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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8일(11월12일) 복녀 안젤라 마리아 아스토르치 동정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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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정 [wjyou57] 쪽지 캡슐

2007-06-08 ㅣ No.2003

 

축일:9월28일(11월12일,5월23일,12월2일)
복녀 안젤라 마리아 아스토르치 동정녀, 카푸친글라라회
Beata Maria Angela Astorch Clarissa Cappuccina
Bl. Angela, Maria, Astorch

Bl. MARIA ANGELA ASTORCH
Born: 1 September 1592 at Barcelona, Spain
Died: 2 December 1665 in Murcia, Spain
Beatified : 23 May 1982 by Pope John Paul II
Canonized: pending

 


1665년에 귀천하였고 축일은 9월28일이다.
복녀 안젤라 마리아 아스토르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1592년 9월1일 태어났으며,
1665년 12월2일 귀천하였다.
요한 바오로2세 교황에 의해 1982년 5월23일 시복되었다.






 
 

스캔들에 연루되어 베일이 벗겨진 수녀
1600년대 중반, 몇몇의 에스파냐 카푸친 글라라회 자매들이 예수회 신부들과 추한 관계를 맺었다는 혐의에 관한 조사로 인해 아빠티싸인 안젤라 마리아 어머니(즉 원장수녀, 어머니라고 칭함)와 그녀의 대리가 베일이 벗겨져서 회개자의 지위로 강등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 자매들은, 새롭게 설립된 무르시아 수도원에서 혹독한 수해를 입고, 주변 산속에 위치한 예수회의 여름 별장으로 임시적으로 대피한 상태였다. 두 번째 조사가 급히 이루어지자, 그 일은 곧 근거 없는 혐의였다는 것이 드러났다. 악의 가득한 그 지역 험담꾼이 퍼뜨린 거짓 소문의 피해자가 된 그 두 명의 '베일이 벗겨진' 회개자 자매들은 이번에 결백이 입증됨으로서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승녀의 지위에 다시 복귀되었다. 초기 조사의 엉성함으로 인해 그 자매들을 강등에 이르게 했던 사제는 공개적으로 징계를 받았다. 아빠티사인 마리아 안젤라 아스토르츠 어머니와 그녀의 자매들에게 이 거짓 혐의는 무르시아에서 진행 중인 그들의 새로운 수도원 설립 계획에서 극복되어야 할 장애 중 또 하나의 장애일 뿐이었다. 그들은 이미 사라고사에 위치한 그들의 집에서 시작된 고된 마차 여정을 거쳤고, 또 그들이 도착하자마자 도시를 강타한 전염병과 홍수를 극복한 상태였다. 무르시아의 수도원은 에스파냐 내의 초기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원 자리들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아바티싸인 마리아 안젤라 아스토르츠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는 카탈로니아 내의 최초의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원의 초기 시절과 영구히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 그곳은 경건한 미망인이었던, 하느님의 종인 '안젤라 마르가리타 세라피나 프라트(Prat) 어머니'에 의해 바르셀로나에 설립된 수도원이다.


 

