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천주와 부모가 개입된 효, 불효 에 대한 천주실의 의 가르침 1242_

인쇄

. [119.194.105.*]

2018-02-15 ㅣ No.1900

게시자 주: 본글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900.htm 에 접속하면, 본글 중에서 제시되고 있는 출처 문헌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인터넷 주소,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에 접속하면, 본글의 제목이 포함된,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제공의 모든 게시글들의 제목들의 목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i) 2006년 12월 16일에 개시(開始)하여 제공 중인 미국 천주교 주교회의/중앙협의회 홈페이지 제공의 날마다 영어 매일미사 중의 독서들 듣고 보기, 그리고 (ii) 신뢰할 수 있는 가톨릭 라틴어/프랑스어/영어 문서들 등은,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손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  (PC용, 날마다 자동으로 듣고 봄) [주: 즐겨찾기에 추가하십시오]; http://ch.catholic.or.kr/pundang/4/m (스마트폰용) [주: 네이버 혹은 구글 검색창 위에 있는 인터넷 주소창에 이 주소 입력 후 꼭 북마크 하십시오]  

 

1. 들어가면서

1-1. 혹시 가까운 친족들 중의 한 분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비난(非難) 혹은 힐난(詰難)을 의미할 수도 있는, 부정적(negative) 질문을 받게 되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께서는 어떻게 답변할 생각이신지요? 

 

질문 1: 너를 낳아 준 부모와 하느님 중에서 누구가 더 중요하니?

 

질문 1에 대한 답변: 우선적으로, 이 질문은, 언뜻 보기에, 답변자가 어느 쪽으로 답변을 하더라도 모순에 봉착하도록 마련된, 한 개의 딜레마(dilemma, 양도논법)인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i) "하느님이 더 중요하다"고 답변하면, "불효자(不孝者)"라고 비난받을 수 있고, 혹은 (ii) "부모가 더 중요하다"고 답변하면 "십계명의 제1계명을 어기는 자"라고 비난받을 수 있다는 속생각을, 즉, 내언(內言, 속말)을, 답변자가, 답변을 하기 전에, 자기 자신과 주고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하더라도, 사제 혹은 수도자에게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적어도, 명백한 모욕이라 아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치 않는지요?

 

더 나아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하더라도, 천주께 사제 혹은 수도자를 봉헌한 그 친부모들에게 이 질문을 하는 것은 적어도, 또한, 명백한 모욕이라 아니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치 않는지요?

 

여기까지 읽은 천주교 신자들께서는, 설사 지금 냉담 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위의 질문 1에 대한 정답이 무엇인지 알아차렸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사도행전 5,29)

 

1-2. 질문 2: 그렇다면, 이제 정답도 알았고 하니까, 지금부터라도, 위의 질문 1을 받자마자, 곧바로, 즉시, "부모보다 하느님이 더 중요하다"고 답변할 것인지요?

 

질문 2에 대한 답변: "심장(heart)" 안에서 진리임을 알아차린 바를 "심장(heart)" 바깥으로 표출하는 실천을 실제로 행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인데, "불효자(不孝者)"라는 비난에 어떻게 답변하여야 할 지 모르고 있을 경우에는, 질문 1의 정답, "부모보다 하느님이 더 중요하다"를 "심장(heart)" 바깥으로 표출하는 실천을 실제로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치 않은지요?

 

결국에, 천주, 부모, 그리고 사이에서 개입되는 "효(, filial piety)"의 정확한 의미(meaning)/정의(definition)를 모르고 있을 경우에는, 질문 1에 대한 정답, 즉, "부모보다 하느님이 더 중요하다"를 "심장(heart)" 바깥으로 표출하는 실천을 실제로 행하지 못하는 "현실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설득의 대상자가 질문 1을 제시한 바로 그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치 않은지요?

 

1-3. 이제 본글의 제목을 다시 한 번 읽은 후에, 이어지는 제2항을 차분히 여러 번 읽도록 하십시오.

