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창동성당 게시판
6월15일 성 비토, 성 모데스토, 성녀 크레센시아 순교자♬7.Os Lus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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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donna of St Vitus Cathedral in Prague - UNKNOWN MASTER, Bohemian
축일:6월15일 성 비토,성 모데스토,성녀 크레센시아 순교자 ST. VITUS, Saint Modestus and his nurse Saint Crescentia San Vito Adolescente martire Died :boiled in oil c.303 in Lucania, Italy Mazara del Vallo (Trapani), III sec. – Lucania, 15 giugno 303 Vito = forse forte, virile, che ha in sé vita, dal latino = perhaps strongly, it turns them, that she has in himself life, from the Latin
비토는 '어두운'이란 뜻이다. 그리고 종이던 크레센시아가 루까니아로, 그 다음에는 로마로 끌려갔다.
유모 크레센시아가 바로 크레센시아 성녀이며, 성 비또와 함께 순교하였다
성 비토 공경은 특히 독일에서 활발하고, 그의 유해는 삭소니아로 이장되었다. 성 비토는 폭풍우의 수호성인이다.
Sts Thomas Aquinas and Flavian, Sts Peter the Martyr and Vitus-LOTTO, Lorenzo
성 비토, 그의 유모 성녀 크레센시아와 그녀의 남편 성 모데스토에 대해서는 역사에 전해 내려오는 기록이 매우 적으나 그들에게 대한 공경은 중세기부터 상당히 행해진 것인데, 그 중에서도 소년 비토는 14인의 구난성인(救難聖人) 중의 한 분이시다.
그들은 4세기 말경, 디오클레시아노 황제가 그리스도교도에 대해 로마 제국의 마지막 박해를 행한 시기의 사람이었고, 비토의 태생지는 시칠리아 섬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히라스로 우상교를 신봉하고 있었으나 유모인 크레센시아와 그녀의 남편 모데스토는 열심한 그리스도교 신자면서 친절 유화한 정직한 사람이었으므로 비토는 어린 마음에도 깊이 느끼는 바가 있어 스스로 원해 그들의 손에 남몰래 거룩한 세례를 받았던 것이다.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사제 학자 축일:1월28일.게시판1590번. http://home.catholic.or.kr/gnbbs/ncbbs.dll/chinchang
비토는 유모 부부와 합심해 열심히 그리스도교를 신봉했는데, 산 위에 세워진 마을이 숨겨질 수 없듯이, 그의 마음씨나 행위는 특별히 눈에 띄게 되어, 결국 자식이 그리스도교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된 히라스는 열화(烈火)와 같이 대노해 기필코 조상의 종교로 돌아오도록 하고자 어떤 때는 감언이설로 꾀고, 또 어떤 때는 괴롭히기도 하는 등 갖은 수법을 이용해 배교를 강요했다.
그러나 한 번 뜨거운 진리의 빛을 받은 이상 결코 암담한 이교의 암흑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비토가 정성을 다 들여 배교의 불가능한 이유를 말하니, 아버지는 점점 분노하며 “부모에게 말대답을 하는 불효 자식, 그러한 불효의 처지에서는 부모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다” 하고 자기 아들을 사교도로서 관헌에 고소했다. 그래서 비토는 형장에 끌려나가 법관 발레리아노에게 여러 가지로 훈계도 받고 고문도 당했지만 절대로 마음이 변치 않으므로 할 수 없이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냈다.
히라스는 관헌의 능력으로도 자식의 마음을 돌리게 하지 못했다는 점에 매우 낙심해, 이번에는 여자로서 세상의 쾌락을 누리게 한다면 귀찮은 그리스도교를 버리게 되리라는 신념 하에 일부러 예쁜 젊은 여성을 그에게 가까이 하도록 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러한 유혹에 빠질 비토가 아니었다.
히라스의 간계는 이번에도 수포로 돌아갔고 비토는 아버지의 집에 머무르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영혼에게 위험한 일이 생길지 모른다 생각하고 마침내 유모의 부부와 상의해 함께 떠날 것을 결심하고, 배로 대륙을 향해 이탈리아의 남부, 지금의 살레루노만(灣)의 부근에 상륙했던 것이다.
세 사람은 잠시동안 거기서 남의 눈을 피해 가며 고요히 성스러운 그리스도교적 생활을 보내고 있었는데, 곧 주위의 우상교도들에게 교발되어 재차 법정에 나서는 몸이 되었다. 비토가 하느님께 기도하자 여러 가지의 기적이 일어나 디오클레시아노 황제의 태자의 병도 그의 덕분으로 완쾌되었다고 전해지나, 그래도 법관은 엄중히 그들에게 배교를 강요하고, 이를 거절하자 우선 납과 기름과 역청이 펄펄 끓는 가마속에 세 사람을 던져 참혹하게도 익혀 죽이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하느님의 보호로 아무 고통도 없이 온전히 무사했으므로 법관은 상기(上氣)되어 이번에는 맹수의 밥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이 역시 맹수가 달려들지 않고 고양이처럼 얌전히 있었으므로 기가 막혀 최후에 혹독한 고문에 처해 간신히 그 생명을 빼앗았다. 때는 303,4년경으로 추측된다. 비토의 나이 겨우 15세였다.
성 비토의 상본은 흔히 팔마 가지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부는 모습이라던가, 혹은 가마 속에 있으면서 천사께 수로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중 먼저 것은 그가 순교의 승리를 획득한 것을 의미하고 나중 것은 불가마의 형을 받아도 무사했다는 기적의 전설에 유래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우표로 보는 성인전에서) ♬7.Os Lusti-베네딕도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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