매우 어린 청원자
1592년, 마리아 안젤라 아스토르츠 어머니는 바르셀로나에서 세례를 받을 때 '히에로니마 마리아'라는 이름을 받았다. 만 5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두 분의 부모를 모두 여의였고, 유모 손에 의해 길러졌다. 만 7살 때쯤 이 어린 소녀는 중병에 걸렸는데, 그 당시 목격자들의 보고에 의하면 그녀는 실제로 죽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위에서 언급한 카푸친 글라라회의 수도승녀인 안젤라 마르가리타 세라피나 어머니의 기도로 되살아나게 되었다. 만 11살이었을 때에, 히에로니마는 그 지역 주교의 특별 허가를 받아 바르셀로나에 있는 '성녀 마르가리타의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원'에 청원자로 ‘입원했다’(입회하기가 너무 어렵지만 수도원에 정식적으로 들어갔다는 의미로 입원했다는 말이 사용됨). 그녀의 언니 엘리사벳도 이미 그곳의 수도승녀였다. 히에로니마에게는 두 명의 오빠가 있는데, 그들 중 한 명은 어려서 죽었고, 또 한 명은 '성모의 종 수도회'의 사제가 되었다. 그 봉쇄수도원에 '입원할' 때, 히에로니마는 6권짜리의 라틴어 성무일도서를 가지고 갔는데, 라틴어 책에 대한 애정이 그녀의 겸손에 방해가 될까봐 라틴어 도서를 읽는 것이 그녀에게 금지되었다. 어린 나이로 수도원에 들어온 히에로니마는 수련자가 되기 위해 만 16살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1608년 9월 7일, 마침내 그녀는 수련자가 되었고 그 순간부터 ‘마리아 안젤라 자매’로 불리게 되었다. 수련장인 그녀의 언니, 엘리사벳 자매는 그녀를 지도하는 데에 있어서 균형 있고 공정했는데, 덕분에 마리아 안젤라 자매의 덕행과 본인 성소를 식별하는 은총이 빠르게 진척되었다. 그녀는 1609년 9월 8일에 성대서약을 했다.


 

안젤라 마리아 자매의 수완 있는 지도력
1612년, 마리아 안젤라 자매는 공동체의 지역참사회에 당선되었고, 1619년 다른 5명의 수도승녀와 함께 사라고사(Zaragoza)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했던 그 카푸친 글라라회 자매들의 공동체 내 한 명의 초기 자매였다. 그녀는 그 수도원에서 1614년부터 1623년까지 수련장으로 봉사했고, 1623년부터 1626년까지는 새롭게 서약한 재매들의 양성을 지도했다. 사실 그녀는 수련자였을 때도 동료 수련자들의 양성을 보조하는 일을 맡기도 했었다. 1626년에 그녀는 아빠티싸로 선출되었는데, 당시 그녀는 아빠티사로 취임하기 위해 피선출자의 최소연령 조건에 대한 특별 관면을 성좌로부터 받아야 했다. 아빠티사로 취임하자마자, 마리아 안젤라 어머니는 에스파냐 카푸친 글라라회의 회헌을 교황 우르바노 8세에게 인준 받는 작업에 착수했다. 1627년에 인준된 그 회헌은 300여 년 동안 에스파냐의 모든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원과 그 수도원에서 분가해 나간 모든 수도원에서 시행되었었다. 그러나 오늘날 전 세계의 모든 카푸친 글라라회 수도승녀들은 '성 글라라의 카푸친 수도회(Ordo Sanctae Clarae Capuccinarum)'의 1986년 회헌을 따른다. 마리아 안젤라 어머니는 자매들에게 지속적으로 성녀 글라라의 회칙을 공부할 것을 요구했고, 또한 문맹 자매들이 회칙 내용을 외울 수 있도록 공동식당에서 매월 낭독될 수 있도록 명했으며, 수도원 내 가대석에서 시간 전례가 매일 엄숙히 거행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마리아 안젤라 아빠티사의 영성 강의는 매우 뛰어났는데, 어떤 한 주교가 그녀에게 사제가 되지 못한 것이 유감스럽다고 말할 정도였다. 공동체의 어머니로서 그녀는 자신의 차례가 오면 부엌이든, 세탁실이든, 수도원 내 양호실이든, 정원이든 기꺼이 일함으로써 자매들을 돌보았고, 또 그들의 필요에 따라 언제 어디서든지 봉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수도원이 받은 애긍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수련자들이 집을 떠날 때에 입고 왔던 옷들도 빈민들에게 기부했다.



