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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젤사랑-김석주 조선일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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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순봉 [psbong] 쪽지 캡슐

2001-07-10 ㅣ No.2989

다음은  9일 저녁 8시에 인터넷 조선일보에 뜬 김석주  안드레아씨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이 기사는 10일자 조선일보 사람들 페이지에서도 볼수 있습니다.

 

                       맨주먹 이민… 모국 찾은 뉴욕 한인회장

 

 

『낯선 곳이지만 빨리 섞여들어 성공하리라. 내 자동차만 가지면 일단 성공한거다.』

 

     1976년 27세 청년 김석주(51)씨는 미국행 비행기 안에서 소박한 꿈을 꿨다. 이민 2년만에 650달러를 주고

    차를 장만했을때 너무 기뻐 자동차 안에서 며칠을 먹고 잤다. 그런 김씨가 25년만에 미국의 심장부 뉴욕의

    한인회장이 됐다. 김씨는 9~12일 재외동포재단(이사장 권병현)이 주관하는 「2001 세계 한인회장

    대회」에 참석하기위해 한국에 왔다.

 

     경북 영주 출신인 김씨는 두살때 소아마비를 앓아 양쪽 다리를 제대로 쓰지 못한다. 어려운 집안 살림에다

   부모가 일찍 헤어지면서 학교는 중학교 1학년으로 끝났다. 멸시와 냉대에속에서 독학으로 중·고교 과정을

   마쳤고, 기술을 배워 전파사도 차렸다.

 

 

『한국 사회에서 배우지도 못한 장애인은 버텨내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김씨는 결국 탈출하는 심정에 맨주먹으로 미국 이민을 떠났다. 일부러 한인들이 모여사는 곳을 피해 자리를 잡았다. 빨리 미국 사회에 동화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곳에서 김씨는 장애인임을 의식하지 않아도 됐다.

 

그는 전자제품 공장을 다니면서 짚고 다니는 목발의 고무바닥이 여러번 닳아 없어질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2년만에 현장감독이 돼 능력을 인정받았고, 간호사로 미국에 온 부인과도 인연을 맺었다. 미국생활 12년째에는 자기 사업도 시작할 수 있었다. 무선통신 서비스회사인 「리사 비퍼」를 설립, 뉴욕 동부지역에서 탄탄한 기반을 다졌다.

 

김씨는 자리가 잡히자 후원과 봉사 등 대외 활동에 나섰다. 백인은 물론 다른 이민 민족들과도 교분을 넓혔다. 덕분에 98년에는 미국이민연합이 주는 「엘리스 아일랜드」상을 받기도 했다. 김씨는 7·8년전에야 뉴욕 한인사회를 무대로 활동을 시작했다.그리고 지난 3월 27대 뉴욕 한인회장에 당선됐다.

 

그는 『이제는 한인들도 미국 사회의 주류에 진출해야 한다』고 말한다. 1.5세, 2세들이 정계, 학계 등 등 다양한 분야에서 힘을 붙여가고 있기 있기 때문이다. 『비록 도망쳤지만 오래 살면 애국자가 된다』는 김씨는 『이민자들이 한국의 영토를 넓힌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 권상은기자 sekwon@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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