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강론

2월 봉헌 생활 기원 미사 요한 21,15-19; '22/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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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흥보 [peters1] 쪽지 캡슐

2022-02-17 ㅣ No.4943

2월 봉헌 생활 기원 미사 요한 21,15-19; '22/02/26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5-19).

그들이 아침을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2월 기원미사는 '봉헌생활 기원미사'로 드립니다. 언젠가 피정 때 신자들에게 총고백 고해성사를 주고 나오시는 신부님을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신부님의 얼굴이 아주 수척해 보였습니다. 봉헌생활은 자신을 버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이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가는 삶입니다. 실제로 오랜 세월 봉헌생활을 한 성직자 수도자들이 병고에 시달리는 모습을 봅니다.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진 이들의 모습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땅과 자녀를 많이 가진 이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으로 보았고, 그런 분들은 오래 살았다고 전했습니다. 그런데 욥 시대에 와서 사람들은 물었습니다. 왜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고, 악한 사람이 마치 세상을 비웃듯이 떵떵거리며 살아야 하는가? 뭐가 잘못된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세상의 아이러니지 하느님의 잘못은 아니라는 사실도 깨닫습니다.

 

급기야는 이사야 예언서에 와서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를 듣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았고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 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 학대받고 천대받았지만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이사 53,3-7)

 

그러고는 그런 처절한 모습이 주님의 종의 모습이며, 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는 것도 일러줍니다. 이 모습은 전통적으로 메시아의 새로운 모습입니다. 과거에는 모세처럼 다른 민족들에게서 해방을 가져다주고, 거꾸로 다른 민족을 지배하면서 살게해 주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예언자가 일러주는 메시아의 모습은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진 고난받는 주님의 종입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주 예수님의 모습을 연상케 해줍니다.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분께서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셨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으면 그는 후손을 보며 오래 살고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그는 제 고난의 끝에 빛을 보고 자기의 예지로 흡족해하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고 그들의 죄악을 짊어지리라. 그러므로 나는 그가 귀인들과 함께 제 몫을 차지하고 강자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게 하리라. 이는 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버리고 무법자들 가운데 하나로 헤아려졌기 때문이다. 또 그가 많은 이들의 죄를 메고 갔으며 무법자들을 위하여 빌었기 때문이다."(10-12)

 

그런데 그는 왜 그런 짐을 지었을까? 세상 사람들 모두가 다 잘 먹고 잘 살기를 바라는데, 그리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평안하길 바라는데. 왜 그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의 삶을 살도록 하는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기꺼이 수난의 길을 걸어갔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끼리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하느님의 축복이요 선물이라고 받아들이고 사는데. 왜 정반대처럼 보이는 고난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 나갈까?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 해답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15)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15)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명하십니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15)

 

이렇게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무색하게도 질문과 다짐을 세 번이나 반복하신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18) 요한 복음의 성경기자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19) 그리고는 결정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19)

 

시대와 장소에 따라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모습과 마지막 모습이 다를 수 있습니다다. 그러나 한 가지 변화되지 않는 본질적인 모습은 바로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그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모습'입니다. 그 길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의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이는 단지 성직자, 수도자, 사도생활단, 봉헌된 평신도들 뿐만 아니라 주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세례를 받아 세상 한 가운데로 나아가 그리스도의 사도직을 수행하는 모든 이들의 모습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요한 14,23)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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