 

성인들과 성무일도에 대한 그녀의 애정
마리아 안젤라 아스토르츠 어머니의 영성은 완전히 성경과 전례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아기 예수님, 예수 성심, 그리스도의 수난, 착하신 목자이신 주님과 착하신 목자의 어머니 마리님에 대한 그녀의 신심은 전형적인 카푸친 프란치스칸의 신심들이었다. 그녀와 동시대의 다른 신비가들과의 차이는 그녀의 영성 안에 있는데, 그것은 성무일도와 성경에 의한 하느님의 말씀과 교부들의 저서가 핵심을 이룬다. 그리스도와 성모님의 모든 천사와 성인들은 그녀의 영성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그녀는 기도 할 때에 성인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곤 했고, 특히 스스로 '천상 회석(會席 - consistorium)'이라고 불렀던 열두 분의 성인에 대해서 깊은 신심을 품었다. 또한 그녀는 여러 가지 덕행에 있어서 그 열두 분의 성인을 자신의 생활모범으로 삼았다. 하지만 시간의 지남에 따라, 성무일도서는 점점 더 그녀의 영성생활의 영감과 요지가 되었다. 1982년,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녀를 시복할 때에 "성무일도서의 신비가"라고 불렀다.


 

또 하나의 새로운 수도원 설립
마리아 안젤라 어머니는 30년 동안 사라고사에서 살았는데, 그동안 수도승녀의 공동체는 질적으로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여 그곳 수도원의 규모를 초과했다. 수도회를 더 확장시키고자 하는 마리아 안젤라 어머니의 소원은 1645년, '성체성사의 현양'에 봉헌된 수도원을 무르시아에 설립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성취되었다. 그 무르시아 수도원의 카푸친 글라라회 자매들은 무엇보다도 성체를 거스르는 신성모독 그 자체에 대한 속죄를 하기 위해 성체조배에 헌신했을 것이다. 마리아 안젤라 어머니는 그리스도론의 모든 것이 성체성찬 안에 집약되어 있다고 이해했고, 당시에는 매우 드물었던 매일의 영성체의 관행을 자신의 자매들에게 도입했다. 그것에 수반되는 어려움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그녀는 즉각 이 초대에 응해버렸다. 사실, 새 수도원들을 설립하기 위하여 마이라 안젤라 어머니와 그녀의 자매들이 겪어야 했던 모든 여정에는 언제나 큰 어려움이 수반되었다. 예를 들자면, 한 번은 그들의 마차가 뒤집혔고, 또 한 번은 마부가 넘어져 마차 바퀴에 깔렸었는데 카푸친 글라라회 재매들의 기도 덕분으로 다시 살아났다. 1647년, 전염병이 무르시아를 덮쳤지만 다행히 수도승녀들은 그 누구도 병들지 않았고, 1651년과 1653년에는 전 도시가 수해를 입었지만 자매들은 모두 무사했다. 하지만 수도원은 크게 수해를 입었고, 공동체는 근교 산속에 위치한 예수회의 ‘라스 에레미타스(Las Eremitas)’라는 여름 별장으로 대피할 수밖에 없었다.


 

'홀로 계신 분과 홀로 있는 채로'
최종적으로 마리아 안젤라 자매가 수도원으로 돌아온 후 1661년까지, 그녀는 아빠티사를 계속 이어갔고, 그 이후에는 '홀로 계신분과 홀로 있는 채로(sola con el Solo)' 관상에 완전히 매진하기 위해 사임했다. 1665년 초반, 그녀는 간헐적으로 간질을 앓기 시작하다가 그 해 12월 2일 날 임종이 다가온 그녀는 병상에 누워 'Pange Lingua'라는 성목요일 성체찬가를 부른 다음 자신의 신랑이신 예수님을 맞으러 갔다. 그때 그녀 나이는 만 75세였다. 부패되지 않은 채로 1683년부터 수도원의 경당에 안치되어 온 그녀의 시신은 1936년 에스파냐의 내전 중에 반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의도적인 훼손을 당했다. 마리아 안젤라 아스토르츠 자매는 1982년에 시복되었다.



 

"나에게 너무나 자주 일어나는 일인데, 내가 시편들을 노래하는 동안, (주님이신) 폐하께서는 내가 부르고 있는 바로 그것을 내면적인 감각으로 나에게 그토록 잘 전달하시어 내 자신이 부르고 있는 것이 시편들의 구문과 구절이기는커녕 내 영의 내면적인 느낌들이라고 참말로 주장할 수 있습니다." - 마리아 안젤라 아스토르츠
(카푸친홈에서)

 

 
update 2012.4.5.








