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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데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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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규환 [qhwan111] 쪽지 캡슐

2010-07-25 ㅣ No.229

갈 데 없는 사람(이명랑, ‘위로’ 중에서)

“넌 싸우면 갈 데도 없냐?” 남편의 말에 아내는 질리고 말았습니다. 사실이니까요. 몇 해 전 무남독녀이던 친정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아내는 찾아갈 친척도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내에게 이제 가족은 남편뿐이지요.

남편은 곧 후회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다시 담을 수는 없었습니다. 밖으로 나가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습니다. 논산행 버스를 타고 아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로 찾아갔지요. 아내의 동창이 학교 서무실에 근무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1학년 7반이었다는 것, 4학년 때는 반장이었고, 졸업하던 해에는 학교를 빛낸 어린이 상을 받았다는 사실도 새로이 알았습니다. 아내의 친구는 연락도 없이 찾아와 이것저것 묻는 그가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왜 찾아왔느냐고요.

“언젠가 아내가 그러더군요. 어릴 적 사진이 한 장도 없다고요. 어머니 혼자 홀몸으로 먹고살기 빠듯한 데다 자주 이사를 다녀 사진을 챙길 겨를이 없었던 거지요.”

남편은 아내의 친구에게 부탁했습니다. 아내에게 유년을 되찾아 주고 싶다고, 그러니 도와 달라고. 늦은 밤 남편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화풀이하듯 욕조를 닦는 아내의 등 뒤로 다가가 이름을 불렀습니다.

“** 초등학교 1학년 7반 김수지!”

그러고는 사진첩을 건넸습니다. 사진첩 갈피마다 아내의 유년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지요. 아내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어렵게 구한 사진이었습니다. 아내는 사진첩을 끝까지 넘겨 보고는 다시 고무장갑을 꼈습니다.

“내가 싸우면 갈 데 없어서 집에 있는 줄 알아? 안 가는 거야!”

그러고는 공들여 청소를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싸우면 갈 데도 없는 처지가 아니라 세상 그 누구와 싸워도 늘 돌아올 곳이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곳이 어디인지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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