 

게시자 주 1-3: 조선 시대의 유학자들처럼 4서5경들을 암기하지 못한 그리고 약 2,000 수 정도의 한시들을 암기하지 못한, 따라서, 비록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1981년 봄부터 1984년 초봄에 이르기까지 3년간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 각각 3시간 반씩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뒷 동네 소재(所在) 한학 서당에서 다산 정약용 선생님의 문집인 "여유당전서"에 포함된 "周易四箋(주역사전)"을, 한학자 함재 선생님의 토/구결(口訣)을 다는 옛 방식의 가르침 아래에서, 2013년에 고인이 된 정운채 교수 등과 함께, 학습하였기는 하나 여전한 필자의 무지(無知)를 보완하기 위하여, 아래의 제2항에 발췌된 "천주실의", 하권, 제8편의 유관 한문 문장들을 우리말로 번역하면서, 필자가, 2017년 3월 중순부터 4월 말 기간 동안에 독자적으로 개발한, 따라서 그 저작권(著作權, Copyright)이 필자에게 있는, Data Mining 기법을 적용한, "AI 기반, 한시(漢詩) 표준 해석법 [A Standard Method of Interpretation of Chinese Poems(漢詩), Based on AI(Artificial Intelligence)]"을 또한 사용하는 과정에서, 참고한 책들과 DB(Data Base)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i) 1981년판, 민중서림, "한한대자전",

(ii)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한한대사전",

(iii) 네이버 한자사전 (http://hanja.naver.com/),

 

(iv) "漢典" (http://www.zdic.net/sousuo/),

(v)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Chinese Text Project, "CTP Dictionary" (https://ctext.org/dictionary.pl?if=en&char=%E4%B9%8E),

(vi) "漢語大詞典",

(vii) "詩詞典故" (https://sou-yun.com/QR.aspx/x10/x85/xDA/xAD/images/QR.aspx?ct=%E7%9B%90&c=%E7%9B%90&qtype=3&page=0&lang=t) [주: "漢語大詞典"에 수록된 표제어들에 대한 검색 기능 포함]

 

(viii) 耶穌會文獻匯編  (https://ctext.org/wiki.pl?if=en&res=804348)

(ix)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43-1607_미카엘_루지에리/1584_천주성교실록.htm 에 안내된 다수의 한문본 천주교 문헌들,

(x) "天主實義"우리말본 "텬쥬실의",

(xi)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經書",

(xii) 한국고전종합DB (http://db.itkc.or.kr/).

 

(xiii) 수신서학 (http://ch.catholic.or.kr/pundang/4/cb/1566-1640_알퐁소_바뇨니/1630_수신서학.htm)

(xiv) 성 토마스 아퀴나스 용어집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585.htm),

(xv) http://ch.catholic.or.kr/pundang/4/q&a.htm [필자에 의하여 구축 중인 DB: 가톨릭 신앙생활 Q&A 코너] 등.

(이상, 게시자 주 1-3 끝)

 

2.

다음은, 16세기 후반부에 중국 본토로 선교사로 파견되셨던, 천주교 예수회 소속의 마태오 리치 신부님(1552-1610년)의 저서인, 특히, "十誡(십계)"라는 용어조차도 사용되지 않은 "천주실의" 하권, 제8편에서 발췌된 바입니다. 그리고 우리말로의 번역은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한 것입니다:

 

출처: http://ctext.org/wiki.pl?if=en&chapter=938302#p672

(발췌 및 필자의 졸역 시작) 

中士曰;依理之語以服人心,強於利刃也。但中國有傳云:「不孝有三,無後為大者。」如何?(*1)

 

[필자의 졸역] 중국 선비(中士) 가로대, [지금까지 주신] 이치/원리의 말씀에 의거하면(依), 인심(人心)을 [도심(道心)에] 복종하게 하므로, [주신 말씀들은] 날카로운 칼(利刃)보다도 더 강합니다. 그러나 중국에는 "불효(不孝)에 셋이 있는데, 무후(無後)가 가장 크니라."라는 전해 내려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지요?(*1) 

 

----------

(*1) 번역자 주: 여기서 발췌문「不孝有三,無後為大者。」은, 다음과 같이, "맹자(孟子)", 이루(離婁), 상(上), 본문에서 발췌된 것인데,

 

출처: http://ctext.org/mengzi/li-lou-i?searchu=%E4%B8%8D%E5%AD%9D%E6%9C%89%E4%B8%89&searchmode=showall#result 

(발췌 시작)

孟子曰:"不孝有三,無後為大。舜不告而娶,為無後也,君子以為猶告也。"

 

[필자의 졸역] 맹자 가로대, "불효(不孝)에 셋이 있는데,  무후(無後)가 가장 크니라. 순(舜)은 [어버이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취하였는데, 무후 때문이니라(為). 군자는 [그렇게 함을] 오히려 [어버이에게] 알림과 같다고 여기니라(以為, presume, think, believe, consider) ."(#1)

