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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도종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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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jhjung] 쪽지 캡슐

1999-11-03 ㅣ No.1642

                그대는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 도종환 님(시인) -

 

“만릿길 나서는 길 / 처자를 내맡기고 맘놓고 갈 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렇게 물어 오면 나는 선뜻 대답을 못한다. 주위에 사람은 있지만 내

맘이 옹졸함을 벗지 못해 대답을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 보아도 그 많은 사람 중에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도 /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렇게 물어 오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그 분은 너무 멀리

있다. 그 분은 늘 마음속에 있고 그 분은 어디에나 있지만, 그 분의

손을 내 손으로 잡을 수 없어서 허전할 때가 많다.

 

 

“탔던 배 꺼지는 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 ‘너만은 살아다오’ 할 /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렇게 물어 오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피붙이

중의 하나 그런 사람 말고 다른 누가 있는가 이렇게 물어 오면 다시

대답할 말이 궁색해진다. 목숨을 서로 먼저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람

하나 가지지 못한 채 오늘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산다.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눈감을 / 그런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런 물음에도 아직은 그렇다 라고 확실하고 명료하게 대답을

못하겠다. 큰소리치며 살았지만 그래서 제대로 살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살면서 더 헌신하고 베풀고 나누고 살아야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이렇게 물어 오면 두번째 질문에서처럼 그런 사람은 있는 것 같다고

대답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흔들리는 내 자신이다. 그 한 얼굴

때문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곤 하는데 그 사람을 떠난 건 아니면서도

때론 유혹의 잔물결에 발을 담갔다 꺼내곤 하는 내 자신을 보면서

나는 어렵게 만난 그 한 얼굴의 벗이 될 자격이 없는 게 아닐까 하고

절망하게 된다.

 

 

이 나이 되도록 함석헌 선생의 이런 시 한 편을 읽으며 자신 있는 대답

하나를 못 하니 어찌 제대로 살았다 할 수 있겠는가. 벗을 보면 그를

알 수 있다 하는데 그런 사람 하나 아직도 없으니 헛산 게 아니고

무엇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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