 

 

Beata Maria Angela Astorch Clarissa Cappuccina
2 dicembre 
Barcellona, 1 settembre 1592 - Murcia, 2 dicembre 1665 

Girolama Maria Agnese nasce a Barcellona il 1° settembre 1592, ultima di quattro figli, da don Cristoforo Astorch e donna Caterina. Orfana di madre a 10 mesi, fu affidata ad una nutrice e all'età di cinque anni a seguito della morte del padre venne affidata a dei parenti che la fecero studiare, imparò quindi a leggere e a scrivere e i lavori femminili. Era molto appassionata di libri, in particolari quelli in latino.
All'età di undici anni entrò in clausura dove ricevette il nome di Maria Angela. Erano già clarisse cappuccine insieme alla fondatrice Angela Serafina Prat, la sorella Isabella.
La maestra suor Vittoria era molto rigida e di modi poco affabili, vietò a Maria Angela di leggere i libri latini.
Dopo un'attesa cinque anni come aspirante, dovuta alla giovane età, venne ammessa al noviziato il 7 settembre 1608, dopo un anno fece la professione solenne.
Nel 1614 insieme ad altre cinque suore fu inviata a Saragozza per fondare un nuovo convento, Maria Angela ebbe l'incarico di maestre delle novizie.
Nel 1627 divenne badessa, proprio in questo periodo papa Urbano VIII approvò le costituzioni delle cappuccine spagnole. Anche se badessa era sempre pronta a fare qualsiasi lavoro, non si risparmiava e si vedeva spesso in cucina, in lavanderia, nell'orto e ad assistere le ammalate in infermeria. Rimase sempre responsabile delle cerimonie. Le elemosine del monastero erano sempre divise con i poveri ed in occasione dell'arrivo in città dei profughi della Catalogna distribuì loro i vestiti delle novizie.
Il suo desiderio di propagare l'ordine la portò nel 1645 a lasciare Saragozza per intraprendere insieme ad cinque sorelle, la nuova avventura di fondare un altro monastero, questa volta a Murcia.
In questo nuovo monastero Maria Angela riuscì ad introdurre la pratica della eucaristia quotidiana per le monache.
Non mancarono ovviamente i momenti di sconforto, in particolare durante la peste, nel 1648, anche se le suore furono preservate, e durante le periodiche inondazioni che il fiume Segura provocò a Murcia. Le suore durante l'evento del 1651 dovettero abbandonare il monastero per circa un anno, in attesa dei restauri dimorarono in una residenza estiva dei padri gesuiti.
Rimase badessa fino al compimento del settantesimo anno di età, quindi essendo inabile ai lavori poté dedicarsi esclusivamente alla vita contemplativa.
Il 2 dicembre 1665 a 75 anni cantando il Pange lingua terminava il suo viaggio terreno.
Il suo corpo incorrotto, profanato durante la guerra civile spagnola, è conservato nel monastero di Murcia.
Giovanni Paolo II ha dichiarato Maria Angela Astorch beata il 23 maggio 1982.
Autore: Carmelo Randello
_______________________
Aggiunto il 1-Oct-2002


MARIA ANGELA ASTORCH
Also known as
Mystic of the Breviary
Memorial
23 May
Profile
Raised in a pious family. Poor Clare Capuchin nun at Barcelona. Novice mistress. Formation and spiritual director. Abbess. She spent her spare time studing the sacred texts and the great Church writers, she came to a profound understanding of the Breviary, the schedule of prayers and hymns recited each day. Mysic and visionary who could see and communicate with her guardian angel.
Born
1 September 1592 at Barcelona, Spain
Died
2 December 1665 in Murcia, Spain
Beatified
23 May 1982 by Pope John Paul II
Canonized
pending
Additional Information
Kirken i Norge [norwegian]

Readings
From her we can learn to respect the ways of man, and at the same time make men open to the ways of God. She was able to respect the individuality of each person, helping the one concerned 'to keep in step with God' which means something different for each one. In this way, her profound understanding did not become inert tolerance.

- Pope John Paul II's homily during the beatification of Blessed M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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