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음동성당 게시판

최민순 신부님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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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학남 [obbji] 쪽지 캡슐

2003-05-13 ㅣ No.2398

최민순 신부님은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신부님이지요. 젊었을 때, 최민순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좋아했던 시 "두메꽃"을 가끔씩 낭송하기도 했는데 오랜시간이 흐른 뒤에 신부님이란 걸 알게되었지요.  우연히 최 신부님의 글을 읽으면서 옛 추억과 함께 최신부님이 그리워 몇 편의 시를 함께 올립니다.

 

시인이며 사제인 영성 신학자

 

우리의 스승이시요 목자이시며 선배요 동료 사제인 최민순 신부님은 지난 19일(1975. 8.) 밤 홀연히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님의 품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40년의 사제 생활을 통해서 영성 신학자이기도 하신 신부님이 사랑하는 한국 교회에 남기신 업적은 영적으로 깊고 큽니다. 은수자와 같이 숨어 살다시피 하시고 좀처럼 대중 앞에 나서기를 싫어하셨지만 신부님은 그 명강론을 통해서, 글과 시를 통해서, 영성에 관련된 역서를 통해서, 수많은 구도자, 신자, 수도자, 성직자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생명을, 그 빛을 전달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신 그 날까지 신학교 교수로 봉직하시면서 사제 양성에 헌신하신 것과 우리들이 일상 기도로 바치는 성경의 시편을 번역해 주신 것은 우리 모두가 길이 기억해야 할 은공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신부님은 주님을 사랑하고 찬미하는 데 싫증을 모르고 지칠 줄 모르셨습니다. 그러시기에 신부님은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라는 시편 22를 즐겨 부르셨습니다. "파아란 풀밭에 이 몸 뉘어 주시고 고이 쉬라 물터로 나를 풀어 주시니, 내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 이렇게 신부님은 하느님 앞에 어린양과 같이 순하고 겸손하셨습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믿고 맡기며 살아오셨습니다. 신부님의 하느님은 엄격한 조물주 형이상학적 절대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착한 목자시고 아버지이셨습니다.

 

하느님은 신부님의 동경, 신부님의 꿈, 신부님의 소망, 신부님의 사랑 전부였습니다. 성녀 데레사와 같이 "오직 하느님만으로 족하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남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당신의 신념으로 삼으셨습니다. 한마디로 신부님께 하느님은 사랑하는 `님’이십니다. 몽매에도 잊을 수 없는 보고 싶은 그 `님’이십니다. `밤’ 그리고 `받으시옵소서’로 시작되는 유시는 이를 잘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하느님을 떠나서 신부님은 문자 그대로 달리 당신의 삶의 의미나 존재의 가치를 찾지 못했습니다.

 

유시 `받으시옵소서’가 그렇고 작년 사순절 바로 이 자리에서 특별 강론을 시작하시면서 그것이 당신 생애의 마지막 사순절 특별 강론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이제 신부님은 당신이 원하신 대로 가셨습니다.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시편을 읊으며 가셨습니다(시편 22). "나아가리이다. 내 기쁨, 내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리이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시름에 잠겨 있느냐…. 하느님께 바라라. 내 다시 그 님을 찬미하게 되리라"(시편 42, 4-5). 이렇게 노래 부르며 가셨습니다.

 

이제는 주님과 대월한 영복 속에서 신부님은 "한 평생 은총과 복이 나를 따르리니, 오래오래 주님 궁에서 살으오리다."라고 끝없이 끝없이 사랑 속에 주님을 기리시리라 믿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아, 노래를 불러 다오. 어둠과 죽음을 떨치고 일어설 빛과 생명의 노래를 불러 다오." 이렇게 우리를 위해 아직도 죽음의 질곡과 어둠을 벗어나지 못한 우리를 위해 주님께 기도해 주실 것을 주님 대전에 나아가신 요한 최민순 신부님께 기원합니다.

 

- 최민순 신부님 장례미사 강론(75.8.23) 중에서 -

 

 

(1) 받으시옵소서           

         

받으시옵소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은 아니라도

여기 육신이 있습니다.영혼이 있습니다.

 

본시 없던 나 손수 지어 있게 하시고

죽었던 나 몸소 살려 주셨으니

받으시옵소서

님으로 말미암은 이 목숨 이 사랑

오직 당신 것이오니 도로 받으시옵소서

갈마드는 세월에 삶이 비록 고달팠고

어리석던 탐욕에 마음은 흐렸을망정

님이 주신 목숨이야 늙을 줄이 있으리까

심어주신 사랑이야 금갈 줄이 있으리까

받으시옵소서 받으시옵소서

당신의 것을 도로 받으시옵소서

 

가멸고 거룩해야 바쳐질 수 있다면

영원이 둘이라도 할 수 없는 몸

이 가난 이 더러움을 어찌 하오리까

이 가난 이 더러움을 어찌 하오리까

 

님께 바칠 내 것이라곤

이 밖에 또 없사오니

받으시옵소서

받아 주시옵소서

 

가난한 채

더러운 채

이대로 나를 바쳐드리옴은

오로지 님을 바쳐드리옴은

오로지 님을 굳이 믿음이오라

전능하신 자비 안에 이 몸이 안겨질 때

주홍같은 나의 죄 눈같이 희어지리다

진흙같은 이 마음이 수정궁처럼 빛나리이다.

 

(2) 두메꽃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3) 천당이 어디냐구

 

천당이 어디냐구.가 보았느냐구요.

지옥은 어디냐구.가 보았느냐구요.

몰라요. 모르지요. 몰라도 나는 좋아요.

 

어디나 님 계시면, 천당이 거기고요.

님 아니 계시면, 어디나 지옥이지요

 

악마란 무어냐구, 아예 묻질 마십시오.

사랑이 없다면야, 천사도 악마랍니다

 

 

(4) 주여, 오늘의 나의 길에서

 

주여, 오늘의 나의 길에서 험한 산이 옮겨지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저에게 고갯길을 올라가도록 힘을 주소서.

 

내가 가는 길에 부닺히는 돌이 저절로 굴러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 넘어지게 하는 돌을 오히려 발판으로 만들어 가게 하소서.

 

넓은 길, 편편한 길 그런 길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좁고 험한 길이라도 주와 함께 가도록 더욱 깊은 믿음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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