 

-----

(#1) 번역자 주: 순(舜) 임금의 아버지가, 순(舜)의 이복 동생과 함께, 자신의 아들인 순(舜)을 몇 번에 걸쳐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무도막심(無道莫甚)한 자였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이 발췌문은 얼핏 보기에 예수회 소속 신부님들이 혼인하지 않는 것을 "커다란 불효"라고 지적하기/나무라기 위하여 발췌된 것처럼 보이나, 그러나, 이 질문은, 이어지는 서사(즉, 마태오 리치 신부)의 답변 문장들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듯이, 단지 그러한 지적/나무람에 대한 답변 뿐만이 아니라, 사실은, 친부(親父)와 나 이렇게 2자들 사이의 윤리 관계(moral relationships)들을 당연히 포함하는하느님, 친부(親父), 그리고 나, 이렇게 최소한도로 3자들로 구성된 윤리 관계(moral relationships)들 안에서, 따라서 "경의(敬意)/존중(尊重)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2)이라는 더 포괄적인 사고의 틀(the frame of thought) 안에서, 천주(즉, 하느님)과 부모가 개입된, 자식(子息)들의 효(filial piety), 불효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촉구하기 위한 하나의 설정(a setting)임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

(#2) 게시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경의(敬意)/존중(尊重)과 함께 당연한 의무들에 대한 충실(piety)"이라고 불리는 윤리덕(moral virtue)에 대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의 졸글들을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intro2piety.htm <----- 필독 권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바로 위의 주소에 접속한 후에, 제1449번 글을 꼭 읽도록 하라.

----- 

 

왜냐하면, 마태오 리치의 저서 "천주실의" 본문 전체에 걸쳐, 오로지 여기에서만 천주와 부모가 개입된 효, 불효 에 대하여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

(이상, (*1) 번역자 주 끝)

 

西士曰:有解之者云:「彼一時,此一時,古者民未眾,當充擴之,今人已眾,宜姑停焉。」予曰此非聖人之傳語,乃孟氏也,或承誤傳,或以釋舜不告而娶之義,而他有托焉。《禮記》一書多非古論議,後人集禮,便雜記之於經典。

 

[필자의 졸역] 서양 선비(西士, 마태오 리치) 가로대, 어떤 해석하는 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때의 일과 지금의 일이 서로 다른데, 옛적에는 백성이 많치 않아서 당연히 [백성을] 채우고 넓혀야 하였으나, 그러나 지금은 인간들이 이미 많으니, 마땅히 부녀자(姑)들이 [자식의 생산을] 미루어야(停) 하는 것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답변 드립니다(予曰): "이것은 [예를 들어, 공자님(기원전 551-479년)과 같은] 성인(聖人)이 전하는 말이 아니고, 의외로/다만(乃) 맹씨(孟氏, 맹자, 기원전 372-289년경)의 말일 뿐인데, 혹은 오전(誤傳, 사실과 틀리게 전함)을 계승하였거나, 혹은 순(舜)이 [어버이에게] 알리지 아니하고 취하였음의 뜻(義)을 설명하기 위하여(以), 다른, 지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서 그 무엇(托)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2) [그리고] 《예기(禮記)》한 권의 책에는 옛 논의(論議)가 아닌 것들이 많은데(多), [이들은] 뒷 세대의 인간(後人)들이, [자신들의 시대의] 예도(禮)들을 함께 모아, [이] 경전(經典)에 단지(便) 섞어 기록한 것입니다.(*3)

 

----------

(*2) 번역자 주: (1) "맹자" 본문 전체에 걸쳐 불효(不孝)에 몇 가지가 있다는 언급은 단 두 곳에서뿐인데, 한 곳은 위의 (*1) 번역자 주에 발췌된 바이고 그리고 나머지 한 곳은, "맹자", 이루, 하에 있는, 다음에 발췌된 바이다:

 

출처: http://ctext.org/mengzi?searchu=%E4%B8%8D%E5%AD%9D

(발췌 시작)

孟子曰:「世俗所謂不孝者五:惰其四支,不顧父母之養,一不孝也;博弈好飲酒,不顧父母之養,二不孝也;好貨財,私妻子,不顧父母之養,三不孝也;從耳目之欲,以為父母戮,四不孝也;好勇鬥很,以危父母,五不孝

(이상, 발췌 끝)

 

