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성당 게시판

[녹색일기]짝사랑과 라면국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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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이 [pear] 쪽지 캡슐

1999-05-31 ㅣ No.157

20년 전 쯤이었던가...?

친구와 함께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학교앞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었다.

그 때 라면 값이 200원이었던거 같다.

우리 둘인 너무나 배가 고픈 나머지 서로의 얼굴도 쳐다 보지 않고 열심히

후룩후룩 라면을 먹었다

주린 배를 얼마쯤인가 채웠을 때에

눈을 들어보니 친구가 라면그릇에 얼굴을 담그고

국물을 끝까지 먹고 있는 것이었다.

"무지 배가 고팠나 보군" 속으로 생각하며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더니

그 친구가 어색하게 씩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래야 짝사랑이 이루어진대" 하는 것이었다.

 

그 즈음에 나는 누군가를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내가 가입해 있던 써클의 편집부장이었고 난 차장이었다.

공식적인 커플이었던 우리는 주보편집과 발행을 위하여

일주일에 서너차례는 의무적으로 만나야만 했었고,

내가 필경을 하면 그 친구는 등사를 하면서 자연스러운 우정이

키워졌고,

불온한 작업(?)을 부탁하는 부장님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은밀한 만남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뒤범벅이 된 그의 눈빛을 보게 되었다.

그건 세상을 향한 증오 같기도 하고, 경멸같기도 하고

아니면 어떤 의지이거나  좌절이 무섭게 엉클어진 것 같은 번뜩임이었다.

'도대체 무엇이 저 사람을 저토록 괴롭히는 걸까?' 하는 의문 부호가

나를 마구 후비고 들어왔다.

내 안에 싹트기 시작한 알수 없는 묵중한 느낌을 과대 포장하면서

힘들어 하고 있을 때,

라면국물을 열심히 먹던 친구의 모습은 나의 귀감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날 이후 나도 라면국물을 억지로라도 먹어치웠고

내가 열심히 라면국물을 삼키기 시작한지 몇 개월후,

써클의 어느 선배가 끌려 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멍한 충격에 정신이 없던 그 날에,

내 짝사랑은 해방이 되었다.

 

내가 먹어치운 라면국물 덕분이었는지..

아니면 충격적인 소식에 접한 그 친구의 충동이었는지...

소설처럼....

짝사랑으로부터 고백을 받던 그 두려움이란.....!!!

 

요즘은 설거지를 하면서

남긴 라면국물을 게수통에 버릴때엔

내가 버린 라면국물 때문에 우리들의 물이 신음하겠구나

하는 죄송함과 함께

18년 전, 짝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신앙처럼  라면국물을 들이키던 쑥맥같던 나의 기억에

웃음짓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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