 초대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음성을 통해서 밝혀지고 있다. 그 음성은 요한이 첫 번째 환시 속에서 들었던 바로 그 음성이다 (1,13).

 

‘열다’라는 것이 묵시록에서는 인간들에게 진리와 구원을 통교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위해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표명하기 위해 사용되는 은유법적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요한이 계속해서 보게 될 환시들은 하느님께서 인간들을 향해 다가오시고 그 결과 인간들은 하느님을 향해 발걸음을 내 디딜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상징(하늘의 문이 열려짐)을 출발점으로 해서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열려진 문’은 아직은 한계성을 지니고 있으며, 단지 올라가고 내려오는 행위를 가능케 하는 출입구로서의 공간만을 의미할 뿐이다. 이제 19,11에서 하늘에 있는 문만이 아니라 하늘 자체가 열려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늘이 열림으로써 다가갈 수 없었던 하느님과의 통교가 막힘이 없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4,1에서 볼 때 묵시록 저자만이 “이 다음에 일어나야 할 일들”을 보기 위해 영 안에서 하늘로 들어 올려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의 로고스’가 땅으로 내려오심으로써 (1913), 하느님의 계시는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구원도 완전하게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 오심으로 해서 하늘은 열려지게 되었다. 또한 그 하늘로부터 하느님께서 거처로 정하신 새로운 예루살렘이 내려오게 될 것이다.

 

“마치 나와 더불어 이야기하는 나팔소리처럼 내가 들었던 그 음성이 말하였다”(4,1) : ‘나팔소리처럼 들었던 그 음성’이라는 표현은 1,10의 바로 그 음성을 의미한다. 그 음성은 묵시록 저자에게 ‘올라오라’고 명령한다. ‘올라오라’ (anaba)는 명령은 구약의 예언자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다. 그 명령은 첫 번째 계약인 출애굽을 상기시켜 줌과 동시에 새로운 계약을 향하고 있다 (출애 24장; 신명 10장 참조).

 

묵시록 저자에게 명령을 한 그 음성은 “너에게 이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보여 주겠다” (4,1)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묵시록 저자에게 심오한 계획 속에서 펼쳐지게 될 역사의 흐름을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그것은 묵시록 저자가 수행해야 할 예언자적 직무를 올바르게 성취하게 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묵시록 저자를 뒤에 ‘영원한 복음’ (14,6)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 무엇인지를 선포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보여주다’라는 동사는 계시를 매우 특징적으로 표명하는 용어이다 (요한 5,19~20). 요한에게 있어서 ‘보여주다’라는 동사는 타동사로서 예수께 적용되고 있으며, 하느님께서 역사(役事)하고 계심을 알려주는 계시를 지칭하는 것으로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옥좌”(4,2) : 옥좌의 이미지는 구약성서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늘을 하느님의 (천상) 옥좌로 표현하고 있다 (이사 66,1; 시편 11,4).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옥좌’는 하늘나라의 최고 주권자를 상징한다. 지상에서는 악의 세력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이나 무지개 저편에는 하느님의 옥좌가 있는 것이다. 이 것은 예레미아서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다. “한 처음에 높이 자리 잡으신 빛나는 옥좌 있는 곳, 그곳이 우리의 성소입니다.”(예레 17,12). ‘옥좌’라는 말은 묵시록에서 거의 매장마다 나올 정도로 자주 쓰이는 용어로써 40여 번 나온다.

 

“옥좌 둘레의 후광은 비취옥같이 보였다.”(4,3) : 여기서 ‘후광’이라는 말을 직역하면 ‘무지개’이지만, 거룩한 사람들이나 사물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는 빛의 모습을 의미한다. 묵시록 저자는 후광을 표시하기 위해 ‘무지개’를 사용함으로써 창세 9,8~17을 연상시킨다. 거기서 무지개는 홍수 이후에 하느님께서 인간들과 결정적으로 맺으시는 계약의 표징으로 묘사되고 있다. 무지개는 화해와 자비의 표지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계시되고 있는 ‘옥좌에 앉으신 어떤 분’은 은총의 하느님, 다시 말해서 자비의 하느님, 계약의 하느님이시다.