특히, 바로 위에 발췌된 바에 있는, [공자님(孔子, 기원전 551-478년)의 제자인 증자(曾子, 기원전 506-436년)의 제자인, 공자님의 손자이고 "중용"의 저자로 알려진 자사(子思, 기원전 483년 경-402년 경)의 출생년도로부터 약 110년 뒤에 태어난, 그리고 공자님 사후 약 100년 뒤에 태어난맹자(기원전 372-289년 경)에 의하여 공자님 사후 적어도 약 170년 이후에 저술된 책인, "맹자"에 나열된 세속에서 소위 말하는 다섯 가지의 불효(不孝)들 중에는, 참으로 이상하게도, 위의 (*1) 번역자 주에 발췌된 바에서, 맹자님 스스로 지적하신, 불효(不孝)들 중에서 가장 큰 불효(不孝)라는 무후(無後)가 포함되어 있지 않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2) 다른 한편으로, 지금 본문에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는 부분은 위의 (*1) 번역자 주에 발췌된 바인데, 갑자기 의외로/다만(乃) 불효(不孝)에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하고 그리고 이들 셋 중에서 심지어 무후(無後)가 가장 큰 불효(不孝)라고 지적하면서도, 그러나 정작에 이들 각각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머지 둘이 어떠한 내용의 불효(不孝)들인지 독자들 어느 누구도 도무지 알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 전부를 알 수 없는 이들 셋 중에서 따라서 왜 무후(無後)가 가장 큰 불효(不孝)라고 지적하였는지를 또한 독자들 어느 누구도 제대로 짐작할 수 없는 문제 때문에, 본문 중에서 "혹은", "혹은"으로 시작하는 서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3) 따라서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하더라도, 바로 위의 제(1)항제(2)항에서 지적한 바로부터 우리는 불효(不孝)의 종류들에 대한  맹자님의 두 설명들 자체가 서로에 대하여 가히 모순(a contradiction)이라 아니 말할 수 없다.

 

(4) 많이 부족한 죄인인 필자가 생각할 때에, 바로 위의 제(3)항에서 지적한 바를 해결하기 위하여, 2세기 후반에 "맹자장구"를 지었다고 알려진, "조씨(趙氏)", 즉, 동한(즉, 후한)의 경학가  "趙岐(조기, 108년경-201년)"(#3)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남겼으나,

 

출처: http://ctext.org/post-han?searchu=%E7%84%A1%E5%BE%8C%20%E4%B8%8D%E5%AD%9D

(발췌 및 필자의 졸역 시작)

趙氏曰:「於者三事:謂阿意曲從,陷親不義,一也;家貧親老,不為祿仕,二也;不娶無子,絕先祖祀,三也。三者之中,為大。」

 

[필자의 졸역] 조씨(趙氏) 가로대, "예()에 있어 불효()라고 부르는 바에 세 가지 일들이 있는데, (i) 아버이의 뜻에 영합하여(阿意) 자기의 뜻을 굽히고 순종하여(曲從) 어버이를 불의(不義)에 빠드림이 그 하나이고, (ii) 가정이 빈곤해지고 어버이가 늙었으나 봉록을 받기 위하여 관직에 있지 않음(祿仕)이 그 둘이고, (iii) 취하지 아니하여(不娶) 아들이 없어(無子) 선조들에 대한 제사(先祖祀)를 [스스로] 끊음(絕)이 그 셋이라 일컫는데, 이들 셋 중에서 무후(無後)가 가장 큰 불효() 된다." 하니라.(#4)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

(#3) 게시자 주: 혹시 "맹자집주"의 주석들에 등장하는 "...씨"가 누구를 말하는지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싶으면,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도록 하라:
http://ch.catholic.or.kr/pundang/4/cb/성씨약칭_인물개략_in_맹자집주.htm  

 

(#4) 번역자 주: 바로 이, 중국의 동한(즉, 후한)의 경학가, 조기(趙岐, 108년경-201년)의 주석(註釋)에서, 제(i)항은 "그러한" 효(孝, filial piety)는 결코 순효(純孝)/독효(篤孝)일 수가 없음을 지적하고, 제(ii)항은 봉양(奉養)하지 않음을 지적하며, 특히 제(iii)항은, 혼인하였으나 아들이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다만 장가들지 않고 홀로 살기 때문에 스스로 아들이 없게 함을 지적함일 뿐임에 반드시 주목하라.

