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덕동성당 게시판

따뜻할 줄 아는 봄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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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현 [venivediveci] 쪽지 캡슐

1999-04-12 ㅣ No.406

어떤 이의 삶의 일면이 누구에게는 뜻하지 않게 하나의 광경이고 구경거리이다. 궁정의 생활로 나른하기 짝이 없던 어느 왕자에겐 배곯은 서민들의 생계 걸린 흥정의 광경이 그럴 것이고, 죽지 못해 사는 고독한 방랑자에겐 소박하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한 가정의 봄나들이 광경이 그럴 것이고, 진하디 진한 소주를 들이부을 수밖에 없는 청계천의 광경은 향락과 안정된 삶에 권태를 느끼는 인텔리에게 그럴 것이고.. 고흐가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걸작 속에 옮겨놓았던 사람들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가난한 저녁식사를 나누던 시골의 한가족이었고, 밀레가 인류에게 남긴 감동, 「만종」속의 사람들은 걸작의 모델이 되기에는 너무도 보잘 것 없던 지친 농부들이었다. O.헨리가 즐겨 그려낸 진실의 삶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데서 찾을 수 있었던 소박하지만, 진솔한 단편들이었고,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몇 안되는 광경 중의 하나는 배고픈 몸보다 훨씬 배부른 맘을 가진 어느 과부의 헌금하는 순간이었다. 투병의 시간이 너무도 괴로워 살고자 하는 의지를 저버린 어느 병자에게 삶에 대한 소망을 다시 불러 일으켜주는 광경은 매일처럼 추운 새벽 거리를 쓸고 있던 어느 청소부 아저씨의 땀맺힌 얼굴이었으며, 오징어를 잡으러 여느 때처럼 밤바다를 헤쳐 나가는 그 배들의 광경이란 처음 보는 이에게만큼은 실로 장관이다. 별 생각 없이 살아가는 나는 누구의 눈에 어떤 광경으로 비쳐지고 있는 걸까? ...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광경으로 ?... "나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면 나는 여지없이 행복해 질텐데..." 그게 아닌 것 같다. 행복은 미래형이 아니라 언제나 현재형. 행복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러기로 결정하는 것.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 나에게 행복과 불행의 권리가 주어졌다는 사실보다도 더 명백한 사실은 내가 바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할 수 있는 이유는 행복은 가진 것, 지금 누리고 있는 것과는 조금도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 그렇게 느끼기로 결정했을 때, 이미 나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 되어 있음을 믿는다. 행복이라는 것만큼 주관적인 것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불행만 빼고.. 내가 보일락 말락하는 작은 점으로 들어가 있는 하나의 풍경화. 화가는 그 제목을 '따뜻할 줄 아는 봄사람들' 이라고 붙였다. 이젠 따뜻한 계절이 오는 게 두렵지가 않다. 요즘 따뜻함을 절실히 느끼는 게 계절의 변화 때문인지, 다른 뭐의 변화 때문인지 분간이 잘 안된다. 여러분 모두 따뜻한 이 계절을 봄답게, 따뜻하게 누리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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