 

“24 장로”(4,4) : 묵시록 21,13~14에서 ‘24 장로’가 뜻하는 바를 유추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 즉 ‘새 예루살렘’에 관한 묘사에서 ‘12’라는 숫자가 각각 다른 두 가지 큰 뜻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열두 대문’에서는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를 ‘열두 주춧돌’에서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를 뜻한다. 이렇게 볼 때 24원로는 ‘구약과 신약의 합일’을 이루는 듯한 인상을 준다. 즉 ‘그리스도 이전(구약)의 하느님 백성’(이스라엘 자손 12지파)과 ‘그리스도 이후(신약)의 새로운 하느님 백성’(어린양의 12사도)이 ‘새 예루살렘의 창립 구성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12+12=24>

 

그리고 이 24원로는 구원의 상징인 흰옷을 입고 (3,4 참조) 금관을 쓰고 있으며 (2,10 참조), ‘옥좌 둘레에 있는 높은 좌석’에 앉아 하느님의 심판과 통치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지상에서는 악의 세력이 득세하여 하느님 백성을 박해하고 있으나 하느님 나라가 오시면 온 하느님 백성이 하느님의 다스리심에 함께 참여하게 되리라는 희망의 선포이다.

 

“번개와 천둥”(4,5) : 전통적으로 ‘번개와 천둥’은 하느님의 현존(顯存)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번개와 천둥은 특별히 시나이 산에서의 신현현(神顯現)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며, 그것은 게약 사상을 상기시켜 준다 (출애 19,16; 에제 1,13; 시편 77,18)).

 

“일곱 영신”(4,5) : 일곱 영신을 일곱 개의 횃불이라고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으므로 1장과 2장에 나오는 일곱 등경과 혼돈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묵시 1,4에서 언급한 것처럼 ‘일곱 영신’은 이것은 이사야 11장 2절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사 11,2에서 야훼의 영이 언급되는데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야훼를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게 하는 영”으로 나타난다. 이 야훼의 영은 바로 우리가 전례에서 사용하는 ‘성령강림 부속가’에서 언급하고 있는 ‘성령칠은’(聖靈七恩)이다.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4,6) : ‘유리바다’는 하느님의 옥좌를 지상 왕궁의 표상으로 묘사하고 있는 개념이다.

묵시록에는 천상성전에 관한 언급이 자주 나오는데, 4장에서는 특별히 하느님의 옥좌에 관한 말씀이 주로 나온다. ‘천상성전’과 ‘하느님의 옥좌’, 이 두 개념의 연결은 이사 6,1에서 “우찌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야훼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옷자락은 성소를 덮고 있었다”는 식으로 한 폭의 그림 안에 ‘하느님의 옥좌’와 ‘천상성전’ 두 가지 개념을 한꺼번에 배합하고 있음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경우는 ‘하느님의 옥좌’를 ‘지상성전의 지성소’(계약의 궤를 모셔둔 곳)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는 사상이다. 시편 79,2에서는 하느님을 케루빔(거룹들) 위에 앉아 계신 분으로 전하고 있다. 또한 출애굽기는 이동식 성막을 묘사함에 있어서 ‘하느님의 현현(顯現)장소’를 속죄판(증거의 궤) 위에 있는 두 거룹들(케루빔) 사이라고 전한다(출애 25,22). 이사야의 환시 내용이 요한 묵시록에 크게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명백하다. 실제로 묵시 4,8의 ‘네 생물의 여섯 날개’는 이사 6,2에서 나오는 세라핌의 표상에서 끌어왔다고 본다. 이런 점들을 미루어볼 때 묵시록에 나오는 ‘하느님의 거처’는 - 하느님의 옥좌와 천상성전 두 가지를 묶어서 - ‘지상의 성전’과 ‘지상의 왕궁’ 두 가지를 적절히 배합해서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묵시 1,6에서도 왕직과 사제직이 결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바다’라는 개념은, 솔로몬이 자기 왕궁을 지을 때 어마어마하게 큰 바다모형을 만들었다(1열왕 7,23~26 참조)는 사실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묵시록 저자가 환시 중에 본 ‘천상성전의 유리바다’는 ‘솔로몬 왕궁의 바다 모형’과 관련이 짙다고 하겠다.

 

“네 생물”(4,6~8) : ‘네 생물’은 에제키엘의 환시(에제 1장)에서도 나온다. 에제키엘서에서 볼 때, 이 네 생물들은 거룹들 (케루빔)과 유사하며 침묵을 지키고 있다 (에제 10,2.20). 하지만 묵시록에서 네 생물들은 이사 6장에 나오는 스랍들 (세라핌)처럼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고, ‘거룩하시다’ 노래를 부르고 있다 (4,8).

 

또 에제키엘서에서 ‘눈이 가득 박혀 있는 것’은 네 바퀴들이지만 (에제 1,18), 묵시록에서는 다름 아닌 네 생물들이다 (4,8). 그리고 전통적으로 ‘눈’은 지혜의 상징이다.