 

따라서, 제(iii)항은 이혼(離婚)의 근거가 될 수도 없고 또한 첩(妾, concubine)을 들일 수 있는 근거가 결코 되지 않음에 반드시 주목하라. 왜냐하면, 혼인하였으나 아들이 없을 경우에는, 선조들에 대한 제사에 관한 한, 입계[入系, 즉, 가까운 친족으로부터 입양(入養)]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문제는, 우선적으로, 바로 여기서 말하는 "예()"가, 위의 본문 중에서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아래의 (*3) 번역자 주에 발췌된 문헌에서도 부정적으로(negatively) 안내된, 여러 사람이 잡다하게 기록한 것을 모은 책인 "예기(禮記)"를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그리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인할 수 있듯이, "예기(禮記)"의 본문 어디에도, "조씨(趙氏)", 즉, 동한(즉, 후한)의 경학가  "趙岐(조기, 108년경-201년)"가 말한, 바로 위에 발췌된 바 혹은 이와 등가인(equivalent) 문장이 전혀 없음에 있다:

http://ctext.org/liji/zh?searchu=%E4%B8%8D%E5%AD%9D 

 

따라서, 바로 위에 발췌된 바는 "조씨(趙氏)", 즉, 동한(즉, 후한)의 경학가  "趙岐(조기, 108년경-201년)"의 고유한 주석임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바로 이 주석은, 참고는 하되, 더 이상의 근거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예를 들어, 맹자님의 말씀 혹은, 더 나아가, 공자님의 말씀처럼, 특히 그동안 우리나라의 다수의 성리학자들이 그러하였듯이 무조건적으로(?) 신뢰할 수 없는, 한 개의 주석일 뿐임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지적을 드리는 주된 이유는, 그동안 우리나라의 다수의 성리학자들이 바로 위에 발췌된 "조씨(趙氏)", 즉, 동한(즉, 후한)의 경학가 "趙岐(조기, 108년경-201년)"의 고유한 주석에 지나친 권위를 부여하여, 그리하여 이 주석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따라서 이런 혹은 저런 종류의 비 논리적인 주장을 해 왔음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기 위하여서이다.

 

(5) 지금까지, 바로 위의 제(1)항부터 제(4)항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지적한 바로 이러한 문제점들 때문에, 예를 들어, 다산 정약용 선생님께서도,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확보되는 한국고전종합DB 검색 엔진에서 key word "不孝"로 검색을 하면 쉽게 확인할 수 있듯이, "여유당전서", "맹자요의"에서 맹자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不孝有三,無後為大." 에 대하여 어떠한 주석도 남기지 않았다는 생각을 또한 하게 된다:

http://db.itkc.or.kr/ 

 

(*3) 번역자 주: "예기"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제시된 "예기"에 대한 안내의 글에는 아래와 같은 언급이 있다: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67853&cid=46649&categoryId=46649

(발췌 시작)

禮記

 

예경()이라 하지 않고 ≪예기≫라고 한 것은 예()에 대한 기록 또는 주석()의 뜻을 나타내고 있다.

[...]

≪예기≫이렇게 여러 사람이 잡다하게 기록한 것을 모은 책이기 때문에, 그 내용이 체계가 없고 번잡한 느낌이 없지 않으며 편차()의 배열도 일정한 원칙이 없다.

(이상, 발췌 끝)

----------

 

貴邦以孔子為大聖,《學》、《庸》、《論語》孔子論孝之語極詳,何獨其大不孝之戒,群弟子及其孫不傳,而至孟氏始著乎?孔子以伯夷叔齊為古之賢人,以比干為殷三仁之一,既稱三子曰仁、曰賢, 必信其德皆全而無缺矣。然三人咸無後也,則孟氏以為不孝,孔子以為仁,且不相戾乎?是故吾謂以無後為不孝,斷非中國先進之旨。

 

[필자의 졸역] 귀방[貴邦, 즉, 귀국(貴國)]에서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년)로써 가장 덕()이 높은 성인(人)(大聖)으로 삼으며, "대학(學)", "중용(庸)"[즉, 《예기(禮記)》의 <중용편(中庸篇)>], 그리고 "논어(論語)"에서 공자(孔子)님께서 효(孝, filial piety)에 대한 말씀들을 극진히 자세하게 가르치셨는데, [그러나] 어찌하여(何) 유독 바로 그 커다란 불효(不孝)에 대한 경계(戒, warning)는 [공자님의] 제자들 집단(群, group) 및 그 자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았고, 다만 맹씨(孟氏, 맹자, 기원전 372-289년 경)에 이르러 비로소/처음 나타났는지요?

 

[필자의 졸역] 공자(孔子)님께서 백이(伯夷)숙제(叔齊)로써 옛 현인(賢人)로 삼으셨고, [그리고 제을(帝乙)의 아들로 은(殷)나라 최후의 군주(君主)인 주왕(殷紂王)의 숙부였던] 비간(比干, 기원전 1125-1067년)으로써 은(殷) 나라의 세 명의 어진(仁) 이들 중의 한 명으로 삼으셨으며, 이미 이들 세 분들이 어질다(仁)고 말씀하셨고, 현자(賢)들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이분들의 덕(德, virtues)들이 완전하고 또 결함이 없음[즉, 완미(完美)함(perfect)]을 [공자님께서] 반드시 믿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필자의 졸역] 그런데 이 세 분들 모두가 무후(無後)였는데, 예상 밖으로/대조적으로(則), [이들을] 맹씨불효자들로 간주하였고(以為, considered), 공자님께서는 어진(仁) 이들로 간주하셨으니, 심지어(且, even) 서로 어긋나지[相戾, 즉, 모순이지(contradictory)] 않은 것인지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저는 무후(無後)로써 불효(不孝)로 삼는 것은 중국의 선진(先進)한 목표(旨, purpose)가 결코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使無為不孝,則為人子者,宜旦夕專務生子以續其後,不可一日有間,豈不誘人被色累乎?

 

[필자의 졸역] 만일에 무후(無後)를 끝내(果) 불효(不孝)로 삼으면, 마땅히 인간의 아들이 되는 자는 아침과 저녁으로 아들 낳기에 오로지 힘써 자신의 뒤를 잇기 위하여, 가히 하루라도 틈새(間)가 있음이 가능하지 않고, 어찌 다른 이를 유혹하여 색(色)에 빠져들게 함을 계속하지 않으리오? 

 

如此則舜猶未為至孝耳。蓋男子二十以上可以生子,舜也三十而娶,則二十逮三十匪孝乎?古人三旬已前不婚,責其一旬之際皆匪孝乎?

 

[필자의 졸역] 바로 이러함 같으면(如此) 즉, 순()[임금]은 오히려 지극한 효도(至孝)를 행하지 못하였을뿐입니다. [왜냐하면] 대개 남자는 스무 살 이상이면 가히 아들을 낳을 수도 있는데(可以, may), 순(舜)이라는 자는 서른 살에 취하였을(娶) 따름(而)이면 즉, [순(舜)은] 스무 살에서 서른 살에 이르기까지 부모을 섬기지 않았다(匪孝)는 것인지요?

 

譬若有匹夫焉,自審無後非孝,有後乃孝,則娶數妾,老於其鄉生子至多,初無他善可稱,可為孝乎?學道之士,平生遠游異鄉,輔君匡國,教化兆民,為忠信而不顧產子,此隨前論乃大不孝也;然於國家兆民有大功焉,則輿論稱為大賢。

 

[필자의 졸역] 예를 들어(譬若, for example), 어떤 필부(匹夫, 즉, 보잘것 없는 남자)가, 무후(無後, 즉, 아들이 없음)는 효(孝)가 아니고 유휴(有後, 즉, 아들이 있음)가 다만() 효라고 스스로 판단하면(審, judge) 즉, 여러 명의 첩(妾, concubines)들을 취하여 늙도록 그 고향에 낳은 아들들은 지극히 많으나, 처음부터 다른 선(他善)이 없다면, 가히 효자라고 불리고, 가히 효자로 삼을 수 있는지요? 도(道)를 배운 선비가 평생 다른 마을로 멀리 여행하고, 임금을 도와 나라을 바로잡으며, 모든 백성을 교화하여, 충신이 되나, 그러나 아들을 낳음을 돌보지 않았다면, 이것은 앞의 논의를 따르면 정말로(乃) 커다란 불효(不孝)이나, 그러나 국가와 모든 백성에 커다란 공이 있을 뿐이니 정말로(乃) 여론(輿論, puplic opinion)은 아주 뛰어난 현인(大賢, sage)이라고 부를 것입니다.

 

孝否在內不在外,由我豈由他乎?得子不得子也,天主有定命矣,有求子者而不得,烏有求孝而不得孝者乎?孟氏嘗曰:「求則得之,舍則失之,是求有益於得也,求在我也;求之有道,得之有命,是求無益於得也,求在外也。」以是得嗣無益於得,況為峻德之效乎?