 

또한 에제키엘서에서 묘사되고 있는 생물들은 각각 사람의 얼굴, 사자의 얼굴, 황소의 얼굴 그리고 독수리의 얼굴을 모두 가지고 있지만  (에제 1,10), 묵시록에서는 각 생물이 그 네 가지 특징적인 모습 가운데 하나씩만을 취하고 있다. 성서 후기 시대에 와서는 이 네 생물을 4복음사가들과 연관시키기도 했다. 즉 사람을 ‘마태오’에게, 사자를 ‘마르코’에게, 소를 ‘루가’에게, 독수리를 ‘요한’에게 연관시켰는데 이것은 네 생물의 원래의 의미와는 동떨어진 생각이다.

 

“여섯 개의 날개”(4,8) : ‘여섯 개의 날개’는 - 앞서 ‘유리바다’에서 언급한 것처럼 - 이사 6,2에 나오는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세라핌)”의 표상에서 끌어온 것이다. 더욱이 네 생물들은 이사야서에서의 세라핌처럼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이사 6,3; 묵시 4,8)를 밤낮 쉬지 않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세라핌이 날개가 둘뿐인 케루빔과 달리 날개가 여섯 개인 이유는 하느님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감히 하느님을 마주 볼 수 없기에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우고”(이사 6,2), 신체의 부끄러운 부분인 두 발을 감추기 위해 “둘로는 발을 가리우고 나머지 둘로 훨훨 날아”(이사 6,2) 다니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네 생물의 여섯 개의 날개’는 바로 네 생물이 세라핌처럼 하느님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존재들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넷이라는 숫자는 우주의 근원적인 네 방향 (동서남북)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네 생물들이 대표하고 있는 것은 Cosmos (우주, 세상)이다. 묵시록 저자는 계약을 상징하는 무지개에 둘러 쌓여 하느님의 옥좌 둘레에서 구원 역사를 대표하는 자들을 묵상하고 있다. 즉 묵시록 저자는 역사의 주님이신 하느님을 보고, 뒤이어 우주를 대표하는 네 생물들을 보고 있다. 역사의 주님이신 하느님은 창조주 하느님이시기도 하다.

 

“거룩하시다…”(4,8) : 이 구절과 이사 6,3을 비교해 보면, 묵시록 저자는 이사 6,3에 나오는 ‘만군의 야훼’를 ‘만물의 주재자 (전능하신)이신 하느님’으로 변형시켰고 또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를 ‘주님은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장차 오시리로다’로 바꾸었음을 알 수 있다.

‘만물의 주재이신 하느님’이라는 호칭은 묵시록 저자가 즐겨 사용하는 표현양식이며 (11,7; 15,3; 16,7; 21,22 참조), 특히 그 중에서 3번은 묵시 1,8(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분 곧 만물의 주재자)에서 나타나는 표현과 유사한 표현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4,8; 11,7; 16,7).

 

“영광과 존경과 감사를 드릴 때마다”(4,9) : 여기서는 문법적으로 미래 직설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구절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미래에도 영광과 존경과 감사를 드리는 찬미 행위가 계속 반복될 것이라는 점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네 생물들이 창조된 세상을 대표하고 있다면, 여기서 우리는 창조된 세상이 하느님께 경배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살아 계신 분”(4,10) : 이 표현은 이미 1,8에서 말한 것처럼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즉 하느님의 호칭인 것이다. 9절에서 창조된 세상이 하느님을 경배한 이후에 10절에서는 사람들이 하느님께 경배를 드린다.

 

하느님의 통치에 연계되어 있는 장로들은 자기들의 관을 옥좌 앞에 벗어 놓음으로써 유일하신 참된 하느님께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표명하고 있다. 10절에 나타나는 이미지와 유사한 역사적 사실을 로마의 역사가 타치투스가 전하고 있는데, ‘티리다트’는 네로 황제로부터 통치권을 부여받기 위해 로마에 와서 어떻게 그가 황제에게 예속되어 있는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황제의 발치에 관을 벗어놓는다.

 

4,11에서는 감사의 행위를 하게 되는 동기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규명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찬미를 받으신다. 묵시 4장에 묘사된 내용은 창조주를 찬미하기 위해서 그분의 창조적 업적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보도록 촉구하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묵시 4장이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묵시 4장에서 묵시록의 첫 번째 환시를 대하고 있다. 곧 이루어져야만 할,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도래, 종말을 예고하기 위해서 묵시록 저자는 창조가 간직하고 있는 비밀 자체를 벗겨내는 일부터 시작하고 있다. 창조란 하느님의 영광과 능력이 실제로 표명된 장소이다. 여기서의 환시는 고유한 의미에서 종말론적이지만, 흥미로운 것은 묵시록 저자는 경신례가 종말에 미리 참여하는 것임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늘이 열리게 될 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묵시 4장에서처럼 천상적이고 우주론적인 차원에서 소리 높여 찬미가를 노래하며 장로들이 경신례를 통해 바치는 기도소리를 듣게 된다.

 

이러한 전례 거행은 묵시 5장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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