 

[필자의 졸역] 효(孝, filial piety)는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으며, [다만] 나로부터 말미암는(由) 것이지, 어떻게(豈, how) 다른 이로부터 말미암는 것인지요? 아들(子, son)을 얻거나 혹은 아들을 얻지 못함은 천주(天主, 하느님)께서 정하시어 명하심[定命, 즉 운명(destiny)]에 있을 뿐이니, 아들을 구하나 그러나 얻지 못함에 있음이, 어찌(烏) 효(孝, filial piety)를 구하나 그러나 효를 얻지 못함에 있음이겠는지요?


[필자의 졸역] 맹씨(孟氏, 맹자)는 과거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구하면 얻고 놓으면 잃는 바로 그러한 구함은 얻음으로부터 유익함(, benefit)이 있으며, 구함이 자신에게 달려있나니라(在, depend on). [그리고] 구함에 있어 도(道)가 있고 얻음에 있어 명(命, instruction)이 있는 바로 그러한 구함은 얻음으로부터 유익함(, benefit)이 없으며, 구함이 [자신의] 바깥 사물(外)들에 달려있나니라(在, depend on)." (*4) 바로 이 이유 때문에(以是, because of this) 후손(嗣)을 얻음은 얻음에 유익함(益, benefit)이 없으니, 하물며/더군다나(況, moreover) 준덕(峻德, outstanding merits and virtues)의 결과(效, effect)로 삼으리오?

 

-----

(*4) 번역자 주: 바로 이 문장은,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읽을 수 있는, "맹자", 진심, 상에서 발췌된 것이다:

https://ctext.org/pre-qin-and-han?searchu=%E6%98%AF%E6%B1%82%E6%9C%89%E7%9B%8A%E6%96%BC%E5%BE%97%E4%B9%9F  

-----

 

大西聖人言不孝之極有三也:陷親於罪惡,其上:弒親之身,其次;脫親財物,又其次也。天下萬國通以三者為不孝之極。至中國而後,聞無嗣不孝之罪,於三者猶加重焉。

 

[필자의 졸역] 대서(大西 , 즉, 서양)의 성인(聖人)들은 불효(不孝)의 극단(極, extremity), 다음과 같이, 셋이 있다고 말합니다: (i) 어버이를 죄악에 빠뜨리는(陷) 것이 그 으뜸이고, (ii) 어버이의 몸을 시해(弑)하는 것이 그 다음이며, 그리고 (iii) 어버이의 재물을 벗기는(脫, take off) 것이 또한 그 다음이니라. [그리고] 천하 만국에 걸쳐 이들 3자들로써 불효(不孝)의 극단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중국에 도달한 후에, [중국에서는] 후손이 없음(無嗣)불효(不孝)의 죄이고, [그리고] 이들 세 개[의 불효(不孝)]들보다도 오히려 더 무겁다(加重)는 것을, [제가] 들었습니다.

 

吾今為子定孝之說,欲定孝之說,先定父子之說。凡人在宇內有三父:一謂天主,二謂國君,三謂家君也;逆三父之旨者為不孝子矣。天下有道,三父之旨無相悖;蓋下父者,命己子奉事上父者也,而為子者順乎,一即兼孝三焉。天下無道,三父之令相反,則下父不順其上父,而私子以奉己,弗顧其上,其為之子者,聽其上命,雖犯其下者,不害其為孝也;若從下者逆其上者,固大為不孝者也。

 

[필자의 졸역] 이제 제가 아들(子)들을 위하여 효(孝, filial piety)에 대한 가르침(孝之說)을 자리잡게 하는데(定, settle), 효(孝, filial piety)에 대한 가르침을 자리잡게 하고자 하려면(欲), 먼저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가르침(父子之說)을 자리잡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무릇 한 인간은 우주 안에 존재함에 있어, (i) 첫 번째로 천주(天主, 하느님)라 일컫고, (ii) 두 번째로 나라의 임금(國君)이라 일컫고, 그리고 (iii) 세 번째로 나의 아버지(家君, my father)라 일컫는, 세 분의 아버지들을 가지며, 그리고 이들 세 분의 아버지들의 목표/탁월함(旨, purpose, excellence)를 거스리는(逆, disobey) 자는 불효자(不孝者)가 되는 것입니다! 

 

[필자의 졸역] 천하에 도(道)가 있으면, 이들 세 분의 아버지들의 목표(旨, purposes)들이 서로(相) 어그러짐/모순(悖, contradiction)이 없어, 대개 아래의 아버지란 자가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위의 아버지를 봉사하도록(奉事, 받들어 섬기도록) 명하고(命, instruct), 그리고 아들이 되는 자는 순응하니(順), 하나인 즉, 효(孝, filial piety) 셋을 겸하는/결합하는(兼, combine)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의 졸역] 천하에 도(道)없으면, 이들 세 아버지들의 령(令, commands, orders)들이 서로 어긋나게 되는(相反, contrary) 즉, 아래의 아버지가 그 위의 아버지에 순응하지(順) 않으면서, 사사로이(私)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받들게 함으로써 그 위에 계신 분를 돌보지 못하게(弗) 하므로, [부득이(不得已, cannot but)] 그 아들 되는 자가 그 위에 계신 분의 명(命, instruction)을 듣고서 순종함(聽, hear, obey)은, 비록 그 아래에 있는 자의 명(命, instruction)을 범한다(犯, violate)고 하더라도, 그 효자 됨을 해치는 것이 아니며, [그러나] 만약에 그 아래에 있는 자를 쫓는다(從)는 이유로 그 위에 있는 분을 거스리면(逆, disobey), 확고하게(固), 크게 불효자(不孝者)가 되는 것입니다.(*5)

 

[내용 추가 일자: 2019년 5월 9일] 

-----

(*5) 번역자 주: (1) 이 서술의 "신약 성경" 근거는, 예를 들어, 다음에 발췌된, 사도행전 5,29일 것이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

 

(2)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이 발췌 인용되고 있는, 성 토마스 아퀴나스(St. Thomas Aquinas)의 "신학 대전(Summa Theologiae)" 본문 중의 유관 부분들을 읽을 수 있다:

http://www.newadvent.org/summa/3104.htm#article5 

http://www.newadvent.org/summa/3033.htm#article7 

 

(3) 그리고 다음의 주소들에 접속하면, "신약성경", 사도행전에 기록된 "missionary discourses"(선교 설교들)"의 여섯 개의 요약들(사도행전 2:22-39; 3:12-26; 4:9-12; 5:29-32; 10:34-43; 13:16-41)사도행전 5,29이 포함된다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1990년 12월 7일자 회칙 "교회의 선교 사명(Redemptoris Missio)"제24항을 읽을 수 있다:

http://w2.vatican.va/content/john-paul-ii/en/encyclicals/documents/hf_jp-ii_enc_07121990_redemptoris-missio.html [영어본, 제24항]

http://ebook.cbck.or.kr/gallery/view.asp?seq=112944&path=100114104020&page=39 [우리말본, 제24항]

-----

[이상, 2019년 5월 9일자 내용 추가 끝]

 

國主於我相為君臣,家君於我相為父子,若使比乎天主之公父乎,世人雖君臣父子,平為兄弟耳焉,此倫不可不明矣。

 

[필자의 졸역] 나라의 주인(國主)과 더불어(於) 나(我, me)는 서로 돕고 보호하는(相為) 임금과 신하(君臣)이고, 가정의 군(家君)과 더불어(於) 나(我, me)는 서로 돕고 보호하는(相為) 아버지와 아들(父子)이니, 만약에 주(天主, 하느님)라는 공번된 아버지(公父, the catholic father) 안에 있는(乎, in) 이분(比)들을 쫓으면/따르면(使), 세상 인간(世人)들이 비록 군신과 부자[의 관계]일지라도, 평화롭게(平, peacefully) 형제가 될 뿐이니, 바로 이 윤리(倫, morality)(*6)는 가히 확실하지 않을/분명하지 않을(不明) 수 없을 것입니다(不可)."

 

-----

(*6) 번역자 주: 다음의 주소에 접속하면, 윤리/도덕(morality)이라는 용어의 정의(definition)를 읽을 수 있다:

http://ch.catholic.or.kr/pundang/4/soh/1284.htm <----- 필독 권고

[제목: 윤리적 악(moral evil)은 죄이다 [교리용어_윤리적악][_윤리][_형이하학적악][_물리적악][_악의 신비][토미즘학습], 게시일자: 2012년 10월 27일] 

-----

(이상, 발췌 및 우리말 번역 끝)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작성자: 교수 소순태 마태오 (Ph.D.)

작업에 소요된 시간: 약15시간



425 3

추천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